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을 낮게 잡으면 망한다 P1 고전11;1, 살전1:5~6 출처, 정리
2001.08.22 옥한흠 목사님 교회갱신협의회 설교 P2 보기
◑설교자와 인격
▲오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해서 저는 저 자신의 내면에 감추고 있는 영적인 고민,
그리고 한국 교회 사역자들을 내다보면서
또 신학대에서 훈련받고 있는 많은 후배들을 바라보면서
저 나름대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하나의 불안,
이것을 일단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너무 거룩한 말씀을 날마다 가르쳐야 되고 전해야 되는
참 어떻게 보면 부담스런 위치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질그릇에 이 보배를 담았다고 했는데,
아니 좀 금 그릇에다가 담았으면, 이 금 그릇도 행복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질그릇에 이것을 담았으니, 질그릇은 참 너무 힘든 거예요.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참 기를 펴고 살 수 없는 처지에서
우리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만큼 거룩한 말씀을 가르치고
입에 담고 날마다 이야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우리를 그만큼 믿어주고 존중해주고, 또 모든 면에서 따라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많은 오늘 평신도의 마음속에 있는 설교자에 대한,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게 각인이 되어 있느냐,
열심히 가르치면서 자기는 잘 안 지키는 사람.
남은 거룩하게 훈계할 줄 알면서 자기는 잘 훈계는 못하는 사람.
자 이런 식으로 각인이 되니까, 이제는 막 기도 많이 한 목사다.
그것 가지고 그 인격이 신뢰를 못 받습니다.
늘 성경책 들고 다닌다고 누가 신뢰해주나요. 설교 잘한다고 누가 신뢰해주나요.
이제는 모두가 한 수 깎아 내려서 사역자들을 평가하고 봅니다.
여러분 이 말이 거짓말인지/참말인지, 여러분들에게 가까이 와서
‘존경합니다’ 말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세요.
그들의 내면에 진심이 있는가요?
교회 안에는 불행하게도 은혜 받은 아첨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첨하는 말에 너무 많이 흔들립니다.
그 아첨에 넘어가다 보니, 오늘 우리의 인격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못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우리 사역자에게 있어서 인격이 이만큼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능력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능력 있는 목회자, 능력 있는 설교자,
이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서,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눈이 빛납니다.
그러나 인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별로 관심이 없어요.
교회 부흥에 대한 어떤 방법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구름떼와 같이 모입니다.
그러나 인격에 대한 어떤 것을 강조하면, 다 눈을 감고 졸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큰 병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 합시다.
강단에 세워놓으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감동을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울렸다, 웃겼다, 마음대로 하는 분들이 누구입니까.
대부분이 부흥사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분들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정말 가슴을 칠 일들이 한 두건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능력은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은혜를 끼치는지는 모르겠어요.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의 상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일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격이에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설교를 못해서가 아니에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그들의 인격 문제는, 바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의 인격을 세상 앞에 보여주는 거울이에요.
이런 면에서 너무 너무 심각한데, 오늘 이 심각성을 우리가 오히려 느끼지 못하고
목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일을 위한 오늘의 목회자>라는 이름의 미국 잡지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2천 명을 대상으로 ‘평신도들이 어떤 목회자를 원하는가?’ 라고 하는
설문조사를 제가 잠깐 보았습니다. 제일 앞에 나오는 세 가지가 이것입니다.
1) 첫째는 개인적인 야망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아니하는 헌신적인 봉사.
자기 목회를, 자기 어떤 개인적인 야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오해받을 소지를 가지고 있는 목회자도 없지 않아 있어요.
신자들은 정확하게 읽고 있는 거예요.
벌써 설교하는 말을 들으면, ‘아 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키워드는 야망이구나/ 소명이구나’
다 알아요. 기가 막혀요.
눈치로 보는 데도, 아주 도사들이에요. 정확하게 알아요.
평신도가 원하는 목회자는, 인격적으로 자기 야망을 앞세우는 자가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2) 두 번째가 인격적인 신실성을 원했어요.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에요.
