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 니의 간증 스크랩
1903~1972
1936년 10월 18일 푸지엔성(福建省 고랑여 鼓浪礖 에서
여기서 기록된 것은 워치만 니 형제가 33세 되던 1936년 10월,
중국 푸지엔성(福建省)의 동남부 구랑위(鼓浪嶼)에서 열린
사역자 집회에서 간증한 것을 녹취한 것이다.
그는 일생 동안 공식적으로 자기의 경험을 말한 것은 매우 드물었고,
오직 여기에서만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간증을 자세히 말했다.
이 간증을 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바와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overestimate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고후12:6
바울의 3층천 체험 간증도,
그런 일이 있은 지 14년 후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고후12:2
나(이 녹취록의 저자 웨이광시)는 여러 번 이 간증을 정리하여 출간하려 했으나
그(워치만 니)의 뜻을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 오다가
그의 간증이 있은 지 38년 후, 1972년 6월 1일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비로소 이것을 발표한다.
나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라고 믿는다.
(1952년 자신의 신앙으로 인해 투옥된 워치만 니는,
20년에 걸친 수감생활 동안 믿음을 지키고 1972년 순교했다.)
내가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람 본인의 어떠함보다는,
주님이 그에게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곧 그가 주님과 함께 함으로 주님께서 그로 일하게 역사하게 하시어
주님의 영광이 그를 통해 나타나게 된 것에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살후 1:12).
◑1. 구원과 동시에 부르심 받음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내 위로는 누님이 두 분 계시는데,
어머님이 누님들을 낳으셨을 때 나의 고모님은 기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고모님은 연달아 딸 여섯을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풍습에 의하면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소홀히 여겼다.
때문에 어머님이 두 딸을 낳은 후 사람들은 어머니도
고모님과 같이 딸 여섯을 낳은 후에야 사내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 어머니는 분명히 구원받지는 않았지만 주님께 간구할 줄은 알았다.
그녀는 주님께, 『만일 당신이 내게 사내아이를 주신다면 그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결국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내가 태어났다.
훗날 부친은 나에게, 『네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가 이미 너를 주님께 드렸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1920년, 17세 때 구원 받았다. 구원받기 전 내 심중에는 큰 교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것인지,
또한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길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받는 것은 어떻게 구출되는가의 문제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또한 나의 종신 사업과 연관되어있었다.
만일 내가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면, 동시에 나는 또한 그분을 주로 영접해야 했다.
그분은 나를 죄에서 건지실 뿐 아니라 또한 세상에서 건지셔야 했다.
그 때 나는 구원받기가 두려웠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구원받으면 주님을 섬기는 일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이중적인 것이어야 했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한쪽에 제쳐 놓고 구원만 원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주님을 믿으려면 양면을 다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방면을 다 포기해야 했다.
내게 있어서, 주님을 영접한다면 이 두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1920년 4월 29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 했다.
처음에 나는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믿지 않자니 또 불안하고 속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릎 꿇고 기도하였다. 처음에는 기도할 말이 없었는데,
마침내 나는 내 앞에 많은 죄들이 놓여진 것을 보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일생 중에 이런 체험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한면으로 죄의 더러움을 보았고, 또 한면으로는 구주를 보았다.
한면으로는 죄의 더러움을 보았고,
또 한면으로는 주님의 보혈이 눈과 같이 희게 깨끗이 씻을 수 있음을 보았다.
한면에서는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내게,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나는 저항할 길이 없어서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에 나는 다른 사람이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면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날 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죄를 자백한 후 죄의 짐이 다 벗어지게 되자 나는 가벼움을 느꼈고, 마음 속에 희락과 평강이 충만했다.
이것이 내 일생 중에 첫번째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처음으로 기쁨과 평강을 체험할 때였다.
