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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4~2005

성령이 가라사대

LNCK 2013. 9. 11. 20:47

성령이 가라사대          13:1-5, 8:22                2004.09.05.설교스크랩, 출처

    

 

 

인생에는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8:22

 

요즘에 기업가들과 지도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은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5년 후, 10년 후에 나라의 경제, 외교, 국방, 어떤 예측되는 모습이 대강 보여야

투자를 하든, 전략을 짤 수가 있는데

앞으로 미래가 5년 후에, 10년 후에 어떤 모습이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지적을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투자도 해외로 빠져나가고, 인력도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지적을 합니다.

(참고로 2004년 당시는, 북핵 사태와 부시 정권의 북한 타격 위협이 고조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려가 되는 일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목사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 이것을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822절을 보면 노아의 홍수가 끝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땅이 있을 동안에는 -그 말은 인류가 이 땅에 살고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

이것은 서로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두 가지가 교체되면서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밤이 있고 낮이 있고 여름이 있고 겨울이 있고 또 여름이 찾아오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에 의거에서 볼 때는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이 거둘 때가 아니라면, 그 말은 심을 때라는 얘기요,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이 낮이 아니라면, 밤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밤이라면 낮이 올 때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할렐루야

 

이건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땅에 거하는 동안 추위와 더위와 밤과 낮이 쉬지 아니하리라 그랬어요.

 

우리가 어떤 시련을 당할 때에 제일 두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 시련이 영원히 지속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질병이든, 가난이든, 아픔 이든 간에.. 일시적인 것이라면 참을 수 있겠지만

만약에 이것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내가 이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게 그 문제 자체보다도, 우리에게 더 부담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노아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것은

밤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겨울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 이예요.

 

때가 바뀌는 순간이 옵니다. 시련을 당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가 감당 할 수 없는 시험 당함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가 시험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 이예요.

그리고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지금이 어려운 때다, 라고 말하는 때가

오히려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투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금이 투자의 적기다라고 말할 때는 이미 늦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그 말을 믿고 뛰어들었다가는 소위 상투(상한가)를 잡기가 십상입니다.

그 말은 사람들이 곧 다 빠져나간다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어렵다, 어렵다라고 말할 때, 그때에 기회가 있습니다.

 

여러분 미국에 1930년도에 대공황이 있지 않았습니까?

대공황이 미국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로 퍼져갔는데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대공황 시절에 돈을 번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현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대공황에 사업 공장이 헐값으로 팔리고, 건물이 헐값으로 팔릴 때

현금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사들인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경제가 정상화 되면서 그 공장과 건물이 값이 엄청나게 뛰었어요.

그러니까 대 공황이라도 준비된 사람은 오히려 돈을 벌수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경제나 투자에 관해 말씀 드리려는 것은 물론 아니고요,

아래의 성경 내용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위에서 경제 얘기를, 예로 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

 

경제뿐만이 아니고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남을 흉내 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아십니까?

이들이 남을 흉내 내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물건을 다량으로 구입할 때 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붕어빵 기계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틀을 만들어서, 거기에다 재료를 집어넣으면

만개든 십만 개든, 그 틀과 똑같은 모형이 생산이 됩니다. 그 틀은 오리지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오리지널 삶을 삽니다. 무작정 남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남이 해보지 않은 일, 남이 가보지 않은 곳, 남이 시도하지 않은 일,

남이 생각하지 못한 일,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리지널의 삶을 삽니다.

 

반대로 남이 하는 일을 흉내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베드로였기 때문에, 베드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와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충실히 산 사람 이예요.

그랬더니 베드로라는 훌륭한 인물이 만들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아마 베드로를 흉내 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투리를 흉내 내고, 베드로의 스타일을 흉내 내고,

베드로의 설교를 흉내 내고... 그러나 아무리 베드로를 흉내 낸다고 하더라도

베드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내가 될 수 있는 최선의 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둘째,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남의 눈치를 보고 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남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다면

남이 내 길을 인도해 주는 것이 아니라면

왜 우리가 그들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됩니까?

 

노아가 산 위에다가 방주를 짓지 않았습니까? 산위에다가 배를 지었다는 얘기입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방주는 돛도 없었고 닻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산 위에다가 나무로 지었습니다. 그러니 그걸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노아를

흉보고 욕하고, 별의별 말로 노아의 하는 일을 중단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것을 만류하고 중단 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 만일 남들의 눈치를 봤더라면

방주를 짓는 일을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끝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과정에는, 남이 하는 말을 참고할 수 는 있지만

그러나 내 안에 사람의 말보다도 더 흔들리지 않는 나의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고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만은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확신은 온유합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고집과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네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본문 2절에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가라사대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가 아닙니까?

 

사도행전의 저자는 성령이 가라사대라는 구절을 기록한 다음에

여기에 부차적인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어떤 방법으로 말씀하셨는지, 성령이 어떤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알리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사도행전을 읽은 초대교인들은

이 말씀만을 읽고도 무슨 뜻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누구인지를 알고, 성령은 말씀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이 가라사대라는 말은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경험하고 성령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는 것이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간 다음에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이런 구절을 접할 때,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성령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셨다는 말인가?’

그만큼 우리의 믿음이 초기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시는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성령이 계신지 안 계신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이 뭔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 성령 충만하는데 성령 충만이 무엇이냐?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첫째,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 그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사람은, 똑같은 일입니다만

해야 되기 때문에 하고,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에 하고,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하고, 안하면 벌 받을 것 같기 때문에 하는 사람은

하는 일은 똑같을 지라도, 그것은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요 괴로운 일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할 때, 해야 되는 일을 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목사는 교인을 심방해야 되고 전화를 해야 됩니다,

그러나 의무감 때문에 전화를 할 때는, 전화를 하고 싶지가 않아요.

