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주의의 남용, 교리와 감정 고전14:29
Charismatic abuses
사회자 : 오늘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 지속론'에 대해 다룹니다. * ↔은사 중지론
존 목사님, 오늘날의 미국의 은사주의 운동 Charismatic movement 에서 보이는
은사의 남용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존 파이퍼의 답변 :
네 은사운동의 남용 Charismatic abuses 에 대해 말씀드리겠지만
먼저 꼭 명심할 게 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의 남용에도 은사의 남용이 있지만,
비은사주의에도 어떤 상대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은사주의가 은사를 너무 선을 넘어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이 문제라면,
비은사주의는, 성령의 은사나 감정적 요인을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은사주의의 문제점을 살피기 전에,
먼저 이 점을 언급함으로써, 우리가 균형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정의 문제를 두고 볼 때,
비은사주의 교회도, 은사주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잘못이 있을 수 있으며
일각에서는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전제를 가지고서, 본론입니다.
은사주의적 남용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1) 교리적 남용과 doctrinal abuses
일부 은사주의 운동이 성경보다 <개인적 체험>을 더 앞세운다는 것.
성경도 믿지만 실제로는 개인적 체험이나 영적인 경험을 더 앞세운 다는 것.
2) 감정적 남용 emotional abuses
이것 역시 <감정>을, 성경보다 더 앞세운다는 것.
성경을 안 믿는게 아니고 성경을 믿지만, 감정을 더 사역에 우대하는 것.
▲1. 교리적 남용
교리적 남용, 감정적 남용이 다 성경에 나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내용이, 21세기에 새로 나타난 게 아니라
1세기 초대교회 때부터 다 있었습니다.
놀랍죠.
그리고 그 남용에 대한 지침도 성경에 다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일4:1~2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무엇을 말합니까?
사도 요한은 당시 일어난 영적인 운동과 그들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이며 교리적 테스트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테스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육신의 교리로서 초자연적 주장들을 테스트합니다.
즉, 예수님을 어떤 영적인 존재로서만 믿고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아울러 육체적 실재 이셨다는 것이죠.
해석을 첨가하면,
기독교 신앙을 너무 영적/신비적으로만 몰고가지 말고,
현실을 기반한, 성육신 하신 예수님처럼,
기독교 신앙은 육신으로 현실을 사는 것이지,
영적으로만 신비주의에 깊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현재 일부 은사주의 교회 안에 많은 교리적 남용이 있고
거기선 교리 doctrine 보다, 개인적 체험 experience 을 높이며
교리의 중요성은 최소화됩니다.
그것이 많은 은사주의 교회들의 큰 결함입니다.
그들은 주장하길,
만일 교리에 맞추어서만 성경을 공부하면
지성과 마음의 충돌로 인해 성령을 소멸하고
신자의 심령 안에 활력, 생기가 많이 소멸될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제 생각에 이런 생각은 잘못이며 체험과 경험의 남용입니다.
성경과 성경적 원리 가운데서 은사주의 운동을 펼쳐야 하는데,
체험이나 경험을 너무 높인 결과
성경적 교리를 버려야 할 것 정도로 취급하거나
'개인적 체험, 경험’을
교리의 대체물 alternative 로 삼는 것입니다.
즉 성경적 교리, 성경적 원리는 무미건조하다고 무시해버리고,
성경적 원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자기 개인적 체험’을 대체해 놓고 말았습니다.
제 존 파이퍼의 개인적 경험을 말해 보면,
한 번은 은사주의 예언 모음에 참석했었는데
거기서는 성경을, 은사의 나타남을 끌어낼 수단으로 취급했습니다.
전통 교회나 예배, 집회가 성경과 말씀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반면에
극단적 은사주의 집회에 가 보면, 말씀은 뒷전이고
‘은사의 나타남’이 (보통 설교 후에 하는 ministry time)
집회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건 은사운동의 남용입니다. *남용 : 필요이상으로 많이 씀
거기서 실제로 원하는 것은 불꽃놀이 같은, 화려하고도 뜨거운
외적인 가시적인 은사의 나타남입니다.
그렇지만 불꽃놀이가 끝나면, 곧 허전하고 쓸쓸해지기 마련입니다.
즉 누군가가 쓰러지거나, 웃거나, 몸을 떨거나, 멍하니 손을 높이 치켜들거나
특별한 예언을 듣는 것을 원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환상을 보면서 예언을 하는데,
‘한 붉은 셔츠를 입은 사람은
다음 주에 아르헨티나로 갈 것입니다!’
이런 예언은 분변을 해야 하며, 테스트를 해야 할 터인데
예언자는 마치 그게 진리인 것처럼 혼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선포합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길 원하며
성경은, 그저 외적 은사, 즉 현상을 일으킬 수단으로 성경을 이용할 뿐입니다.