이전에도 기쁨과 평강이 있었지만, 구원받은 후의 기쁨과 평강이야말로 참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홀로 내 방 안에서 빛을 보았고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주님께, 『 주여, 당신은 참으로 저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적어도 세 명이 과거 나의 동급생이었다.
그 중 위광희(魏光禧) 형제는 내가 학교 다닐 때 얼마나 특이하게 행동하는 학생이었으며
동시에 얼마나 놀라운 학생이었는지를 간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쁜 면으로 말한다면 나는 자주 학교 규칙을 어기는 학생이었고,
좋은 면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천부적인 총명을 주셔서
시험을 치를 때마다 일등을 했으며 나의 작문은 자주 게시판에 발표되었다.
그 때 나는 많은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청년이었다.
자기 장래를 위해 계획하고 자신의 판단을 가장 옳은 것으로 여겼다.
내가 겸손히 말하거니와, 만일 내가 세상으로 나갔다면 아마도 큰 업적을 세웠을 것이다.
내 동급생들이 이 일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 받은 후 내게 많은 새로운 일들이 발생했다.
이전 나의 계획은 다 허무한 데로 돌아갔으며, 나의 장래는 이미 끝장나고 포기되었다.
이 일이 다른사람에게는 쉬운지 모르지만 내게는 아주 어려웠다.
이는 내게 많은 사상과 꿈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받은 그날 저녁부터
나는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의 구원받음과 부르심받아 주님을 섬기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내가 부르심을 받은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 한시간 동안 나는 나의 장래를 한 번 정함으로 영원히 정하였다.
나는 나를 구원하심은 한면에서 내 자신을 위한 것이며, 또 한면에서는 그분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주님은 한면에서 나로 그분의 생명을 얻게 하셨고, 다른 면에서 그분을 섬기고 그분과 동역하게 하셨다.
어렸을 때 나는 전도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성장할 수록 내눈에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일이요 가장 비천한 일로 보였다.
그 당시 전도사는 대개가 유럽과 미주의 목사들에 의해 고용된 일꾼으로서
목사의 눈치를 살폈으며 매달 월급은 팔 구 불밖에 되지 않았었다.
나는 전도할 뜻이 조금도 없었고 나는 전도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도 않앗다.
그러나 오늘 내가 전에 비천하게 여겼던 전도의 직무를 택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2. 구령 사역을 배움
구원 받은 후로 나는 자연히 죄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그들이 구원 받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급우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간증하기 시작하였다.
약 일 년간 수고하였지만 한 사람도 구원 받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이유를 더 많이 제시할수록
사람을 구원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 예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했지만 능력이 없었고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 무렵 나는 그로브스(Groves)라는 한 서양 선교사를 만났다.
바버(M. E. Barber) 교사의 동역자인 그녀는 나에게
구원 받고서 일 년 동안 몇 사람을 구원시켰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아주 부끄러워하며 낮은 소리로,
“급우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지만 그들이 듣기 싫어하고,
들어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죄는 그들에게 돌려질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주 솔직하게, 내게
“자네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네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이 있거나
감추인 죄를 아직 깨끗이 처리하지 않았거나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있기 때문일세.”라고 했다.
나는 내 자신에게 그러한 것이 있다고 시인했다.
그녀가 내게 그것들을 즉시 처리하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나는 원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나에게, “형제는 어떻게 간증했는가?”라고 물었다.
내가 “아무나 붙들고 전했습니다. 상대방이 듣든 듣지 않든 전파했습니다.”
라고 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잘못되었네. 자네는 먼저 하나님께 말하고(기도)
그런 다음 사람에게 말해야 하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급우들의 이름을 적어내야 하네.
하나님께 어떤 사람을 위해 먼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묻고,
이름을 부르며 날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안배하실 때 그들에게 간증해야 하네.”
그녀와 교제한 후 나는 배상하는 것과, 빚을 갚는 것과, 급우들과 화목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죄를 자백하는 일 등의 많은 죄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노트에 60~70명의 이름을 적고서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각 사람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 언급하였다.
