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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진리 / 필립 얀시

LNCK 2018. 10. 1. 20:14

단단한 진리                          8:18~22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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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                       ※스크랩한 원고가 너무 울퉁불퉁 해서 다듬다가 결국 녹음 포기!

 

(녹색, 녹음 안 합니다)

필립 얀시는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태어나 미국 남부의 경직된 근본주의 교회의 영향속에 자랐다.

그 교회는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정작 이를 경험하기는 어려웠고,

백인에게는 관대하지만 흑인에게는 가혹한 곳, 거리낌없이 인종차별이 자행되곤 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얀시 자신이 농담삼아 하는 말처럼 이후의 삶은

교회의 해독으로부터 회복되는 여정, 기독교신앙에 대해 회의(懷疑)하며 몸부림치는 과정이었다.

 

덕분에 믿음의 경계선에선 사람들을 대변해 거침없이 물음을 던지는 글을 쓸 수 있었고,

회의자의 안내자로서 소명을 감당했다.

 

휘튼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영어를 공부했다.

대학원생시절 수업료를 벌기위해 청소년잡지 <캠퍼스라이프>에서 일하며 글쓰기에 발을 놓았다.

 

이후 <리더스다이제스트>, <크리스천센추리><리폼드저널>등 다양한 정기간행물에 글을 썼다.

미기독교잡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 정규칼럼을 썼고 총편집자로 일했다.

 

<필립얀시의 성경을 만나다>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20여권의 책을 써

1500만의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콜로라도주 로키산맥 아랫자락의 마을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고통, 그리고 의심

 

할리우드 여스타가 LA항만에서 만취된 채 요트갑판에 나갔다가 실족한 사건으로

애인과 관련해 TV기자와 인터뷰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이 많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두실 수가 있죠?’.


이처럼 인간은 상처를 입으면 상황을 따져보지도 않고 본능적으로 하나님에게 화살을 돌려 의심하고 원망한다. 비행도중에 연료가 떨어져 옥수수 밭에 추락한 10,

파이럿과 결혼식을 올린지 딱 여섯달만에 백혈병으로 죽음을 맞게 된 새댁처럼,

불행의 덫에 걸려 시름하는 아픔 때문에 회의(懷疑)를 경험한다.

통은 하나님을 향한 기본적인 믿음까지 뒤흔든다.

 

고통이 다가올 때 네 가지 의문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능력있는 분이신가?

하나님은 정말 막강한 힘을 가졌는가?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하나님은 과연 고통을 돌아보시는가? 이다.

      

◑1. 하나님은 능력있는 분이신가?

 

이단적으로 보이는 질문이지만 고통의 문제를 파고들다보면

하나님은 능력이 있는 분이신가라는 주제에 연결되기 십상이다.

우주만물을 지으셨다는 분이 이렇게밖에 세상을 경영하실 수 없는 걸까?

봄날의 들판을 거닐 때 산골의 경치를 굽어보며 온 땅이 정상인 것처럼 돌아가는 듯 보이는데,

그처럼 사랑스런 세계를 면밀히 살펴보면 곳곳에 널린 고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테러리스트들의 살해, 지진, 해일, 홍수의 자연재해 등을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은 흠집투성이뿐이다.

한때는 고통을 하나님의 저지른 터무니없는 실수로 보았다.

어쩌자고 아픔을 끼워넣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드셨단 말인가


고통만 없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할 수 있었을텐데, 고통을 남겨두셨을까?

하지만 이같은 회의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 한센병 전문병원의 높은 담장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루이지애나 한센병원 요양원에서 만난 희생자들 속에서

고통이 가치가 있는 가?’하는 의구심은 말끔히 사라졌다.


환자들은 신체적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게 이 병의 가장 치명적인 속성이었다.

아픔을 감지하는 말초신경은 기능을 잃고 침묵에 빠져

고통이 사라진 세상이 어떠할지를 또렷이 보여주었다.


두려움과 혐오감을 떠올리는 환자들의 나균(癩菌)은 통증을 느끼는 신경세포를 공격해서 파괴하여

아픔을 느끼지 못해 신체조직이 녹아내려도 금방 알아채지를 못한다.

 

건강한 자가 체내에서 고통을 느끼므로 얻어지는 놀라운 성질로는

고통이 경계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스포츠는 훨씬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고통이 없으면 통증과 압박을 감지하는 신체가도에 의존하는 예술과 문화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통증을 감지 못하는 희귀질환에 걸리면 맹장염, 심장마비, 뇌종양이 찾아와도

사전에 의학적인 문제를 파악할 길이 없다. 통증은 지상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2. 하나님은 정말 막강한 힘을 가졌는가?

 

신체적인 아픔은 이른바 고통이라고 부르는 괴로움의 가장 바깥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 질병, 지진 같은 재난들은 하나님이 과연 이 세상에 개입하시는가? 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이 고통을 효과적인 경보체계로 설계하셔서 저마다에게 심어주셨다.

