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연도 알 수 없음

하용조 목사님 목회 회고담

LNCK 2015. 7. 26. 10:07

◈하용조 목사님 목회 회고담                       출처

 



 

반갑습니다. ‘목사가 목사에게라는 주제로 얘기를 하려고 생각하니까

제가 어떻게 목사가 됐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시작일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 믿는 전형적인 크리스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에 의해 1.4 후퇴 때 이북에서 피난 나온 가정입니다.

다섯 살 때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전쟁 중에 남한으로 내려왔죠.

 

제 고향은 평안남도 진남포입니다. 어머님 아버님이 이북에서 예수를 잘 믿는 그런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정이 가지고 있었던 재산이란, 성경 하나 뿐이에요.

아무것도 없고, 성경 하나 들고, 보따리 들고 피난 와서

피난민 생활부터 시작한 것이, 저의 어렸을 때 기억 전부입니다.

 

그래서 전쟁 중이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의지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인천을 거쳐 전라남도 목포에서, 선교사님 집 처마 밑에서 살았습니다.

 

먹을 게 없어서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를 하고, 아버님은 막노동을 하고

저랑 형님도 그랬고. 다 피난 살 땐 그랬죠. 구호물자 배급 받아서 살고.

그렇지만 그 어렸을 때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부모님이 철저히 신앙생활을 하셨다는 거죠.

 

아침 저녁 두 번 예배 드렸고, 성경 중심으로 가정 예배를 꼭 드렸고,

제가 대학 갈 때까지 그런 철저한 신앙생활하는 부모님 밑에서 신앙 훈련 받았던 것이

오늘 저를 만든, 굉장히 눈에 안 보이는, 중요한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님은 하루에 다섯 시간씩 기도하는 분이었어요. 매일. 기도가 직업이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지금 목사 되어서 기도해도, 우리 아버지를 못 따라갑니다.

 

저희 어머니는 산동네 어촌에서, 라면 들고, 사탕 들고,

산동네 다니면서 귀신 쫓고 전도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기도하셨고 특별히 가난한 달동네를 다니면서 평생 전도하셨던 분이고,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그 말년에, 더욱 더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셨어요.

 

그래서 목포에서 서울까지 기차타고 저를 만나러 오시면

기차 안에서 서울 올 때까지, 밥만 먹고, 화장실 가고, 기도만 하세요. 유명한 얘깁니다.

 

그리고 저희 부모님은 교회를 참 사랑하셔서

서울에 올라오실 땐, 꼭 교회에 가서 기도하시고 목포로 떠나시고,

서울에서 목포로 돌아오면, 집으로 곧장 안 가고, 교회 가서 기도하고 집으로 가셨어요.

 

이런 것들이 제가 무의식적으로 제 신앙을 만드는데

굉장히 큰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신앙적 배경을 가졌지만, 제가 예수 만난 경험은 없어요.

그냥 교회를 다녔죠. 유년주일학교부터 열심히 교회 부흥회, 새벽기도 다 했지만

개인적 예수체험 성령체험은 전혀 없었던 그런 삶을 살다가, 제가 재수를 했습니다.

 

재수를 두 번이나 했는데, 사실 저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춘원 이광수 이런 분들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농촌 운동을 하고 싶었고

의사가 되고 싶어서, 시골로 가는 그런 환상을 가지고 살았는데

결국 그런 꿈이 깨지고, 그때 하나님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제가 만난 분이 남서울교회 홍정길 목사님이고, 그리고 CCC였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을 만나게 됐고, 그 후 7년동안 학생운동에 헌신하며 예수를 알게 됐고

복음을 체험하고,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저는 복음 전도자로 살기로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그때 제가 대학생 때, 예수에 아주 미쳐있을 때

성령체험하고, 예수에 미치고, 정말 그렇게 살 때, 제가 한번 꺾였습니다.

 

왜냐면 폐병에 걸려서 학교를 휴학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병 이력의 시작입니다.