어떤 때는 한 시간에 그들 모두를 위해 한 번씩 기도하였고
수업 시간에도 은밀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증거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급우들은 자주 농담으로, “전도사가 또 오셨네. 자, 설교를 들어보자.”라고 말했다.
사실 그들은 듣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나는 또다시 그로브스 교사를 찾아가 그녀에게
“당신이 내게 알려준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는데도 왜 효과가 없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녀는 “낙심하지 말고 사람들이 구원 받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게나.”라고 말했다.
주님의 은혜로 나는 매일 끊임없이 기도하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주께 감사드린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내 노트에 적힌 칠십 명 중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3. 권위에 순복하는 교훈을 배움
1923년에 우리 가운데에는 7명의 동역자가 있었는데,
나는 나보다 5살 위인 한 동역자와 함께 인도했었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에 동역자 집회를 가졌는데,
기타 5사람들은 자주 우리 둘이 다투는 것을 들어야 했다.
그 때 우리는 젊었기 때문에 각각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틀렸다고 말하고, 그는 내가 틀렸다고 말했다.
그 때 나의 육체가 아직 처리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자주 화를 냈다.
오늘(1936년) 나는 그 때를 생각하면서 웃을 수 있지만,
그 당시 나는 거의 웃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다툴 때, 나는 내가 틀렸다고 시인할 때가 많았지만,
때때로 그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나는 자신의 잘못은 용서하기가 쉬웠지만 남의 잘못은 용서하기가 쉽지 않았다.
금요일에 다투고서 그 다음날에 바버 자매님에게 가서
나보다 5살 위인 그 동역자를 참소하였다.
내가, “제가 그 동역자에게 어떤 일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그가 듣지 않으니 자매님이 말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바버 자매님은 “그가 너보다 5살 위이니 자네가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순종해야 하네.”라고 하였다.
“일리가 있든 없든 무조건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렇네. 성경은 어린 자는 연장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네.”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이치에 따라 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자네는 이치를 따지지 말게나.
성경은 어린 자가 연장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네.”
나는 성경이 왜 그렇게 쓰여졌는지에 대해 마음속에서 화가 났다.
나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낼 수도 없었다.
매주 금요일 다툼이 있은 후, 나는 그녀를 찾아가 그녀에게 쓴 물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연장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때로 나는 금요일 오후에 다투고 나서 저녁에 한바탕 울고
그 다음날 바버 교사를 찾아가 그녀에게 고통을 토로했다.
그녀가 나를 옹호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가지만,
토요일 집에 돌아가서는 다시 한바탕 울게 되었다.(또 싸웠다)
나는 내가 왜 몇 해 더 일찍 출생하지 않았는가를 원망했다.
언젠가 한번 다투고 나서, 나는 내게 좋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고하면 그녀가 반드시 내 동역자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나를 지지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개 동역자가 틀렸는지는 별개 문제네.
오늘 네가 내 앞에서 이렇게 형제를 참소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다우냐?
어린 양다우냐?”라고 말했다.
그녀의 이러한 질문에 나는 정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 날 내 말과 태도가 확실히 십자가를 지는 사람 같지 않고
어린 양 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연장한 동역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
그 한 해 반 동안 나는 일생에서 가장 보배로운 공과를 배웠다.
나의 머리는 많은 이상으로 충만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영적인 실제적 삶 안으로 인도하기 원하셨다.
그 한 해 반 동안 나는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오늘 우리 가운데 50명의 동역자가 있다.
그 한 해 반 동안 순종의 공과를 배우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어느 누구와도 동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환경 가운데 나를 두시어 성령의 통제를 받게 하셨다.
그 18개월 동안 나는 나의 주장을 내세울 기회가 없었고
다만 울면서 고통스럽게 견딜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내 자신이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뾰족한 부분을 갈으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은혜로 나를 이끌어,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이제 나는 연소한 동역자들에게
만일 여러분이 십자가의 연단을 견디지 못한다면,
유용한 그릇이 될 수 없다고 말하겠다.
