◈윌슨보다 귀한 영혼이라면 시22:16~22 출처보기
◑1. 예배자로서의 설교자 되기
▶설교자로서 가장 괴로운 일은, 내 설교가 성도들에게 다가가지 않을 때라고 느끼는 때이다.
마치 계란을 가지고 바위를 치는 것처럼, 나의 설교가 힘을 잃고
사람들의 마음에 부딪치자마자 깨져 버린다.
나는 쉼 없이 설교를 하지만, 그 많은 언어와 사상은
사람들의 심령에 박히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그것을 볼 때는 나의 마음은 괴롭다.
나는 오늘도 설교를 하고 있고 우리는 모두 예배한다.
사람들은 예배와 설교를 분리시켜서 생각한다.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예배이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설교는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예배의 행위와는 또 다른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 많은 설교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설교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되지 못하면, 설교 자체가 우상이 될 수 있다.
교인들에게 설교를 잘 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 설교의 목적이 아니다.
설교의 목적은 교인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데 있다.
그 하나님을 만나 그 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 이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영국의 유명한 주석학자이며 설교학자인 캠벨 몰간은,
젊은 나이에 설교자로 일할 때부터 여기저기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사람들은 성경을 능통하게 해석하는 몰간의 실력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몰간 자신도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가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서재에 홀로 앉아 자신의 삶과 사역을 깊이 성찰하고 있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너는 무엇이 되려느냐? 인기 있는 설교자냐? 아니면 나의 충실한 사자냐?”
그 날 밤 그는 야곱과 같이 하나님과 씨름한다.
새벽이 밝아 올 무렵 몰간은 주님께 항복했다.
“주님의 사자입니다. 주님의 사자가 되고 싶습니다.” 몰간은 울부짖었다.
그리고 자신이 작성한 설교몽치를 화로에 던져 버렸다.
그는 이것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바로 그 아침, 나는 지난 수년 간 만들어 온 내 설교를 모두 없애 버렸다.
나는 그것들 없이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도 결코 예배자를 벗어날 수 없다.
설교도 예배행위가 되어야 한다.
예배하기 위해 모여 있는 이상 설교자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도 예배라고 한다면, 예배의 모든 것들은 실제로 예배를 위한 것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순서 하나하나,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배의 맨 처음 순간부터 맨 마지막까지 우리는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보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보도록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예배이다.
여러분은 그 예배 시간에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2. 예배, 설교 시간에 바라보시라
우리는 예배하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예배, 설교시간에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생각하시라.
나의 예배를 받으시는 그 분이 어떤 분이며, 내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생각해보시라.
왜냐하면 그 은총을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하는 지금,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신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라.
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가?
우리가 구약에 태어났다면 오늘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못했다.
아무나 언제나 그 분 앞에 나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높으신 하나님을 아무런 간격 없이 예배의 현장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십자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의 은혜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올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속죄의 기쁨을 노래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면서 승리와 잔치를 벌인다.
▶성령님을 바라보시라.
성령님은 우리의 예배를 역동적으로 움직여 가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시고,
예배에 생명력을 불러일으키신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얻는 감동과 변화된 바른 삶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모두가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배가 기름 부으심이 있는 예배를 위해서 성령님을 초청하시라.
성령님을 간구하시라.
우리의 예배 가운데 임하여 주시고 우리의 생각을 통일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뜨겁게 갈망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라.
예배드린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하시고,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과 성령님의 터치를 간구하시라.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무엇을 바라보며,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을 생각하며 예배하고, 설교를 하거나 들으시는가?
하나님을 바라보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는가? 성령님을 바라보았는가?
우리가 예배하며 진정으로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회에 모여 예배하면서
내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모을 수 있는지 그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하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출세하고 성공할 지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우리가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을 진정으로 바라보았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가만히 두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 속으로 우리를 가라고 명하신다.
▶우리는 모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만세전에 예정하신 그 하나님,
나의 행위와 인격에 상관없이 나를 구원하시기로 기쁘게 정하신 그 하나님,
나의 구원을 위해서 아들을 주신 그 하나님..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내가 그런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우리는 예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나를 위해서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를 바라본다.
나를 대신하신 그 희생과 사랑을 바라보며, 나도 그 보혈에 내 몸과 영혼을 맡긴다.
