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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뒤흔드는 악령을 대적하라 / 프랜시스 프랜지팬

LNCK 2018. 5. 21. 15:26

교회를 뒤흔드는 악령을 대적하라


프랜시스 프랜지팬




▒ 예수님의 삶을 닮는 능력 ▒


 

단순히 기도만 드린다고 해서 악령은 물러가지 않는다.
사단의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신도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세벨을 대적하여 성공적으로 싸우는 교회는 밖으로는 가시적인 영광이요

안으로는 감추어진 순결의 상징인

"영광의 새벽 별"을 상급으로 받을 것이다.


계시록 22:16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그러한 교회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는데

이는 주의 종들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빼앗으려고

책동하는 이세벨의 영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교회에는 특히 병을 고치는 은사가 충만하게 부어진다.

 

우리의 승리는 입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완성은 우리 심령 속에 "예수님의 성품이 자리잡기까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세벨과의 전쟁을 제대로 치루려면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서

악령과 타협하고 있는지

성령님께서 밝히 보여주시도록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마음의 어느 한 구석에 감추어진 은밀한 죄까지 포함한다.
일단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하늘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악령인 원수를 이기려면 '예수님을 닮는 삶의 능력'이 필요하다.


모든 영적 전쟁은 "마음의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이세벨이 좋아할 만한 사고방식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신앙이 교회터를 넘어서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침투되어 들어가야만 한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면 자기 집에 거할 때에도 사실은 교회에 있는 것이다.

 

만일 한 남편이 고집이 센 아내를 두려워함으로 인하여 가장으로서의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다면

그 남자는 이세벨의 영을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 전투의 장소는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이다. 매일 매일 삶의 터전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 속에서

우리는 '이세벨의 영'과 대면하고 싸우게 되어있다.


 

▒ 위임받은 책임 ▒

 

이세벨의 영에 동조하게 만드는 악령도 있다.
이 악귀가 하는 일은 사람의 혼을 연약함과 두려움으로 채우는 일이다.
그 귀신의 이름은 '아합의 영'이며, 그의 본성은 '자신의 권위를 이세벨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아합의 문제는 '남편'이라는 칭호는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 권위가 없다는 점이다.
아합이 왕의 자리에 있을 때 실제로 지배력을 행사한 사람은 이세벨이다.


자기 집을 경건하게 다스릴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영적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그런 남자는 자신의 두려움을 회개하고 단호함과 온유함으로 자기 집의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


권위란 한마디로 위임받은 책임이다.
그러므로 누가 우두머리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책임질 것인가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최종의 권력과 권위를 가지신 분이다.

그러나 그분의 권위의 기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집에서 가장의 권위가 단지 지배하려는 권력에 머무른다면 그 가정은 평안할 날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함께 결정을 내리고, 서로의 지혜를 의지하며, 친구로서 솔직한 교제를 즐기는

그런 부부가 되는 것이다.


억압의 형태를 아내가 다스림에서 남편이 다스림으로 뒤집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면 억압하는 구조는 여전히 유지된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내가 남편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남편도 아내의 푸근한 사랑을 받음으로

삶에 대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의 실천만이 이세벨의 영을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이다.


 

▒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 ▒

 

아내의 경우에 , 이세벨의 오만함이 그리스도의 온유함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이란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이다.(벧전 3:4)
아내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가정의 질서를 지켜야하며 특히 남편을 존경하는 태도로 대해야한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 31:30)

 

악령이 틈탈 기회를 제공하는 여인의 삶이란 참으로 기구한 것이다.

사랑 받지 못한 여인으로, 권위주의적인 남성과의 심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시작한 반항이

결국 자신의 삶을 얽어매고, 급기야는 도리어 억압하는 자로 둔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가장 증오했던 사람과 비슷한 사람으로 닮아가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여인을 돕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담겨있다.

