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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LNCK 2016. 2. 5. 09:3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3:22~30                      설교녹취, 출처                        

    

    

 

오늘 22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각 성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셨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러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가시는 중에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스톱시키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눅13: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이 구원을 받는가?' 라고 물은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을 사람이 많을지/ 적을지?'를 물었습니다.

 

왜 이런 질문이 나왔을까요?

구원의 문제는 그 당시 굉장한 초미의 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좀 독특했습니다.

 

자신들은 선민, 선택된 민족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 혈통에서 그냥 할례 받고 종교의식에만 참여하면

구원은 그냥 따놓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오직 회개한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전통적인 선민사상과, 예수님이 하신 메시지와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이 사람도 나름대로 고민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 것입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을 통해서, 모든 청중들에게 대답하시는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1. 여기서 좁은 문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여 구원받을 사람이 적으니이까?’ 라고 남의 얘기 하듯이 물어 보았는데

예수님께서 '이 구원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네 문제다' 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엄밀하게 번역하자면 너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개역에 '너는'이 빠져있죠?)


여러분 영적인 문제는 교리적으로 남의 이야기 하듯이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자기의 이야기로 풀어야 합니다. 자기의 간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취지는 이것입니다.

‘네가 지금 남의 구원 문제를 걱정할 때가 아니고, 당장 지금 네 자신이 제대로 구원 받았는지를 확인하라.

단순히 너는 교회 오래 다닌 유대인이라고 해서, 구원이 당연히 너희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안심할 일이 아니다. 네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점검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좁은 문"이라는 말을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좁은 문은 천국의 문, 구원의 문이죠. 그런데 이 좁은 문은 말 그대로 좁은 문입니다.

    사람 몸뚱이 하나 겨우 빠져 나갈만한 작은 문입니다.


▲2. 사람들은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가지면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많이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돈도 많이 가지려고 하고, 부동산도 많이 가지려고 하고

명예와 학벌도 최대한 가지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없는 것도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자신을 과대 포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국 전쟁 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오신 분들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부동산 가지고 온 분이 있나요? 북한의 땅 문서 가지고 온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가구며 좋은 것 다 버리고 왔습니다. 정말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천국이 바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천국 문은, 그것을 들고 통과 할 수는 없습니다.

천국의 문은 겨우 우리 몸뚱이 하나 통과 할 수 있는 작은 문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입니다.

천국 문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걸러버리는 것입니다.

 

▲3. 좁은 문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The Narrow Gate

정관사 “The”가 더 붙어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 가톨릭, 유교는 말합니다.

왜 그렇게 개신교 기독교는 배타적인 것인가, 왜 포용력이 없는가?

왜 다른 종교에게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하느냐?‘

 

배타적이 아니라, 천하 만민에게 나사렛 예수 외에는 다른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4. 좁은 문은 동시에 작은 문입니다. 작기 때문에 발견 하기가 어렵고

세상이 보기에는 그 가치를 식별할 수 없는 초라한 문입니다.

 

파리의 개선문 같이 크고 웅장한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기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 촌 동네에서 말 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그것은 좁은 문의 탄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초라한 모습에서, 그 분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 문은 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크고 화려하고 편한 문만을 찾아 다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때에는, 세상의 것들을 잃어 버렸을 때입니다.

   건강 혹은 돈을 잃거나, 혹은 자유를 잃고 감옥에 갇히든지

   그때 세상에 대한 집착이 부서져 버렸을 때, 우리는 좁은 문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가장 비참할 때가

   영적으로 보면, 가장 축복의 때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서, 구원의 문을 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5. 좁은 문은 믿음의 사람이 들어 갈수 있는 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이 좁은 문은 고난과 박해가 기다리고

사람들이 알아 주지도 않는 이 문으로, 좋다고 뛰어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문은, 자기의 이성과 노력과 계산으로 들어 갈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내 마음에 은혜를 부어 주실 때

믿음을 주실 때 들어 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 가기를 힘쓰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 해야 합니다.