오직 온유하고 겸손하며 화평한 어린 양의 영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이다.
당신의 웅지와 큰 뜻과 재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쓸모가 없다.
나는 이 길을 걸어온 사람이며, 나는 자주 나의 과실을 시인해야 한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문제는 옳고 그름에 있지 않고, 당신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다운가에 있다.
교회 가운데 옳고 그름은 아무 지위가 없다.(크게 중요하지 않다)
계수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십자가의 파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흘러 보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
◑4. 투병에서 치유, 문서사역 시작
1924년에 처음 나는 내게 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다만 미열이 있었고 육신이 무력함을 느꼈으며,
가슴에는 통증만 약간 있었다.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몰랐다.
왕화성 의사는 나에게, “나는 당신에게 믿음이 있는 줄 알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유하실 것도 믿습니다.
그러나 내게 와서 무슨 병인지 한 번 검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검사를 마친 후 그는 얼마동안 낮은 목소리로 왕등명 형제에게 어떤 말을 했다.
내가 그들에게 검사 결과가 어떠냐고 묻자, 처음에 그들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고 말하자,
왕의사는 나의 폐병이 아주 심각하고 장기 휴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날 저녁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사명을 마치기도 전에
주님을 뵈러간다는 것이 주님께 죄송하여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시골로 내려가서 휴식을 취하면서 주님과 많은 교통을 갖기로 결정했다.
나는 주님께, “나에 대한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나에게 목숨을 내려놓기를 원하신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라고 기도했다. 약 반 년 동안이나 나는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었고, 주님은 틀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때 각지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들은 위로의 말을 하기보다는
내가 일에 과로하고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은 것에 대해 책망했다.
어떤 형제는 에베소서 5장 29절 말씀을 인용하여 나를 책망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얼마 후 난징(南京)의 청치궤이(成寄歸) 형제가 나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한 면으로 휴식을 취하면서, 자기가 스코필드(Dr. C. I. Scofield) 성경의
통신 과정을 번역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루하루가 지나도 내 폐병은 좋아지는 조짐이 없었다.
비록 억지로 문서와 사경회 일을 조금 했지만 매우 힘겨웠다.
매일 오후에는 열이 있었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항상 식은땀이 났다.
한 형제가 나에게 많은 휴식을 취하라고 권하자,
나는 “내가 녹슬 정도로 휴식을 취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비록 내가 오래 살지 못할지라도,
한 편으로 나는 하나님이 내게 힘주심을 믿어야 하고
또 한 편으로는 내가 그분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주님께, 마지막으로 내가 마쳐야 할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만일 주께서 나에게 맡기시고 마쳐야 할 일이 있다면,
주님이 내 생명을 보존해 주시기를 구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처음에는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복음집회를 인도해 달라고 나를 초청했는데,
나는 억지로 일어나 주님이 내게 힘주시기를 구했다.
집회에 가는 도중에 나는 여러 차례 전봇대를 붙들고 잠깐씩 쉬어야만 했다.
전봇대를 붙들고 잠시 쉴 때마다 나는 주님께
“당신을 위해 죽는 것은 정말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형제들은 나의 이러한 상태를 알고서 내게 몸을 아끼지 않는다고 책망했다.
그러나 나는 내 주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잃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투병 중에 문서 사역을 시작하다
나는 한 달 이상 기도를 한 후,
하나님 앞에서 배운 것들을 책으로 써내야 한다고 느꼈다.
전에 나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야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 나는 내가 곧 세상을 떠날 줄로 생각했으므로, 책의 집필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장쑤성(江蘇省) 우시성(無錫城)에서 작은 방을 빌려
그 안에서 하루 종일 집필에 몰두했다.
