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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보다 인간을 강조하는 출판계와 기독교 왕하3:27 스크랩
십자가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대한 가장 위대한 간증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언급된다.
예수님께서 또한 왕 중의 왕이시며 모든 통치와
권세와 지배 위에 뛰어난 분이라는 것에는 전혀 의심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다른 명칭들보다 '어린 양' the Lamb 이라는 명칭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다.
예수님은 그분의 상처 자국을 치유할 능력이 있으시지만,
그분은 그것들을 영원히 지니고 계신다.
그것은 승리의 표시가 아니던가!
하나님의 상처 자국들은 그분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다.
심지어 천사들이 아직도 십자가를 보며 놀라워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든 피조물들이 그분에게
그렇게 끔찍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신 -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느 미국 목회자) 멜 깁슨이 만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시사회에서 관람한 것이었다.
이 시사회에는 주로 예능인들과 그런 사업에 몸담고 있는 중역들이 참석하였다.
그 작은 방안에 있던 사람 중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도 많았다.
우리가 본 영화에는 특수 효과나 음악이 없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직 손잡이만 있는 채찍으로 맞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것이 단순히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또한 완성되고 있는 하나의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나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나는 이것이 단순히 영화이며, 주님은 지금 부활하셔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것을 계속해서 되새겼지만, 나의 왕이 그런 식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불이 켜지고 멜 깁슨이 영화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왔을 때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사람이 마치 불빛에 놀란 사슴처럼 보였다.
울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멜 깁슨은 먼저 우리의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와이노나 저드 Wynonna Judd가 힘겹게 어떤 말을 꺼냈다.
그는 마치 신음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다른 모든 사람 또한 신음하다시피 하면서 말을 했다.
나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이러한 영향력을 끼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또한 나에게 이러한 영향력을 끼친 영화도 없었다.
나는 이 영화의 완결판을 보지는 않았다.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도 힘겨웠다.
영원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볼 때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기억나게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은 더 이상 십자가 위에 계시지 않으며
보좌 위에 앉아계신다고 말하는 것을 듣곤 한다.
그들의 말은 십자가에 대해서는 덜 강조해야 하며,
이제는 그분의 권세를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
어떤 면에서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우리가 예수님을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 옳다.
그분의 이름은 '스스로 있었던 자' (I Was)가 아니라,
'스스로 있는 자' (I Am)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진정으로 알기 원한다면 현재의 그분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십자가를 덜 강조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현재의 주님위에는 영원토록 지속될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있다.
따라서 십자가를 기억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사실, 성경의 어느 구절이 우리가 그분을 따르기 위해
매일 우리의 보좌를 져야 한다고 지적하는가?
그런 구절은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을 따르기 위해
매일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을 받았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을 따르며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희생하는 삶, 즉 우리의 생명과 포부와 욕망들을 내려놓는 삶이다.
십자가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토대임에도 불구하고,
선포되는 수많은 설교 속에서, 그리고 출간되는 수많은 책 속에서
이는 좀처럼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위대한 사회이어야 할 교회가 도덕적으로 붕괴된 이유 중의 하나다.
교회의 도덕적 붕괴는 또한 일반적인 사회의 붕괴를 반영한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 이라고 선포한다.
따라서 십자가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분의 능력만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책을 읽었으며, 가능한 한 훌륭한
기독교 고전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참된 고전들을 보라.
그 안에는 한 가지의 주제가 깔려있다. 바로 십자가다.
당신은 저자들이 십자가에 관하여 글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정말 십자가를 지는 참된 삶을 살면서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주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정말 진귀한 것으로, 우리 시대에 반드시 회복되어야한다.
예수님이 계시되는 곳에서는 항상 십자가의 삶이 나타난다.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의 계시가 좀처럼 잘 보이거나 들리지 않지만 말이다.
오늘날 여러 사람에게 내가 받는 대부분의 책은 그분에 관한 것보다 우리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책들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수준이 낮다.
1988년에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이 우리 안에서 어떤 분이신지를 강조하는 대신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지를 '지나치게 강조' overemphasize
함으로써 생명의 길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지나친 강조' 다.
우리가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한다면 결코 부름을 받은 존재로
변화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참된 제자의 삶, 즉 참된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얻느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신 것 때문에
그분이 무엇을 받기에 합당하신지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화해시키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처소와 그분의 몸이 될 수 있게 하시고,
또한 그분이 현재 이 땅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확장시킬 수 있게 한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십자가다.
자기 의지, 자기 추구, 그리고 자기 승진은
우리 기독교의 가장 치명적인 원수들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의지를 제단 위에 내려놓아야 한다.
자기 의지가 온전히 죽을 때에만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다.
이 둘은 항상 충돌 하고 있으며 결코 공존할 수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10:38~39)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오늘날 많은 사람이 사도 사역을 추구하고 있기에
우리가 사도의 위임과 메시지를 가지고 시작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에 관해서는 특별히 고린도전서 2장 1-5 절에서
사도 바울이 명확하게 표현해놓았다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한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 (고전 4:20)
성경을 관통하여 계시된 기본적인 영적 원리는
능력이 희생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유월절 희생에서 심오하게 실증되었으며,
심지어 열왕기하 3장 27절에서 나오는 것처럼 악한 자들도
이 원리를 이해하고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자기 (모압 왕)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이방 왕이 드린 이렇게 악한 희생이
그렇게 강력한 능력을 나타낼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은 얼마나 더 큰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
사탄 숭배적 희생에도 능력이 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 어떤 희생보다
더 강력한 희생을 치르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다.
우리가 우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는 정도에 따라
우리 삶 속에서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모닝스타 저널28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이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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