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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삼마

LNCK 2014. 4. 15. 08:58

여호와 삼마             48:35                   2014.03.30. 인터넷 설교 녹취

 

오늘 본문을 보니까 여호와 삼마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한계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 한계가 무엇이냐. 하면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만 믿으려고 하는 이런 속성이 있다는 것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은, 잘 안 믿으려고 하는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보이는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에 목적을 두고, 또 그곳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소중한 것들이 많아요.

소망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미래 천국..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에요.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만져지거나 보여 지지 않는 겁니다.

공기 마시는데도 가스 마시는 것처럼 옆구리에다가 미터기를 달아놓고

공기마신만큼 돈 내라 그러면 적게 마시려고 애를 쓸 텐데,

무제한적으로 공급해주니까 소중한 것을 모르는 것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은혜가 있는데, 사람들이 안 보인다고, 그 은혜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우를 범하면서 살아가는데,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한계 일런지도 몰라요.

 

여러분, 사람은 자기 집이 없어도 살아갑니다. 셋방으로 살면 됩니다.

집이 조그마한 것이 있어도 살아가요.

그러나 장래 희망이 없고/ 미래가 없고/ 소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장래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만큼 더 소중하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오늘 본문 에스겔서를 보셨으면 합니다.

 

◑에스겔서의 주제

 

▲에스겔서가 모두 48장으로 엮어져 있는데

이 48장이라는 방대한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무슨 말이겠느냐 하면

여호와 삼마에요.

 

이 말씀이 에스겔서의 핵심이고, 또 주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서는 모두 48장인데, 전 후,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어요.

 

1장~32장까지 전반부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 라고 백성들이 느끼는 부분이고 (여호와 삼마가 아닌 거죠)

 

33~48장까지 후반부에서는

‘아 주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고 계시는구나.’ (여호와 삼마)

그런 부분으로 엮어져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은 여기 계시지 않는다. 이렇게 믿고 있었어요.

왜 그러하냐면, 이 백성들이 우상을 아주 굉장히 섬겼어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가지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지요.

 

바벨론에 가서 70년 동안 이국생활을 하고 악재를 받고 노예로 살아가요.

얼마만큼 우상을 섬겼길래 하나님은 그렇게 징계하셨느냐하면

에스겔서 5장~32장까지 보면, 내내 우상섬기는 이야기에요.

 

근데 특별히 16:20절에 가서 보면 사람들이 얼마만큼 우상을 섬겼냐하면

목석을 만들어놓고 가서 절하고 이런 수준이 아니고

어린아이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악습을 흉내를 내요.

나중에는 아이들을 재물로 바치기도 해요.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심판 받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백성들이 그렇게 고난을 받게 된 것이지요.

 

사람이 왜 우상숭배를 하냐하면

우상숭배가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금지하시고 우리들에게 주의를 주시냐하면

우상숭배를 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에요.

이게 무서운 겁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금지시킬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그냥 우상도 아니고, 이방인신앙을 섬긴 것도 아니고,

이방인 흉내를 내어서, 자기 아이들을 재물로 까지 바쳤단 말이에요.

있을 수도 없는 이런 모습을 봐서,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세요.

 

◑여호와 삼마의 중요성

 

▲그래서 이방나라들의 압재를 받고 살아가는데

이방 나라에 가서 압재를 받고 살아가는 것 만해도 힘든 일인데

이방나라로 포로로 잡혀온 12년 째, 성경에 보면 10월 5일이라고 그랬어요.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고 불타고,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앞서 2차 포로로 잡혀와서) 포로생활 하는 것도 힘든데

예루살렘 성전..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 그 자체에요.

그런데 그것이 파괴되었고 점령당했다 이 말씀이죠.

 

그러니까 순간적으로 이 백성들이 무엇을 느꼈느냐하면

‘아 하나님은 거기에 안계시다.’

그래서 겔1장~32장까지가 그 내용이에요.

 

▲우리들이 이 부분을 실감나게 이해 잘 못해요.

예를 들면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 죄를 짓고 나서

밤마다 침상을 적시는 눈물을 흘려요.

 

왜 눈물을 흘렸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잊혀 질까봐, 버려질까봐..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고 떠나실까봐, 벌벌 떨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피부에 와 닿는 것이에요?

