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4~2005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고 나중이라 / 김성수

LNCK 2013. 6. 17. 12:53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고 나중이라       계1:17-20               계시록13강

                                                                     김성수 목사님 설교 스크랩, (강추) 출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으시다면

지금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함께 계십니다.

 

바라만 봐도 눈이 멀고 죄인은, 그 앞에서면 그냥 죽어 버리게 되는

그 천지의 주인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구요.

그 사실을 정말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신데

도저히 그 사실 만으로도 감격스러워 감당을 못할 텐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이제 노예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소원 들어줘요, 병 고쳐 줘요, 부자 만들어 줘요’ 하면서

열심히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문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행동들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나?’를 두려워 하셔야지요.

 

 

◑1. 하나님을 뵈면, 죽은 자 같이 됩니다.

 

‘계1:17, 그를 뵐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구절들을 공부하면서

능력과 권세와 위엄의 주님께서, 지금도 교회를 오른 손에 꼭 붙들어 보호하고 계시며

주석 같은 두 발로,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도 요한이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죽은 자같이 됩니다.

 

여러분,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삼년 반 동안 함께 숙식을 같이 하던 스승입니다.

그 중에서 유독 사랑을 많이 받았던 ‘주의 사랑하는 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예수님을 보자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요한은 그렇게 사랑해 주던 스승을 만났음에도

반가움과 기쁨이 아닌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그런 모습은,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동일하게 나타났던 현상입니다.

 

삼손의 아비 마노아와 그 아내가 하나님을 보고 지른 비명을 보십시오.

(삿 13:22) “마노아는 아내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우리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오."

 

다니엘은, 하나님을 보자마자 온 몸에 힘이 빠졌고, 죽은 것처럼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개역 성경에서 깊이 ‘잠들었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담’은

마치 죽은 것처럼 정신을 잃은 모습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단 10:5-9)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이사야도 하나님을 뵈었을 때,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는 하나님을 보자마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고 외칩니다.

‘나는 이제 파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지옥 앞에서 심판을 받을 자가, 마지막 단말마로 지르는 비명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도,

그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직접 보자마자

자신이 얼마나 작고 추하고 더러운 인간인지 일순간에 드러나게 되어

나는 도저히 저 빛을 감당할 수 없는 자로 파멸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에스겔의 임재 체험을 살펴봅시다.

(겔 1:28)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여기서도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드렸다고 나오지요?

여기서 ‘엎드리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나팔’도, ‘죽은 것 같이 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빛을 본 후 눈이 멉니다. 영광의 빛이 너무 밝았다는 뜻이지요.

(행 9:3-4)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모세의 체험을 보십시다. 

(출 33:18-20)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은 그토록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 죄인들은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면 ‘난 이제 죽게 되는구나.’ 하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 본 바대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도

그 하나님 앞에 서면.. 죽은 듯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그 새 언약을 성취하시고

약속대로 하나님의 백성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2. 두려워 말아라

 

“계1:17 그를 뵐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극적 반전이 나타납니다.

사도요한은.. 주님의 임재 앞에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는데,

오히려 주님은.. 그런 사도요한을 따뜻이 위로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으시다 면 지금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함께 계십니다.

바라만 봐도 눈이 멀고, 죄인은 그 앞에서면 그냥 죽어 버리게 되는

그 천지의 주인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구요.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 사실을 정말 믿으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여러분은 이렇게 눈도 안 멀고 죽지도 않게 되신 것입니까?

 

그게 바로 여러분의 신분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존귀하신 분들이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 분과 대화를 하면서

그 분의 이끄심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친구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이십니다.

 

여러분, 박쥐나 올빼미는 빛에 노출이 되면 죽습니다.

쥐나 바퀴벌레도 빛을 비추면 감당을 못하고 어디로 숨기 바쁩니다.

그렇게 죄인들에게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두려움과 경악의 심판의 빛입니다.

 

똑같은 죄인들이었던 우리에게, 그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빛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이렇게 기쁘고 안도하고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햇빛이 식물을 키우고 열매를 맺히게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영광의 빛 속에서 평안을 얻습니다. 그 것이 복음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예수께서 죽은 것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 요한에게 ‘두려워 말라’

라고 하시면서, 주님은 요한에게, 오른 손을 얹어 안심을 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 심판의 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십니다. 안 좋으세요?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여러분, 그 사실이 정말 믿겨지신다면

그 사실보다 더 여러분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사람, 물건, 사건이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신데

도저히 그 사실 만으로도 감격스러워 감당을 못할 텐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이제 노예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소원 들어줘, 병 고쳐 줘, 부자 만들어 줘’ 하면서

열심히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문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행동들입니다.

