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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하는 사랑 / 데이빗 윌커슨

LNCK 2018. 6. 29. 20:06


징계하는 사랑

데이빗 윌커슨   Oct. 21. 2010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은 당신은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징계입니다.

 

당신은 과거와 현재의 죄들 때문에 당신 영혼 안에 하나님의 화살을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고 잘못으로부터 돌이키기 원한다면

그분의 징계하시는 사랑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고침을 받게 되나
그분의 크신 자비와 동정심으로 고쳐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이방인들이 그렇듯이 그분의 진노를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분이 사랑스런 손길로 치시는 훈련의 막대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의 고통은 잘못내린 결정에서 온 것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하나님이 결혼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사람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한계상황으로 몰아넣으며
마음 아프게 합니까?

 

하지만 많은 경우 부모 자신들의
과거의 죄와 태만과 타협으로 인해 생긴 일입니다.

당신이 가장 밑바닥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때,

그 때가 깨진 가운데 회개와 믿음 안에서 주님을 구할 때입니다.

 

성령의 힘을 새롭게 주입 받을 때입니다. 당신 안에 영적 힘이
흘러넘치도록 새로워지고 회복되어야 할 때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신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분은
당신에게 그분의 힘을 부어주십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시138:3, 7-8).

크리스천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의인이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유대인들은
번영과 건강을 경건한 것과 연관 지었습니다.

 

당신이 부유하고 건강하거나 또는 다른 면으로 복을 받았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는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하나님이 절대로 당신이 고통당하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면 그분이 달려와 즉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동행하였으며

돌에 맞고, 조롱당하고, 고문당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했습니다(36-38절).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했던 바울 자신도 파선을 겪고, 돌에 맞고, 채찍질당하고,

죽도록 내버림을 받고, 강도당하고, 투옥당하고 핍박받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믿음을 시험받고, 정화되고,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험과 시련을 통하여 우리 마음가운데
뭔가를 심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주 예수님, 당신은 나의 보호자이시고 나는 당신이 내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통치하신다고 믿습니다.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당신이 허락하셨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시는 당신의 목적을 신뢰합니다. 그 일로 내가 어떤 교훈을 받기 원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내가 의안에서 행하고 내 마음속에 당신의 기쁨이 있다면

내가 살든지 죽든지 당신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어떤 영광을 예비해 놓으셨을 수도 있고

내 유한한 마음이 이해할 수 없는 영원한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어떻든지, 나는 ‘예수님, 살든지 죽든지 나는 당신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질투는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모든 하늘에 속한 목적을 앗아갑니다  

 

 데이빗 윌커슨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양심이

화인을 맞게 되면 질투의 영을 대적하여

방어할 방법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됩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사무엘상 16:14).

 

글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악령을 사울에게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단지 마땅히 일어날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계속되는 불신에 매인 사람이 이 지점,

즉 율법주의에 의존하고, 분별력을 잃으며, 양심에 화인을 맞는 상태에 다다르게 될 때

그런 사람은 침략해오는 질투와 시기의 영을 막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이 두 개의 영은 침입하는 모든 영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이때쯤, 사울은 사실 보는 사람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마귀에 사로잡혀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의 종들은 너무나 겁이 나서 사울의 영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윗에게 하프를 연주하며 시편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물론 다윗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기름부음 받은 음악은 사울의 영혼에 평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왕은 너무나 고마워서 다윗을 군대장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전장에서 용기와 뛰어난 전술을 보여주자

사울은 비정상적으로 점점 그를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질투는 성도를 끔찍한 존재로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아무도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질투심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참소합니다.

 

그런 죄는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데도 말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여깁니다.

그런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항상 자기를 질투하고 있으며

언제나 자기에 관해 수근거리고 끊임없이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고 믿습니다.

 

질투는 단지 사람들이 겪는 단계 중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옥의 영입니다.

질투는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모든 하늘에 속한 목적을 앗아갑니다.

질투는 자기 자신의 작고, 육적인 전쟁에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여러분은 질투를 느낄 때 어디로부터 이러한 질투의 영이 오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겪었던 시험의 때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반응했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다짐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제때 나타나시지 않았다는 생각을 품었습니까?

 

사울의 불신의 영이 맞이하는 비극적인 종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영원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으로 의논한 사람은 무당, 즉 마녀였습니다.

그의 서글픈 마지막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떠나서 다시는...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삼상 28:15).

 

그러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패역함에 대한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는 사울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완고했고 완고한 마음은 자비를 갈구하지 않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신이라는 마법의 주문을 깨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율법주의의 사슬을 끊으시고 질투의 속박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불신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의 미래, 자유, 구원을 모두 예수님의 보살핌 안으로 던져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정확한 시간에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그분을 신뢰하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당하는 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믿음을 굳건히 지키고

주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존귀케 될 것임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고 계십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