그러므로 이세벨의 영에 대한 해독제는 예수님의 겸손함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자신의 권리를 십자가에 못박고, 억울하게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건들의 목록도

역시 십자가에 못박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면 그리스도게서 만사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 악령으로부터 건지심 받는 것과 해방 받는 것의 차이 ▒

 

나는 이세벨의 영에 사로잡혔다가 해방된 여인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지금 기독교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자신들이 여성인 것을 인정하고 그들의 여성스러움 (womanhood) 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세벨의 영은 오늘날 남성을 여성으로 그리고 여성을 남성으로 둔갑시키려는 책동을 벌인다.

이세벨의 영은 과분한 권력을 인간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에 회복되는 단계에서는 일시적인 '무력감'을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측면에서 그러한 무력감을 끌어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의존하는 사람마다 자신의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강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타인을 교묘하게 조종함으로 자존심을 세울 필요가 없어진다.

 

이세벨의 영은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한 두려움이라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안에 거한다.

이세벨의 영의 힘을 빌어 타인을 자꾸만 조종하려고 덤벼드는 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특히 타인을 신뢰할 수 없기에 도리어 지배해 버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고 하신다. (요일 4:18)

그러므로 이세벨의 영에서 치유 받고 회복되려면 반드시 주변에 넘치는 사랑으로

감싸주는 성도가 함께해 주어야한다.

그러면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편안한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을 끌어 안을 수 있게 된다.

 

치유에는 단계가 있다. 악령으로부터 혼이 건지심을 받는 건 영이 해방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인간의 혼은 살아오면서 겪은 사건들로 꽉 차있다. 그래서 혼 안에는 추억과 소망, 사랑과 미움,

그리고 수많은 경험에 대응한 삶의 방식이 들어있다.

그 모든 것이 합하여 지력, 성격, 그리고 감정을 형성한다.

그러나 영은 늘 조용히 그것들을 관망하고 있는 존재이다.

영은 혼의 모든 움직임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후 2:11)

 

그러므로 순서적으로 보면 영이 먼저 해방을 받아야 한다.

내면 깊숙이 심령의 중심에 있는 존재가 먼저 이세벨의 영으로 인하여 굳어진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어루만져주심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영이 구원 받게 되면 다음 단계로 혼을 치유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혼은 마음의 새로움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모든 사고방식이 개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씻겨내고 바른 생각들로 대치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영이 깨어나는 것보다는 더 오랜 기간이 걸린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그릇된 삶의 태도가 죽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낡은 사고방식부터 뜯어고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5)

이세벨의 영에 말려들지 않고 평안히 웃을 수 있는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머무는

신앙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다.

 

 

- 교회를 뒤흔드는 악령을 대적하라! / 순전한 나드

 

 

이세벨의 영 - 프랜시스 프랜지팬

 

가르침이 열매를 맺으려면 교회 안에 겸손한 성품을 가진 신자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오직 겸손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를 열어주며 악령에 사로잡힌 교회를 구출해 낼 수 있는 길도 열어준다.

겸손의 태도만 유지한다면 악한 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교회도 구출될 것이다.

 

 

▒ 이세벨의 영을 이해하기 ▒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 2:20)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주의 선지자를 죽인 바로 그 영이 "이세벨의 영"이다. (왕상 9:14)

이세벨의 영으로 말미암아 온나라가 타락할 정도로 이세벨의 영은 강력한 악령이다.

"이세벨"을 그 문자대로 번역하면 "독립적"이라는 뜻이다.

즉 함께 일하기를 거부하고 삶의 동반자가 되기도 거절한다.

이세벨은 상대를 휘어잡고 조종하기 전까지는 누구와도 상종하지 않는다.

물론 이따금 잘 협력하는 척하기도 하지만 이는 차후에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정략일 뿐이다.

그럼으로써 마음속으로는 아무에게도 순응하지 않는다.

 

 

▒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 하라! ▒

 

이세벨의 영이 침투하는 곳은 "개인의 영혼" 이라는 점이다.

이세벨의 영은 인간 내면의 성소, 즉 영혼으로 침투하여 그곳에 안착한다.

