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소명은 ‘말씀을 통해서’ 주어진다 막1:10~11, 창1:26~28 도서 스크랩
요즘 이 블로그 ‘냉수 한 그릇’에서
찰스 스펄전의 책「목회자 후보생들에게」를 소개하면서,
‘목회자는 소명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서 여러분께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래 책에서는,
<그 목회자의 소명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주어진다>라고 주장하는데..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편.
김회권,「목회자 후보생들에게」pp.70~94. 스크랩, 정리.
◑1. 소명은..<말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1. 예수님도 소명을 ‘말씀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본문 막1장에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장면은,
공생애 시작 직전으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공생애에 대한 소명을 받으신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요단 강물에서 올라오실 때
즉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 위에 임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1:10~11
이 말씀은, 그냥 우연히 하늘에서 들려진 말씀이 아니라,
이사야42:1절과, 시편2:7절의 합성문입니다.
사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시2: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예수님의 왕적 정체성과
종의 정체성을 둘 다 공증하는 선언입니다. 주1)
이것은 사실 선언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이, 구약의 성경말씀을 통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출애굽기에서 모세의 부르심도,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졌고,
성 어거스틴의 부르심도, 로마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주어졌고,
땅콩박사 워싱턴 카버도, 성경말씀을 통해서, 어떤 소명이 자기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주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명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주어진다.> 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깨닫는 것은,
하나님은 성경 텍스트에 의존해서, 예수님의 소명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경 텍스트에 근거해서 사람을 부르십니다.
※물론 성경텍스트에 근거하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도 사람을 부르실 수 있겠습니다만,
성경텍스트에 근거해서 부르는 방식이,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며,
그 부르심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calling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텍스트 의존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말로, 구원사 의존적인 하나님이란 뜻인데요...
▲2. 모세도, 이미 주어진 말씀을 통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도, 이런 사실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출3:6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만나자마자,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내가 너를 통해.. 내 백성,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들을 그들에게
각각 기업으로 주기로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작정이다.”
모세와 만나는 첫 장면에서 하나님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신 것은
굉장히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을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인도하여,
그 땅을 상속받게 해 줄 약속에 묶여 있는 답답한 하나님이다”(창15:13~16)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창세기를 잘 알고 있는 모세에게, 출애굽기의 주인공이 되게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즉 이전에 일어났던 구원사를 바탕으로 하여,
다음 단계에 일어날 구원사에 쓰임 받을 인물을 부르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전 구원사를 숙지하면서,
장차 하나님의 구원사가 어떤 단계로 진전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그 사람에게
그 다음 단계의 구원사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지금 글의 흐름은, 하나님은, 텍스트 의존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말로, 구원사 의존적인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더 나아가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약속의 땅에 반드시 정착하게 해줄
사명과 약속에 묶여 있는 하나님인데,
이 사명을 성취시키고 수행해 줄 사명자를 찾고 있다.
모세야, 네가 그 일을 해 주기 바란다!” 이런 뜻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사에 쓰임 받는 인물들을 부르실 때는
대개 텍스트(성경)을 갖고서 찾아오셨습니다.
▲3. 성 어거스틴의 부르심도.. 성경에 의거해서
어거스틴은 16세 때부터 방탕한 삶을 살다가,
31세에,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어린 아이들이 놀이하면서 하는 말을 우연히 듣습니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 (집어서 읽으라. 집어서 읽으라)
어거스틴은 그 말을 ‘성경을 집어서 읽으라’는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 근처에 있는 성경을 찾아서, 집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롬13:11~14절이, 눈에 강권적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어거스틴의 생애
텍스트(성경) 의존적인 하나님!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구원사의 당면하고 절박한 사명 앞에 고뇌하는 젊은이를 부르십니다.
절박한 구원사의 과업을 자신도 모르게 의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찾아옵니다.
성경말씀을 가지시고, 구원사를 이루기 위해서,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4. 땅콩 박사의 소명도.. 성경에 의거해서
땅콩 박사로 널리 알려진 조지 워싱턴 카버는 미국 최초의 흑인 농학박사로서,
앨라바마, 미시시피, 켄터키 주 등 16개 주에 땅콩 재배를 도입한 사람입니다.
그는 땅콩을 재배해서 농가소득을 높여 미국 농민을 섬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콩 농장이 한창 활황일 때,
면화 방직업이 들어와서, 땅콩 산업이 갑자기 사양산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16개 주의 농민들이 그를 찾아와서,
“이 검둥이, 저주 받을 놈아!”라고 욕하면서 비난했습니다.
이때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는, 땅콩을 한 주목 움켜쥐고, 땅콩 밭 사이를 걸으면서
하나님께 불평하며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 태양은 왜 지었습니까? 이 소나무 숲은 왜 지었습니까?
이 더러운 몸뚱이, 검둥이는 왜 지었습니까? 그리고 이 땅콩은 왜 만들었습니까?”
라고 질문하면서, 자기 손에 쥐고 있던 땅콩을 냅다 집어 던졌습니다.
그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답변이 들려왔습니다.
“창세기1:29, ‘내가 푸른 풀을, 너와 동물에게 식물로 주노라’는 구절을 붙들고 실험실로 들어가라.”
워싱턴 카버는, 이 말씀을 가지고 실험실에 들어가서
빵에 바르는 땅콩버터를 비롯하여 300여 가지의 땅콩 제품을 만들어 냅니다.