   ‘힘쓰라는 말의 헬라어 진행형 동사가 애거나이스

   운동선수들이 고통을 견뎌내며 몸부림치며 자기를 훈련하고

   운동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때 쓰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 해석하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우리의 노력으로 필사적으로 몸부림 쳐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그래서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해 가지고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많은 업을 쌓아야 된다.

   그래서 면제부도 사고 로마 교황청이 요구하는 선한 행위들을

   종교 의식들을 행하여야만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따라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은,

우리가 구원을 위해 어떤 업적을 쌓아야 된다든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받지 못하도록 심어놓으신 까다로운 문을

인디아나 존스처럼 아슬아슬하게 통과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서 다 이루어 놓은 것을, 우리는 붙잡고 구원의 문을 통과하는데

문제는 이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마귀가 방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일들로 정신 없이 바쁘게 만들어 놓습니다.

여러 가지 유혹으로 정신을 분산 시켜 놓습니다.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나 선입관을 확대시켜가지고

우리가 믿음의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이고

또한 마귀가 권세를 휘두르는 세상에 사로 잡힌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는, 좁은 문에 대한, 구원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잘 보이지도 않아요.

 

물고기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 갈 때에는 두 배의 노력을 기우려야 되듯이

마귀가 주도하고 있는 이 화려하고 분주한 세상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 믿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포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단의 한 발자국을 내 디딜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구원 받은 자가 살아야 하는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7. 신앙이란 단순히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걸어가는데 있습니다.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기서 좁은 문좁은 길의 개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기도 하시지만

이제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인생"길"의 패턴이기도 하십니다.

나의 인생의 맨토입니다. 그분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것은, 좁은 으로 통과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좁은 을 예수님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8. 이 좁은 , 좁은 을 가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대가를 치른다는 말은 첫째: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얼마나 세상적입니까? 우리는 가만 두면 명예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화려한 것 좋아하고 사람의 칭찬에 약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 공주병 환자 입니다. 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 시퍼렇게 살아 있는 옛 사람 때문에, 우리는 좁은 문, 좁은 길로 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기도하며 옛 사람에 대해서 죽고

예수님에 대한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인정 받고 싶은 자존심과 욕망을 내려 놓지 않으면, 결코 갈수 없는 길이기에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 것들을 적당히 누리지 않고서 살수는 없습니다.

   옷도 사 입어야 되고, 차도 몰아야 되고, 집도 어느 정도 있어야 되고 그렇지만

   여기에 집착하지는 마세요.

 

   주님이 주시면 성공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한 집착은 하지 마세요.

   돈을 벌 수도 있지만, 돈을 잃어 버려도 절망하지 않는 것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면, 내가 행복해 질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좋은 집을 사면, 좋은 가정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도 포기 해야 합니다.

   자식을 잘 키워 놓으면,

   부부 관계도 희생하고 모든 것을 희생하여서 자식을 잘 키워 놓으면

   그 자식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포기 해야 합니다.

 

   나의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자식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 어머님들,

   내 아들이 장가 가고 나서도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포기 하십시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시죠?

 

고난과 핍박을 가고 해야 갈수 있는 길이 바로 이 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이 좁은 문을 통과한 그때부터, 우리는 마귀의 타깃이 되었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교활하고 집요하고 잔인한 마귀가 24시간 우리의 약점을 분석합니다.

우리의 빈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핍박하고 유혹합니다.

 

가장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가장 내가 믿고 의지 했던 것들을 통해서 핍박이 들어 옵니다.

 

좁은 문, 좁은 길로 갈 때, 가장 큰 걸림돌, 가장 무서운 핍박자가

내 부모 형제 친척이고 친구 들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등을 돌릴 수 있는, 이 외롭고 힘든 길을

우리는 함께 선택 했어요. 외로움을 각오 하셔야 합니다.

 

길이 좁기 때문에,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독과 왕따를 각오해야 합니다.

왕따왕을 따르기로 한 자들의 준말입니다.