본문에는 관심이 없지요. 설교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습니다.
성경이나 설교는, 그저 사역시간에 있을 어떤 현상을 위한
마치 영화의 예고편 정도로 취급해 버립니다.
말씀은 그저 마지막에 있을 불꽃놀이(은사의 나타남) 시간을 위한
준비순서 워밍업에 불과하게 취급하죠.
그들이 중요시 여기는 예배의 하이라이트는
그들은 그것을 ‘사역시간 ministry time’이라고 부르는데
설교를 마치고, 다같이 통성기도를 하면서
방언을 하거나, 예언을 하거나, 쓰러지거나, 어떤 외적 현상이 ㄴ타나는 것!
거기에 오직 치중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
은사주의 운동의 남용,
즉 성령의 은사를 올바르게 정도껏 쓰지 않고
선을 훌쩍 뛰어넘어 쓰는.. 그래서 남용 abuse 이라고 봅니다.
제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런 극단적 은사주의 집회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령 어떤 종류의 폭죽(은사의 나타남)이 터지든
그 폭죽은 왜곡되고 잘못된 용도로 사용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설령 그것들이 진짜 성령의 은사의 나타남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왜곡되고 남용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집회의 강사는 하나님 중심적이거나
그리스도를 높이거나
성경말씀으로 충만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기준은 다 간과하고, 오직 ‘은사의 나타남’에만 치중하니까요!
그래서 저 존 파이퍼는 이렇게 합니다.
매우 현실적으로, 은사주의자들과 싸우려 하기보다
진리를 퍼트리기 위한 운동을 계속 합니다.
저는 복음 중심적이고
그리스도를 높이며
성경으로 충만한 칼빈주의적 진리를 모든 곳에 퍼트릴 겁니다.
또한 모든 은사주의자들 면전에 그것을 들이댈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실제 거기 존재하는 성경적 교리의 체계를 품는다면
그것이 그들의 모든 경험을 바른 궤도로 이끌어
진리의 태양을 중심으로 돌게 할 것입니다. *천동설이 아니라 지동설
그래서 일부 극단적 은사주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성경적, 교리적 남용을 하기 쉬우며
즉 성령의 은사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선을 넘어서 오버하기 쉬우며
그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2. 감정적 남용
성경에 기반한 헌신보다
순간적 감정으로 인도받고자 한다면, 이는 잘못입니다.
고전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무슨 뜻인가요?
교회 안의 몇몇의 감정적 도취 상태가
질서에 관한 성경적 원리를 능가했다는 것입니다.
즉 예언을 하더라도 질서 있게 해야되는 게 성경적 원리인데,
예언을 받은 사람이 너무 자기 감정에 도취되고 업up된 나머지
무질서하게 자기 예언만, 예배시간에 길게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작용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권면한 것이지요. 그래서
-한 사람씩 예언해라
-예언하는 사람은 예언하는 사람에 의해 재제를 받아야 한다.
즉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너무 감정에 도취되면, 즉 emotional abuse가 일어나면
‘나한테 조용히 하라 하지 마세요
나는 방금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받았어요!’
그리고는 몸을 떨면서 하나님에게서 온 말씀을 말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감정을 우선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보세요, 당신이 진짜 예언자라면
당신이 성령을 받았고 그게 진짜라면
예언하는 자의 영은, 다른 예언하는 자에게 제재를 받지요
당신은 앉아서 자기 차례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과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입니다.
그러니 예언하는 이여, 앉아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세요!’
라고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성경적인 행동 원칙들이
사람의 몰입된 감정(엑스터시)보다 더 준수되어 져야 하는데’,
이것이 성경적인데,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의 외적 은사로 자기가 감정적으로 극도의 엑스터시 한 상태에 이르면,
행동이 좀 흐트러져도,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라고 여깁니다.
왜냐면 성령은사에 의한 자기 감정을
어떤 성경적 일반적 원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데,
존 파이퍼는 이를 ‘감정적 남용 emotional abuse’라고 여깁니다.
방언이나 예언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과도하게 별 이상한, 기괴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고전14장 본문에서, 감정과 행동
그리고 감정과 질서의 관계를 배워야 합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되, 질서있게 하고
너무 감정을 과도하게 표출하는 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경에 기반한 지혜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원하며, 말씀에 대해 참되게 원하며
일순간 어떤 사람의 감정적 격정이 아닌
말씀의 적용이 교회와 성도의 삶을 다스리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교리적 남용과 감정적 남용은
즉 선을 넘은 과도한 은사주의 운동은
카리스마틱 교회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져야 합니다.
반대로 서두에 언급했지만
물론 비은사주의 일부 교회에도 ‘감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정의 부재인데,
어쩌면 이것은 감정의 과잉보다 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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