그 후로 저는 안 걸려본 병이 없습니다. 폐병도 걸려보고, 온갖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병이라 그러면 제가 아주 거의 모든 병을 다 섭렵했다시피 그런 병치레를 한 목사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약한데서 주님이 강해진 것처럼

나의 목회는 병 가운데 태어났다. 절망 가운데 태어났다. 죽음 가운데 태어났다.’

그렇게 얘기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제가 간암 수술을 7년 전에 하고, 재발을 다섯 번이나 하고

다섯 번 수술하고. 최근에는 당뇨와 고혈압도 30년 정도.. 아주 병력이 많습니다.

 

지금도 계속 인슐린을 맞고, 투석도 하고,

일주일에 세 번, 한 번에 네 시간씩. 이렇게 투석을 합니다.

그저께도 투석을 하고 왔습니다. 내일도 투석을 합니다.

 

그렇게 육체적 질병에, 하루도 편한 날 없이 살아왔어요.

제가 늘 이런 기도를 해요. ‘하나님 내가 하루를 안 아프고 살 수는 없습니까.’

 

제 기도 제목 중 하나는 하룻밤 안 아프고 살게 해주세요.’

그 정도로 저는 한 주먹씩 매일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투석하며 살고 있습니다.

 

대학부터 시작한 투병이었죠. 그러나 그렇게 병이 깊고 오래 되고 심각했지만

한 번도 내 안에 있는 주님이 주시는 이 열정과 꿈과 비전이 흐트러진 적 없습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이 비전을 포기한 적도 없고, 쉬어본 적도 없고

속도를 늦춘 적도 없고, 지금까지 여기까지 하나님께선 이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즘 느끼는 것은, 병은 병대로 따로 놀고, 내가 하나님 일하는 것은 따로 놉니다.

아무 상관없어요. 그런 질병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아요.

 

제가 가진 은사 중 하나는, 저는 과거를 기억 잘 안합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것도 잘 잊어버려요.

그래서 제가 목회를 건강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겁니다.

 

어쨌든 내게 큰 축복은 CCC를 만난 것이었고, 김준곤 목사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신앙이란 것은 사람을 만남으로 시작되더라고요.

 

저는 제 생애 한 일곱, 여덟 분의 멘토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김준곤 목사님을 통해서 비전을 배웠습니다.

대한민국 목사님 중 김준곤 목사님만큼, 큰 꿈을 가진 분을 제가 못 봤습니다.

1960년대부터 만났는데요.

 

그리고 만난 분이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이었어요.

가나안 농군학교 44기 출신인데, 그 분을 통해서 땅을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흠뻑 빠졌어요.

 

그래서 농촌으로 가고 싶었던 열정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것은 아마 전적으로 김용기 장로님 돌아가실 때까지

그 분이 어느 날 고려 병원에서 저를 부르셨어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리고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랑을 많이 주셨는데, 그것이 오늘날 저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에게 굉장히 큰 영향력을 주신 분이 주선애 교수님이세요.

장신대 대학원장 지내셨고, 결혼하기 전에 제가 그 분을 멘토로 삼았는데

지금까지도 주일날 꼭 저희 교회 오셔서 저를 뒷바라지 해주시고. 조용히. 멀리서.

보일 듯 안 보일 듯 항상 제 뒤에서, 저의 삶을 지켜주시는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주선애 권사님이 제가 신학교 들어갔을 때 저를 인도해주셨던 곳이 망우리 빈민촌이었어요.

지금 쓰레기장 이전에, 이상량 전도사님이 거기서 순교했는데, 같이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청계천 활빈교회 김진홍 목사님도 초창기에 같이 했었고.

그것이 다 주선애 권사님의 영향력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나의 설교와 목회의 배경이 여기 있는 거예요.

 

김준곤 목사님의 민족 복음화, ‘그리스도 계절이 오게 하자그런 비전이 한 모퉁이에 있고,

김용기 장로님의 땅 사랑 하늘사랑 조국사랑또 그렇게 검소하게 사는 그런 정신이 거기에 있었고.

 

또 빈민촌, 가난한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훈련 받고.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분이 이상량 전도사에요.

그 분은 폐수술을 하고, 물병을 들고 그 현장에서 일하다가 죽었는데.. 이런 사람들.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제 설교 속에, 제 삶 속에 있죠.