 

 

◑3. 나는 살아있다.

 

계1:18 “(나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본문 18절에 보시면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여기서 ‘산 자’라고 번역이 된 ‘호 존’은 관사가 붙은 현재분사 능동태입니다.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시점으로부터 계속 살아 계신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과 신약에서 공히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수3:10)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너희 가운데 계시사”

 

(시42: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이렇게 ‘산 자’ 라는 용어는 신구약에서 공히 하나님께 적용된 신적 칭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단어로 자신을 묘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전에 죽었었다’ 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죽었었다’라는 단어 ‘에게노멘 was 네크로스 dead’는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그 분의 죽음은 영 단번에 일어났지만 그 영향력은 이제 세세토록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구절을 읽으시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 죽음의 영향력이 오늘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정말 이 땅에 죽을 수 있는 인간으로 오셔서 실제로 죽으셨고

이제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자리로 복귀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확실하게 알아두셔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죽었었지만 이제 산자의 자리에 복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정말 허무한 것입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가된 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심으로써,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완전한 의가, 완제품이 되어서,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주1)

 

구원은 완전한 항복입니다. 살아 나셔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의의 옷’ 그 이외에 우리가 보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영원히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합니다...

 

 

◑4. 나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계1:18)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사 22:22)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예수께서 바로 이 열쇠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열쇠는 고대 시대를 비롯해서 예수께서 사시던 시대에도

통치권, 권세 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왕이나 황제들이 도시를 방문할 때

그 도시의 성주나 분봉 왕들이 입구에서 왕에게

상징적인 ‘금 열쇠나 은 열쇠‘를 만들어 바쳤다고 합니다.

‘여기는 당신의 통치 아래 있는 당신의 땅입니다’라는 고백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여기서 음부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하데스’라는 말입니다.

하데스는 부정접두사 ‘알파’와, ‘보다’를 의미하는 ‘에이도’의 합성어로

그 끝을 볼 수 없는 아득히 멀고 깊은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데스는 저주받은 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그냥 막연히 죽은 영들이 가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저주받을 자들이 가는 지옥의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계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사망과 음부를 의인화해서 마귀의 세력을 표현합니다.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바로 그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께서 쥐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망과 지옥의 열쇠 뿐 아니라 천국의 열쇠도 쥐고 계신 분이십니다.

 

열쇠를 쥐고 계시다는 것은 통치권이 그 분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뿐 아니라 음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십니다.

음부에 묶여있는 사탄과 마귀의 세력도, 예수께서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안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실패하실 수 없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자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사탄은 완전히 무장해제(disarmed)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는 사탄에게, 넘어가지 못할 선을 그어 주셨지요?

 

(욥 38: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바다의 경계를 그으시고 ‘넘어가지 말아라’라고 명령하시는 그 예수님의 명령에

사탄도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거룩을 가르치시기 위해 필요한 만큼 사탄을 이용하실 뿐입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그 어느 곳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벗어난 무정부 상태의 공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에 잡혀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굳게 잠긴 사망의 자물통을 여십니다.

사망이 자기가 포로로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조리 끌어내십니다.

 

사망을 상징하는 애굽에 단 한 사람의 이스라엘 백성이 남겨지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한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다 그 사망의 나라에서 나오게 됩니다.

 

열쇠를 우리 예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보지요.

 

(사 26:19) “그러나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열쇠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의 문을 여십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면, 예수님은 천국 문을 잠가 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회복될 피조물들을 넣고

밖에서 하나님께서 문을 닫아 거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창7:15-16

 

하나님의 택한 백성 외에는 절대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자물통은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리치고 두들겨도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주님,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종교행위를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문 좀 열어주세요.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여기는 너희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너희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지옥 불에 들어가 이를 갈고 슬피 울어라’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그 열쇠를 누가 가지고 계시다구요?

‘예수님’

 

▲네,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십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십니다.

 

(요 10: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 당시 양의 우리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산에서 풀을 뜯기다가 동네까지 내려오지 못 할 때

일정한 장소에 양을 모아두는 임시 우리들이 여기 저기 있었습니다.

 

그런 종류의 우리에는 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입구에는 목자가 서서 양을 통과 시켰다고 합니다.

바로 예수께서 그 양의 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양의 문으로는 이리나 늑대는 못 들어갑니다.

 

또 다른 양의 우리는 동네 아래에 있는 공동 우리입니다.

목자들이 양을 먹이고 마을로 데리고 들어와서

공동으로 만들어 놓은 우리에 모두 집어넣습니다.

