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어진 사랑"의 요새를 주의할것 스크랩
프란시스 프랜지팬 <영적 전투의 세영역>
여러분의 사랑은 날로 더 부드럽고, 더 밝으며, 더 담대하고, 더 눈에 띄도록 자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갈수록 더 차별하며, 더 계산적이 되며, 더욱 몸 조심을 하고 몸을 사리십니까?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기독교는
오직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만큼 참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눈에 띄도록 점점 더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식어진 사랑"의 요새가
여러분 속에서 조성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용서못함을 주의하라!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영적 싸움의 한 주요한 부분은 교회 사이의 상호 관계의 영역입니다.
사탄은 교회가 스스로 분쟁하여서는 설 수 없는 것을 잘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때의 축복과 영적 돌파의 한 철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 전체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예수님은 단합된 범 도시교회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이 연합되어 승리하는 교회의 특징은 헌신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대의 마지막 때에 늘어나는 불의로 인해 기독교인의 참 사랑은 심한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쓰디 쓴 감정은 식어진 사랑의 요새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증세입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쓴 감정을 품는 마음 가짐을 회개하고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마음 아픈 경험을 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이 시험에서 낙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온생애가 쓰디 쓴 감정과 원망에 삼켜 버리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서로 용서하며 살기 시작할때,
여러분은 쓰디 쓴 감정과 이를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게 하는
"식어진 사랑"의 견고한 요새를 실제적으로 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신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
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0-12)
아주 분명이 해두고 싶은 것은 헌신이 없는 사랑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사랑하는가는 여러분이 얼마나 깊이 헌신하느냐로 나타납니다.
저는 "한 때 사랑했지만 상처만 입었다."라든가 '기독교인으로서 섬기는 일에 몸 바쳤으나
사람들이 나를 이용만 했다."는 사람들의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전혀 깨닫지도 못하면서 헌신이라면 뒷걸음칩니다.
겉으로는 그들이 차겁게 된 것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교회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으며 십일조를 드리고 찬송을 하는 등 기독교인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뒷걸음 쳤습니다.
예수님은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마18:7)고 말씀하셨습니다.
살다보면 선한 사람들마저 어려운 일을 겪는 날들을 만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윗돌에 걸려 실족하지 않고 작은 돌들에 걸려 실족합니다.
실족은 걷기를 그치고 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다른 이의 약점이나 죄 문제에 걸려 실족한 일이 없으십니까?
다시 일어나 사랑하기를 전처럼 계속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실족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좇아 행하던데서 어느 정도 뒤로 물러나게 되지는 않았습니까?
성도여러분, 우리는 헌신에 대한 우리의 거리끼는 마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사는 동안 불완전한 사람들에게 헌신함이 없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목적의 충만함에 이를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헌신으로 여러분의 식어진 사랑의 요새를 파하십시오.
사랑하는것만큼 승리하실 수 있음을 실천적체험으로 살아내십시오.
가장 강력한 사랑의 요새를 구축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 예
수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타작기
사탄이 인간 본성의 육적인 면에 들어가는 예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에서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사리 보지 못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정확하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밤 그의 행동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베드로의 부인을 두려움이 드러난 것이라고 간단히 결론 내릴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본성이 두려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몇 시간 전에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왔던 무리들을 상대로 칼을 뽑았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두려움이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을 부인하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사탄에 의해 유도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사탄은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베드로의 심령속에 있는 어두움의 영역에 드나들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어떻게 사탄은 베드로를 넘어뜨렸습니까?
유월절 식사가 끝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 중의 하나가 자기를 배신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성경은 아래와 같이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눅 22:23) 아주 어둡고 우울한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몸서리치는 순간에 우리가 읽는 성경은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눅22:24) 그들은 충격과 실망의 자세에서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크냐는 논쟁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베드로! 물위를 걸은 자, 사도들 중에 가장 담대하고 가장 거리낌없이 말하는 그가 다른 사도들을 눌렀을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 중에 높이 돋보인 것이 그를 우월감에 쌓이도록 했고, 사탄이 이를 부채질하여 자만과 오만한 자세로 이끌어간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교만으로 높아진 베드로는 넘어지게끔 된 것입니다. 교만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따르면 패망의 선봉입니다. (잠 16:18) 교만은 사탄을 타락시킨 원인이며 또 교만은 사탄이 베드로를 넘어지도록 하는데 쓴 바로 똑같은 어두움입니다.