 

그리고 끊임없이 내 삶에 흐르는 전주곡은 질병이에요.

하나님이 내 병 좀 고쳐주면 뭐가 어때서.. 그렇게 안 고쳐주세요.

그러면서도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집요하게 저를 일 시키세요.

 

이 두 가지 쌍곡선이 내 삶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실적으로 두 가지를 다 받아들여요.

비전을 주셔서 일하시게 하는 것과, 질병의 고난 주신 것, 두 가지를 다 내 몸에 받고 살아요.

 

그러다가 제가 그렇게 성령체험하고, 예수체험하고, 구원체험하고, 복음을 체험하고 나서

제 인생을 목사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하나님께 헌신했을 무렵에

제가 폐벙 걸렸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폐병 걸린 것이 제가 신학하게 된 결정적 계기에요.

 

학교를 쉬고 인천에서 요양할 때 하나님이 제게 찾아오셨습니다.

1시에.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제게 질문했어요.

 

너 나한테 헌신하지 않겠나?’ 저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다음날 어머님이 시골에서 갑자기 찾아왔어요.

오시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제게 너 목사 안 될래?’ 이러시더라고요.

 

어제 하나님이 나한테 그러셨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나봐요.’ 폐병 중에.

그래서 제가 요양원에 있게 한 것은, 하나님이 저를 단독 면회하신 거죠.

제가 여러 가지 일을 다 스톱시키고, 하나님이 저를 만나시는 그런 영적 경험을 하게 된 겁니다.

 

제가 그때 요양원에서 열심히 읽은 책이 파스칼의 <팡세>에요. 아주 정독을 했습니다.

성경처럼 읽었어요. 읽으면서 그때 책을 많이 읽고 성경을 통독하기도 하고.

그런 아주 좋은 영적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CCC에서 자란 걸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CCC는 들어가면서부터 전도 훈련을 시켜요. 교재를 암기하다시피 합니다.

저는 어딜 가나 전도하는 훈련이 되어있어요.

 

저는 목사도 아니고, 전도사도 아니었지만, 대학생 때부터 성경을 가르쳤어요.

창세기는 제 전공이었어요. 그것이 지금 목사가 되서도 굉장히 중요한 자양분입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별로 없어요. 무슨 얘기냐면 거기선 지식을 배웠어요.

영적인 도전은 다 그때 배운 거예요. 물론 신학교에서 헬라어 히브리어 교회사

조직신학 다 했죠. 그러나 진짜 나의 영적인 체험은 그 이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를 가게 됐고, 가자마자 하나님이 저를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갔어요.

거기가 연예인들이에요. 박귀숙씨를 만나게 한 거예요. 구봉서씨도 만나고.

그리고 그들과도 제가 성경 공부를 하게 됐고. 그 순간에 하나님이 연예계에 태풍을 불게 했어요.

여러 가지 사건으로 출연정지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이런 일들이 생기면서

그 분들이 다 나한테 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생긴 게 연예인 교회에요.

 

저는 거기서 상상할 수 없는 걸 배웁니다. 연예인을 통해서,

제가 그들을 전도한 게 아니라 그들이 저에게 스승이었습니다.

대중문화를 배웠죠. 저는 대중문화를 경험한 적 없는 사람인데 그들을 전도하다보니까

연예인들 문화 속에 제가 7년을 빠져 들어간 거예요.

 

연예인들은 밤을 살고 새벽을 못 살아요. 왜냐면 다 밤일을 하니까요.

그러면 밤에 한시 두시에 술 먹고 전화를 해요. 상담하자고.

나는 자야겠는데. 그럼 밤 두시에 막 전화해서

양은 이렇게 괴로워서 잠을 못 자는데, 목자는 어떻게 자냐고 그래요.‘

 

나이트클럽에서 토하고 난리치면 제가 가서 업어오고. 그런 일을 7년을 했어요.

그러면서 인간을 배우게 됐어요.

 

연예인 교회 끝나고 민간 교회를 가니까 너무 심심해요.