특히 악한 것에 대해 아량을 베풀면서 관대한 척하는 자들의 심령 안으로 파고 들어온다.

 

현대에 "이세벨의 영"은 연예, 오락, 유흥 등의 사업을 통해 계속 인간의 영혼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다.

심지어는 옷의 유행에도 침투하여 이세벨의 영은 의기 양양하게  거리를 활보하며 자신의 위력을 과시한다.

이세벨의 영은 대학의 문화와 사고방식 안으로도 침투하여 학생들을 휘어잡는다.

사탄은 이미 형대의 대중문화를 거머쥐고 있다.

정치가든지 설교자든지 누구라도, 이세벨의 악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살해하는 낙태의 배후에서, 부부사이의 갈등의 배후에서, 교인들 간에 서로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조장하는 배후에서 이세벨의 영은 작용한다.

 

 

▒ 공격에 취약점을 드러내는 목표들 ▒

 

이세벨의 영은 교회의 남성들을 위주로 공격한다. 특히 야심만만한 자들을 공격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취약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주 세련된 자질을 가진 사람이 경배와 찬양 인도자가 되려는 야망을 펼친다면

이세벨의 영은 그 사람을 공격할 것이다.

이세벨의 영은 또한 목사를 공격할 기회도 엿본다.

특히 매우 권위적이며 고집불통인 목사일수록 더욱 이세벨의 영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갈수록 다른 목회자나 성도들로부터 고립된 외톨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세벨의 영은 교회의 여성들도 공격한다.

기도 모임의 인도자들, 교회의 사무원들, 예배 인도자들, 그 이외에 기타 교회의 지도자들,

이들 모두는 '이세벨'이라는 악령의 공격 목표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은 영적 전투에 관한 지도편달과 아울러 경고를 종종 받아야 한다.

모든 교회의 직분자나 사역팀의 일원들이 "영적 전투 팀"에 가담하지 않는 이상 어느 교회라도 바로 설 수 없다.

 

 

▒ 이세벨이 증오하는 것 ▒

 

이세벨은 겸손함을 증오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기를,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자는 겉모양이 위대하게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 내면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겸손한 기독교인들은 흔쾌한 마음으로 자진해서 교회 안의 다른 사역과 조화를 이루며 사역한다.

이것이 종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의 척도는 얼마나 능력을 발휘하느냐가 아니라 과연 얼마나 온유한 심정을 가지느냐에 달려있다.

 

이세벨은 기도를 증오한다.

중보의 기도는 이세벨로 하여금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중보의 기도는 이세벨의 영을 묶고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킨다.

부도덕을 대항하여 기도할 때에 악령은 전투력을 상실한다.

겸손함을 갈구하며 기도하면 악령은 무기력하게 되고 그로써 우리는 이세벨의 영을 짓밟을 수 있게 된다.

 

이세벨은 선지자들을 증오한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그녀를 대적하여 외치기 때문이다.

이세벨은 선지자적 메세지에 대항하도록 군중들을 선동한다. 선지자가 외치는 메세지가 이세벨의 영의 귀에

상당히 거슬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세벨의 진정한 원수는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세벨의 궁극적인 증오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증오이다.

그녀는 범죄한 인간들에게 넘치도록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각별히 싫어한다.

하나님이 약하고 천한 자들을 사용하시는 것도 미워한다. 왜냐하면 형편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에게

당하는 것이 망신스럽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세벨은 순수하고 경건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를 증오한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거룩하게 하여주옵소서.

우리의 의로움의 수준을 하나님의 의로우신 정도로까지 끌어올려 주옵소서.

청순함, 순진함, 온유함, 거룩함을 유지하게 도와주옵소서.

마음이 청결한 자 되기 원합니다.

행위와 생각에서 이세벨의 영을 용납한 것을 회개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주님의 권세를 사용할 권한을 이어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세벨의 영이라는 정사를 묶습니다.