그때 내 병세는 더 악화되어 누워 있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집필할 때에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서 가슴의 통증을 경감시키기 위해
가슴을 책상에 밀착시켜야 했다. 사탄은 나에게
“너는 곧 죽게 되면서 편하게나 죽지, 이런 고통을 당하느냐?”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이다. 너는 물러가라.”고 말했다.
4개월에 걸쳐 나는「영에 속한 사람」 세 권의 집필을 끝마쳤다.
집필 기간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생명을 단념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시종 나를 인도했으며 이 기간을 보냈다.
집필을 마칠 때마다 나는 자신에게 “이것이 교회에 대한 나의 마지막 간증이다.”
라고 말했다. 비록 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 집필했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히 가까우시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성 형제는 편지로 내게, “자네가 이렇게 극도로 자신을 소모시킨다면
어느 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네.”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 대한 답장에서, “나는 나의 주님을 사랑하므로
마땅히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하네.”라고 말했다.
나는 길고 긴 투병 기간에 「영에 속한 사람」을 썼다.
내가 책을 다 쓰고 출판해야 할 때 약 4천 원이 필요했다.
내 수중에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필요를 채우시도록 간구했다.
이러한 필요를 4명의 동역자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얼마 후 주님이 4백 원을 공급해 주셔서
우리는 인쇄소와 계약을 맺고 인쇄를 시작했다.
계약서에는 만일 이후로 기간에 따라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계약금 4백 원을 되돌려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손실을 배상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일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때 나는 내 병으로 인하여 여전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인쇄소는 정한 때에 와서 돈을 요구했고,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공급하셔서 때에 따라 돈을 지불하게 하셨다.
인쇄소 사람들은 우리가 신용을 지키는 것을 보고서,
“당신들 외의 다른 교회 사람들은
이렇게 정한 시기에 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제 당신의 종으로 편안히 세상을 떠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때 내 병은 악화되어 밤에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에 깨어나 침상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으며,
몸은 마른 나무처럼 야위었고, 밤에 식은땀이 나며 목은 잠겨 있었다.
내 말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귀를 내 입가에 갖다 대어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몇 자매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간호하였는데,
그 중 한 노련한 간호원 자매는 나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내가 많은 환자들을 보아왔지만, 이처럼 불쌍한 상태에 있는 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3~4일이나 더 살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내게 알려 주자,
나는 “이대로 끝났으며, 나는 내가 곧 죽게 될 것을 압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떤 형제가 전보로 각지 교회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나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알렸다.
어느 날 나는 하나님께 “왜 이렇게 저를 빨리 데려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게 아직 충성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까봐 내 죄를 자복했다. 동시에 나는 하나님께 나의 믿음 없음을 고백했다.
그날 나는 전일하게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이 내게 정하신 일만을 하겠다고 그분께 말씀드렸다.
그날 나는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금식했다.
동시에 동역자들도 리위엔루 자매의 집에 모여서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하나님께 내게 믿음을 주시도록 간구했는데,
그 때 그분은 나에게 일생 잊어버릴 수 없는 말씀을 주셨다.
그 첫 번째 말씀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였고,
두 번째 말씀은 “믿음으로 서리라”(고후 1:24)였으며,
세 번째 말씀은 “믿음으로 행하리라”(고후 5:17)였다.
이 몇 마디로 인해 나는 기쁨으로 충만케 되었다.
왜냐하면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미 내게 말씀을 주셨고,
나는 하나님이 이미 나를 치료하신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미했다.
그러자 곧 시험이 닥쳐왔다.
성경은 “믿음으로 서리라”고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이때 내 마음 속에는 몸을 일으켜 설 것이냐
계속 침상에 누워 있을 것이냐에 대한 싸움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침상에 누워서 죽는 것이, 서서 죽는 것보다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능력을 발하여 나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176일 동안 입지 않았던 내 의복을 입었다.