목회가 힘들다고 그러는데 전혀 이해가 안 되요. 연예인을 겪어보니까. 한번 혼들 나봐야 해요.

 

저는 연예인들을 겪으면서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영화, 뮤지컬, 공연도 거기서 겪었어요. 거기서 맞춤전도도 배웠어요.

그들은 특수한 사람들입니다. 설교도 보통 설교로 안됩니다. 그들에게 맞는 코드로 해야 합니다.

 

저는 한 번도 경험이 없어서 그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아주 굉장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또 연예인들은 얼마나 질투와 시기 모함이 많은지 몰라요.

옛날 분들 많으시겠지만 구봉서씨가 오면 배삼룡씨가 못 와요. 라이벌 때문에.

MBC하고 TBC 라이벌 관계 때문에, MBC 사람 전도하면 TBC는 포기해야 해요. 저는 그런 거 몰랐어요.

 

이런 게 연예인 교회였어요. 그런 분들 모시고 성경공부 했어요.

제가 연예인들 모시고 성경 공부할 때

그들은 자기들이 스타고 나는 피디로 생각해요. 스탭으로 생각하고.

누가 설교할 때, 물 한 컵 갖다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연예인들 특징이 회의를 할 줄 몰라요. 그런 과정 많이 겪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간이 다 부었겠습니까. 그때 간이 다쳤어요.

결국은 연예인 교회 사임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연예인들을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지금도 연예인만 보면 제 끼가 막 발동됩니다. 체질적으로

 

그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되는 거예요.

설교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해야 됩니다. 교인을 정말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설교가 나오는 거예요. 설교는 하는 게 아니고 되는 거예요.

 

영혼을 사랑하면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왔어요.

윤복희, 남진... 기라성 같은 사람들을 다 하나님이 불러주셨어요.

그분들과 신앙생활 하다가 간을 다쳐서 목회를 그만뒀습니다.

 

저를 주례해주셨던 분이 한경직 목사님이신데, 제가 교회를 떠날 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어요.

그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냥 떠나라고.

 

당신이 미국 있을 때 폐병 걸려서 피를 토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사건 때문에 오늘 내가 영락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있었다고.

하나님이 새 길을 가게 하니 다 잊고 떠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영국에 가게 됐어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열두시간씩 잤어요. 얼마나 피곤했던지.

그렇게 세 달을 잤어요. 그 정도로 지쳐 있었습니다.

 

연예인 교회 통해서 돌이켜보니까, 그 분들이 제 선생님이었어요.

그 분들이 나에게 대중문화를 가르쳐주었고

앞으로 목회를 할 때 참 중요한 문화코드를 7년간 가르쳐준 거예요.

 

음악, 조명. 그 당시에 제가 한 게, 창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뮤지컬도 해보고. 코메디도 해보고. 국악도 하고.

그 당시에는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한 것이었고,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제가 따져보니까 그 당시에 빌 하이벨즈가 미국에서 극장 빌려서 예배 드린게

제가 연예인 목회한 것과 딱 맞더라고요.

그 양반은 거기서 그런 걸 했고, 저는 여기서 연예인들 중심으로 했고.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이화여대 대강당 빌려서 <새롭게 하소서>라는 공연을 했어요.

그 타이틀이 CBS 타이틀로 간 게 그 이름 때문입니다.

 

어쨌든 제가 방송국을 제 집 드나들듯 그리고 공연에도 미쳤어요.

그러면서 성우 되시는, 드라마하시는 분, 연극하시는 분, 뮤지컬하시는 분들

뒷바라지 하고 지도해주고 이러면서, 하나님이

제가 이런 문화적 코드를 잡는 목회를 하도록 7년을 훈련시킨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교회를 처음에 지을 때 극장식 교회로 지은 거예요.

예전에 맨하튼에 가서도 리버사이드 처치에 있는 극장도 다 가서 보고, 그런 작업을 한 거예요.

 

그 당시에 저처럼 교회를, 그렇게 생각하는 목사님이 거의 없었어요.

그때부터 제가 생각한 게 잡지, , 문학사상. 뿌리 깊은 나무.