 

‘다른 집 양하고 섞이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양은 정확하게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아침에 나갈 때 주인이 양을 부르면

그 양들은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따라 목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갑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셨을 때,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셨을 때,

예수님이 빌립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희한하게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심지어 죽었던 나사로조차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

메시야가 쥐신 다윗을 열쇠를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에 나오셨습니까?

그 열쇠를 쥐신 분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믿겠노라고

분연히 일어선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그 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보태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요한복음9장에 보면 소경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예수님이 안식일 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결국 그 소경은 출교를 당합니다. 쫓겨납니다. 쫓겨나서 누구의 품으로 갑니까?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볼 때는 출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유대교라는 우리에서 불려나온 (부름 받아 나온)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요10장에서, 양의 우리에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불려 나오는 양들의 이야기로 연결시키시는 것입니다.

 

네, 여러분이 계신 우리가 아무리 매력적이고 강한 울타리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참 양들은 그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오직 예수만이 문이시며 예수만이 참 목자이십니다.

 

 

◑5.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계1:17

 

그리고 그 분은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하십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전에 8절 공부할 때 배웠지요?

 

(계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 동일한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묘사하는데 쓰십니다.

우리를 위해 인간으로 오셔서 죽으신 그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이지요.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나시고 촌구석 나사렛에서

아장아장 걷는 아기부터 출발하셔서, 말을 배우셔야 했고

가구 수리하는 법을 배우셔야 했고, 등짐을 지고 가구를 고치러 다니셨던,

 

그리고 사람들에게 멸시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하릴없이 죽으셨던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처음이시며 나중이십니다. 그분은 전부이십니다.

 

(잠 8:23-26) “23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요 1:1-3, 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하시니"

 

(고전 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여기에서 ‘주를 시험하다가’가 헬라어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불 뱀을 풀어서 많은 자들을 죽이셨습니다.

그 사건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고전10:9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우리의 구원 사건의 전체를 이끌고 가신 분이십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그 분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속사역을 시작하시고

수행하시고 완성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 이십니다.

 

그 분이 여러분을 가리켜 내 형제요 내 자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신분이 확인된 여러분이 왜 두렵고 왜 염려를 하십니까?

 

과거의 상처가 여러분을 괴롭히십니까? 예수님은 처음이십니다.

아직 여러분에게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들이 두려우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나중이시기도 합니다.

 

그분은 전부이십니다. 두려워 마세요. 힘을 내십시오.

정말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나?’를 두려워 하셔야지요.

 

▲여러분의 신분이 확인되신 분들은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두려움은 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가 자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죄 속에 머물러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실 거예요.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이면 그렇게 해결하실 것이고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일이 해결되게도 하실 것이고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세요. 두려움을 떨쳐 버리세요.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오른 손을 얹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그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

 

주1)

로만 가톨릭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교리대로 하면 예수님이 굳이 살아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로만 가톨릭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원죄가 해결되어

그들에게 의가 ’주입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의‘가 영세를 받을 때 주입이 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영세를 안 받으면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 세례 안 받아도 천국 갑니까? 못 갑니까?

부득이하게 세례를 받지 못했으나,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사람은 천국에 갑니다.

 

세례라는 것은 세례를 받는 사람의 인간적인 긍정이 아니라

그를 향한 하나님의 긍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세례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세례는 우리 성도의 신앙의 고백이며 구원 이해의 표출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세 때 주입된 ‘의’로, 우리는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었고,

선한 행위를 함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되기 때문에

열심히 선행을 보태야 한다고 합니다.

 

영세를 받은 이후에 짓는 죄는 고해성사를 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된 것은 연옥에서 해결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로는 원죄가 해결된 것이고, 나머지는 인간이 열심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십자가에는 죽으신 예수님이 아직도 걸려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자기들이 완성해야 하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수난 받으시고 죽으셔서, 우리의 원죄를 해결해 주셨으니

우리 열심히 선행을 하고 종교행위를 해서 ‘거기에 보태자’라고 합니다.

굉장히 기특한 발상인 것 같지만 그건 아주 위험한 주장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에 조금도 보탤 수 없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그 안에서 부활을 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이지

주님이 죽어주셨고 이제 부활의 몫은 우리에게도 나누어져 있는 것이라면

저는 정말 자신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면 할수록 관록이 붙어 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신이 없어집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시퍼런 칼날 같은 말씀 앞에서

저 자신이 점점 더 밝히 드러나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도 죽기 얼마 전에 쓴 그의 일기에서

‘하나님 저 정말 잘하는 겁니까? 아니 저 정말 구원받은 사람 맞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