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P1 고후4:16-18 2001.08.20. 목회자세미나
옥한흠 목사님 설교 녹취, 동영상 보기
◑목회자는, 소명을 받아야 합니다.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하는 제목으로
오늘 밤에 우리가 함께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캘빈의 <기독교 강요>를 보면
우리가 흔히 성직이라고 부르는 목사/ 선교사/ 전도사 - 이 직분에 대해서
화려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유일한 지배자이시고, 하나님은 교회의 유일한 권위가 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게 교회에 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직’이라고 하는 인간의 봉사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교회에 명백하게 선포하게 하셨다고, 캘빈은 말합니다.
마치 노동자가 일을 하기 위해서 연장을 사용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을, 그의 손에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자는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사자요. 또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한 계시를 해석할 수 있는 권위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성직을 맡은 종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존경할만한 일을 하고 있는 자로 인정받기 원하고
모든 사람이 그 권위에 복종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구든지 교회 안에 성직이 필요 없다 한다든지,
성직을 무시한다던지, 성직을 멸시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를 파괴하는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태양의 열과 빛과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지상의 교회가 제 역할과 사명을 잘하기 위해선
사도적 직분 목회적직분인 '성직'이 절대로 필요하다 하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굉장히 화려한 묘사입니다.
우리가 이런 종교개혁자들의 진지한 신학적인 설명을 배경으로 해서
지금 우리 모두가 성직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캘빈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하죠.
누구든지 성직자가 되려면 비밀한 소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비밀한 소명’이라는 말을, 여러분 마음속에 잘 담아두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 사람을 놓고, 하나님에게서 비밀한 소명을 받았는지를
증명해줄 자격이 없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캘빈은 재밌는 말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있는데, 깨끗하지 못한 양심을 가지고 소명이 없는데도
소명이 있는 체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목사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사악한 생각들이 드러나지 않았어요.
소명을 받지 못했는데도 받은 것처럼 하는
그 사악한 마음이, 사람들 눈에는 발각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그 사람을, 교회 목회자로 청빙했을 때는,
소명자처럼 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지상에 있는 교회의 약점이죠.
이 말속에는 상당히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내면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비밀한 소명과 공적인 소명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비밀한 소명 없이 공적인 소명을 가지고 목사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부름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교회에서는 인정을 받고 사역자로 일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우리는,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비밀한 소명이 있는가.
-나는 공적인 소명만 가지고, 목사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비밀한 소명과 공적인 소명이 나에게는 분명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우리가 깊이 성찰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소명’은 원래 값없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에 은혜에 대한
전인격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의 대한 은혜에 감격하면
윤형주 (음악인) 장로님처럼 성직자가 아니라도,
자신의 생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꼭 목회자만 소명 받았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이야기요.
모든 평신도가 소명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할 때 ‘오 주여 나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는 진지한 고백이, 마음에서부터 누구든지 다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 받은 자의 반응이란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바로 소명을 의미한다.’ 라는 신학적인 명제는
어디까지나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틴데일을 잘 아시죠. 그분이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어요.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물 기르는 것과, 설거지하는 것과, 또 구두를 고치는 것과, 강단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다.’
이런 의미에서 꼭 뭐 ‘성직자만 소명자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가 부름 받은 독특한 직분,
다시 말하면 독특한 사역 때문에,
평신도의 소명과 구별되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벤처기업 하는 집사를 불러서, 하나님께서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장사하는 집사를 불러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학 강사를 하고 있는 성도에게, 주님께서
‘성도를 섬기라, 봉사의 일을 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라’ 라는
엄숙한 명령을 주시지 않았어요.
집안에서 자녀를 키우는 주부를 향해서
주님께서 ‘너는 내 오른손에 붙잡힌 일곱별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직을 받은 목회자에게 있어서, 이 직분의 독특성 때문에
우리 ‘목회자의 소명은 평신도의 소명과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와 전도사 선교사는.. 믿는다고 다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있겠다고 덤벼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남달리 불러 세우는 자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밀한 소명을 받은 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밀한 소명이 나에게 있는가?’ 하는 것은
수시로 우리가 물어야 될 중요한 질문입니다.