그러나 기독교의 잡지 문화는 삼류예요. 너무 디자인 수준이 형편 없는 거예요.

 

그때부터 제가 잡지를 만들기 시작하고,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기독교 수준을 올리려고 애를 쓴 거예요.

그래서 처음 <빛과 소금>이 나왔을 때 센세이션을 일으킨 거에요.

 

그리고 제가 영국에 갔는데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존 스토트 목사님.

저는 그 분 만난 게 큰 축복입니다. 그분은 저에게 세계 문화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는 WEC이라는 선교 단체에서 1년간 훈련을 받으면서, 세계 선교라는 현장을 봤습니다.

그리고 OMF라든지 WEC라든지 이런 유수한 세계 선교단체의 거목들을 만났어요.

 

이 분들을 만나면서 제 세계관이 달라지고, 교회 관점이 달라지고.

저는 영국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어요.

전통적인 한국 신학교식 예배만 드리던 제가 첫 예배부터 쇼크를 먹었어요.

 

제가 옥스퍼드에 있는 올데이트 처치에 제가 가서 예배를 드리니까

마이클 그린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 갔더니 드럼이 한 가운데 있어요.

머리 허연 할아버지가 드럼을 쳐요. 어떻게 교회에서 드럼을 치나..

그러니까 그게 한국에서 전통적 교회만 보다가 충격 받은 거예요.

 

거기서 경배와 찬양을 처음 봤어요. 워십송을 부르는 걸 처음 봤습니다.

워십댄스도 하더라고요. 아니 교회에서 저렇게 발가벗고 춤 춰도 되나..

 

존 스토트 목사님이나 이런 교회 가봤더니, 축도를 목사님이 안하고 교인들이 하더라고요.

우리는 전도사도 못하잖아요. 근데 거긴 교인들끼리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을 많이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에 대해서 성만찬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 선교사들 이런 분들을 만나면서

부터 도무지 신학이 뭔가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특별히 독일과 가깝기 때문에,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이 많이 들어와 있지만

한국은 흔들리더라고요, 신학교에서.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교는 눈 하나 깜짝 안 해요.

사람들이 이렇게 학문적으로 자신만만 하구나.. 느낀 거예요.

 

거기서 훈련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존 스토트 라는 분께 목회적인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서 컨템퍼러리 이슈를 배웠습니다.

그게 뭐냐면 낙태 문제, 공해 문제, 환경 문제, 노조 문제, 이런 것들에 관한 거예요.

 

한국 신학교에서는 안 가르쳐준 것들이거든요.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복음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신경/정신병을 다룰 것이며,

노조를 다룰 것이며, 경제와 정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다룰 것인가,

현대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세속화에 대해서..

 

제가 London Institute 에서 공부를 하면서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고, 좋은 학자들을 많이 만나게 해주셨어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런 요소들이 오늘 서울에 와서 온누리교회에서 목회할 때

하나님께서 저를 준비시켰던 과정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만난 사람이 짐 그레이엄이라는 분입니다. 그 사람 침례교회 목사였어요.

제가 훈련받았던 WEC이라는 선교 단체 밑에 골드니 벱티스트 처치라는 곳이 있었는데

영국에서 그런 교회 처음 봤어요. 지붕이 떠나갈 듯 찬송을 해요.

 

교회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가질 못해요. 꽉 차 있어요. 영국에도 그런 교회가 있더라고요.

이 사람이 설교를 하면 50분씩 설교를 해요. 예배 순서가 달라요.

거긴 성가대 이런 거 없어요. 시작하자마자 설교부터 들어가요. 시편 낭독하고 설교 들어가요.

 

설교 끝나면, 청중들이 다 흥분을 해요. 펄쩍펄쩍 뛰어요.

귀신들이 나가고, 설교 도중에 사람들이 넘어지기도 하고..

제가 그런 성령의 역사를 이렇게 보면서, 하용인 선교사님을 끌고 온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경배와 찬양 운동이 시작돼요.

 

아 성령 운동이 이런거구나.’

그리고 성령 운동에 대해서 제게 가르쳐준 게 YWAM이었어요. 영국이었고요.