숫자는 작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좁은 길로 들어선 형제 들입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지 말아야 됩니다.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며 함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공통 분모를 가진 사람들이며, 모여서 서로에게 격려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 험한 나그네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 엄마들 속에 끼어 대화 하다가 보면

자식들을 온 동네 과외 학원에 다 보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 믿음의 부모들끼리 모이면, 과외보다 중요한 것이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고

3이라고 할찌라도 자녀는 예배에 보내야 되고, 말씀을 읽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조롱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격려하면서 함께 이겨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세법대로 다 내며 장사를 하는가'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 좁은 길을 걸으면서 정직하게 세금을 냅니다. 손해를 봅니다.

그러면서도 기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서로 함께 붙어 있다면,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좁지만 좋은 길입니다. 고통과 핍박만을 생각하면 되지 않습니다.

   좁지만 좋은 길입니다. 좁지만 끝에는 영광이 기다립니다. 우리 주님이 기다리십니다.

   상급이 기다립니다. 세상의 화려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의 상급을

   주님께서는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가장 현명한 사람인줄로 믿습니다.

이 천국의 보상이 없다면 우리의 고난은 얼마나 억울한 것이겠습니까?

천국의 보상을 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억울함을, 이 가난함을,

이 고통을, 이 오해를 견디면서 기쁨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또 천국에 가서만 보상 받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인 것입니다.

 

▲9. 이 좁은 길은, 갈수록 점점 넓어지는 길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좁은 길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 잘 믿으면, 세상적으로 성공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렇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국 가는 순례자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좁은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울이, 베드로가 갈수록 넓은 집에서 사셨나요? 갈수록 월급이 올라 가셨나요?

갈수록 잘 되었나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의 결론은 십자가였고, 요한의 결론은 밧모섬 귀양이었습니다.

바울의 결론은 로마에서의 순교였습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 끝에서, 그들은 하늘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그러니 이 좁은 문, 좁은 길을 기뻐하면서,

끝까지 우리 주님을 찬양하면서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10.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에 힘쓰라'는 말의 또 하나의 의미는,

우리에게 이 좁은 문 좁은 길을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안으로 들어가 걷고 살아 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단순히 성가대 찬양하는 것을 듣고 목사님 설교하는 것을

구경하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내는 것입니다. 행동으로의 초청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대충 듣고 겉으로 구경하면 편안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대로 살려고 하면 고통과 괴로움이 따라 옵니다.

 

자기가 위선자라는 사실이 들어납니다.

위선과 게으름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입니다.

 

영적으로 변하지 않고, 귀 동냥 눈 동냥 하면서 교회 다니는 경력만 늘어나게 되면

우리는 오늘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좁은 문 좁은 길은 어떻게 인간의 결단으로 가겠습니까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성령의 도움으로 되지만

구원 받은 자로 사는 것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인간의 본능은 넓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편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대접받고 싶어 합니다.

 

나 좋아 하는 사람 내가 좋아해주고, 나 싫어하는 사람 나도 싫어 해 버리고

자기 권리 주장하고, 실력만큼 누리고 싶어 하고, 칭찬받고 싶어 합니다.

가만 두면 우리는 자꾸 좁은 문 좁은 길을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새로운 결심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의 손을 잡고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형제 자매의 격려로, 우리는 이 좁은 문, 좁은 길을 함께 갈수 있습니다.

 

 

24b, 좁은 문으로 들어 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 가는 자가 많으리라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그 문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은 예수님이 결정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들어가기 싫다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들어 갈려고 하는데

왜 예수님이 심술 맞게 못 들어가게 하실까요?

 

그것은 그들이 특히 유대인들이, 자기 방법대로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좁은 문은, 그 문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방법대로 들어가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자기의 방법대로 들어가려고 해요.


유대인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고, 하나는 혈통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주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이야기는, 자기들이 교회 나오고

새벽에도 나오고,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에 가서 갈비도 먹고

예배도 참석하고 사역하는 현장이 항상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는 우리를 길 거리에서 가르쳤나이다.’

그들은 아마 기독교 복음 전파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자라났나 봅니다.

믿는 가정,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는가 봅니다.