앉아 계신 여러분의 얼굴 표정을 보니까, 별로 실감이 안나요.

 

그런데 다윗은 지금 마음이 두려워요. 왜 두렵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잊혀 질까.. 버림당할까..

그러니 밤마다 두려운 마음에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려서 요를 적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거든요.

 

그런데 사울 같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실수를 해요. 뜻을 어기고 섭리를 어기며 하나님 명령을 어겨요.

그것은 용기 있어서가 아니고,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가시든지, 머물러 계시든지.. 개의치 않았어요.

그래서 끝내 사울이 버림받잖아요.

 

그러나 다윗은, 임재의 중요성을 절실히 알았기 때문에

혹시 죄를 짓고도..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지요.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이렇게 살아갑니다.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함께 하심(임마누엘, 여호와 삼마)에 대한 소중함을 잘 몰라요.

 

그런데 언제 깨닫게 되냐면, 잃어버리고 나야 알아요.

사람들은 소중한 것이 주어져도, 가지고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릅니다.

그런데 잃어 버리고나면, 다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꼭 잃어버려야만 아냐? 그것은 아니에요.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간접체험하면서 깨닫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에 다윗의 고백이 나오고, 솔로몬의 고백이 나오는 것이에요.

솔로몬이 그러잖아요.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간접체험으로 깨닫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듣고 알면서도, 우리들이 그 길을 또 걸어간다 이 말씀이에요.

간접체험으로 부족해서, 꼭 직접체험을 하고서 깨달으려고,

성경이 금하는 그 어리석은 길로.. 우리가 제발로 가는 겁니다.

 

▲여기 에스겔서는 우리들에게 그걸 보여주고 있어요.

여러분, 세상에서 최고의 복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최고의 저주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떨어져나가는 삶이에요.

 

에스겔서 1장에서 32절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후반부도 33장에서 48장까지 보면

이제는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 돌아오셨다. 우리를 회복시켜 주셨다.

그런 내용이에요.

 

그래서 33절 이후로 읽어보면 소망적인 말씀 회복의 말씀이 나와요.

36:34절에 보면 ‘그 황폐한 땅이 장차 경작지가 되게 하리라.’

35절에 보면 ‘전에는 황폐한 땅이더니 이제는 에덴동산같이 되었다.’

회복을 말씀하는 것이죠.

 

43:4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에 들어가셨다.’ 회복이에요.

그리고 오늘 읽은 이 마지막 절을 보면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삼마’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다.. 그래서 회복되었다.. 이런 말씀이에요.

 

이것은 미래적 상황입니다.

지금 현재는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지만, 징계를 받은 후에,

장차 미래에, 성전이 다시 회복되어지고, 여호와께서 다시 돌아오실 것을,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것이죠.

 

 

◑여호와 삼마, 회복의 약속을 사모합시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통찰력을 얻는데

그중에 한 가지는,

자기 잘못이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죠.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해요. 70년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곧 고국으로 되돌아갈 소원을 암암리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 포로생활 와중에, 멀리 이방 바벨론 땅에서, 소식을 들었는데,

버티고 버티던 예루살렘 성이, 무너졌다 점령당했다. 성전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어요.

엎친데 덥친 격, 절망이 가중되는 것이에요.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래서 백성들이 뭐라고 생각했냐하면

‘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 이렇게 느꼈다는 말이에요.

 

왜요?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다면, 그 성이, 또한 그 성전이

그렇게 짓밟힐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에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언제 그들을 떠났습니까. 자기들이 떠났지요.

자기들이 떠났지 하나님이 언제 떠났느냐는 말씀이에요.

 

사람들은 흔히 오해를 해요. 자기 욕심 때문에 일을 그릇치고 나서 실패하고 나서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을 주십니까.. 탄식하며 기도하는데

언제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험을 줬는데요?

 

자기가 욕심껏 뭐 투자했다가 실패하고 나서, 왜 나를 망하게 하십니까?

언제 하나님이 망하게 하셨냐 이 말씀입니다.

 

자기가 우상숭배 하며, 하나님을 떠났지.. 하나님이 언제 떠났냐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첫 번째 오해이고..