말은 굉장한데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3) 세 번째는, 모범적인 표준이 되어졌으면 좋겠다. 따르고 싶은 표준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 가지를 다 묶어놓고 보면, 한 마디로 인격이라는 말에 다 포함이 됩니다.
이것이 평신도가 원하는 지도자상이에요.
그런데 이 사실을 오늘날 우리가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뭐 지금은 자유주의 신학에 너무 많이 물들어서, 우리가 많이 주목을 하지 않습니다만,
예일대 신학교. 미국에서 신학으로 알아주는 유명한 신학교죠.
그 신학교는 지난 150년 전부터 매년마다 그 유명한 <설교학 특강>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150년 역사를 가진 설교학 특강 세미나입니다. 굉장한 것입니다.
제가 몇 건을 읽어봤습니다. 뭐 그 깊이가 대단해요.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가장 설교자로써 탁월한 분들만 초청해서
며칠씩 특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책으로 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일 대학교 설교학 특강 시리즈 자료 하면, 누구나 고전으로 생각할 정도입니다.
1876년, 지금으로부터 한 130년 전에,
우리가 잘 아는 필립 브룩스라고 하는 목사님이 특강을 했습니다.
2년을 연속 특강을 했는데, 필립 브룩스는
지난 천 년 사이에 세계가 배출한 10명의 설교자 중에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사람입니다.
이 분이 특강을 할 때, 이런 내용을 이야기 했습니다.
‘사역을 위한 준비는 단순히 어떤 기술을 연마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더욱이 풍부한 지식만을 갖추는 것이어도 안 된다.
사역을 위한 준비는 유능한 말씀 증거자로서 역량과 자질을 갖출 때까지
인격을 연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일 대학교 설교학 특강 시리즈에 기본적인 주제는 “인격”이라고 합니다.
100년 동안 이어진 주제가 인격이에요.
그만큼 사역자에게 중요한 것은 인격이라는 말입니다.
◑소명과 갈등
▲저는 목사로서 부름받은 것을 항상 감격하는 사람입니다.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하필이면 왜 저입니까.
저보다 더 훌륭한 평신도들 우리 교회 안에도 수 백, 수 천 명이 되는데.
왜 저를 불렀습니까.’ 라고 하는 부담과 동시에 감격이 있어요.
며칠 전에도 우리 교회 장로님들 가운데 몇 분이 선교사로 떠납니다.
뭐 연세가 다 50대 중반이 넘었는데, 이제 남은 인생을 선교지에 가서 일하고 싶다.
그래서 지난 일 년 동안 선교 전문 기관에 가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분은 블라디보스톡 대학 한국어 교수로, 또 한 분은 정보통신 교수로,
또 한 분은 미국 풀러 신학교에 가서 3년 공부 하고 멕시코로 선교사로 떠나려고,
다 한국에서 일급 두뇌들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이제 떠나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특별히 함께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그런 말을 했어요.
제가 그들과 함께, 적어도 15년 이상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저 밑에서 제자훈련 받고, 사역 훈련 받고, 다 나중에 장로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신 분들입니다.
학적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탁월한 분들입니다.
지금 직장에서 나와 은퇴한 돈으로만 해도, 평생 편안히 살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어려운 곳을 찾아갑니다.
학교에서 방 하나 주는데, 주방도 없는데, 옛날 소련에서 지은 것이니까요,
그냥 자고 일어나고 하는, 그런데 ‘목사님도 거기 가서 연단 좀 받으셔야지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 제가 한 가지 교회 사역을 하면서
왜 하나님은 당신 같은 사람들을 목사로 부르지 않고
나 같은 사람을 목사로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당신들이야말로 인격적으로나 헌신 면에서, 목사 기 죽이기 좋은 사람들인데
왜 당신들을 부르지 않고, 나 같은 사람을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아 목사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느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진실한 말이에요.
저보다 목사 되기에 훨씬 타당한, 훨씬 적합한 평신도들이 너무 많은데
하나님이 그들은 부르지 않고, 이 허물투성이인 나 같은 것을 불러서
하나님의 종으로 세웠다는 점에 대해서, 항상 불가사의 수수께끼에요.