내가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서려고 할 때,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사탄은 나에게, “네가 앉지도 못하는데 일어서려고 하느냐?”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이 나더러 일어서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래서 일어서는데 온 몸에서 또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여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믿음으로 서리라! 믿음으로 서리라!”고 말했다.
나는 걸어가서 옷과 양말을 가져다가 입은 후에 다시 앉았다.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또 다시 내게 임하여
믿음으로 서야 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내가 침상에서 일어나서 몇 걸음 걸어가 바지와 양말을 입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더 걷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나님께 “당신은 제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자,
하나님은 “너는 아래층의 리 자매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에서는 한 무리의 형제자매들이 내 병을 위해
이미 2~3일 동안이나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집 안에서는 걸을 수 있으나
어떻게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나는, “오 하나님, 제가 믿음으로 설 수 있다면,
또한 믿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나는 즉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문을 향해 가서 그 문을 열었다.
내가 솔직히 말하지만, 내가 층계 위에 서 있을 때
그것은 내 일생에 내가 본 가장 높은 층계 같았다.
나는 하나님께, “당신이 나에게 걸으라고 하셨다면,
내가 죽을지라도 걷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어서, “주여, 나에게는 걸을 힘이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부축하여 걷게 해 주소서.”라고 말했다.
나는 난간을 붙들고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왔다.
내 온 몸에서 다시 식은땀이 났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믿음으로 행하리라. 믿음으로 행하리라.”고 외쳤다.
한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나는
“주여, 당신이 나로 능히 걷게 하십니다.”라고 기도했다.
믿음 안에서 나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그 25개의 계단을 내려왔다.
층계 아래로 내려왔을 때 아주 힘있게 느껴져
빠른 걸음으로 뒷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리 자매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님께, “이제부터 나는 믿음으로 살며 더 이상 누워 있는 환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사도행전 12장에 있는 베드로와 같이 그렇게 문을 두드렸다.
다만 거기에 문을 열어주는 로데가 없었을 뿐이다.
문이 열리자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고,
7~8명의 형제자매들은 나를 주시했으며,
그들은 말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치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나타난 것처럼, 약 한 시간 동안 모든 사람이
다 잠잠히 앉아 있었다.
나도 거기에 앉아 있었으며 내 마음 속에는 감사와 찬미가 충만했다.
이후에 나는 그들에게 내가 은혜로 치유 받은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모든 이의 영에 상쾌함과 기쁨이 있었고,
우리는 높은 소리로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를 찬미했다.
그 날 우리는 자가용 한 대를 빌려 교외에 있는 강완(江灣)으로,
유명한 여 전도자인 도라 유(Dora Yu) 자매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얼마 전에 내가 곧 세상을 떠나게 되리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너무나 놀랐다.
나의 출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감사하며 찬양했다.
그 주일 나는 강단에서 3시간이나 말씀을 전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한 독일인 의사의 집에서 물건을 처분한다기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그 의사는 바로 수년 전 엑스레이로 나의 흉부 촬영을 해준 의사였다.
그는 석 장을 찍고 나서 내게 소망이 없다고 말했었다.
내가 그에게 다시 한 번 찍어달라고 했을 때,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엑스레이 흉부 사진을 내게 보여주면서,
“이 사람의 상태는 당신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진을 찍고 집에 돌아가 2주도 못 넘기고 죽었습니다.
당신은 다시 나를 만나러 올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돈을 벌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이것을 듣고 아주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4년 전, 나는 신문에서 어느 유명한 독일인 의사가 별세하여
집과 가구를 판매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그 의사가 과거 내 흉부 촬영을 해주었던 의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손을 들어 주님을 찬미하면서 “이 의사가 죽었습니다.
그는 내가 머지않아 죽게 된다고 했는데, 지금 그가 먼저 쓰러져 죽었습니다.
주님은 정말 나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님의 보혈 아래에서 나는 “이 의사는 나보다 건강했으나 먼저 죽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치유함을 받아 여전히 살아 있다.”고 했다.