어디를 가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적인 환경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으니까

자기도 구원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노래도 못하면서, 잘하는 성가대 속에 끼어 있으면

그 성가대 소리가 자기 소리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묻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 의식에 익숙한 사람이었지,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경건의 모양이 있으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그들이 주장한 것은 혈통입니다. '우리는 성골이야' *신라 골품제도의 성골과 진골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자기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인데, 구원을 받지 못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천국에 있을 거야, 그런데 너희는 아니야'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본 받지 않고 아브라함의 혈통만 자랑했습니다.

큰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서울대 총장 아들로 태어났으니까

자기도 서울대 시험 치지 않고 들어 갈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각각 자기의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지

혈통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착각을 깨버린 것입니다.

'혈통으로 구원의 문을 통과하는 것은, 너희들의 방법이지만 나의 방법이 아니다.

출제 의원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시험범위를 착각하고 시험을 친 것이다. 틀린 것이다.’

 

구원의 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로 가는 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좁지만 또한 한편으로 굉장히 넓습니다.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이것은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에 치명타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민족이 있었지만 열방이 없었습니다.

자기 민족만이 하나님이 예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대인 너희들이 아니라

오히려 열방이 구원 받는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세계를 품고 계실 것이다.'

 

7:9이 일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아까 유대인의 질문 '구원 받을 자가 많으니이까 적으니이까?'

아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너희들이 생각하는 유대인에서 많은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복음화를 미리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는 것은, 구원의 결단은 타이밍이라는 것입니다.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구원의 문은 문이 좁을 뿐만 아니라

   어느 시간이 지나면 닫혀 버리는 문입니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집 주인이 문을 한번 닫은 후에는 끝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시지만 영원히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은 무자비하게 딱 닫힌다'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이 땅에 계셨을 때는 항상 나에게 오라고 말씀 하셨던 주님이

이 심판의 순간에는,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 하십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여러분 시간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문은 우리가 죽을 때 닫힙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원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마지막 호흡이 다할 때까지 구원의 찬스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주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예수 안 믿는 분이 있다면

마지막 호흡이 다 할 때까지 전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의 문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최후 심판 날에는 닫힐 것입니다.

은혜의 시대가 끝나고 심판의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세상에서 가장 처절한 후회를 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 후회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믿는 기회만 닫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마음 것 헌신할 수 있는 기회도 닫히게 됩니다.


어떤 분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습니다. 자기만 간신히 천국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금할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몸으로 헌신할 수 있는 기회들을 전부다 잃었던 것입니다.


'아니 나 사업이 좀 안정되면 하지, 자식 좀 키워 놓으면 하지'

이렇게 미루다가 주님 앞에 축복된 구원을 풍성한 구원을,

또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분 앞에 놓여 있는 축복의 시간을 그냥 흘려 보내지 마십시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를 믿어야 되고, 이미 예수를 믿음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자신의 돈을 쓰고 시간을 써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 할 때

이 영원한 구원의 문이 닫힐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 구원의 문, 이것은 영적인 절박한 간절한 목마름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새 신자들만 예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 잖아요?

나중 된 자는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먼저 된 자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 의식을 깨 버리는 것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이 말을, 마태복음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복음에 대한 적극성입니다. 은혜에 대한 목마름 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 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은혜를 갈망하는 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민족에게 부흥을 주십니다.

그런 교회를 축복하십니다.

 

제가 교회를 다녀보면, 그런 은혜에 갈망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설교할 때면, 제 능력의 열 배의 설교가 나옵니다.

하늘의 은혜가 쏟아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유명한 교회인데,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습니다.

아무튼 '또 강사 왔나 보다' 이런 식으로 앉아 있습니다.

은혜를 당연히 여기기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민족도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갈망을 불러 일으키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민족에게 부흥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사 기록을 보면 한국으로 온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교인들의 뜨거운 영적 갈급함에 감탄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19세기말 조선이 아직 국법으로 선교를 금하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라는 선교사님이 북간도에 와서

조선 선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한국 말로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그 성경 번역을 도와준 몇 명의 한국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서상륜이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비밀리에 국경을 넘어서 황해도 고향인 자기 마을로 내려 옵니다.