그래서 복음주의적 성령 운동, 인격적 성령 운동, 선교가 기초된 성령 운동이 어떤 것인가를

거기서 하나님이 제게 경험시켰던 것이죠.

온누리교회는 이런 요소들이 합성된 곳입니다.

 

제가 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제가 어떤 교회를 하면 좋습니까?’

저는 영국에서 이민 교회도 해봤어요. 그렇지만 서울에 돌아올 무렵에

주님 제가 어떤 교회를 하면 좋습니까?’

 

저는 서울에서 하도 혼이 나서, 몇 가지 혼자 생각한 게 있어요.

서울에서 목회 안하겠다.’

첫째. 왜 서울에는 친구들도 많고, 기라성 같은 교회도 있는데

꼭 내가 할 이유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지방에서 목회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둘째. 내가 교회하면 내 손으로 교회 안 짓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교회 짓다가 너무 혼이 나서요.

그런데 그런 생각은 하나님이 아주 기분 나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서울에서 연락 왔어요. 동부이촌동 서빙고에 이만한 땅이 있는데

나보고 목회를 안 하겠냐고 그러더라고요. 나는 다 걸리는 거예요.

서울이고, 내가 또 집 지어야 해서,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1년동안 계속 연락이 왔어요. 하든지/안 하든지 결정하라고.

그래서 기도를 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런데 나를 스스로 설득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기도하다가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교파의 교회도 아니고, 교단의 교회도 아니고, 사도행전적 교회가 2천년 전에 있었다면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런 교회가 존재하지 말라는 법이 있냐?’

 

그런 생각을 하니까 내 마음 속에 어떤 비전이 생기냐면

그렇다. 2천년 전에 사도행전적 같은 교회가 서울에 다시 생길 수 있다면

주님 제가 한 번 헌신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멘 하고, 서울에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시작하려고 보니까, 사람이라는 게 자기 경험 이상으로는 못해요.

자기 생각 이상으로, 자기 배운 것 이상으로는 못해요.

 

그래서 막상 교회를, 제가 연예인 교회 해보고, 영국에서 이민 교회 3년 해보고,

그리고 서울에서 새로운 교회 하려는데, 아무렇게나 못 하겠더라고요.

 

그렇다면 이왕에,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주님이 원하는 교회를,

교파와 교단과 이 세상 조건과 상관없이, 그런 초대교회 같은 교회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때부터 제가 영국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모델을 찾기 시작했어요.

영국에서 교회를 저만큼 다녀본 사람이 없을 거예요. 저는 굉장히 노력했습니다.

 

그 다음에 미국 가서, 미국 교회도 뒤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발견한 모델이 그레이스 커뮤니티 처치에요.

1만 명 모이는 교회인데, 저하고 딱 마음이 맞더라고요.

 

그 교회의 목사님을 서울로 초청도 하고, 교재도 다 모으고, 프로그램을 다 들어보고

짐 그레이엄의 성령운동 하고.

그 다음에 존 스토트의 컨템퍼러리 이슈들하고

이런것들을 다 종합해서 마음의 그림을 그린 게 온누리교회입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21, 제 비전은 딱 하나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교회. 사도행전적 교회.

근데 한 번도 이런 이상적인 교회를 제가 해본 적이 없어요.

저는 대형 교회를 해본 적이 없어요. 매일 매일이 새로워요.

 

저희가 초창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옷이 맞은 적이 없어요.

너무 교회가 21년 동안 이 자리 올 때까지 끊임없이 커졌기 때문에

뭘 만들어놓으면 틀리고. 만들어놓으면 틀리고..

 

지금까지 가졌던 개념을 가지고, 정리를 해 보면, 맞는 게 하나도 없어요.

왜냐면 어떤 교회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온누리교회의 모델이 그럼 어디 있느냐,

영국에서 성령 운동하는 분, 미국에서 말씀운동 하는 분 등

몇몇 교회를 제가 모델로 삼았지만

제가 온누리교회를 만들면서 가진 모델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를 따라가자.’ 열 가지 특색이 있더라고요.

그 열 가지 특색이 온누리교회입니다.