사방의 범죄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질병을 보고만 계실 작정인가?

측량할 수 없는 능력자가 범죄, 자연재해, 질병 같은 고통을 면하게 해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고통의 문제를 다른 신학서적으로 유대인 랍비 해럴드 쿠시너(Herald Kushner)가 쓴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라는 책이다.


어린 아들이 조로증 진단을 받아 유치원에 갈 나이에 노인네처럼 변해 노화되다가 여덟살에 숨을 거두자

그동안 타인이 배우자를 잃으면 위로하고 입원환자들을 돌보고,

자식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들을 찾아보고 하나님말씀을 전했지만 하나님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통을 위한 변명 

부당한 고통을 당했던 욥과 세 친구는 고통의 문제를 두고, 며칠에 걸쳐 격론을 벌이고,

그 말미에 하나님이 입을 열어 말씀하셨다.

38~41장의 긴 말씀은 욥의 기대와 동떨어진 반응을 보이셨다.


주님은 사과나, 연민, 공감도 없으나, 우주를 움직이는 일과 한층 더 넓은 가르침을 주셨다.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40:2)는 말씀과 함께

욥을 데리고 우주여행을 시작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38:4~6).

 

하나님의 권능이 수준미달이었다면 하나님은 욥과 대화시 얼마든지 고백할 수 있었다.

욥아, 네게 닥친 일은 정말 안됐구나, 널 도와주고 싶지만 알다시피 내게는 그럴 힘이 없단다라고 했다면

욥도 무척 반겼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사기 꺾인 인간을 앞에 두고

하나님 스스로의 지혜와 권능을 설파하셨다.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역시 사악한 원수들이 망쳐놓은 이 세상의 상태를

불만스러워 하심을 보여주는 단서는 많다.


주님은 슬퍼하고 분노하시고 확실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선지자들의 글, 예수님의 가르침과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

옛것들을 대신하는 위대한 날이 올 것이란 소망이다.


바울은 그 꿈을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8:18~19,22).


신음하는 피조물의 세계에서 인간은 더러 사기그릇조각으로 헌데를 긁어대며,

하나님의 고난을 회의학 고민하는 불쌍한 노인, 욥의 정서를 갖게 하지만,

성도는 그 분을 의지해야할 의무가 있다.


당면한 현실에 시선을 뺏긴 나머지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을 함부로 판단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주님은 눈물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새 세상을 설계해 두셨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약속을 신뢰하도록 말씀하신다.

 

고통은 늘 불쾌한가?

창조주는 더 열심히 노력해서 인간세상의 온갖 위험을 미리 감자할 수 있는 시스템을

장착시켜 주셨어야 했다고 믿는 자들에게 일깨워 주는 사건이 있다.


미국의 한센병환자요양소를 이끌었던 외과의사이자 의료선교사인 폴 브랜드(Paul Brand)박사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꼭 선물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아마 고통일거예요

 

고통은 자연계의 구성요소들이 다 그러하듯, 본질적으로는 선한 피조물이다.

창조와 타락, 그리고 영원한 회복으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세계관과도 맞아떨어진다.


빛과 그림자, 리듬에 맞춘 파도와 해저지진의 파장에 휩쓸린 죽음의 벽,

세상은 창조주의 손길을 보여주는 전시장인 동시에 죽음과 파괴의 전초기지이기도 하다.


바흐와 루터, 괴테와 베토벤을 배출한 독일이 또한 히틀러와 아이히만, 괴링을 낳았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다치는 즉시 고통을 느끼는건 축복이다.


한센병 환자들과 어울려 지낸 뒤에야 폴 브랜드박사는 손과 발가락이 잘리고 뒤틀리고

뜨거운 물에 들어서는 순간을 감지하는 감각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그는 말한다. “고통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신체말단부위를 마비시켜, 고통을 느끼게 해서 위험을 알리는 경보시스템이 침묵한 것이다.

무거운 무쇠솥 옆에서 펄펄 끓는 물속에 손을 넣어 감자를 꺼낸다.

아프리카, 아시아의 시골을 여행하며 만난 한센병 환자들이 한밤중에 쥐가 손가락을 뜯어먹어도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전혀 알아차리지 못해 인도(인도에서는 그들을 ,불가촉천민‘, 하류인생으로 취급받는다.)

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고양이를 가까이 두고 키우라고 권했다.


반사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경보체계가 살아있는 한 인간을 파멸에서 지켜준다.

신체적 고통은 두뇌에 위험을 알리는 초기경보장치 구실을 할뿐만 아니라,

영혼에 경계신호를 보내는 역할도 한다.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때로는 속삭이고, 때로는 고함치며, 무언가 잘못됐음을 일깨워준다.

