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청자, 나병환자와 접촉해야 합니다. 막1:40~45 도서 스크랩
김회권,「목회자 후보생들에게」pp.206~234.
◑1. 나병환자가 내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동정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깨끗한 사람이, 더러운 사람을 만지면, 깨끗해지지 않지만,
반대로 정결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금방 부정해지는 것이
레위기 율법의 신학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면 맞는 말입니다. 부정한 것과의 접촉을 멀리하고, 우리는 정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율법사들은, 그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을 가급적 꺼렸습니다.
그런데, 유대교가 그토록 집착했던 깨끗함, 정결함은
복잡한 정결예법과 율법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정심과 그 동정심 가득 찬 접촉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불결한 것을 접촉해서,
내가 불결해 질 것을 염려해서 기피할 것이 아니라,
불결한 것과의 접촉을 통해서, 자신의 거룩과 정결의 능력을 드러내야 할 곳은
오직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뿐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동정심 넘치는 치유자가
치료의 강물로 메마른 땅을 적실 때에야,
은닉되어 있고, 숨어 있고 격리되어 있던 많은 '나병환자'들이 커밍아웃을 하는 거예요.
▲목회를 하면 아무리 작은 목회라도 <고통의 전이>가 일어납니다.
괴롭고 답답한 사연을 가진 사람과, 두 시간만 같이 있으면,
반쯤은 내 몸이 아파지고, 마음은 돌덩이처럼 무거워집니다.
‘고통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괴롭고 답답한 사람과 전화를 하거나
혹은 그분이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면, 우리 마음이 갑자기 어떻게 됩니까?
마치 납 성분이, 내 속에 들어온 것처럼, 내 몸이 굳어집니다.
크롬과 비소를 먹은 것처럼, 내 몸이 굳어지면서
‘오늘 제발 저 사람, 안 만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회를 해 보면, 목회자에게, 한 잔의 비산을 마시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요.
자신의 괴로운 사정을 다발로 풀어놓을 때,
이것을 다 듣고 흡수하자니.. 목회자가 고통의 한계점에 도달하고,
이걸 내뱉자니.. 자신이 너무 경박한 목회자가 되는 것 같은
진퇴양난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나병환자처럼 오그라들고 마비되고,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까지 갈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더러워진 사람들의 사연을 듣기만 해도 더러워지는 목회자의 몸과 영혼은,
예수님의 살가운 접촉으로 재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같이 지극히 정결하시고 동정심 많은 분이 나타나면,
이런 나병환자 같은 레미제라블(비천한 자)들이
자기 은신처를 벗어나, 삶의 현장으로 뛰쳐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허름한 상가에서 교회개척을 시작해도
여러분이 목회에서 성공하겠다는 야심보다는
죽어가는 자들에 대해, 동정심으로 눈물을 쏟는다면,
'레미제라블'들은 여러분께로 쇄도할 것입니다.
이 세상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고 작은 상처와 충족되지 않은 염원과 탄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동정심과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가득 찬 사람의 포착에 민감합니다.
예수님 같은 동정심을 가진, 상한 목회자의 심정은,
녹슨 쇠붙이 같은 버려진 인생들을 흡인하는, 강한 자석 같은 힘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여러분의 인생에,
누군가가 한 번도 도와달라는 사람이 안 나타났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스크루지 같은 수전노일 가능성이 있거나,
아니면 돌처럼 냉담한 관료적 인물로 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교역자인데, 한 명도 나에게 기도해 달라고 문자도 안 오고,
이메일도 안 오고, 아무런 부탁도 없었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청소년부 전도사인데, 중고등학생이 자살 직전까지 가는 궁지에 몰려
아파트 7층에 가서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는 그런 절망까지 갔으면서도
나에게 찾아오지 않으면,
교역자인 내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어가는 청소년들의 심장 속에서 울려나오는 피맺힌 절규를 들을 귀만 있다면,
분명히 영적지도자로 잘 성장하겠지만,
그것을 들을 귀가 없고 볼 눈이 없다면, 장차 여러분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우리의 감수성을 흔들어 놓을, 아우성치는 간청자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상한 목자의 심정이 안 일어나는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에게 상한 목자의 심정이 없기에,
그런 간청자가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요?
여러분,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 신령한 종으로, 성장해 가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한 번만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당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긍휼과 동정심으로 살아야.. 그게 가능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간청하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들에게, 간청 받는 자도 되어야 합니다...
▲황순원의 소설 <인간접목>을 보면
불량기 가득한 고아들을 갱생시키는 과정이 나옵니다.
사랑과 자애가.. 탈선하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정상적인 사랑과 진실의 공동체로 접목시키는 힘임을.. 소설은 가르쳐 줍니다.
불결한 것들과 접촉하면서, 불결한 것들을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선교적 손 내밈,
이것이 교회가 항구적으로 추진해야 할 일입니다.