그래서 감사하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불안하기도 하고, 기뻐하다가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이런 감정기복이 일어나는 것을 제가 자주 봅니다.
그런데 솔직한 심정으로, 저는 저 자신을 미워할 때가 더 많습니다.
더욱이 저는 제자훈련을 항상 해야 한다고 깃발 들고 외치는 위치입니다.
그래서 더 이런 감정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저 개인에 대한 혐오증이 자주 저를 괴롭게 만듭니다. 왜요?
예수의 제자 되자고 외치는 것만큼, 내가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제 양심에 항상 직면하거든요.
그리고 남을 가르치는 것만큼 나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무뎌져서.. 양심에 가책도 없는.. 그런 내 자신을 발견하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또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떨 때는 혐오감이 생겨요.
더욱이 여러분, 제자훈련이 무엇입니까. 작은 예수 되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온전한 자가 되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평신도를 온전한 데에 세우자. 예수 닮아가는 작은 예수를 만들자.
이런 포커스가 항상 제자훈련에서 강조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내가 어느 정도 인격적으로 주님을 닮았다..는 모습이 보여야지요.
내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인정하고, 가족이 인정하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인정할 수 있는 어느 수준을 가고 있으면서
이런 소리를 하면 좋겠는데
지금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도록, 저 나름대로 노력은 했습니다만
여전히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저의 모습이
어떤 때에는 스스로 혐오감을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뭐 저의 솔직한 고백이에요.
◑제자훈련 사역자로서의 고민
▲제자훈련에 대해서, 처음에 제가 마음을 뜨겁게 가졌던 이유는 따로 있어요.
예수님이 제자를 만들라고 했으니까, 그 명령에 복종해서 목회해야 한다!
그 소명감에서 시작했어요.
그리고 평신도를 깨우면, 하나님의 교회가 놀라운 능력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이 일에 열을 올렸어요.
그런데 이런 제자훈련을 뭐 20년, 30년이 넘도록 하다보니까
이제는 점점 관심이 어디로 쏠리느냐 하면 저 자신에게 쏠리는 거예요.
도대체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수준의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그 인격을 너는 몇 퍼센트 정도나 너의 삶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느냐.
계속 저 자신에게로 이 포커스가 집중되는 것을 제가 지금 계속 느껴요.
그러니까 겁도 나고, 불안하고 답답하고 그래서
‘내가 어쩌다가 이 팔자가 되었나. (왜 이런 어려운 일에 뛰어들었나..)’ 하는 생각도 해요.
아예 할 수 있으면 ‘제자훈련’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대신에 은혜스러운 설교, 은혜스러운 교육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가장 힘든 주제를 가지고, 제가 설교 할 때가 많고 강의를 해야 될 때가 많다는
이 사실 때문에 저는 항상 부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고백이에요.
▲그러나 이런 고민이, 저는 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볼 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에요. 질그릇은 고민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민 없는 질그릇이라면, 질그릇이 아니에요.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인격 문제를 항상 신중하게 다루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관심은 이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했을까?’
바울이라고 뭐 완전했나요? 바울이라고 그 인격에 흠이 없었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서신서를 읽으면서, 바울에게서 조금씩 스며 나오고, 냄새가 풍기는 그의 약점들을
우리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인격을 놓고 어떻게 해결했을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 영혼이 찌들어지지 아니하며
그 영성이 위축되지 아니하며, 그 마음에 기쁨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긍지를 가지면서 평생을 살았을까,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저에게 관심사였어요.
◑사도바울에게서 해답을 발견하다
▲그런데 오늘 읽은 이 본문이 정말로 저에게 주는 굉장한 해답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설교의 주제
나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기 내면에 있는 인각적인 고민, 질그릇으로서의 약점,
인격적으로서의 불완전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에게 자기 눈을 평생 고정시켜놓고
오직 그 분을 닮은데 정신을 집중하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받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잖아요.