고통이 마이커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는 이 세상에서 쾌락의 만족을 누리길 원하는 이들은

1365일 귀를 틀어막고 지내는 게 분명하다.

 

고통이라는 선물은 아픔을 피해보려는 인간의 마음가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욥이 그랬던 것처럼 고통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매달린 용기를 가져야 한다.

 

<고통이라는 선물(The Gift of Pain)>,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Where is God When It Hurts).

고통과 죽음이 없는 세상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광범위한 설계이다.


죽음은 자연계에서도 엄청난 생명의 소비가 일어난다.

고래는 한입 가득 물을 들이마실 때마다 백만 마리가 넘는 플랑크톤을 집어삼킨다.


집 정원에 파놓은 조그만 연못에도 한 생명은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생명을 키워내는 장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장이다. 죽음은 피조물을 망가뜨리는 사악한 불청객이 아니라,

멋진 창조세계 자체를 세우는 핵심이다.


고등생물은 그보다 하등한 생물의 죽음에 기대어 삶을 이어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박테리아가 죽지 않으면 흙이 생기지 않고 벌레가 죽지 않으면 개똥지빠귀는 살수 없고,

독수리는 주검이 없으면 살아갈 길이 없다.


구약은 영생,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뤄지는 직접적인 의사소통과 교제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신하던 날, 그 영적인 연결고리가 끊어져 죄를 지었다.


가장 강력한 진통제는 양귀비에서 추출한 아편이다. 이전에 고통을 누구러뜨린 여러 가지 방법이 개발되었다.

 

변화산 꼭대기에서 예수님과 다른 이들의 몸은 알아볼 수 있는 상태이나, 부활하신 예수의 몸은

단단히 닫힌 돌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셨다. 죽은 뒤에는 지금과는 다른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 분명하다.


하늘나라는 영적인 세계이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라는 찬송을 부르지만,

세상에서는 눈물이 사라지면 얼마못가서 실명하게 된다.

 

신화의 여인 판도라는 속 내용을 알 수없는 단지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단지를 열자 사악한 내용물들이 죄나 풀려나가고, 황급히 뚜껑을 닫았을 때는 신이 준 마지막 선물인

소망만이 남아있었다.


스탈린시대의 러시아, 히틀러치하의 독일, 마오쩌둥이 통치하는 중국에서,

신앙은 꺼지지 않는 소망의 불씨였다. 자유와 사면에 관한 소문은

 

 

3.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적인 현실 앞에 서면 본능적으로 이렇게 묻게 된다.

빗속을 뚫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어째서 내차만 미끄러져 다리난간을 들이받은 거지?

그 많은 스키어들 중에 하필 내가 다리골절로 휴가를 망치는가?

암환자 천명 중 한 명꼴로 걸리는 희귀한 암인데 왜 내 어머니가 그 암에 걸려야 하는거지?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관여하시지 않는지?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토록 뼈아픈 일을 겪게 하시는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하나님의 속내를 몰라 안타까워한다.


성경은 선지서에서 어린 자녀를 야단치는 부모처럼 주의를 주셨다.

바로는 이집트 땅의 열 가지 재앙이 쏟아진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어떻게 마음을 고쳐먹어야 비극적인 사태를 막을 수 있는지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이 다른 길을 특별히 계시해보여주시지 않는 한,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서

고난당한 인물들의 사례를 찾아보는 게 상책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

 

그 고통은 잘못에 대한 게 아니었다.

제자들이 앞 못 보는 소경의 어려움은 자신이나 부모 때문이 아니라고 하셨다(9:1~3).

실로암의 망대(빌라도가 성전자금을 악용해 만든 수로(水路)의 일부로

예루살렘성의 동남편 성밖 담에 세워짐)가 무너져 생명을 잃은 사건이나,

빌라도 정부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한 사태(13:1~5)에서

희생자들 가운데 누구도 그런 아픔을 당할 마땅한 죄를 짓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죽음, , 과부가 된 것,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등 인생의 불행을 모두 죄의 결과라고 보았다).

 

세상일이 돌아가는 이치를 낱낱이 파악하려는 자세는

조개한테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설명하려는 마음가짐이나 다름없다.

성경은 시종일관 원인과 결과라는 도식에 매이지 않고 고통의 문제를 설명한다.

너희들 눈에 어찌 보이든 내가 만사를 통제하고 다스린다“. 그리고 인간에게 되물으신다. ”나를 믿느냐?“

 

        

4. 하나님은 과연 고통을 돌아보시는가?

 

지금까지 질문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반면, 이번 물음은 개인적이고 현실적이다.

작가 C.S루이스는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란 책을 써서 답변을 제시했으나

몇 년 후 루이스의 아내가 암에 걸려 죽음을 맞자 또 한 권의 책<헤아려본 슬픔(A Grief observed)>에서는

그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절박하리만치 어려울 때 그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어떤 상황과 마주치게 될까? 차라리 돌아서는 게 낫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분의 사랑에 의문을 제기한다.