불결한 것들과 생의 한복판에서 만나야만
신학이 발전하고, 목회가 성숙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깨끗하고 호화롭고 사치스런 '종교 귀족계급'이 되어서
왕후장상들과 각종 파티에 어슬렁거리느라
불결한 것과 접촉을 전혀 못하고 산다면,
신앙의 본질에는.. 아예 접근도 못하겠지요.
대신에 우리가 지금 죽음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는, 불결한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서
내 손을 내뻗는다면,
비록 내 생명의 감가상각이 일어나겠지만,
그 사람도 살고, 나도 영적 소생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서.. 예수님 같은 영적 지도자가 나오는데도..
목이 좋고 물이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 한국 개신교의 한계, 가톨릭의 약진 이유
▲1980년대에 출간된 복음주의 해외선교 소식지「인터치」에는
쿠바의 공산당 지도자 카스트로가, 쿠바의 가톨릭 신앙과 교회에 대해 피력한
소감이 실려 있습니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가톨릭 수녀들의 헌신을 보고
가톨릭교회와 신앙에 대하여 아주 큰 호감을 느끼고 찬양했다는 점입니다.
쿠바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카스트로는 쿠바의 가톨릭 수녀들을 이렇게 칭찬했습니다.
“수녀들을 보십시오! 공산당이 해야 할 인민들에 대한 봉사를,
그들이 다 감당하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인민들을 섬기고 돌보는 일을, 수녀들이 다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에 대한 카스트로의 예찬이 있은 지 얼마 후,
교황의 쿠바 방문을 가능케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교회가 약진하는 이유도,
수녀들이 펼치는 무한 책임적인 저인망 선교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무한 책임적 봉사의 화신인 수녀라는 존재가,
전체 가톨릭을 대신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불결한 것, 버려진 것, 인간 부스러기 같은 존재들을 끌어안는 사람은,
(한국에는) 지금 수녀밖에 없습니다.
수녀는 아예 처음부터 아무런 칭찬을 바라지 않고,
성직자로 고상한 일만 하겠다는 의식도 없이, 꿋꿋이 그 일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교역자이기 때문에, 일류 신학대학원 출신 엘리트 성직자요,
예루살렘 사독 계열의 제사장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내가 달동네나 빈민촌에 들어가서, 만약 빛이 난다면,
빛이 나는 동안은, 불결한 존재들과 접촉을 하겠지만,
수녀들처럼 은닉되거나, 꺼져가는 반딧불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개신교회에서는 그저 그렇고 교양 있는 목사들은 많지만,
이태석 신부 같은 인물이 잘 안 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 우리의 문제입니다.
도시에 있는 한국교회의 말짱한 정신의 소유자(지도자)들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불결한 것과 죽어가는 것과
인간존엄성의 바닥으로 내쳐진 사람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는데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없는 자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고전1:28
고린도교회는 ‘존재감 없는 자들’이 교회를 가득 채웠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에는 즉 ‘내로라’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 결과, 존재하지 않는 자들은,
교회 안에 있어도,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 대우를 받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장애인이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히려 ‘장애 교회’는 어디입니까?
장애우가 아무도 없는 교회입니다.
장애우를 환영하지 않고, 장애인 시설도 없는 교회가
사실은 ‘장애 교회’인 셈입니다.
그런데 장애우들, 병자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집안에만 있는 사람들,
이들을 교회가 다 감당하려면,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이 소요될 뿐,
교회 부흥이나, 재정 면으로는.. 아무런 유익을 창출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교회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교회 성장에 저해 요인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붓고 주기만 해야 되는
부서지고 병든 영혼들을 돌보는 사역에는 관심을 안 가집니다.
영혼이 죽어가는 자와의 접촉과 제휴를 꿈꾸지 못합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이 개신교 전반의 한계입니다.
▲1959년에, 알바니아 출신의 한 수녀가,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 들어가
시작한 일이 무엇입니까? 산 자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에 숨넘어가는 사람들의 시신을 염하고, 매장하여
장례식을 존엄하게 치러주는 일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죽어간 자의 시체를 씻어주고 닦는 일을 평생 하다가
노벨상을 받고 유명해져서, 인도의 힌두교도들의 존경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것과의 접촉, 불결한 것과의 접촉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하나님을 섬김’이었습니다.
▲또한 이보다 앞선 가톨릭교회 성자 중, 성 다미안 신부님이 계십니다.
태평양 하와이 근처에 몰로카이 섬에 나병환자가 많이 산다는 사실을 알고,
나병환자의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하다가,
형과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침내 나병환자의 섬 몰로카이로 찾아 들어갑니다.
그런데 몰로카이 섬에서 아무리 전도를 하고 나병환자와 접촉해도..
