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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지평 P1 룻4:13~22 2003.04.13.설교스크랩
◑나는 생명용품, 장례용품?
▶저는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떠오르는 단상들이 있습니다.
장례용품에 대한 단상들입니다.
죽은 자의 시신은 수의를 입힙니다.
수의는 삼베에서 명주를 거쳐 비단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천차만별입니다.
제일 비싼 수의는 그 가격이, 제일 싼 수의의 수십 배, 심한 경우 1백 배에 이르기도 합니다.
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동나무, 홍송, 향나무로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관도
그 형태나 가격이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장례용품은 그 특성이 오직 죽은 자를 위해서 제작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말을 바꾸어서 표현하면 아무리 비싼 장례 용품이라 할지라도
장례용품은 단지 썩어지기 위해서 제작됩니다.
같은 산에 같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어떤 나무들은 건축 재료로 쓰입니다.
어떤 나무들은 가구로 쓰여집니다.
그런데 장례 용품으로 만들어질 관은, 오직 썩기 위해 존재합니다.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되지만, 오직 썩어지기 위해서
오직 죽은 자를 위해서 제작되는 장례용품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생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연인, 모든 인간은 그 인생이 일회적이라는 의미에서, 모두 장례용품과 동일합니다.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더불어 사는 사람을 살려내는 사람도 있고,
일평생을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서
긴 안목에서 본다면, 오직 공동묘지를 향해서
자기 평생을 전력으로 질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의 인생이 사람을 살려내는 생명용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일구는 것이라면
후자의 인생이야말로 자기 인생을 장례용품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출세를 하고,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남보다 1백배 비싼 ‘수의’, 1백배 비싼 ‘관’으로.. 으스댄다 하더라도
그래도 ‘관’이요, ‘수의’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비싼 ‘관’이나, ‘수의’라 하더라도,
남이 한 번 썼던 것을, 다시 재활용해서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례용품의 재활용품은.. 그저 줘도, 안 가집니다.
예수 밖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인생도, 그와 같다는 것이지요.
성공해봤자.. ‘장례용품’ 중에 고가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첫째, 한 인간이 자기 인생을 평생생명 용품으로 일구어 갈 것인가,
결국은 장례용품으로 일구어 갈 것인가는 철저하게 결정권이 개인에게 있습니다.
결정권을 그 당사자가 지니고 있기에
자기 인생을 스스로 장례용품으로 일구어 가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없고
그 인생보다 더 추한 인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3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저는 목사입니다.
가령 이를테면 예를 들어 제가 몇 분과 성경 공부를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목사인 제 이름을 걸고 저와 함께 성경 공부하시는 분 가운데서
단 한 분도, 그 인생이 실족하는 분이 없도록, 제 열과 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재철 목사와 성경 공부하다가, 내 인생 버렸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용납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을 때,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 믿다가 장례용품 되었다..’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도록.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의의 길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세월이 가면 우리의 육체는 반드시 후패합니다. 반드시 노쇠합니다.
그러나 내 속에 진리에 기인한 생명이 차 있을 때
내 육체가 아무리 쇠잔해진다 할지라도
내 육체는 날로 새롭게 ‘생명 용품’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의 체험적 고백이었습니다.
▶몇 해 전에 이름만 대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여인이
단 하루 차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여인은 영국 찰스 황태자의 부인이었던 다이애나 비였습니다.
또 한 여인은 인도 캘커타에서 빈민들과 한 평생 살았던 테레사 수녀였습니다.
다이애나 비는 30대의 젊은이였습니다. 부귀영화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몸에 걸친 모든 것들은, 세상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최정상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장례 용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같이 썩었습니다.
그 젊은 여인에 비하면, 마더 테레사는 노파였습니다. 80세 노파였습니다.
재산이라고는 하루마다 번갈아 빨아 입는 사리 옷, 그것도 두 벌밖에 없었습니다.
온 얼굴, 손등에 깊이 주름이 패어 있었습니다.
미모라고는 어디라도 찾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 노인이야말로 후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넘치는 생명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생명용품’으로 살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 외에 어머니를 떠난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길 원합니다.’
