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누가복음만 전하는 부분으로,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몸소 가시려는 곳으로 앞서 70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눅10: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註1)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그 중에 ‘해야 할 것들’에서,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눅10:5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주님의 천사가 목동들에게 알릴 때의 일입니다.
“그때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나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눅2:14~15
천사들의 이 노래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이는 ‘영광이 있기를, 혹은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단순한 인사나
‘영광과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의 노래가 아닌,
지금 그리고 여기 (오늘) 지금 현재 성취된 실재로 선포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는 영광’을, ‘땅에는 평화’를 성취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을 맞는 무리는
하늘에만 ‘영광과 평화’가 있다고 노래합니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역시 하늘)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눅19:38
누가복음사가만 이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그들이 말하는 평화와 영광은 ‘하늘’에 위치해 있습니다.
곧 하늘의 평화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하늘에 거주하는 천사들은 “땅에 평화”를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는 그 일이 “오늘” 이루어졌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눅2:11
▶“오늘”은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 일관된 구원의 “오늘”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눅4:20) 하시고,
삭게오에게는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눅19:9) 하시고,
십자가에서 강도에게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23:43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건네 준 “주님의 평화”를
우리들의 삶 안에 반갑게 맞아들여 뿌리내리고 꽃피워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죽어 타인을 살리는 평화입니다.
바로 이 평화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화평)를 이루는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5:9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눅10:5
신앙생활은 내세적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현재적입니다.
신앙생활은 ‘오늘’ 하는 것입니다.
구원도 ‘오늘’ 받아서, ‘오늘’ 복음을,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도 오늘 빌어주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무시하고,
먼 미래에 얻을 구원만 염두에 두고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복음 이해가 아닙니다.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지만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누리는 것입니다.
▶일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눅10:5
선배 목사님과 택시를 함께 탄 적이 있습니다.
택시 기사님께서는 우리를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목사님이시네요. 사실 저도 신자인데, 신앙이 식은 지가 꽤 되네요.
저 같은 사람은 이제 신자라도 할 수 없겠죠?
저도 목사님들처럼 거룩히 살아야 하는데....”
그러자 선배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기사님은 수많은 사람을 원하는 장소에 편하게 태워다 줍니다.
이렇게 자신의 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친절하게 모신다면
이것이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겠죠!”
기사님의 표정이 금세 밝아지더군요.
그리고 곧바로 “이번 주부터 다시 교회 나갈게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때 목사님께서 “교회 안 나가면 벌 받아요.”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이렇게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평화를 빌어주는 것이
전도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70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 역시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세상에 파송 받은 전도자의 제일 처음 임무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여 평화를 빌어주는 것입니다.
▶요즘 업무 차 또는 휴가 차 해외여행을 다니는 일이 많습니다.
자주 다니다 보니 요즘은 요령이 좀 생겼습니다.
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여행이 얼마나 부담스러워지는지 모릅니다.
짐 부칠 때는 물론, 세관을 통관할 때, 그리고 짐 찾을 때
엄청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대폭 짐을 줄이고 있습니다.
‘이게 이번 여행에 꼭 필요한 짐인가, 아닌가?’
그러다보니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은 여벌 옷 두벌, 속내의 두벌,
작은 성경책, 작은 수첩 한권! 그리고는 끝입니다.
그러면 조그마한 배낭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디든 무사통과입니다. 얼마나 몸과 마음이 홀가분한지 모릅니다.
여행이야기가 아니고요, 주님의 70제자들이 전도여행을 할 때,
주님이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하신 것은, 아마 그런 이유도 ‘여러 이유 중 하나로’ 포함된다고 봅니다.
짐이 많으면, (또 사람들과 만나서 인사하다보면)
전도여행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본말이 전도되고 말죠.
그런데 어쩌면 우리의 일생이 순례자요, 다른 말로 천국 여정으로 향하는 여행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순례 여행길에 불편한 짐들은, 가급적 줄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많은 짐들은, 인맥들은 (길에서 인사하는)
어쩌면 우리의 천국 순례길에 상당한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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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 이렇게 정반대로 해석하기도 하는군요.
그러나 이 글의 주제가 아니라서 각주로 처리합니다.
“이리 떼 가운데 양처럼” 보내신 것은
종말에 늑대와 새기 양이 평화롭게 뒹굴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사11:6, 65:25 참조)을 이루는 것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