 

▲두 번째는, 징계를 순순히 받으면.. 하나님이 다시 돌아오신다..는 것이에요.

여호와삼마가 다시 회복된다는 뜻이에요.

회개와 정결의 시간을 지나고 나면,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39:21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회복되리라.’

43:4절 ‘여호와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다.’

44:4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하시 도다.’

이런 표현은 다 회복을 말하는 것이에요.

 

복중의 복이 무엇이냐 하면요 희망이에요. 소망이고, 미래고, 내일입니다.

사람은 오늘 살아가기가 힘들어도, 희망이 있으면 살아가요.

집이 없어도 살아가요. 희망/ 소망/ 내일의 비전이 있으면 꿋꿋이 살아가요.

 

그래서 사람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입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 이것만 있으면 살아가는 것이에요.

 

▲4세기에 활동했던 어거스틴이라는 분이 있어요.

기독교 초기 역사에 굉장한 영향을 끼친 분이에요.

 

이 분이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써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있어요.

주후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합니다.

로마가 이제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다하는 선포식이었어요.

 

그래서 땅 속에서 산 속에서 굴속에서 살아가던 핍박받던 그리스도인들이 자유하게 되었어요.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평화시대가 왔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1백년 쯤 지나서 410년에 와가지고

야만민족인 고트족이 와가지고 로마를 점령한 것이에요.

 

(마치 에스겔서 상황처럼) 로마가 멸망한 것이지요.

그 모습을 보고 어거스틴이 너무너무 놀란 것이에요.

 

왜 놀랐느냐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도성인 로마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고트족에게 그것도 야만족 고트족에게 멸망당하다니 짓밟히다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느냐.. 이거지요.

그것에 시험 드는 것이지요. 용납이 안 되니까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로 억눌려 살아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고국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멘붕 상태에 빠진 것이에요.

 

그래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여기 계시지 아니하다’ 이렇게 고백한 것과 똑같은 심정이지요.

이게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은 마음이에요.

 

그런데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 역사 경륜을 깨닫게 돼요.

그리고 두 손을 만세! 하며, 번쩍 드는 것이에요.

 

얼마 후에 로마를 점령했던 야만 민족 고트족이 회심을 한 것이에요.

그래서 기독교인이 된 것이에요.

그러더니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니까,

옛날 조그마하던 로마가 더 커진 로마로 만들어버린 것이에요.

 

그리고 그 커진 로마는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이 되지요.

전 유럽의 기독교화가, 그렇게 이루어진 겁니다.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 말하자면

세상 나라를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은 또 다른 세계를 이루신다는

이 기가 막힌 역설의 운영의 묘를 발견하고 나서

어거스틴이 두 손을 번쩍 든 것이에요,

 

역사 속에서 이런 신비를 목격을 하고나서, 비로소 그는 고백을 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가 무너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떠나셨다 이렇게 봤지만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의 나라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더 크게 세우시려고, 이런 (부쉬는) 삶들이 이루어진 것이에요.

 

그래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도, 바벨론에서 선교적 사명을 충실히 감당합니다.

다니엘, 에스더, 느헤미야서에서, 그 내용을 잘 볼 수 있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국지적인 지역 신이 아니라,

온 세계의 하나님 되심이, 바벨론 포로를 통해서, 이방과 접촉을 통해서.. 선교가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와중에, 이방에 아주 동화되어버린 선민들도 있겠지요.)

 

▲여러분 새 집을 지으려면, 헌 집을 부숴야합니다.

헌 집을 부술 때, 눈물로 두 팔 뻗고 탄식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왜 울지 않느냐하면, 더 큰 집을 지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때부터 그런 하나님의 섭리,

미래의 역사,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13년 동안 저술을 해요. 그리고 발표한 것이 <하나님의 도성 The city of God>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시거든요.

언제 역사하시느냐하면, 과거에도 역사하셨고, 지금도 역사하시고, 미래에도 역사하시는 것이에요.

 

안목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아가며

예민하게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에요.

이게 진정한 믿음이거든요.

믿음의 세계에서 초점은, 소망이고, 미래의 희망이에요.

하나님은 이것을, 본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