해도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고요, 그럴 때는 안합니다.

 

그럼 언제 하느냐? 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합니다.

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전화를 하면, 대화가 즐겁고 유익합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데 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화를 하면

둘 다 거북합니다. 저쪽에서 목사님 왜 전화하셨어요?’

저도 내가 왜 전화했지...’ 해야 되기 때문에 전화했죠.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게 아닙니다.

 

제가 목사지만 해야 되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요, 그것보다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반대로 기도가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기도가 즐거울 때가 있어요.

그것이 성령이 함께 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기도와, 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기도,

같은 기도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시지만, 부득이 섬기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시고

즐거이 섬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바리새인들, 좋은 일 많이 했죠. 기도하고 구제하고 금식하고..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을 성령 충만 하다고 보시지도 않고

의롭다고 보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은 그러므로 그 행위의 내용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동기로 판단하고, 어떠한 마음으로 하느냐에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 충만은 무엇을 할 때 감사하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라면을 먹는다고 가정해봅시다.

제가 그것을 먹으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런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맛있다. 정말 좋다.’ 이것은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반대로 샐러드를 먹는데 몸에 좋은 거예요. 아주 몸에 좋은 음식입니다.

그런데 샐러드를 먹으면서 아무개 집사가 나한테 뭐라고 말했지, 다음에 두고 보자.

또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맛없는 음식을 먹어야 되나, 아 먹고 싶지 않은데

나는 왜 이런 것만 먹고 살까불평하면서 먹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본인도 행복하지 않고

그것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닙니다.

 

먹는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가고 교회에서 봉사를 하면서도 마음속에

누가 나를 봐 주지 않을까?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되나?’하거나,

아무개 집사가 나한테 뭐라고 말을 했고

그래서 자기 마음에 불평이 가득하고 원망이 가득한 상황에서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 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동안에 바른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들이

나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도 못했다는 가능성을 기억해야 돼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성령은, 사람을 불러서 사명을 주십니다.

즉 성령충만한 사람은, 성령님으로부터, 선명하고 뚜렷한 사명을 받습니다.

자기 인생에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목표가 생깁니다. '주님이 내게 시키신 그 일'이 분명합니다.

 

본문에 이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한 것은

초대교회에 최초의 이방인 전문 선교사역의 시작입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더 이상 유대인들의 교회가 아니요 이방인들의 교회요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인들의 신앙이 아니요 이방인들의 신앙이 되는 관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아주 역사적인 순간 이예요. 이 문이 몇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금식하며 주님을 예배하는 중에 본문에 주를 섬겼다’, 라는 말은

service, 주님에게 예배드렸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금식하면서 주님을 예배하는 중에 성령이 가라사대

 

여러분 우리가 백날 토론회 하고, 언론과 싸우고, 국회에서 서로 멱살을 잡아도

백년 그런 일을 해봐도, 이 민족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지금 교회가 나아갈 길을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교회가 나아갈 길을 발견하려면,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성령이 가라사대하시는, 그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싸워서, 서로 반목함으로 상대방을 원망함으로 이 민족이 살아갈 길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대 간의 갈등을 통하여 이 민족의 살 길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계층 간의 갈등을 통하여 이 민족의 흥할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민족은 그 사실을 빨리 깨닫고 거기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민족에게 상처가 있는 이유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는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끼치려고 합니다. 죄가 죄를 낳고, 상처가 상처를 낳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정치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교육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믿음 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누가 소망을 제시할 수 있느냐?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치적인 논리에 너무 휘말려서는 안 됩니다.

정치적인 감정에 너무 휘말려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내 감정과 내 말과 내 판단을 자제하고

남들이 흥분할 때 나는 침착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길입니다.

 

너무 정치적인 논리에 휘말려서는 안 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 없습니다.

좌측에도 진리가 없고, 우측에도 진리가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면

아무리 경제적인 여건이 어렵더라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실 때 에덴동산은 풍성한 곳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류의 삶은 궁핍한 삶이 아니요 풍성한 삶입니다.

그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풍성하게 살고

나누며 살고,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불신 때문이요, 우리의 죄 때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그랬어요.

 

이 지식은 도서관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예요.

대학교 강의실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도 아닙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이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다 그랬습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내가 아직 모릅니다.

내 자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직 모릅니다.

모른다면 지켜보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성령께서는 사람을 세우시고, 부르시고, 일을 시키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거나 은혜를 주실 때에는

반드시 거기에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반드시 선물을 가지고 오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성경에 그 믿음의 사람들을 보세요.

모세든 엘리야든 베드로든 바울이든 어느 누구든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일을 안 맡긴 경우가 있습니까? 다 일을 맡깁니다.

 

모세를 만나실 때에도 일을 맡기시고

엘리야, 다윗, 사무엘,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뿐만이 아니고, 자신이 장차 무엇을 해야 되는 지를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말씀하실 때에는 내가 불로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이 구별됨을 말합니다.

 

불러 따로 세우라

사람은 사람을 누르고 경쟁하고 경계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십니다.

넘어진 사람, 낙심한 사람, 실패한 사람, 뒤쳐진 사람,

삭게오와 같이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세우십니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 하나님의 역사를 세우는 일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