쉽게 열매가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한센병 환자와 접촉점을 갖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던 것처럼, 자신도 나병에 걸려야 한다는 것을요..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한센병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정녕 한센병 환자가 될 자격이 없나요?”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자,
어느 날 샤워를 하는데, 자기 왼쪽 발가락이 서서히 마비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는 나병에 걸립니다. 나병환자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자신이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3. 가톨릭 부흥의 원천
▲이런 극한의 선교적 지향이, 오늘날의 인상적인 가톨릭 부흥의 원천입니다.
가톨릭은 우리보다 신학이 훨씬 단순해요. 오히려 성경적 근거는 개신교 신학이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실천'은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 들어가면, 거대한 항공모함을 타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개신교에 들어오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붙어 있다는 접목 의식이 약하기 때문에,
망망대해에서, 혼자 구명보트를 저으며, 천국 항구로 항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서 방향의 확실성에 대해서도, 때때로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영성체(성찬)을 받으면서도,
여러 수도회들,
즉 돈 보스코, 빈센치노, 살레시오 운동 등에도 참여하고,
꽃동네도 가면서, 그저 빈자, 장애우들과 한 식구가 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접목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교적 쉽게 느낍니다.
*물론 '소속'이 내 구원을 책임져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항공모함급 크루즈를 타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개신교 국가들에서는 자살률이 높지만,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자살률이 낮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죽어가는 것, 불결한 것과의 접촉을 마다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당위로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에 호소하여 말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것들,
불결케 되어서 사회적 접촉을 상실한 것들,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성을 누리지 못하는 비천한 사람들,
그런 존재감도 없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유지하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가 없고, 선교의 미래가 없고,
복음의 미래도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교인 수 감소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상한 목자의 심정이 고갈된 상황을 걱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장신대학원에 어려운 시험을 쳐서 들어왔기 때문에 *장신대 사경회 설교임
여러분 마음속에는 어느 정도 엘리트 의식이 있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마땅히 성공한 목사로서의 멋진 미래 청사진이 그려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의 마을 같은, 버려진 교구는
아예 여러분의 마음에서 배제된 땅 끝 선교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은 대부분 도시목회에 참여하게 되고,
극소소의 사람만이 농어촌 오지나 해외 선교지로 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관목회자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나병환자들이 사는 마을을 교구로 삼으라는 권면을
‘이런 모든 것들은 그냥 해보는 이야기겠지. 그냥 사경회니까 말하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흘려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목회를 하면서,
이런 죽어가는 자들과의 생명적 연대를 잃어버리는 순간,
더 이상 ‘영적인 종’의 모드로 살지 못하고,
‘육신적 종’의 모드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엄연한 진실입니다.
*그 간청자 한 명을 돕는 것이 무슨 크게 도움이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으나,
그 한 명이, 메말라버린 내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회자가 살면, 그 교회가 살게 됩니다.
◑4. 육신적으로 살아갈 목사들을 구원해 줄 사람은, 사실 나병환자급 교우들입니다.
▲나병환자처럼 산 자의 땅에서 추방당한 가난한 자의 아우성치는 간청이,
목사들의 영적 감수성을 회복시키고, 영적인 종으로 되살려 냅니다.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의 신학 입니다.
그가 대표했던 러시아 정교회의 영성신학에 따르면,
나병환자, 가난뱅이, 바보천지, 노숙자는 곧 현장한 천사로서
구원받은 사람을 데려가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세상에 파송된 자들입니다.
그들이 노숙자, 나병환자, 행려병자의 이름으로 전 세계에 파송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리에 버려진 그 사람들의 손을 잡는 순간.. 천국에 갑니다.
우리가 죽어가는 것과, 불결한 것,
하나님의 원시적인 자비가 필요한 사람과 접촉을 유지하고 연대할 때에야
비로소 교회가 살고,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마치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지는 피와 물처럼,
치료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부터 계속 쏟아져 나올 줄 믿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병환자급 교우들을 재활, 복구 시켜, 그들을 정상인의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선교이며, 교회의 사역입니다.
▲결단의 기도.
여러분, 첫째로, 나 스스로 깨끗케 되기를 열망하는 기도를 먼저 드립시다.
나 자신이 먼저, 나병환자보다 더 절박하게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외쳐야 합니다.
내가 먼저 나병환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두 번째로, 깨끗케 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이
불결한 것, 죽어가는 것과 접촉하고, 연대하는.. 선교적 현장투입을 위해 기도합시다.
교회가 단순히 교양 있고 점잖은, 고만고만한 크리스천을 배출하는데 만족하지 말고,
나병의 고통이 넘치고, 죽음이 역사하는 땅까지 손을 내뻗는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인적, 재정적 희생을 무릅쓰며
영력을 소진시켜 가는 선교적 아웃리치를 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여러분께서 스스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접촉해야 할 간청자(나병환자 같은 분)를 만나게 해 주시고,
제 인생의 도상에서, 나에게 소리치며 달려오는 양떼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럴 수 있도록, 제가 평소에, 주님의 긍휼과 동정심으로 살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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