만약에 이런 신성한 부르심이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한다면,
어떤 사람의 표현대로, 그것은 광대 짓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저는 23살 때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1960년 봄이었는데요. 그렇게도 안하겠다고 도망갔던 내가,
어떻게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겠다는 그 일념가지고
2년, 3년, 씨름하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손에 꺾여서,
20평도 안 되는 작은 시골교회에 마룻바닥에 홀로 엎드려
하루 종일 일어나지 않고 흐느끼면서 갈등하며
하나님께 항복하던 그 순간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별난 신앙 생활한 것은 사실입니다.
중학교 때 되니까 ‘누가 봐도 너는 목사감이야’ 그랬습니다.
그리고 저도 내면에 ‘목사가 되어야하겠다. 이거 피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라는
불안감을 항상 갖고 다녔고,
제 뒤에서 어머니는, 항상 제가 목사 되기를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싫었어요.
제가 몸담고 있던 시골 교회에서,
젊은 목사를 끌어다가 방에 세워놓고 린치를 가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오는 꼴을 보고서
‘내가 저 목사 돼서 저런 고생을 하겠나. 무슨 세상에 할 짓이 없어 목사를 하냐.
성미 갖다 주면 그저 끼니 거르지 않고 먹고, 성미를 갖다 주지 않으면 굶는다는 소리도 못하고..’
그 농촌 교회 목회자, 저 몰골은 도대체 보기 싫은 몰골이에요.
‘남자가 되어서 저런 꼴을 하고 있으면 뭐하나’ 이런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죽어도 하기 싫은 거예요.
어떤 변명을 해서라도, 저는 이 길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셨어요.
▶그때부터 저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강제로 차출당한 사람처럼
다른 길을 감히 돌아보지 못하고, 40 몇 년 동안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이런 식으로 목사로서의 길을 시작했기 때문에
항상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소명 콤플렉스라 할까요?
하기 싫은 거 억지로 끌려와서.. 차출당한 전투병처럼
'어찌 할 수 없어서 이 일을 하고 있지 않나? .. 이것이 진정한 소명인가?'
하는 약간의 콤플렉스가, 한 동안 저를 계속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면서, 저 자신이 위로를 받았어요.
신구약을 통틀어서, 주님 앞에서 쓰임 받은 종들을 보니까
“접니다!” 하고 스스로 좋아서 자원한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요.
도망 다니다 끌려오고, 안하겠다고 버티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대부분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저 자신이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참 소명을 분명히 받는 그 순간만은
제가 그렇게도 피하려고 하던 그 하나님이 몰아넣으신다고 하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느낀 것입니다.
그 순간은 나와 하나님만이 대면하는 시간 이였습니다.
아마 비밀한 소명을, 제가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철저한 항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장한 결단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자랑이나 흥분할 순간도 아니었습니다. 저에게는 그래요.
오히려 헨리 나우헨이 말한 그 순간↓이 적용된 순간 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했어요. 소명을 받을 때 우리의 상황은 주로 어떤 상황이냐,
‘하나님은 모든 바지랑대를 다 치워버린다.’
그게 뭐냐면, 빨래를 걸 때, 빨랫줄이 길면 중간에 받쳐놓는 장대있죠?
그것을 바지랑대라고 그래요.
‘소명 받는 순간에는 모든 바지랑대를 다 치워버린다.’
대화할 친구도 없고, 받을 전화도 없고, 참석할 모임도 없고
감상할 책도 없고, 오로지 벌거벗고,
취약하고, 죄악 되고, 가난한, 처절한 모습만이 남는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순간에는 바지랑대를 다 치워버리고,
내가 기댈 언덕이라는 건 하나도 없어요.
오직 죄악된 모습, 처절한 모습, 가난한 모습, 상처받은 모습, 그 모습을 가진
참 너무나 보잘것없는 존재 하나만 하나님 앞에 남는 순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저를 부르셨고, 아마 여러분을 부르셨다고 생각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를 아실 겁니다. 그분 말씀 중에 참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소명을 깨닫는다는 것은,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와 같이 올 수도 있고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올수도 있지만,
어떤 방식이던 간에 그것은 초자연적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특성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소명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말입니다.