나도 그 주님을 닮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모든 열방을 향해 이 복음을 전해주라는 주님의 마지막 음성이 우리 안에 박힌다.
우리는 예배하며 성령 하나님을 바라본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말씀이 깨달아지게 하시고,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며 결단할 수 있게 하시고,
그 말씀들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할 수 있도록 감화 감동을 주신 성령님을 바라본다.
우리는 예배하면서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오신 성령님의 애타는 간구를 듣는다.
우리가 그동안 드리는 모든 예배가운데 이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면, 성령님을 바라보았다면
우리는 분명히 나의 구원과 우리의 구원과 열방을 향한 구원을 노래했을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생각했더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그 분이 원하시는 뜻을 주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우상과 같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드림과 헌신과 사랑에 응답하실 수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3. 증거자를 파송하는 예배
▶우리의 예배는 예배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우리를 증인(증거자, 전파자)으로 부르신다.
그래서 워렌 위어즈비는 이런 예배의 특성을 가리켜서 “증거가 있는 예배”라고 했다.
예배는 마땅히 증거를 포함한다. 예배는 증거를 낳는다.
예배는 예배로 그치게 하지 않고 우리 안에 영혼 구원에 대한 열망을 잉태하게 한다.
윌리암 템플은
“이 세상을 정치적인 혼돈과 붕괴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배”라고 말했다.
왜 그럴까? 우리가 예배를 회복한다면
교회는 세상을 위한 유일한 소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회를 변화시켜서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원하신다.
우리의 예배가 진정으로 회복된다면 복음전도가 왕성해지고, 그 영적 깊이는 더해진다.
여러분은 참되게 예배하고 있는가? 그러면 세상을 향하여 얼마나 증거하고 있는가?
이 둘은 따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섬이 아니다. 둘은 하나이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간다.
이것은 어느 소수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에게 주시는 그 분의 은혜이다.
▶톰 행크스가 주연한 <캐스트 어웨이>란 영화의 일부분을 소개해 드린다.
화물 운송업 회사에 다니는 주인공이,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갇힌다.
그 외로운 섬에서 그를 위로하는 것은 “윌슨”이라고 이름 붙인 배구공뿐이다.
그는 너무나 외로워서 배구공을 친구삼아 말을 건네고, 그와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섬을 그 친구 윌슨과 함께 탈출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그 섬을 탈출하면서, 배구공 윌슨이 바닷물에 떠내려가니까 통곡한다.
그가 왜 그렇게 통곡했는지,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윌슨은 그 외로운 무인도에서, 자기의 유일한 말동무 친구였고, 자기 연인의 투사체였다.
한낱 배구공에 불과했지만,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물건이니까,
그는 배구공이 바닷물에 휩쓸려 떠내려갈 때, 자기 생명을 던져서 건지고자 했던 것이다.
이 설교 제목이 <윌슨보다 귀한 영혼이라면> 이다.
주인공의 그 아픈 통곡과 아픔보다 더한 통곡과 아픔이, 우리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맨 아래 비디오 클립 있음)
오늘 우리에게 이 주인공의 마음이 있는가?
그는 떠밀려가는 배구공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던지듯 그를 구하려고 한다.
왜였을까? 그에게 그 배구공 친구 윌슨은 너무나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말 못하는 배구공이었지만, 그 배구공은 주인공이 너무나 외로울 때
그의 곁에 있어 주었던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하며 내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 준 그를 놓치지 않고 싶어서
그는 그렇게 통곡했다.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라. 가족, 친척, 친구, 이웃, 동료...
이들은 배구공보다 내게 의미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아무런 생명도 없이 자기 연민의 자화상인 배구공을 잃어버려도 그처럼 통곡하는데
오늘 우리에게 있는 수많은 영혼들은 배구공보다 얼마나 귀한가?
우리는 그 영혼들이 험한 세상의 물결과 심판의 물결에 휩쓸려 가는데
통곡하지 않는다니 말이 되는가?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들이 윌슨보다 귀하다면 그를 구원하는 증거자가 되시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노래하며 예배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 사명을 오늘도 주신다.
본문 시22편16~22절은, 우리 영혼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고통에 찬 비명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고통 섞인 기도와 증거자의 삶을 살게 되기 바란다. (이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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