룻이, 이방인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생각할 때, 그 연로한 여인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여인이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서 남의 나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 시어머니가 ‘그래, 너 그런 결심으로 나를 따라왔으면
죽을 때까지 내 수발이나 들다가 세상 떠나거라’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어머니는 그 젊은 며느리의 중심을 아름답게 보고
자기가 앞장서서, 보아스라는 사람에게 룻이 개가를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룻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를 잉태께 하심으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바로 이 구절만 보면, 룻이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신앙을 위하여 시어머니를 좇아갔더니
하나님께서 새로운 가정을 주시고, 아들까지 주셨구나, 해피 엔딩이구나.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룻이 나온 성경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16~1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룻은, 자기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시어머니가
아이 키우는 기쁨을 누리시게끔 하기 위하여
시어머니 나오미로 하여금, 아이를 키우게 했습니다.
바로 룻이 낳은 그 아이의 이름이 오벳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이름이 오벳이었다라고 성경은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태어난 것은 오벳 한명 밖에 없는데
성경은,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한 오벳의 아들 이새, 손자 다윗의 이름까지 거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누굽니까.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성경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룻 한 여인이. 하나님에 대한 말씀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생명용품으로 일구었을 때
그 조그마한 여인의 삶을 통해서
지금 미래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이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핏덩이밖에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핏덩이를 통해서, 새롭게 될 역사의 지평을
우리에게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메시지인지 성경은 다시 반복합니다.
룻4:18~22,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다시 바로 그 오벳을 통해서 이새와 다윗이 태어났음을
이스라엘의 역사의 지평이 새로워졌음을, 한번 더 강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미래는 기다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미래는 창조의 대상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삶을 어떤 용품으로 일구느냐에 따라서
미래는 창조됩니다.
나의 삶은 절대로 내 개인과 내 시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미래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소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소망을 느낀다.. 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보잘것 없다 할지라도
여러분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나는 정말 보잘 것 없어.’
여러분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과부되고 늙은 시어머니 따라 국적까지 바꾼
룻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생명 용품이 될 때
미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할 수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것은 반대로
내가 내 인생을 나의 욕망 때문에 썩어질 장례 용품으로 만든다면
나로 인해서 미래 역사의 한 부분은 반드시 허물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번 밖에 없는 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떻게 내 인생의 진리 안에서 생명 용품으로 일굼으로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일구는 하나님의 이 시대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요.
우리는 나오미와 룻의 삶을 통해서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룻보다도 먼저 내가 생명용품이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오미, 오르바, 룻. 룻기에 등장하는 이 세 여인의 특징은 공통점은
처절하게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
남편이 죽었죠. 두 아들들이 죽었습니다.
여러분 죽는 사람은 오히려 편하죠. 고통은 산 사람의 몫입니다.
남편 죽고 두 아들이 죽어서, 슬픔을 가슴에 묻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처절하게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오르바,
시아버지 돌아가셨죠. 남편 죽었죠. 시동생 죽었습니다. 처절한 경험입니다.
룻,
시아버지 돌아가셨죠, 시숙 돌아가셨죠, 남편 죽었습니다.
세 여인 모두, 죽음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죽음은 바로 나의 것이라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알기 때문에, 도리어 쾌락주의자, 염세주의자, 세속주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르바는 죽음을 처절하게 경험하고나서도
어떤 연유인지 세상을 쫓아 갔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와 룻은 죽음을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죽음 이후를 책임져주실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의탁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 접촉점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알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결국 나의 욕망의 도구로써
하나님을 부리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죽음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 다는 거에요. 반드시 죽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은 크게 직삼각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꼭지점마다 아주 대표적인 무덤이 있습니다.
오른쪽 꼭지점에는 이집트가 있죠. 이집트에는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2.5톤짜리 석회암 230만개를 정교하게 쌓아올렸습니다.
밑변이 230m, 높이가 144.6m입니다. 인간이 만든 무덤 중에 가장 거대한 무덤입니다.
그 앞에 서면, 압도당한다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아프리카 왼쪽 꼭지점에는 모로코가 있습니다.
모로코 수도 라바트에 가면, 모하메드 5세의 영묘가 있습니다.
2년 전에 타계한 핫산 2세가, 자기 부왕을 위해서 만든 묘입니다.
묘라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묘가 아니죠. 멋진 궁과 같은 묘입니다.
들어가면 2층 발코니에서 속을 볼 수 있습니다. 1층 바닥에 관이 있죠.
핫산 2세가 죽은 뒤에, 바로 그 묘에 들어갔습니다.