시행착오를 포함한 한동안의 탐색을 통해서만
분명한 소명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내가 소명 받았나. 안 받았나?' .. 시행착오를 거듭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한동안 탐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비밀한 소명을 받고 신학교를 들어왔나,
정말 나를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목사 안수를 받았나,
한참 탐색을 통해서 .. ‘아 내가 분명히 소명 받은 것이 틀림없구나’ 하는
어떤 결론으로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40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달려왔지만,
확실히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불렀으면 부르신 어떤 징후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부르신 자에게는 은사를 주신다’ 고했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목회자로 불렀으면, 목회자로 일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시는 것이 보여야 되고,
설교자로 부르셨으면, 설교할 수 있는 은사와 능력을 주신 것이 분명히 나타나야 되잖아요.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불렀으면, 불렀다는 것이 내 눈에 보여야
그래도 내가 참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사역에 몸을 실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을 확인하기까지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한동안은 탐색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드디어 제가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고 몇 년 지나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하나 하나 확인할 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 사실이구나, 이제 나는 방황 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고는 내 마음에 감격이 찾아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나 같은 것을 부르셨을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 없는 것처럼
충성되지 못 함에도 불구하고 충성된 자처럼
완전 되지 못한데 완전한 자처럼.. 나를 대접하시면서,
이렇게 나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 사실이구나,
하는 것을 저 자신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사역자의 소명 갈등
▶우리 교회 교역자 중에 남자교역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자신이 소명을 받게 된 과정을, 글로 쓴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교회 부교역자로 들어올 때는, 전부 다 그런 것을 쓰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가 받은 ‘소명’을.. 분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형제의 간증문이 재밌어요.
자기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농촌교회 마룻바닥에 앉아서 오랫동안
장래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자기혼자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음성이 들렸어요.
‘나는 너를 위해 죽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 하느냐?’
너무나 생생한 음성이 되어서, 도무지 그 음성이 자기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어요.
자기 소원은 의사가 되는 것인데,
그 음성은 자기를 자꾸 목사가 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어요.
갈등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결단을 하고,
‘그래 하나님이 부르시면 목사가 돼야지’ 하고
총신대학 1학년에 시험을 쳐서 입학을 했습니다.
막상 입학을 하고 나서, 그 갈등이 없어져야하는데,
의사가 되고 싶은 내면의 욕심과
이제 신학교에 왔다고 하는 두 상황 사이 틈에 끼어서
아마 상당한 갈등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총신대학을 그만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남은기간 열심히 준비해서,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어요.
그래서 의대를 들어갔습니다.
의대를 들어가서 공부하는데, 여전히 갈등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위해 죽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 하느냐?’
그 음성이 마음에서 살아날 때마다
‘의사가 되어야 되겠다’ 하는 자기 소원이, 주님의 음성이 아닌 것 같단 말입니다.
이건 분명히 ‘목사가 되라’는 음성 같단 말이에요.
그래서 갈등하다가 휴학계를 내고, 군대를 갔습니다.
군대 가서 복무하면서, 많은 진통을 통해
하나님의 소명에 무릎을 꿇기로 작정했습니다.
제대하면서 다시 총신대학시험을 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가 자기 소명 간증문 끝마무리에 이런 것을 썼어요.
지나간 일에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 저를 부르셨을 때, 한 길로 줄곧 가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것이 회한으로 남고, 부끄럽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소명 확인 위한 갈등)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한동안의 어떤 방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나를 불렀느냐.. 탐색을 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분명한 소명의식 없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어쩌다 신학교에 들어가고, 어쩌다 목사가 된 사람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방황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미나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누구의 부르심을 받고 이 자리에 와있습니까?
누구의 부름을 받고 목사가 된 것입니까.
‘비밀한 소명’을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여러분만이 아는 소명 말입니다.
여러분만이 아는 하나님의 내면의 음성을 갖고 있습니까?
‘다른 모든 길은 다 막혀버렸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 길로만 가라고 열어주셔서,
거역할 수 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어서,
하나님이 밀어 넣으시는 대로, 나는 이 길로 들어왔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소명의식을 여러분이 갖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나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을 따라가는 것만이
나의 남은 필생의 소원이라고 나의 마음에 말할 수 있습니까?