어떤 중은 절간에 앉아서 그 앞에 있는 큰 바위를 40년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바위만 응시하면서 살다보니, 나중에는 그 중의 얼굴이 바위처럼 변하더라.. 그러더라고요.
여러분, 닮는다는 것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참으로 내가 예수님을 닮는다, 본받는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시사철 24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영의 눈이 따로 있어서
마치 태양계 행성이 항상 태양을 바라보면서 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그(바울)의 마음의 내면에 눈이 있었어요.
그 분에 대해서 눈을 떼지 않아요. 항상 그분만을 바라보아요.
그리고 그 분을 닮으려고 전력투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바울이 이런 말까지 했잖아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내가 아니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상한 말을 할 정도로
그는 주님을 완전히 자기의 눈에 가득 차도록 놓고 한 평생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비결이었어요. 자기의 인격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비결이었어요.
자기 내면에 들어오는 모든 모순과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었어요.
주님만을 바라보았어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이 없이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안 되기 때문에
그만큼 '내가 예수님을 본받는 자 되었다'고 소리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 부인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보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본받겠다고 하는
자기의 그 중심의 목표가 많이 달성이 된 것 같아요.
만족스러울 만큼 자기는 예수님을 받는 수준으로 나아간 것 같아요.
무엇을 보고 아느냐. 그 다음 말씀을 보고 알아요.
‘너희는 나를 본 받아라’ 고전11;1b
이 말씀을 자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주님을 닮아 가는데 있어서
자기가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점점 닮아가는 자기를
성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샘플로 내어놓은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보아라. 나처럼 깊은 영안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지 못하는 약점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마.
너희는 나를 보아라. 나를 보고 내가 하는 대로 따라와라.’
그는 자신 있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어요.
▲그의 글들을 보면 고린도전서 4:16절에는 ‘너희는 나를 본 받는자 되라’ 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한 배경이 뭐냐 하면,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바울은 정말 낮은 자리까지 떨어지면서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한 생명을 구원하는데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 성도들에게 보여주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세상의 찌꺼기같은 자리와 같은 곳에 떨어지면서
수모와 수치를 감수하면서 한 영혼을 구원하려고 전력하는 그 모습,
어디에서 배운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날마다 응시하고, 날마다 바라보는 그분을 닮으려고 하다보니까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는 나를 본받아라.’ 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신 분!
얼마나 부러운 사람인지 모릅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1:1절의 배경이 뭡니까.
많은 사람이 유익을 위해서 자기 유익을 포기하는 자기의 인격, 자기의 모습을
교인들에게 내놓은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을 기쁘게 하고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겠다.
이런 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바울의 모습은, 그는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바로 자기가 날마다 본받기를 사모하고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예수님에게서 배운 거예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를 희생해서 썩는 밀알이 되는
주님의 그 삶과 인격을 통해, 자기가 그것을 전수한 거예요.
그리고 교인들을 보고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전1:6절을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 중에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살전1;5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인격을 가지고 너희를 대했는지, 너희가 잘 알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가 우리를 본받으라..
바울이 샘플로 내어놓은 자신의 그 인격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빌립보서 3:17절을 보면, 거기서도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그 배경은 무엇입니까?
온전히 이룬 것처럼, 자만하기 쉬운 자들을 경고하면서 하시는 말씀이었어요.
‘온전히 이루었다는 소리 하지 말아라.
나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지금도 달려간다.
마지막 상을 얻기까지 아직도 얻지 못한 자처럼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향해서 달려간다. 그런 나를 보고, 너희는 본받으라.’ 이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는 완전한 자리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어떤 면에서는 극치에 이른 그런 위대한 지도자도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고
아직도 노상에서 달려가고 있는 자신임을, 그는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영적 세계의 건강은, 앞에 있는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아직도 나는 부족하다는 심정을 가지고 달려가는데 있습니다.
완전하다고 스스로 자족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준에까지 그의 표준에까지 이르기 위해서
일생을 필사적으로 달려가는데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그랬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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