우리나라와 우리 지역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악령의 정체가 드러나고,

원수 마귀의 요새가 무너져 내리게 허락하여 조옵소서.

주님,

영적인 영역에서 악마의 요새가 견고히 서있는 곳마다 주님이 방문하시고,

성령의 검으로 무너뜨리시며, 이세벨의 집을 포위하시고,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시며 주옵소서.

주님,

배우자된 남편과 아내에게 진실함으로 대하는 자 되게 하시고,

눈으로나 생각으로나 행위로나 범죄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독신이건 기혼이건, 모두가 정결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모든 이들을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덮고 보호해 주옵소서.

겸손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심령에게 허락하시는 희락을 맛볼 수 있게 하시고,

야심과 교만한 마음을 물리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순전한 나드/ 김유태 옮김에서 발췌, 편집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의 참 뜻 - 프랜시스 프랜지팬

 

 

 

'엘리야의 영'과 '이세벨의 영'과의 싸움이라는 아주 오래된 전쟁이 있다.

엘리야는 하늘의 관심사를 대표하는데, 이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부르심이다.

반대로 이세벨의 영은 회개를 방해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세벨이라는 권세와 영적 전쟁을 벌일 때에 정욕과 계략을 피한다해도 두려움과 낙망에 짓눌리는 날에는

살아남기 어렵게 된다.

일단 마음이 두려움과 낙담으로 무기력하게 되면 승리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어있다. (왕상 19:4)

 

▒ 엘리야의 영과 예후의 의분 ▒

 

엘리사에게 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엘리야의 영은 세례요한에게도 임하여 요한을 일깨워 영감을 불어넣고

불붙는 심령으로 변화시켰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11:14, 17:11-13)

요한과 엘리야는 그 겉모습마저도 닮았다. 엘리야의 영이 사명을 받고 다시 세상에 보내진 것이다!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오늘날 하나님은 엘리야, 엘리사, 세례요한 같은 예언자들의 군대를 일으키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엘리야가 온다면 이세벨도 동시에 함께 등장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세벨의 영이 이렇게 드러내놓고 활개치는 것을 보면 종말이 성큼 가까이 다가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전 세계적인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는 예언자들이 우후죽순같이 일어나리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실로 이세벨의 영이 통치하는 기간동안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예언자적 기름부음은 받지 않을 수 없다.

 

 

구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세벨을 어떻게 멸망시켰는지 본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 지라 이르되 그녀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녀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녀의 시체를 밟으니라. (왕하 9:30~33)

 

오늘날 이세벨의 영과 영적 전쟁을 치르는 우리들에게 뭔가 예후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

이세벨에게 사로잡힌 '인간'은 불쌍히 여겨야하지만 악령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악령과는 타협하지도 말고, 개선될 가능성도 열어놓지 말고, 동정심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예후는 '그녀의 시체를 밟았다.' 그녀가 피를 흘리며 거의 쓰러져 죽어갈 즈음에 무자비하게 말발굽으로 짓밟고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다.

 

지금은 '예언의 영'들이 합심하여 하나로 뭉칠 때이다. 엘리야의 기름부음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고 예후의 의분으로 일어서서 이세벨의 영에 대항하자.

바로 지금, 예수님의 보혈로 온갖 죄의 더러움을 씻고, 이세벨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그녀의 보물을 강탈하자!

 

▒ 이세벨의 영향권으로부터 빠져나오기 ▒

 

죄를 회개하는 것과 그 죄의 원인이 되는 견고한 진을 무너트리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죄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견고한 진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한다.

나의 경우에 성령의 역사가 1971년부터 임하기 시작했는데 이세벨의 영향권으로부터 빠져 나오도록

하나님은 나를 도우셨다.

나의 회개기간은 40일이나 이어졌다.

그 기간 동안 이세벨의 영을 쉽게 용납하던 나의 심정이 바뀌었다.

그리고나니 이세벨이 영이 거하던 견고한 진이 무너졌다.