그 발코니에 서서 그 영묘를 쭉 둘러보면,
그 묘실 내부가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되어있는지
만약 바닥에 관만 보이지 않으면, 무덤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치 멋진 왕궁의 왕비의 내실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하메드 5세의 영묘를 ‘아프리카의 타지마할’이라고 합니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죠.
아프리카 직삼각형 제일 아래쪽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있습니다.
그 남아공화국에 흑인 빈민촌 속에, 흑인 빈민들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저는 어느 나라를 가던지, 처음 가보는 나라나 도시를 가면
꼭 그 도시의 공동묘지를 찾아가봅니다. 공동묘지에는 교훈이 많거든요.
저는 전 세계 어디에 가서도,
남아공화국 흑인 빈민촌 공동묘지처럼, 초라한 묘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묘지라고 부르기가 민망했습니다. 그곳은 쓰레기장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피라미드,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 가장 아름다운 모하메드 5세의 영묘.
가장 지저분한 쓰레기장 같은 흑인 빈민촌 공동묘지.
그 형태는 완벽하게 다릅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뭡니까.
죽음이라는 의미에서 동일합니다.
무엇을 시사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거대했던 자? 가장 거대함을 누린 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 세상에서 제일 미모를 지니고 있는 자?
세상에서 제일 비천한 천민? .. 모두 동일하게 죽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죽고, 저도 죽습니다.
▶우리 오늘 하루 살았죠? 그 말의 의미가 뭡니까.
오늘 하루 살았다는 것은, 하루를 죽은 것입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30세면, 30년 죽은 겁니다.
저는 우리 나이로 55살입니다. 55년 죽은 겁니다. (2003년 설교)
산다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알지 못하고, 매일매일 자기의 욕구를 따라서 산다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장례용품으로서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알고 나면 오늘 하루 죽었다는 것은, 오늘 하루 산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아는 자만이 죽음 이후를 책임져주실
내 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내가 그분을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삶을 그분에게 의탁해드리기 위해서,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의 복음을, 단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그림이 될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구원의 십자가가
이스라엘 많은 동네 많은 장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골고다'라는 이름의 장소에 세워졌습니다.
골고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굴골토’를 헬라어로 음역한 말인데.
굴골토는 해골이라는 말입니다. 해골이라는 이름의 지명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하나 그려봅시다.
해골바가지가 있습니다. 그 해골 정수리에 십자가가 세워져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타고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한 방울 한 방울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해골처럼 죽었던 인간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정말 복음을 이보다 더 좋게 표현할 수 있는 한 컷의 그림은 없죠.
그럼 그 그림에 의거해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진정한 구세주로 인격적으로 영접하겠습니까.
누가 그 분을 이용하려 함이 아니라,
그 분에게 내 삶을 의탁하기 위해서 그 분을 찾겠습니까.
오직 한 사람입니다.
내가 해골임을 아는 자입니다.
내가 오늘 살았다라고 생각하는 자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산 것 같으나 결국 내가 해골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때
‘주여 제게로 오소서’ 그분을 모시게 됩니다.
바로 나는 그 분의 생명 속에서 ‘생명 용품’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연세가 몇 세이던지 상관 없이, 여기에 젊은이들도 계십니다.
한 80년 잡을까요. 80년 후에 누가 살아있겠습니까.
80년 후에 다 우리가 뭐죠? 해골입니다.
80년 후에 우리는 땅 속에서 해골이 되어 있습니다.
2년 전에 캐나다 토론토 어떤 신문사에서, 직업 에이전트가 광고를 게재했는데
의사, 사무원, 이런 사람들을 쭉 세워놓고,
‘우리는 당신들의 직업을 죽을 때까지 보장합니다.’
이런 문구로 사진을 게재했는데. x-ray로 찍은 해골이에요.
옷은 다 입고 있는데, 속이 다 해골이에요.
그 사람들은 해골이 될때까지 직업을 보전하겠다고 사진을 게재했지만
대단히 신앙적인 그림이죠.
우리는 이렇게 서 있지만, 우리는 내일의 해골입니다.
그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을 생명용품으로 일구는 자가 됩니다.
나오미의 첫번째 자부 오르바는 죽음을 알긴 알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좋은대로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공동묘지의 해골로 사라졌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추적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장례 용품’이 된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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