심지어 내가 목회를 하다가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 말고는 내가 갈 길이 없고
이 길 말고는 내가 생명 걸고 할 일이 없다고
분명히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을 만큼, 마음에 분명한 소명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놀라운 사람입니다.
◑목회자들의 소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견고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특별히 부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목회 상황이 점점 열악해지는 것 같습니다.
‘비밀한 소명’을 가지고, 생명 걸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매달려도
될까 말까한 참 굉장히 어려운 목회현장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보통 험난한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고, 좋은 소문이 나고,
교회에서 대접 잘 받고, 그것이 너무 좋아서 감사합니다.
그런 좁은 웅덩이 속에서 모든 것을 보면 간단해요.
자기교회만 잘되면 천하가 다 잘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지역교회 하나만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국교회 모든 사역자는, 한국 모든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요,
또 우리가 한국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전 우주적인 교회에 앞날과 그 운명을
우리가 등에 업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 혼자 잘된다고 뻐기고 자기 목에 힘주면.. 소인중의 소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넓게 봐야 되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를 한번 봅시다.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평신도도 물론이거니와, 특별히 목회자에겐 점점 어려운 상황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는 오스 기니스의 말을 여러분에게 인용하고 싶습니다.
‘오늘날은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 이래로 최초의
세계화된 문화의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미 감을 잡으셨을 거예요.
이 세계화된 문화는, 너무나 그 힘이 강력해서
이만한 힘을 가진 반기독교세력은 지금까지 역사상 없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기독교를 해치던 수많은 힘이 있었잖습니까,
스탈린이 있었고, 모택동이 있었고, 김일성이 있었고,
과거의 많은 기독교의 적대 세력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모든 적대세력이 교회를 해친 것보다도 더 강력한 힘으로
오늘날 교회를 해치고 있는 것이 바로, ‘세계화 된 문화’라는 것입니다.
이미 이것은 가정이 아니에요. 이미 확인된 사실입니다.
여러분 가장 쉬운 예로 인터넷을 꼽아봅시다. 세계화된 문화입니다.
이것이 지금 얼마만큼 기독교의 목을 죄고 들어오고 있는지, 여러분 아셔야합니다.
도덕적으로/ 가치관으로/ 세계관으로/ 예술적으로
얼마나 오늘 교회를 포위하면서 교회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지 여러분 아세요?
바벨론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예루살렘 바깥에 토성을 쌓아서,
점점 예루살렘 사람들이 잠을 자지 못하고 드디어 항복할 수밖에 없듯이 조여 매듯,
오늘 세계화된 문화 그중에 인터넷이
얼마나 교회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끌고 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지성인들로 하여금 신앙에서 돌아서게 만드는지.. 여러분 아세요?
이 힘을 아세요? 느껴보셨어요?
▶저에게 어느 목사님이 전화했어요. ‘목사님, 목사님 가만히 계시면 안 됩니다.
사랑의 교회 목사라고 해서 가만히 계시면 안 돼요.’
‘어떻게 하면 좋겠소?’
‘목사님이 일어나셔야 돼요.’
‘난 도무지 여유가 없어요. 시간도 없고, 체력도 여유가 없어요.’
‘그래도 목사님, 가만히 계시면 안 돼요’ 그럽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목사님 인터넷 한번 들어가 보셨어요? 특별히 인터넷에 채팅하는데 들어가 보셨어요?’
‘목사님 교회의 순장도 있어요. 정신 차리세요.’ 기가 막히더라고요.
그래서 ‘목사님 무슨 말하는 거예요?’
자기는 이 인터넷 중에서 특별히 채팅을 하는데
특별히 가슴에 끌리는 뭐↓가 있대요.
'이대로 방치하면 다 붕괴된다. 이걸 어떻게 막아야하겠는데..'
막으려면 도대체 이 세상이 요지경인가 경험하지 못하고는
도무지 뭐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해서 자기도 목사 신분을 숨기고 들어갔대요.
일반 남자로서 주고받는 겁니다. 어떤 여자와,
이 여자 하다가, 저 여자 하다가, 채팅을 주고받았대요.
주고받는데 목사니까, 은근히 신앙 쪽으로 유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좀 친해졌다싶으니까, 상대편이 속에 있는 얘기 다 털어 놓는 거예요.