곤고한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그러나 고통가운데 하나님을 더 생생하게 만난다고 고백하는 성도는 적지 않다.

성령이 납득할 수없는 위안을 주시고, 고통을 초월하도록 이끄시는 분이다.


역사적 실체의 예수님은 스스로 고통을 짊어지셨다.

하나님은 세상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크리스천 작가 도로시 세이어즈는

하나님은 가정생활 중에 만나는 사소한 짜증과 밥벌이의 고단함,

부족한 생활비부터 고통에 대한 공포감, 절망,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겪는 모든 일을 경험하셨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으셨으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셨다.

예수님이 사시장철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지도 않으나,

하나님이 팔짱을 끼고서 인간이 고통당하는 걸 구경만 하시고 있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그 누구 못지않은 아픔을 겪으셨다.

훗날 바울이 묘사한 것처럼 장차 고통이 없는 세상을 여는 승리를 거두셨다.

 

긍휼(矜恤)(Compassion)’함께 고통 받는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왔다.

주님은 삶의 대부분을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시며 보내셨다.


예수님은 상한 심령을 대할 때마다 깊은 슬픔과 근심을 품으셨다.

친구 나사로가 세상을 떠나자 눈물 흘리시며 우셨다. 그리고 아픔을 치료하셨다.

주님은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자녀들과 함께 계신다는 생생한 증표로 성령을 보내주셨다.


언젠가 세상을 바로 세우며,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거룩한 백성들을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당장은 어떡하란 말인가?

교회, 이 땅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공동체가 등장하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위로받는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3~5).

 

1654년 파스칼은 예수를 새롭게 만났을 때의 황홀함을 확신, 기쁨, 평안이라고 했다.

예수와의 진정한 인격적 만남을 원한다. 인생의 두 가지 길에서 하나는

옛 생활방식(인생을 하나님과의 계약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선행을 보상하시는 도덕적인 하나님이

삶을 스스로 주관할 수 있다고 믿는 것)


또 하나는 새로운 길(하나님이 먼저 당신 마음에 그의 임재를 더 사모하는 갈망을 심어주셔서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는 대신에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천국시민)

 

래리 크랩의 저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라에서 가장 나빴던 설교는,

어떤 중년의 목사가 마치 거만하게 걷는 공작처럼 자기 자랑을 늘어놓아,

얼마나 바르게 자녀들을 교육했고, 교훈했고, 지혜를 심어주었는지를 35분동안 설명한 것으로

그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그가 해야 할 것을 했고

경건한 자녀들로 인해 즐거운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인데,

교만은 감사로 가장했기에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려고 수고했지만 속 썩이는 자녀를 둔 부모를 낙심시켰다.

 

모세의 옛길(원리를 따르고, 축복을 기대하고, 지켜야 하는 의무감으로

부담감을 지고 가는 인과법칙아래 살아감)

그리스도의 새길(자비를 간청하고, 은혜를 발견하고, 참된 쉼을 경험하고, 부담감을 내려놓은,

자유의 법아래서 살아감)이 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 심령 속에 역사하사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옛길보다 더 나은 새로운 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 주실 줄 믿는다”.


가짜 생수는 우리를 바꿀 능력이 없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3:1~5).


바울의 인생은 결코 즐거운 삶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 위해 살았다.

예수님을 닮아가고 성령을 따라 행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이세상의 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꾸준한 순종을 통해 진실된 주의 종임을 인식했을 때 결박이 풀리고 부담감에서 벗어난 것.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1:14~16).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내 몫의 재산을 나눠달라는 탕자와 같다.

산타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즐거워하기 보다는 산타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선물을 놓고 가기를 더 바란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마치 식탁상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억지로 모인 우리가 떨며 서있듯 생각하는 불신에 있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우물을 파는 자들에게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와서 마시라너의 삽을 버리라.

우물은 이미 파여있다. 와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 내게로 와서 좋은 것을 먹으라.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나와 교제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을 것이다.


언제든지 내게로 나아오라. 주님 주시는 소망보다 그가 줄수있는 더 나은 삶에 가치를 두고 옛길을 향한다.

그에게 가까이 오라는 초대를 일축해버리고 대신 우리가 원하는 바 축복을 주리라고 생각하는 원칙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셨는데, 우리는 다른 것을 원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영혼의 허무를 알았다.

그는 절제할 수없는 쾌락에 빠졌으나 더 큰 기쁨을 발견하고 중독에서 벗어났다.

인생 말년에 두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는 글에서 한 도시에는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도시에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산다.


그들은 각자 자기나름대로 평안의 방식을 선택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자기가 선택한 평안을 누리며 산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