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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 / 앤드류 머레이

LNCK 2018. 7. 31. 17:32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

 

앤드류 머레이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 중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6:5)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이 가져오는 모든 권능과 축복에 참예하는 일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와의 그러한 연합은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죄와 죄의 권능으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또한 자신의 승리로 받아들임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날마다의 삶에서 육신을 죽이고

우리의 삶 전부를 예수의 부활의 생명에 완벽하게 일치시키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이 예수 안에 거하는 일은 우리 육신의 죽음으로부터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을 자라나게하는 비결입니다.

 

이 점을 이해해 봅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이라는 표현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슨뜻이지를 알게 합니다.

 

잘린 가지가 새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을 때 그것은 튼튼히 붙들어 매어져야 합니다.

가지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무의 접붙임 되는 자리는 베어지고 상처를 입게됩니다.

 

이 상처가 없이는 접붙임이 불가능합니다.

바깥에서 오는 가지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무의 살갗이 벌어지고 그 내면이

드러나는 거지요.

오직 이상처를 통해서만이 새가지가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나무의 수액을

공급받아 튼실한 가지로 자라날 수 있지요.

 

예수와 우리 죄인들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예수의 상처 곧 그리스도의 죽음의 자리에 우리가 함께 심어질 때

우리는 또한 그의 부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권능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그리스도는 베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베인 상처 자리에 우리가 접붙여진 것입니다.

 

가지를 접붙이면서 농부는 "자 나무의 이 베인 자리에 들어오너라.

여기가 너의 머물 곳이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믿는 영혼들에게도 같은 메시지가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의 상처안에 거하라.이곳이 연합의 자리이며 생명의 성장의 자리가 될 것이다.

이곳에서 그의심장이 열려 너희를 받아들일 것이며 그의 육신이 찢어져

너희와 하나되며 그의 신성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모든 축복이 너희에게 다가올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접붙임을 받기위해 가지는 원래의 나무로부터 절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제살을 베어낸 새나무의 상처 자리에 꼭 들어맞게

결합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이들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꼭 들어맞게 연합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못박히고 그분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잘린 가지의 상처와 베인 나무의 상처는 서로 꼭 들어맞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은 서로 소통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분의 경험이 우리의 경험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택하시고 지심으로써 드러난 그분의 본성이 우리의 본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과 마찬가지로 우리도한 죄를 저주하고 의로운 판단 위에 서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죄로 얼룩진 우리의 삶을 죽임으로써 새셩명에 이르는길로 나서야 합니다.

 

부활의 환희는 오로지 겟세마네와 갈보리에서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잘린 가지의 상처와 베인 나무의 상처가 서로 닮으면 닮을수록

서로에게 더욱 잘 들어맞게 될것이고

둘사이의 연합은 더욱 쉽고 완전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하나님에 대한 속죄로서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승리로 볼수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죄의식의 씻음이 아니라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구원말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바라보노라면

그분에 스스로를 바쳐 극도로 친밀한 연합과 교제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죄에 대한 죽음의 위대한 능력과 그 죽음이 통로가 되어

열릴 승리의 생명에 우리를 참예케 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분께 우리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되 기도와 열망으로 그리합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되도록

그리고 그 죽음을 감당하게 하신 성령과 하나가 되도록 간청합시다.

 

왜 십자가가 그러한 연합의 자리가 되도록 하셨을까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과의 전적인 결합을 이룹니다.

 

저주의 속박아래 묶인 인류의 동족 곧 인자가 된다는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전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생명의 왕이신 그분이 죽음을 정복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죽음 안에서만이 그분은 우리를 위대한 승리에 참예케 하실수 있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생명은 죽음에서 비롯되는 죽음을 넘어선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모든 힘은 죽음과의 연합에서 옵니다.

 

죽음과 생명은 불가분의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와의 교제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의 자리로 가서 거기에 거해야 합니다.

 

그분의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것인 그자리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분은 당신 스스로 선택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으나 우리는 우리죄의 저주로 인해

십자가를 집니다.

 

그분은 우리를 찾기위해 십자가로 오셨고

우리는 오직 거기서만 그분을 찾을수 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찾았을 때 그곳은 저주의 자리였습니다.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니"(3:13)라는 말씀과 같이

그분은 그 저주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그곳을 축복의 자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대신 저주를 받아 우리를 저주로부터 구원하시고

축복받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리로 오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자로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교제하시는 가운데 그분은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지시고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리에 설 때에 우리는 본성 그대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저주받은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과 연합될 때 우리는 그분의 축복과 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와 하나되기위해 오셨을 때 그분은 십자가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저주의 결말과 결실은 이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되기를 구할 때 우리 도한 십자가를 피흘 수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생명과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묶어 놓은 저주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만날 수 있는곳은 십자가 뿐이었다면

그분의 축복으로 인해 우리가 그분을 만날 수 있는곳 또한 십자가 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십자가를 당신의 것으로 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를 우리의 것으로 질 때입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안에 깊이 그리고 항상 거할 때만이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생명의 능력과 그분의 구원의 완전함을 우리는 맛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는이들이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참으로 깊은 신비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함께 못박히는 체험없이

그저 바라보는데 만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초대 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는 세상 사람들이 겪는 삶의 범상한 고통들을 겪으면서 그것을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는것인양 착각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이

어떤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셈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것은 죽음에 이르도록 순종하는 그리스도를 닮는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지를 전적으로 내려놓고 육신의 모든 소욕과 쾌락을 완전히 부정하고

세상의 방식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전히 단절하며 자기를 버려

타인을 이롭게 하려는 전적인 헌신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징표입니다.

 

그 사람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바 되었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 예수안에 거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받아들이는 만큼 그렇게 친밀한 교제 속에서

그분 안에 거하시기를 정녕 원합니까?

그렇다면 성령님이 우리를 축복된 진리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신비로 이끌어주시기를 간구합시다.

물론 베드로는 십자가가 아직 치욕으로 존재할 때조차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구속하시는 보혈과 새롭게 하시는 하시는 생명을 믿는 믿음은

십자가 아래서만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구할때만

완전한 것이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믿을 뿐 아니라 당신 안에서 거하기를 가르쳐 주소서.

당신의 십자가를 단지 우리의 구속의 기반으로서 뿐만 아니라

새생명의 법으로 알게 하소서.

 

그위에서 당신이 우리의 죄를 짊어졌기 때문에 아니라 그위에서야 우리가

당신과 함께 못박히고 당신과 완저한 연합에 이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하신 성령님이 또한 우리를 사로집아

우리또한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허락되는 권능과 축복의 참예자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