그러다 그만 저희 교회 순장도 걸려든 것입니다.
‘아니 그 제자훈련 하기로 유명한 S교회 순장이 여기 왜 와있습니까?’
‘아저씨도 예수 믿으세요?’
‘나야 뭐 나갔다 들어갔다 하는 사람인데.. 근데 S교회 교인이 어떻게?'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 따분해서 못살겠어요.'
너무너무 따분해서 한번 들어와 봤더니 너무나 재밌잖아요.
그래서 지금 하다보니까, 끊을 수 없는 자리까지 왔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벼랑에서 있어요.
자기가 있는 도시에 어느 교회 주부2명은 이 채팅에 들어가서 헤매다가
가출해서 벌써 두 달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고 소식도 없대요.
자녀 내버려두고 말이에요.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에요.
이 세계화된 세계를 지구촌으로 묶어 언어와 혈통의 장벽을 뛰어넘어,
심지어 종교와 모든 사상의 장벽을 뛰어넘어, 무서운 힘으로 사람들을 옭아매어서
마치 그물이 물고기를 싸서 끌고 가듯이 끌고가는
이 무서운 세계화된 무서운 힘을 여러분 아십니까.
이 힘을 알면 우리는요. 아마 잠을 자지 못 할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목회현장이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는가, 우리가 알아야합니다.
▶미국의 통계를 보았습니다. 목회자 3분의1정도가 천직으로 알았던
목회자 직을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못 견디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명의식조차 뿌리째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문조사한 5천명 가운데 40%가
3개월 안에 다른 직업을 구하겠다고 하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일해도 열매도안보이고 전도도 잘 안되고,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도무지 더 이상 버틸 수 가없어서, 적당한 직장만 생기면
3개월 이내에 나는 이 일을 그만두고 떠나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5천 명 중의 2천명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 미국 목회현장에서 뛰고 있는 목사 30만 명 중에
20%에 해당하는 목회자들이 정기적으로 정신적인 질환 때문에 치료받고 있다 고해요.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내면이 붕괴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회자 자신이 소명까지 흔들리게 되면,
심리학에서 흔히 말하는 ‘페르조나 현상’이 나타납니다.
페르조나는 가면이라는 뜻입니다.
소명이 흔들리니까 성도들 앞에 자기가, 소명이 흔들리고
심지어 소명도 별로 없는데 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어떻게 하던지 탄로 나지 않게 가면을 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난히 열심히 일한다던지
아니면 성도들이 볼 때, 저분이 정말 열정적으로 일한다 하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엉뚱한 것을 가지고
가면을 쓰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목회자들이 소명의식에 위기를 맞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은,
'교회 부흥'과 연관이 된다고 봅니다.
아무리 힘을 쓰고 애를 써도 부흥(성장)이 안 되고,
사람 좀 키워 놓으면 옆에 유명한 목사교회에 다 빼앗겨버리고,
10년이 지나가는데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는 목회현장을 보면서
자신이 과연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은 성령이 기뻐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봅니다. 경쟁이 너무 심합니다.
‘이렇게 살벌한 경쟁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목회현장’
이것을 하나님이 절대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저는 봅니다.
어떤 구실을 가지고도 이건 설명하거나 합리화시킬 수 없어요.
(합동 통합 교단의) 많은 분들이 ‘1만 교회를 세우자. 개척하자. 신학생을 더 많이 배출하자’
그래서 믿음 좀 좋은 사람만나면 ‘당신 목사 돼야 되겠소.’라며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이렇게 포화상태가 되고, 신학교 나온 사람들이 갈 곳이 없고,
무임 목사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교회 하나 시작하면, 피비린내 나는 경쟁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이 상황,
이것은 성령께서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현실은 피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출혈을 하는 것입니다.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악의의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우리 모두가 지쳐버리는 것입니다. 소명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됩니다.
교회가 부흥이 잘 안 돼요. 우리 모두가 흔들리게 됩니다.
▶문제는 어디 있느냐,
교회가 부흥이 안 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부흥관에, 지금 우리가 끌려 다니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양적인 성장은 교회부흥에 있어서 필수요건입니다.