 

저는 교단에 있고, 교파 안에 있고, 그렇지만 그 원칙에 따라가지 않고

저는 사도행전이 제 모토에요. 제 방법이고, 제 목회고, 제 스피릿이고, 제 방향이고, 제 꿈이에요.

저는 그것을 어디가서든지 얘기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얘기합니다.

 

만약 우리가 사도행전적 교회를 재생할 수 있다면

저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교회라고 믿어요.

 

그 예 중에 하나가, 예를 들면, 사도행전적 교회의 열가지 특징 중 아홉번째가 뭐냐면 선교하는 공동체에요.

사도행전 13장부터 안디옥 교회가 나오지 않습니까.

 

사도행전은 전부 28장인데 선교는 13장부터 시작입니다.

사도행전 사건을 전체로 놓고 보면, 반이 선교입니다.

1차 전도, 2차 전도, 3차 전도.

결론은, 모든 교회는 교회가 하는 활동의 반 이상은 선교여야 합니다.

선교에 돈을 투자하고, 선교에 헌신하고, 선교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사도행전 설교를 제일 많이 했는데

사도행전 13장 설교할 때 교인들게 이렇게 얘기했어요.

우리가 사도행전 13장 할 때는 선교사를 파송합시다.’

 

처음에 교회 시작할 때 교회가 제 월급 안 줬어요. 집도 안 줬어요.

그냥 했어요. 여러분 고생한 것만큼 저도 고생 다 했어요.

 

저는 당회하다가 멱살도 잡혀봤어요.

그런 건 목회하다가 누구나 다 겪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목회하시는 분들은, 누구나 그런 과정을 다 겪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제가 13장을 설교할 때, 우리가 이 날은 성경적인 선교사를 파송합시다.

그래서 김우정 선교사님, 한정국 선교사님을 파송하게 됐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성경대로 이루어졌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13장을 성경대로 그대로 적용하자면, 다른 사람을 보내는게 아니라

담임목사가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더라고요.

 

사도행전 13장부터 28장까지가, 1, 2, 3차 선교 여행이에요.

한 교회는, 그 교회의 전부는 선교여야 한다는 게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어떤 교회냐, 성령 공동체, 성령으로 태어났어요.

바람, , 충만, 방언, 출발! 이게 사도행전이에요.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로 보면, 모든 장로님은 성령 세례 받은 분이어야 해요.

성령 세례 안 받은 분이 장로 되면 큰일 나요.

집사님들이 성령 체험 없이 집사 되면 안돼요.

구원 체험은 말할 것도 없고. 성령의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방언하고, 은사가 있고 이런 성령을 아셔야 해요. 교회는 성령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교회가 시작되는 겁니다. 교회는 예수 공동체입니다.

떡을 떼고, 가르치고, 기도하고, 나누는 예수 공동체.

여러분 이런 예수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바로 사도행전이에요.

 

어저께 빌 할이벨즈가 소그룹 얘기를 했습니다만.

그 교회가면 성령의 소문이 날마다 있어야 해요.

성령의 간증이 있어야 하고. 성령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은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 교회가면 예수 공동체를 느껴야 해요. 이게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노회, 총회도 있어야죠.

 

제가 얘기하는 포인트는, 무엇이 됐든지 간에, 어느 교파에 있든지 간에

사도행전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기적 공동체입니다. 날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순 예배에서, 설교에서, 만남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든, 귀머거리가 열리든, 죽은자가 살아나든

이런 초자연적인 역사가 날마다 있는 게 교회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교회가, 날마다 기적이 있길 바랍니다.

날마다 기적이 있고, 예수 사랑이 있고, 예수 공동체가 느껴지고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떡을 떼며 집을 파는 일도 있고

이런 사도행전적 코드.

 

여러분, 사도행전적 교회란 무엇이에요?

고난당하는 교회. 서퍼링 처치. 고난당하는 공동체.

감옥에 들어가고, 얻어맞고, 순교하고.. 이게 사도행전이에요.

 

복음을 전했다가 고난을 당하는 이게 사도행전의 특징이에요.