루시퍼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종교적인 교만과 질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잘 알았습니다. 사탄은 베드로를 닥치는대로 공격하고 죽일 권리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주님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나서야 베드로 사도를 공격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마귀가 허락을 요구했고 또 이를 받아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라
사탄이 베드로를 넘어지게 하는데 사용한 덫줄은 베드로 자신의 교만의 죄입니다. 싸움에 나서기 전에 우리가 어두움 속에 숨기고 있는 영역들이 우리가 앞으로 패배를 당할 영역들임을 인정하십시다. 종종 우리가 부딪치는 싸움은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어두움을 찾아내어회개할 때까지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 효과적으로 대비하려면 우리는 계속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우리의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첫 행동 지침이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때 마귀가 우리를 피해 달아날 것입니다. (약 4:7)
베드로와 우리 자신에게 좋은 소식은 사탄이 성도들을 멸망케 하도록 결코 허락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탄이 허락받은 것은 성도들을 밀알처럼 까부르는 것에 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각자의 속에는 밀알이 있습니다. 사탄의 이같은 형의 공격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뜻을 통해 허용된 것이며 그 결과는 교만의 마음을 씻어버리고 우리의 삶을 보다 더 겸손하고 보다 더 솔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너무 심하다고 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렇게하십니다.
우리의 껍질같은 겉사람의 본성은 새로 피조된 사람의 밀알같은 본성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을 돕기 위해 죽어야만 합니다. 겨나 껍질은 둘 다 필요했습니다. 즉 그들은 이생의 모진 요소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모저모로 우리를 참으로 쓰실 수 있게 되기 전에 우리는 껍질을 깨는 탈곡의 때를 지날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졌던 껍질의 본성은 주제넘은 것과 교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잘한 일들 때문에 그는 야심에 차고 자기 중심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교만이 깨지지 않은 자에게는 그것이 누구일지라도 그의 나라를 결코 맡기실 수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흑암 자체의 무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베드로를 공격하겠다고 허락을 구했을 때 예수님은 실재로 까부를 수는 있어도 그를 멸망시키는 것은 허락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노린 싸움은 지독했지만 정확히 미리 재여진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루어 드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속에 있는 어두움의 영역들에 관해 무지했으며 이같은 무지로 인해 그는 공격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기 쉬운 곳이 네 속 어디에 있는지 네가 아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에 무지하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드러내실 때, 주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마귀의 역사를 허무시려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최대의 방어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심령을 유지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회개가 필요한 곳을 보여주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호하려는 본능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 캄캄한 골방으로부터 작은 변호사가 불쑥 나서며 내가 맡은 이 피고는 별로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변호하는 시시한 소리를 잠잠케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변호인은 여러분이 죽는 날까지 여러분을 감싸려 할 것입니다. 또 그에게 귀를 기울이면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결코 보지 못할 것이며 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결코 직시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여러분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주 예수 앞에 내어놓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여러분을 참으로 변호해 주시는 대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은채 우리는 영적 전투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야고보서 4장 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대적하신다는 뜻). 이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면 그런데 우리가 교만하여서 겸손히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다면그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7절에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우리가 이 구절을 보면 대체로 그 자체가 영적 싸움의 승리를 보여주는 기념탑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피해 달아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회개, 겸손 그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는데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막연하게 순복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개개인이 싸우는 전투에서 정확하고 구체적인 영역을 주님께 순복하여 내어놓아야만합니다. 우리가 마귀의 능력을 대적하게 되는 때 이는 분명코 예수님께 순복한 심령으로부터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글 전체에 거듭해서 나오는 교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장차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이 원칙을 알며 이를 깨닫고 또 삶에 적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원칙은 이것입니다. 승리는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는 예수의 이름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완성은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에 의하여이루어집니다. 이 규정은 영적 싸움의 모든 면에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유일하신 응답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참으로 사탄은 여러분의 연약한 곳을 공격하도록 허락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성품까지도 덧입기 시작할 때 적은 물러갈 것입니다
사탄은, 여러분을 망치려고 짜놓은 상황들이 이제 여러분을 온전케 하도록 역사하고 있다면 여러분을 공격하는 일을 계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체험한 결과는 오순절 후 하나님께서 그를 쓰셔서 한 앉은뱅이를 고치셨을 때 나타났습니다. 겸손하게 된 새 베드로가 모여든 군중에게 말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2)
교만과 마귀를 이긴 베드로의 승리는 그의 입술에서 나간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되었고그의 심령속에 이루어진 예수의 성품으로 온전한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베드로 안에 있던 어두움이 빛으로 바뀌었으며 베드로 안에 있던 교만의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자리 잡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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