그 날 나는 기념으로 남겨 두려고 그의 집에서 많은 물건들을 사왔다.
◑5. 사역하는 동안 생계를 위해 주님을 앙망함
1923년, 웨이광시 형제는 푸지엔성 북쪽에 있는 �어우(建毆)라는 곳에
전도하도록 나를 초청했다. 그때 내 호주머니 속에는 10여 원밖에 없었고,
그 돈으로는 여비의 1/3밖에 충당할 수 없었다.
나는 금요일 저녁에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수요일과 목요일 이틀에 걸쳐 계속 기도하였다.
그러나 돈은 생기지 않았다. 금요일 아침에 나는 다시 기도했다.
그러나 돈이 들어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내게 있는 5원을 한 동역자에게 주라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주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요”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본래 나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정말 돈을 사랑했고 돈을 내놓기가 아주 어려웠다.
나는 다시 주님께 “주여, 만일 당신이 나에게 5원을 내놓으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내 속에는 그렇게 하고자하는 마음이 없었다.
나는 사탄에게 속아서, 기도한 후 5원을 내놓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일생에서 오직 그 때 한 번 ‘돈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결국 나는 주님께 순종하고 5원을 그 동역자에게 보내 주었다.
돈을 보낸 후, 내 마음 속에는 하늘의 기쁨이 충만하였다.
그 동역자가 내게 왜 이 돈을 자기에게 주느냐고 묻자,
나는 “물어볼 필요 없습니다.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금요일 저녁에 나는 출발 준비를 마쳤다.
나는 하나님께, “여비를 위해 15원으로도 부족한데
당신은 나에게 5원을 누구에게 보내 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더욱 부족하게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정말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는 먼저 기선을 타고 쉐이커우(水口)에 가서
그 다음 다시 작은 나룻배로 �어우에 가기로 결정했다.
쉐이커우에 가는 데에는 돈이 조금밖에 들지 않았다.
기선이 도착할 때쯤, 나는
내 뜻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나는 어떻게 기도할지 모릅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라고 말했다.
또 나는 주님께, “만일 당신이 나에게 돈을 주지 않으시려면
나를 위해 저렴한 가격의 배를 마련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내가 쉐이커우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공들이 내게 흥정하러 왔다.
그 중 한 사람은 뱃삯으로 단지 칠 원만 요구했다.
이것은 내 예상 밖의 가격이었다. 평상시의 뱃삯은 이것의 몇 배나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공에게, 왜 이렇게 값이 싸냐고 물었다.
그의 답변은, “이 배는 한 정부 관리가 전세 낸 것인데,
나는 뱃고물에 따로 한 손님을 태울 수 있도록 허락 받았기 때문에
배 삯이 얼마인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준비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본래 내 호주머니 속에는 15원이 있었는데
나중에 한 동역자에게 5원을 보내 주었고,
작은 기선의 뱃삯으로 몇 전, 나룻배의 삯으로 7원,
음식물을 사는 데 1원 정도가 들었기 때문에
건구에 도착했을 때 아직 1원 30전이 남아 있었다.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분의 안배하심은 언제나 선한 것임을 인해 그분을 찬미한다.
�어우에서 일을 마치고 푸저우(福州)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나에게는 돌아갈 충분한 여비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주 월요일에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토요일까지 기도했다.
이번에는 내 심중에 확신이 있었고, 푸저우를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 동역자에게 5원을 보내주라고 하셨는데
그때 내가 주기를 아까워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누가복음 6장 38절을 읽게 되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나는 이 말씀을 붙잡고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당신의 약속대로
나를 위해 여비를 마련해 주시기를 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주일 저녁에 영국의 필립스(Mr. Phillips)라는 한 선교사가
웨이 형제와 나를 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확실히 구원 받았고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형제였다.
