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눅12:49-53 가톨릭 글 스크랩
※내용이 다소 딱딱하지만, 이 본문으로 설교할 때, 성경해석에 참고가 될 자료 같아서, 스크랩 해 둡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12:49-53
▲1. 그 불은, 정화의 불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불은, 어지러운 세상을 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타오르는 불은, 주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걸러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는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주님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가, 곧 불의 세례이지요.
또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이시고 분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은
얼른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고,
주님께서 당신 날개 안에 모으시는 일치는, 세상에서 말하는 일치와 다릅니다.
세상의 평화는 힘의 논리에 따른 것이고,
세상이 말하는 일치는 독재자의 횡포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주님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지 결정하고,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논리를 따라간다면,
우리는 그 즉시 참된 주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와, 모녀와, 고부가, 서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정화의 과정은, 나부터 시작되며, 고통스럽습니다.
이 구절은 십자가상에서 세례를 받기까지,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피하고 싶은 고통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예수님의 고뇌가 엿보입니다.
예수님은 그 과정을 거치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불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안에 하나님 사랑의 불씨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불은 처음에는 뜨겁고 아프고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금이 불에 단련되어야 금으로 완성되듯이,
인간 역시 하나님 사랑의 불씨가 들어와 정화과정을 거쳐야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람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것이 ‘분열’이고 ‘맞섬’이고 ‘갈라짐’입니다. 눅12:52
그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고통을 통해 행복의 소중함을 깨닫고,
갈증을 통해 물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지금 너무도 힘든 정화과정 중에 있다면, 나 자신에게 말해주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정화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토록 힘든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나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훌륭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3. 신앙은.. 반대와 불신을 각오하는 것
오랜 유교 전통을 간직한 경상도 양반 집안의 며느리인 제 어머니가
세례 받으신 지 30년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습니다.
누나가 수녀원에 가겠다는 결심을 밝히자
“딸이 그 길을 가는데 내가 어떻게 더 이상 교회 밖에 머물 수 있겠느냐.”는 말씀과 함께.
지극히 현실적이고 비종교적이셨던 아버지가
스스로 입교를 결심하신 것은, 지금도 나에게 놀랍게 느껴집니다.
명절날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정치와 종교 얘기는 피하라고들 합니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언제부터인가 종교,
특히 기독교는 또 하나의 분열 요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신앙을 가지면 당연히 불신자와 반목하게 된다.’는 뜻으로만 알아듣는다면
절반만 이해한 것입니다.
신앙인이 비신앙인과 갈라지고 반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 아니라,
진정 복음을 살고 헌신하는 사람은, 반대와 오해와 불신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두루뭉술, 좋은 게 좋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신앙인,
현실에 그냥 동조하는 타협주의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세상에 사랑의 불을 놓으러 오신 예수님은
그것이 이미 활활 타오르기를 바라시고 그렇게 되기까지
고통 받을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다.
당신이 주시는 평화와 일치는, 십자가와 죽음을 거쳐 완성될 것입니다.
분열과 오해는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인이 때때로 주위에서 겪는 현실입니다.
이웃을 비난하거나 탓하기보다 일치와 화해를 지향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입교하신 어머니는
세례 받고 얼마 뒤에 아버지의 이해 부족으로
한동안 교회에 다니지 못하셨지만 (그것은 그분에게 엄청난 슬픔과 고통이었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우선하고 문중 대소사를 외면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결국 세월이 지나서, 아버지의 동의를 받아, 다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신앙을 가정불화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사랑과 인내로 이겨내셨습니다. 덕분에 나중에 태어난 나는
신앙이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4. 십자가를 통과해야, 불이 붙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으며,
평화보다는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의 반대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불을 질러야 하며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평화보다는 분열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가장 가까운 가족의 반대까지도 극복해야 하는
자기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행복을 원합니다.
꿈에도 그리는 그 영원한 행복이란 바로 부활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의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죽음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부활의 생명의 씨앗을 받습니다.
그 생명이 만개하기 위해서는,
자기 이기심에 대해서 죽고,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삶은 한마디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입니다.
자기중심적 이기심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삶이기에
매일 겪는 죽음과 부활의 체험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부활의 생명 완성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통과하도록 마련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하고 공포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요?
죽음의 힘 앞에서 인간적인 모든 것은 무너집니다.
그제야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정신을 차립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제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믿기 시작하며
주님은 죽음 안에서 사랑의 폭발을 일으키시어
우리의 모든 죄와 잘못을 정화하시고, 부활을 완성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요! 이 모든 것은 자비로우신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5. 불 지르시는 주님, 불 꺼진 나
저의 집은 제가 중학교 때까지 아궁이에 연탄을 피워 방을 데웠습니다.
뜨끈한 아랫목은 참으로 좋았지만, 자다 일어나 불구멍을 막아야 했고,
연탄을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번거로움은
연탄이 저의 가족에게 주는 따뜻함과 훈훈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연탄재 발로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예수님께서 무슨 불을, 어디에 지르실까 묵상해봅니다.
왜 불을 지르실까요?
지금 제 안에 있는 “열정”에 대한 물음이라고 묵상해봅니다.
제가 가졌던 첫 마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제 안에 있는 열정이 뜨거운지 식었는지
돌아볼 수 있도록 말씀을 주십니다.
나의 들숨과 날숨으로 드나드시는 성령님께, 이 시간 청해봅니다.
‘나의 들숨으로 들어오셔서
저의 열정을 다시 불태워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날숨으로
좋지 않은 모든 것들을 빼내어주십시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첫 마음을 떠올려봅니다.
순수하고, 뜨거웠던 첫 발걸음을 떠올려봅니다.
차라리 연탄이라도 좋으니
다시 불붙는 심령이 되고 싶습니다.
▲6. 불은.. 결국은 주위로 불 붙입니다.
수도사(수녀) 소명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준비하던 시절,
가족의 반대에 부딪힌 것은 당연한 과정이었습니다.
언니와 나만 성당을 다니던 때였습니다.
온 가족은, 수녀원에 자원하려는 나를 회유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방법을 총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반대는, 가장 크고 강력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다니던 직장으로 찾아온 둘째 오빠는
“네가 나를 설득하면 어머니는, 내가 설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나를 꼬마라고 불렀던 둘째 오빠는
나에게 설득당하지 않을 마음 자세가 확고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너 하나만 마음을 제대로 잡으면, 우리 가족이 모두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뜻을 굽히지 않는 나 때문에, 어머니는 결국 앓아누우시고 말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한동안, 제 때문에, 웃음을 잃었습니다.
내 마음에 타오르는 불길이, 가족에겐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누구의 반대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내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은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언니의 반대였습니다.
식구들 중 유일하게 가톨릭 신앙을 가졌던 언니는, 나에게
“네가 수녀원에 가면, 그날로 나는 냉담(신앙생활을 쉼)할 거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웃에게 전도하기도 힘든 마당에, 신자인 언니마저 냉담자로 만들면서
내가 가고자 하는 이 길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가족의 마음에 이렇게 큰 고통을 안겨주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이 꼭 이 길뿐이란 말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처럼 심각하게 고민하며 지냈던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내가 죽고 나서 가는 것은 반대하지 않겠다.”라고 하시던
연로하신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에
‘그래, 결혼을 할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는
제가 수녀원에 입회한 후, 그 어려운 기도문을 하나하나 외우며
세례를 받으셨고,
냉담하겠다던 언니는, 구역장에 자모회장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내 마음에 타올랐던 불길이, 가족한테도 불길이 되어 번져갔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