한사람이 늘어도 교회가 조금씩, 조금씩 자라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에요.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안 되는 상황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달리 많은 기도하고 많은 땀 흘리면서 양떼를 돌보고,
하나님 말씀 앞에 앉아서 참 능력 있는 설교를 하고 있어서,
진땀을 흘려서 설교준비하고 하지만, 이상하게 안 되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만약에 여러분 여기에 모인 600-700명 정도 되는 우리 목회자들이 목회를 했는데
전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제일 작은 교회가 5천명이고, 전부 1만~10만 명 목회를 만약 한다면,
여러분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깁니까?
그러므로 몇 만 명 모인다 하는 것을, 무슨 목회의 모델이나 되는 것처럼,
성공의 케이스가 되는 것처럼 쳐다보고,
신기루 좇듯 좇아가는 그 자체는, 벌써 잘못된 부흥관에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이, 이 잘못된 부흥관에 중독이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목회가 초라할 수밖에 없죠.
100명을 모아놓고도 사람들이 눈에 안 들어오죠.
◑진정한 소명자 - 한 영혼을 위해 목회하는 사람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진정한 소명자는 부흥 콤플렉스에 희생당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진정한 소명자는 사람 수가 많고 적은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진정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소명 받은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 고백할 수 없다면, 여러분의 소명을 다시 한 번 점검하셔야합니다.
왜 제가 이 말을 하는지 압니까?
성경을보세요. 보면 목회의 생명이나 성공이
수적인 부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단서는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목회라고 할 때는
우리는 서신서에 가서 봐야지, 사도행전을 가지고 자꾸 얘기하면 안 돼요.
사도행전은 선교의 말씀이에요,
사도행전은 교회가 처음 일어날 때 불같이 일어나던 한 어떤 시기를 얘기하는 것이지,
그것은 목회 전체를 얘기하는 성경이 아니에요.
목회는 서신서로 넘어가서 연구해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서신서에 가서 구절, 구절 다 훑어보세요.
목회자의 잘하고 못하는 것을, 교회의 숫자를 가지고
아니면 양적인 성장을 가지고 성경구절이 있습니까?
바울이 그런 언급한 것이 있습니까?
심지어, 재림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잘못된 것을 책망하실 때,
‘왜 지금까지 부흥이 안 되느냐, 숫자가 그 모양이냐?’ 라고 책망하신 성경구절이
한 구절이라도 있는지 살펴보세요. 없어요. 정말 없어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양적인 성장은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두고 기도해야 될 제목입니다만,
그 양적인 성장이 우리의 목회에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것을
가늠하는 잣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명 자냐. 소명 자가 아니냐를 평가하는 기준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합니다.
오스 기니스의 말을 다시 인용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청중이 있느냐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청중이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소명에 귀 기울이면서 한 생을 산 사람들은
다른 모든 청중을 다 밀어낸 다음
단 한분의 청중(예수님) 앞에서 살아남는 인생’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소명에 귀 기울이면서, 하루하루 사는 사람은
한분의 청중,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아남는 인생이라 고했습니다.
그 유일한 청중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나를 불러주신 주님이에요.
그분 앞에서 내가 누구냐를 물으면서
내가 항상 나 자신을 점검하고 채찍질하는 사람이지,
눈앞에 있는 숫자가 얼마냐에 따라, 자기를 점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소명자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만, 숫자의 노예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어딘가 모르게 잘못되어있습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일본을 갈일이 있어서 갔습니다.
훗카이도로 갔는데요.
마침 그곳에 갔을 때, 일본 수사 한분이 자기 별장을 마음대로 쓰도록 빌려주셔서,
거기서 지내고 왔습니다. 그곳에 프라노 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주일이 되었는데, 제가 그 프라노 소망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타무라 목사님께서 제가 거기에 와있다는 것을 알고, 설교를 부탁을 했어요.
일본교회 여러분이 어떤지 잘 아시죠.
저는 지난10년 동안 일본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면서도,
수천 명의 일본 목회자들과 상대를 하면서, 일본교회가 무엇인지 조금 압니다.
일본목회자들이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는가도 조금 압니다.