결국 땅콩 산업을 다시 회복시키고, 농민들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조지 워싱턴 카버는 ‘땅콩박사’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으로
당신이 쓰실 인물들을 부르시고, 사명을 자각하게 하시며, 그 사명을 완수하게 하십니다.
▲5.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텍스트에 의존해서, 구원사의 한 시대를 책임질 인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구약 이사야 40:3절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눅3: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그 외 마3:3, 막1:3, 요1:23)
◑2. 소명 받은 사람에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합니다.
-중략-
◑3. 소명 받은 사람은 최선을 다합니다.
소명만 받았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소명을 받은 사람은.. 자기 소명과 사명에 최선을 다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한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남보다 더 열심히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문화 명령 cultual mandate, 창1:26~28절을 남기신 후에,
피조물의 능동적 배후에 은닉하셨습니다. 스스로 숨으셨습니다.
지상의 모든 일을 아담에게 맡기신 후, 하나님은 지상 역사에서 종적을 감춘 듯
은닉하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관리하고 동산을 지키면서
동식물을 다스리는 모든 일을 인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세계통치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인간의 동참을 유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우주적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마치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인간의 순종 여부에 동산의 미래가 달려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장막 뒤로 철수하신 겁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닉, 이 여백에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
책임과 실패 가능성이 작동합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나이다.” 사45:15.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 숨으십니까?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최고조로 고양시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자기 권능을 억제하고 제한하시는 방법이, 숨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보좌 위에, 남보석 위에서,
이동식 전차를 타고 다니시면서, 역사와 세계를 휘젓고 다니시면,
피조물이 하나님의 인격에 설복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권위에 눌려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되기보다는, 하나님의 권능에 기가 눌려 압도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인간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위하여, 자신을 은닉하시고, 감추심으로써
인간의 믿음과 자발적 순종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는 그런 사람과 더불어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역할을 극대화 시켜 주기 위해서, 이런 노선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 나라의 공동 창조자로, 공동 통치자로,
대리 통치자로 세우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를 극도로 축소시키시고, 비우고, 은닉시키시면서,
이 세계를 마치 인간의 독부대인 것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 역사는,
인간의 능동적 행위와 책임감수 아래 운영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큰 그림, 예정과 부르심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 큰 그림 속에서, 작은 모자이크는, 우리 각자가 열심히 채워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1:26~28절을 염두에 두고, 늘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지만,
그 관리를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임하시고, 양도하시고, 자신은 은닉하셨습니다.
(이게 독단과 방종으로 나가자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면서,
우리 각자 자신도, 자기가 맡은 소명과 사명에, 최선을 다할 의무와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여전히 "공사 중"입니다. 영어로 under construction 입니다.
오직 성령 충만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 창조의 공사 현장이, 자기 눈에 보입니다.
그 공사 현장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투입하셨고,
어거스틴을,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를 불러서, 투입하셨습니다.
소명을 받은 사람은, ‘공사 현장’이 자기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자기가 감당해야 할 역할과 임무와 한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부르심)’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은 각자 현장에서 사역하다 보면,
‘내가 과연 하나님의 종이 맞나?’ 하는 극한 의심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벌떼처럼 여러분의 설교와, 여러분의 사역에 대해서
심지어 인격과 습관 등 모든 것에 대해서 흠을 잡으면서
‘당신은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라고 도전해 올 때,
우리 각자에게 그 소명 받은 날, 특별히 소명 받은 말씀, 소명 받은 장소,
그 결정적인 소명 사건이 있어야, 우울증을 이길 수 있고, 영적 침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험난한 파도가 계속 밀어닥쳐도, 소명 받은 사람은, 인내로 버텨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로서의 소명(부르심)이,
말씀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주어질 수도 있겠지만,
위에서 살펴본 논지에 따르면, <소명은 주로 말씀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도, 그저 ‘네가 번성하리라. 잘 되리라’가 아니라,
구속사에 입각해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적 방식의 소명감을 받지 않아도,
목회를 잘 감당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보통 ‘지원병’이라는 말을 씁니다)
‘일평생 긴가 민가 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확실히 받아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거기가 어떤 산이든지, 기도실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려서, 주의 종으로서 소명감이 확인된
그 날, 그 장소, 그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행9장에 소명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는 그 체험을 행22장과, 26장에서 연거푸 간증합니다.
자기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과, 결정적인 장소에서,
그는 자기가 받은 소명을 피력하면서.. 그 어떤 위기를 돌파해 나가는 모습을 봅니다.
이와 같이 나에게도 ‘원초적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결정적 순간에, 본능적으로 ‘내 소명 간증’이 튀어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다메섹 도상은, 예수님께는 ‘요단강 (수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 어떤 문제와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그 음성을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마17:5참조.
그렇다면 여러분의 받은 ‘음성’은 무엇이며, 그 장소는 어디입니까?
혹시 여러분이 몸부림치지 않아서, 아직 그것이 확인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
주1)
*시편2:7과 이사야42:3의 합성문으로 예수님을 부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중적 정체성을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너는 다윗 계열의 왕, 이상적인 왕임과 동시에
너는 고난 받는 종으로서, 너는 종의 도를 실천함으로
왕의 도를 펼치라는 이중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너는 섬김으로써 너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목숨을 위하여 대속물로 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왕이 될지어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왕적 면모를 억제하고 억제하지만
또한 어쩔 수 없이 많이 드러내십니다.
*시편2:7과 이사야42:3의 합성 말고,
사41:8, 창22:12, 16의 합성구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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