물론 나는 그 이전에도 모든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40일 동안 내가 벌인 작업은 단순한 죄의 회개가 아니라 그 죄를 용납하던 나의 못된 본성을 고치는 일이었다.

사탄의 견고한 요새를 허무는 비결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를 더럽게 하고 짓누르는 그릇된 사고방식,

바로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릇된 사고방식이 나의 본선 속으로 들어와 집을 짓고 주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래서 회개하는 기간동안 나의 유일한 목표는 "심령을 새롭게 하는 것" 이었다. (엡 4:23)

 

악령의 요새를 분쇄하는 사건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성령은 내가 구원받기 이전에 저지른 죄들을 상기시키셨다. 이는 주로 청소년기에 저지른 죄들인데

매일 꿈을 통해 하루에 두 세번씩 내가 저지를 잘못들이 생각나도록 해주셨다.

주님께서 과거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들추어 내실 때마다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그 사건들을 덮었다.

기도할 때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악령의 요새의 돌이 하나씩 뽑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어느 날 주님은 그 악령의 요새가 무너졌음을 시사하는 한 꿈을 꾸게 해 주셨다.

그 꿈에서는 두 사람이 말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사람은 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이 대화중에

안좋은 말을 사용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아기가 그런 악독한 말을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해했다.

그러나 아기는 순진하기에 악독한 말의 뜻을 모를거라고 하면서 스스로 안심시켰다.

꿈속에서 나역시도 그 악한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함을 확인하고는 하나님이 내 심령 안에

새로운 순결함을 넣어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꿈에 나타난 아기는 나의 새롭게 된 심정을 상징한다. 사실 그 당시는 이세벨의 영이라는 게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내 심령 안에 그러한 악령을 대적할 수 있는 저항력을 길러주셨던 것이다.

 

 

▒ 이세벨의 영과의 첫 대면 ▒

 

1970년대에 나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가 풍성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한 기관에서 목회를 했다.

그 기관에는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 기도회, 아름다운 경배와 찬양, 엄청난 헌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능력이 나타났다.

마치 주님께서 모압 평지에서 야곱에게 베푸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들소의 힘으로 강력하게 밀어

붙이시는 것을 체험했다.(민 23:22)

그 당시 우리를 대적하는 저주나 불길한 징조는 전혀 없었고 하늘의 무수한 축복으로 큰 성공이 발치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발람이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모압의 딸들로 유혹하라고 권했듯이, 이세벨의 영은 우리에게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원수 마귀는 직접적인 공격을 개시할 수 없는 경우, 죄에 빠지도록 유도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빠져들게 하는

수법을 쓰기도 한다.

그래서 이세벨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면 성적인 타락에 대해서 그냥 눈감아주게 되어있다.

내가 몸담은 집단에도 그런 일이 발생했다. 나는 우리 잡단의 창설자를 직접 만나서 그런 음란한 행위를 지적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 만날 때에 아버지를 대하듯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세 달 후에 나는 우리 잡단의 모든 지도급 인사들을 방문하여

성적 범죄의 영을 용납하는 것의 결말은 결국 질병과 죽음 뿐이라고 간절히 눈물로 호소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2~23)

 

그러나 그들도 역시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달 뒤에 나는 리더쉽의 위치에서 쫓겨났고

결국 그 모임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떠난 후 몇 달 뒤에 그 창설자는 아내와 이혼했고 이혼한지 1년 후에 비서와 재혼했다.

그러나 그는 2년이 채 못되어 전립선암으로 죽었다.

 

위의 경험은 한편으로는, 참혹한 것이기는 했으나 동시에 내 심령을 밝히 조명해 주는 사건이었다.

이세벨의 영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기간이었다. 경솔하고 망령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특별히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지 않으리라 착각하며 안일하게 죄를 범하는 순간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이 와서

덮친다는 진실도 뼈저리게 느꼈다.