그리고 일본목회자는 한국목회자들과 달리
순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
너무나 소중한 동력자라는 사실도, 일본 선교 10년 되니까 알게 되는 것을 고백합니다.
프라노에 있는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조그마한 건물이 있어요.
갔더니 목사님이 70조금 넘으신 분인데, 미국 유학까지 다녀오신 분입니다.
예배시간을 기다리는데 강대상도 없어요. 의자로 둘러앉아서 예배를 봅니다.
몇 명이나 올까 궁금해서, 통역하는 선교사 사모하고 기다렸습니다.
목사 부부가 들어와서 앉았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부인 2명이 들어옵니다.
또 조금 있으니까, 한 80대 보이는 미국 부인, 은퇴한 선교사가 앉았습니다.
이리저리 앉았는데, 11명이 되요. 남자가 한 2명 있고요.
그런데 옆에 피아노가 있는데 아무도 피아노 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50대 부인이 왔는데, 자기가 피아노 치겠다고 하며 피아노에 앉았어요.
그래서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빙 둘러앉아서 예배를 보았어요.
그런 분위기가 되니까요. 한분 한분의 얼굴이 얼마나 눈에 크게 들어오는지 몰라요.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에요.
교회 바로 옆에는 50미터도 안 되는 곳에 큰 일본 절간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구 2만5천인 작은 도시지만, 교회라는 것은 딱 두 개있는데
하나는 어디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성당이 하나 있고,
그런데 역사가 꽤 있다고 하는 이 교회에, 기껏 주일예배에 모인 사람이 11명이에요.
저까지 다 포함해서요.
저는 참 감개무량했습니다.
마치 23년전, 제가 처음 개척했을 때
12명이 둘러앉아 첫 예배를 보던 그 당시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소중하게 보면서 느껴지는 제 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너무나 소중하게보이는 거예요.
설교를 한참하고 있는데, 제일 젊은 여자가, 애 둘을 데리고 왔어요.
애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떠들고, 자꾸 엄마에게 매달리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제 설교를 듣더라고요. 듣더니 애 하나 안고 졸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니 11명 앉은 자리에서 조니까, 그 폼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ㅎㅎ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조는 그 모습도 얼마나 소중해 보이는지, 천사 같은 거예요.
너무너무 소중하게 보이고 귀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가 이 몇 명안 되는 성도를 위해서
타무라 목사님이 여기서 20년을 인생을 바치면서 헌신해왔구나,
그리고 나중에 그 옆에 있는 미국선교사 부인은
남편이 여기서 40년 선교하다가, 여기서 몇 년 전에 죽었고
자기는 미국에 갔다가, 오고 싶어서 한번 방문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 진정한 소명자는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내 명성을 사방에 떨치게 하고,
나로 하여금 목회 성공자가 된 것처럼 띄울 수 있는 굉장한 교회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하면.. 그것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 교회의 설교를 마치고 설교비도 없죠. 점심도 안 주더라고요.
목사님께서 감사합니다. 허리가 꺾어지게 인사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나오면서 제 마음이 어찌나 기뻤던지..
보통 설교하러 가면 봉투 주면 받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주고, 여기에 와서 8명의 평신도에게 말씀을 전하고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제 마음에 큰 기쁨이 되는지..
나중에 통역한 선교사 부인이 그랬어요.
‘목사님 저 놀랬어요. 뭐 때문에 놀랬냐 하면,
목사님은 큰 교회 사역하면서 많은 성도 앞에서 설교하다가
이 10명도 안 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면서, 적당히 해치우자 하고 떠나게 될 줄 알았다’
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사람을 어떻게 봤느냐고’
그런데 제가 너무너무 진지하게 설교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감동을 받았다고 해요.
▶여러분 보시기에 저는 큰 교회 담임목사입니다.
4만 명이 넘는 성도들을 지도해야하는 막중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프라노에 있는 교회에 가면서
저 자신이 누군가를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사람/한 영혼에게 미칠 수 있는 소명자의 양심이, 아직도 제게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를 위해서 생명 걸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죽으라면 죽을 수 있다는, 내 양심의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소명자는 숫자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한 생명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진지한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마음이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한국교회를 갱신시키기 위해서는, 누가 참 소명자인가를 가려야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비밀한 소명을 받은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를 짊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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