사도행전의 교회의 특징이 뭐냐. 5장에 들어가면

거룩한 공동체, 순결한 공동체.

이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숫자를 원하지 않고 거룩과 정직과 순결을 원하세요.

순결한 리더십, 거룩한 리더십. 이게 사도행전이에요.

 

사도행전 공동체는, 리더십 공동체입니다.

일곱 집사를 선택한 사건 기억하시죠?

사도와 집사들과의 드림팀. 평신도 리더십을 인정하는 공동체.

목회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고, 평신도들이 날갯짓하는 그런 공동체.

 

평신도들은 스타고, 목사는 코치고.

여러분 농구 게임에서 감독이 나가서 게임하는 거 봤어요?

감독은 감독의 위치에 있어야 하고, 스타들은 스타의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와 목회자가 그런 드림팀을 만들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목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아니에요. 우리는 세상을 잘 몰라요.

여러분이나 나나 하루 종일 살아도, 예수 안 믿는 사람 만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포위당하고 살아요.

하루 종일, 일 년 열두 달 내내 그렇습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세상을 변화시키겠어요?

교인들이에요. 교인들을 훈련시켜서, 그 분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세상에서, 사회에서 그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있는 평신도로 만드는 게 목회자의 역할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말할 때, 좀 부끄러운 말이 있어요.

아무개 목사님의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는 그 목사님이 유명한데, 교인이 유명하단 얘긴 별로 없어요.

아닙니다. 교인이 유명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의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이게 다 사도행전입니다. 스테반, 빌립 이런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궁극적으로 순교하는 교회입니다. 스테반이 순교하잖아요. 7장에.

저희 교회도 생긴지 이십년 만에 여러 사람 죽었어요.

 

지금도 그 분을 생각하면 제 눈에 눈물이 나요.

최근에도 한 선교사가 암으로 죽었어요. 온누리동산에 묻혔죠.

 

복음을 전하다가 선교지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암으로 죽고,

터키에서는 우리 선교사 자녀가 죽고. 중국에서는 선교사 부인이 죽고. 죽는 거예요.

 

목회는 뭐냐,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소풍 아닙니다. 죽으러 가는 거예요.

우리의 문제가 뭐냐. 죽기로 결정 안한 거예요.

 

여러분 죽기로 결정하면, 배고픈 게 뭐가 문제가 되고, 병든게 뭐가 문제고,

수모를 당하는 게 뭐가 문제입니까.

 

힘들다는 게 도대체 뭐예요. 뭐가 힘들어요?

예수님 생각하면 힘든 거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힘들다는 소리 그만하세요.

피곤하다 힘들다 지쳤다.. 그건 우리의 언어가 아닙니다. 당연한 겁니다.

사도행전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겁니다.

 

버림받고 쫓겨나가고, 강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의 사형 선고를 받는 것. 그게 목회죠.

 

그러고도 우리는 자랑할 게 없는 거예요.

그게 목회자의 길이고, 선교사의 길이고,

그거 하려고 영광스럽게 이 길로 오지 않았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불평할 거 없잖아요.

 

뭐 아무튼 간단하게 정리하면, 사도행전적 교회는 이방인의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에는 이방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끼리 살면 교회 아닙니다. 이방인을 품어야 교회입니다. 10.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떠나기 위해 존재하고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게 교회에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적 교회의 특징은 28,

교회는 교회를 낳기 위해 존재한다는 겁니다. 교회를 낳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에요.

우리는 교회를 끊임없이 낳아야 돼요. 이런 것들이 사도행전적 교회에요.

 

이런 요소들이 크건 작건 간에, 그런 요소들이 있는 교회.

그것이 제가 지난 21년간 끊임없이 생각한 교회에요. 지금도 생각하고 있고.

 

실수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계속 실수할 수밖에 없고요.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실수하고 또 일어서고, 또 고치고.

저는 하루에도 열두번을 바꿔요. ‘이게 사도행전적이다, 성경적이다그러면

저는 과거에 어떤 말을 했어도 다 바꿔요. 그 목표를 이뤄야 되고, 꿈을 이뤄야 되니까요.

 

 

타자 J.H.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