 

예수님이 최고의 신뢰를 두며 즐거움으로 삼는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나는 '거룩한 두려움의 참 뜻'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엄한 죄(sin of presumption)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의 정반대이다.

 

 

▒ 기도를 통해 풀리는 영혼 ▒

 

나는 1985년에 상담을 하다가 이세벨의 영이 동성연애의 영을 수하에 부리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주님은 이세벨의 영과 맞서 싸우라고 지시하셨고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 결과, 한달 동안에 세 사람이 동성애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그 다음 달에는 지역 케이블 방송이 음란 방송 채널의 방영을 중단했다.

성중독증으로부터 자우로워지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우리 사역 센터로 전화를 걸어왔다.

심지어는 목사와 사모들도 전화로 죄를 고백하고 악령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 당시 이세벨과의 전쟁을 통해 해방된 사람의 숫자는 참으로 많았다.

 

때를 같이 하여 우리 가족과 교회를 향한 적의 공격이 심화되었다.

특히 남의 실수만을 골라서 찾아내는 악령(이 귀신은 한달이 지나서야 분별이 되었으나)

이 교회에서 분열과 분쟁을 가져왔다. 깊이 사랑하던 사람들이 원인모를 증오로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 안에는 의심이 쌓이게 되었고 심히 흔들리는 동요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세벨의 영과 대항하여 영적 전쟁을 지속했다.

 

그러던 어느 저녁 무렵, 이세벨의 영은 내 침대 발치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온 몸이 마비되는 현상을 느꼈고 도움을 청하려 하였으나 입에서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와 가장 절친한 친구들을 이간질 했던 바로 그 악령이 내 눈 앞에 서있는 것이었다.

나는 내 육신의 생기가 전부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을 의지하며

그 자리에서 버텼다.

귓가에 직접 들린 소리는 아니었지만 이 정사와 권세를 장악한 악령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내 심령에 심었다.

"네가 지금 하는 대로 중보의 기도를 계속하는 경우 나는 너를 죽이고 네 교회를 벅살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악령은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거의 꼼짝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낙담하는 생각들로 얽혀버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왜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기도를 해야하나? 그들은 언제 돌아서서 나를 배반할지도 모르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인데!"

그러나 성령님께서 개입하셔서 공연한 고생을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게 하셨다.

 

하지만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협박은 공갈이 아니었다.

일주일이 채 안되어 우리 교회의 한 여성도가 나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남편이 마약을 하고서 그녀와 자식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그녀와 자녀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그날 밤 새벽 한 시에 격양된 목소리로 그녀의 남편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은 총기 34종을

소지한 사람인데 아내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 아내가 숨어있는 처소를 대지 않으면

우리 교회 성도들을 전부 다 집단 살해해 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갑자기 그 순간 이세벨의 영이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동일한 말이었다.

이세벨의 영이 하수인을 제대로 찾은 것이다!

 

나는 토요일 밤에 기도 처소로 들어갔다. 밖을 내다보니 약간의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기이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주님, 이 눈이 폭설로 변하여 내일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해주시옵소서"

솔직히 그런 기도는 목사가 드릴 기도는 아니다! 하여간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눈보라는 폭설로 변하여 주일 아침 예배시간까지 25센티미터의 눈이 내렸다.

우리 교인들은 그날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으나 우리를 협박하던 그 사람은 도로가 패쇄된 관계로

그날 교회로 침입해 들어오지 못했다.

그날 우리들은 교회에서 이세벨의 영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었다. 그리고 결론을 말하자면,

결국 그 남자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세벨의 영이라는 악령과의 싸움에 대한 우리의 증언은 간단하게 예수님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길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저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눅 10:19)"

 

 

- 교회를 뒤흔드는 악령을 대적하라! / 순저한 나드

 

 

지금 드러나고 있는 인본주의 영들이 거의 이영들인것이니 이글이 진짜 필요하고 철저한 회개와 함께

아가페 사랑의 성령안에서의 겸손한 믿음과 순종의 행함을 위한 십자가의 도의 실제적인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