이때 알렌과 최초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선교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 못한 때였는데

이 서상륜이 복음을 가지고 들어와서 지방으로 다니는 것입니다.


황해도 소래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웁니다.

한국 최초의 교회는 황해도 소래에 있는 교회인데,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아니고

한국인 청년들이 세운 교회 입니다.


교회를 세운 그들은 또 복음서를 가지고, 의주 정주 강주 등 북한 지역 곳곳에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이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고

이들이 몇 년 후에 서울에 있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와서

'북쪽으로 와서 세례를 주십시오' 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언더우드가 세례를 주려고 가보니까 너무나 놀란 것입니다.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100200명씩 북부 지방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세례를 주고 교회가 세워지도록 격려하는데

의주에 도착해 보니까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의 법이 이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압록강을 넘어서

중국 땅에 가서 세례를 주기로 합니다. 그래서 32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압록강을 넘습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각이 되면 어떻게 될 줄 모르잖아요.

그래서 처음으로 언더우드의 세례문답에 질문 하나가 더 들어 갑니다.

'조선의 국법이 기독교를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세례를 받으면 그렇기 때문에 재산을 빼앗기고 맞아 죽고 감금당하고 처형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세례를 받겠습니까?'


이것이 당시 세례 문답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32명이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인의 열심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감탄을 합니다. 7명의 학생을 데리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는데

20년 후에 5만 명이 넘는 한국 교회의 평신도가 성경공부에 매진합니다.


그리고 평양 대 부흥이 터집니다. 그 다음부터는 수만이 넘는 사람들이 부흥 사경회를 여는데

지방에서 완전히 아저씨, 아줌마들이 먹을 것을 싸가지고 와서 사경회에 참석하고 말씀에 매진 합니다.

복음이 들어 온지 30년 만에 미국의 선교사들은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교회가 회복하여야 할 것은 이 갈망입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 이 갈급함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좁은 문을 활짝 열어서

우리 민족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 가는 좁은 문이 될 것입니다.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천국 열쇠가, 바로 이 천국 문의 열쇠요, 구원의 좁은 문의 열쇠요

우리 주님께서 그 열쇠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 할 때 천국 문이 열립니다.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구원의 문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전도 할 때, 그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선교할 때 그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전도와 선교를 그렇게 이해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주일 학교부터 성인 공동체 모임까지 모두가 11월 첫째 주, 둘째 주 에 있는

전도 초청 주일을 준비하면서 기도 중입니다.


제가 깜작 놀랐습니다. 지난주 통계로 각 순마다 주변에 전도하고 싶은 분들의 이름을 적어서 올렸는데

지난주 처음 봤을 때 성인 공동체만 1500명이 넘었습니다.

제가 듣기로 주일학교 학생들이 거의 1000명이 넘게 적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학 청년부까지 합치면 지금 그리고 이번 주까지 모으면

지금 우리 교인 숫자보다 더 많은, 잃어 버린 영혼들을 적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전설 같은 일을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순들이 테마 마트를 준비하고 있으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힘들지만 하나님이 기뻐 하실 것입니다.


전도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교회 존재 자체의 의미입니다.

잃어 버린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 교회 안에 있어요,

그래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일한 그들에게는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그 문을 우리가 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그렇게 세우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천국 공동체로서

넓은 문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차별화 된, 어떤 거룩한 삶을 보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도 남자들이 밤 늦게까지 행복한 모습을 우리가 보여 주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와 인기에 집착하지 않고 가난 하다 할지라도 행복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앞에서 소박하게 살지만 결코 기 죽지 않는 거룩한 당당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볼 수 없는 뜨거운 사랑으로 서로를 붙들어 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과는 전혀 바꿀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가지고

좁은 문, 좁은 길에 여러분 기쁘게 같이 걸어 갑시다. 인상 쓰면서 걸어 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좁은 문 좁은 길을 갈 때 기쁨으로 격려하면서 붙들어 주면서 가는

그런 천국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끝까지 함께 이 믿음의 순례의 길을 완주합시다.


*타자 PD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