저녁을 먹을 때 그는 나에게, 내 메시지로 인해
그와 그의 선교단체가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서
나의 왕복 여비를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내 여비를 책임지는 분이 있다고 말했다.
내 말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당신이 푸저우로 돌아간 후에
일본에서 주님께 크게 쓰임 받은 복음 전파자 윌키스(Mr. Wilkes)씨가 쓴
「사역의 폭발력」이라는 책을 보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즉시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느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책이 아니라 여비였다.
나는 그의 헌금을 받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했다.
저녁을 먹고서 나는 웨이 형제와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필립스씨의 도움을 거절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기쁨과 평강이 있었다.
웨이 형제는 내 경제적인 형편을 몰랐다.
나는 그에게 여비를 빌렸다가 푸저우로 돌아간 후에
다시 갚아 줄까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그에게 이 문제를 내놓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심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공급하시는지를 보기 원했다.
이튿날 출발하려고 할 때 내 호주머니 속에는 단 몇 전(錢)밖에 없었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마중 나왔고 어떤 이는 내 짐을 들어다 주었다.
나는 걸으면서, “주여, 당신은 나를 이곳에 인도하시고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기도했다.
반쯤 갔을 때, 필립스씨가 사람을 통해 내게 편지 한 통을 보내 주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록 누가 당신의 여비를 책임졌다 하더라도
나는 이곳에서의 당신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이 나이든 형제도 한 몫을 감당할 수 없겠습니까?
부디 이 돈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편지를 읽고서 이 돈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느꼈으므로 그것을 받았다.
그 금액은 푸저우로 돌아올 여비뿐 아니라
한 번의「부흥보」를 인쇄하기에도 충분했다.
푸저우로 돌아온 후, 전에 그 5원을 도와줬던 동역자의 아내가
나에게 “당신이 떠나기 전에, 당신이 쓰기에도 부족했을 텐데
왜 5원을 제 남편에게 보내 주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내가 그녀에게 그 5원에 대해 무슨 문제가 있었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변했다. “수요일에 우리 집에는 1원밖에 남지 않았고,
금요일에는 다 써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금요일에 우리는 하루 종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내 남편은 밖으로 나가서 산책을 좀 해야겠다고 느꼈고,
그러다가 당신을 만났는데 당신이 그에게 5원을 주었습니다.
그 5원을 5일 동안 다 쓰고 나자
하나님은 다른 면에서 우리에게 공급하셨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날 만일 당신이 우리에게 5원을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굶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굶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녀의 간증을 듣고서 나는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했다.
주님이 나를 통해 그 5원으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정말 신실하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요...”
이것이 내가 일생동안 배운 교훈이다.
이제 나는 경험이 있어서 내 손에 돈이 없으면 없을수록
하나님께서 내게 더욱 주실 것임을 안다.
이 길은 가기 어려운 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느끼겠지만,
막상 시험이 닥치면 두려워한다.
만일 당신이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이 이 길을 가는 것을 권하지 않겠다.
오늘 나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엘리야 때의 까마귀의 공급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 여러분이 이것을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자주 마지막 1원을 쓸 때,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임하는 것을 체험한다.
나는 이것을 14년 동안 체험하였다.
매번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얻으셨다.
하나님은 내 모든 필요를 공급하셨고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전에 공급했던 사람이 오늘 공급하지 않을 수 있고,
공급하는 무리는 계속해서 바뀌고 또 바뀐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그분은 영원히 변함없으시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 믿음 생활을 하는 이 길에서
여러분이 계속 전진할 수 있도록 이 일을 부득불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10가지 또는 20가지 이상 여러분에게 제시해 줄 수 있다.
물질을 드리는 데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확실한 액수를 정해야 한다.
수입의 십분의 일이든 이분의 일이든 그것을 하나님 손에 두어야 한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는 본성적으로 드리기를 아까워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그분을 섬겨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그분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미해야 한다! 아멘
1938년 위치만 니
1896년 바버 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