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서 좌뇌와 우뇌의 균형 출처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 중에서
티머시 제닝스 지음 / CUP
하버드 정신의학부의 신경해부학자이자 연구가인 질 볼트 테일러는
어느 날 좌뇌에 뇌졸중을 일으켰다.
의사들이 떼어낸 응혈의 크기는 골프공만 했다.
출혈로 좌뇌의 기능이 손상되어 있던 동안 우뇌가 그녀의 뇌 기능을 지배했다.
그때 그녀는 소위 ‘열반’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했다.
자신의 개체성을 상실하고 우주와 합일하는 도취감을 맛본 것이다.
회복된 후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나는 우뇌의 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다.
거기서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합일을 이룬다.
나는 우주의 생명력이고, 내 몸을 이루는 50조 개의 아름답고 신기한 분자의 약동하는 생명력이다.
그런가 하면 나는 좌뇌의 의식으로 들어가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거기서 나는 단독의 개체다. 흐름에서 떨어져 있고 당신과도 별개다.
나는 지성적 존재이자 신경해부학자인 질 볼트 테일러 박사다.
이 둘이 내 안에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실제로 언제,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
뇌는 생체전기 기관이다. 화학 신호만 아니라 전기 신호도 있다는 뜻이다.
뇌의 전기 신호, 즉 뇌파는 알파파, 베타파, 세타파, 델타파 등 크게 네 종류로 구분된다.
알파파는 뇌가 쉬고 있거나 REM 수면, 즉 꿈꾸는 상태일 때 발생한다.
사람이 깨어 있어 책을 읽거나 연설하거나 어떤 활동에 집중하거나 생각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때는 뇌에서 베타파가 나온다.
세타파는 의식이 멍한 상태로, 몽상이나 막연한 상념에 빠질 때 발생한다.
델타파는 깊은 수면, 즉 꿈을 꾸지 않는 상태에서 나온다.
▶동양 명상법은 알파파와 세타파의 빈도를 증가시키는 반면 베타파를 억제한다.
그래서 시각화를 증진시키는 도파민이라는 뇌 화학물질의 분비량이 늘어나고
우뇌가 지배적으로 활동하게 되어 사람의 의식 전체가 바뀐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자의식을 잃고, 우주와의 합일을 느끼고,
심상이 더 강해지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의식이 저하된다.
증거에 기초해 진실을 분별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 동안 동양 명상 요법은 기독교 교회 내에도
점점 널리 퍼졌다. 천주교에서는 적극적으로 장려되고 있다고 한다.
본래 하나님이 설계하신 창조 세계는 창조주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사랑의 법대로 움직였다.
“무조건 내가 먼저”라는 사탄의 원리로 지구가 병든 것은 죄가 들어온 이후다.
그 결과 하나님의 법과 사탄의 법,
즉 사랑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 공존하는 이원적 상태가 생겨났다.
이러한 선악의 현재적 공존을 주변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식물은 예쁜 꽃과 열매도 내지만 가시와 엉겅퀴도 낸다.
비는 땅에 생기를 주지만 홍수는 파멸을 부른다.
우리 내면도 영적 속성과 육적 속성이 서로 싸운다.
동양 종교인 불교와 힌두교는 선악이 영원히 공존한다는 우주적 이원론을 가르친다.
우주의 균형에 선과 악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희망사항이다.
이기심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삶과 조화를 잃은 채
우리를 이원적 상태에 몰아넣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이기심에서 기원했다. ?
▶동양의 신비주의자들도
죄가 불러온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험한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하는 길은 둘 중 하나이다.
첫째, 각자의 업보에 따라 더 귀하거나 천한 존재로 환생한다는 영원한 윤회에 자신을 맡겨버린다. 둘째, 동양 명상을 통해 선과 악을 둘 다 초월해 거기서 벗어난다.
동양 명상의 기본 동기는 부처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는 우뇌의 활성화로 봄)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괴로웠던 부처는 명상에서 평안을 얻었다.
생사와 선악을 모두 초월해 열반이나 득도나 해탈을 경험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이 해탈의 세계는 “이원성이 없는 상태”,
즉 우주 및 서로와의 합일을 느끼는 상태로 묘사된다.
이렇듯 동양 명상을 하는 사람들의 뇌는 이원적 상태의 번뇌를 피하고자
스스로 인위적 도취감을 만들어냄으로써 개인적 현실로부터 일시적으로 단절된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설계에서 어긋나 있는 불치(不治)의 상태다.
▶뇌는 좌뇌와 우뇌로 나뉘며 뇌량이라는 초고속의 신경섬유 다발로 연결되어 있다.
좌뇌와 우뇌는 전반적으로 기능이 다르지만 서로 협력해 균형과 보완을 이루게 되어 있다.
양쪽의 균형을 잃으면 장기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동양 명상을 하는 동안에는 의식이 한쪽으로 압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와 같은 문구를 주문처럼 외운다.
마치 그 작은 고백의 몸짓으로 홍수처럼 거센 신경 현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명상법은 뇌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우뇌의 지배력이 커지고, 그 결과로 이성을 통한 분명한 사고와 개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성경에 나와 있듯이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자 사랑의 영이시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좌뇌이고, 연합과 일체감과 관계적 소통을 경험하는 것은 우뇌이다.
성경적 묵상은 생각을 무(無)에 집중하거나 머릿속을 비우거나
어떤 문구를 주문처럼 반복해서 되뇌는 게 아니라
늘 하나님의 실재하는 일면과 그분의 속성인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방법인 사랑을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기는 묵상이다.
이런 식으로 묵상하려면 좌뇌와 우뇌를 균형 있게 다 써야 한다.
그런 균형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더 건강해지고 평안해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게 된다.
▶커트 톰슨 박사는 『영혼의 해부』에서 그것을 잘 설명했다.
“신경과학 연구를 통해 밝혀졌듯이, 뇌의 다른 부위 간에
적절한 균형과 적절한 수준의 유익하고 원만한 소통이 갖추어진 사람들은
불안이 감소하고 행복감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성령께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으실 수 있도록 늘 준비되어 있다.
우리 안에 뿌리내리기를 우리가 그토록 사모하는 바로 그 특성들이다.”
진리와 사랑을 양쪽 다 충만하게 경험하려면 좌뇌와 우뇌의 활동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우리 안에서 좌뇌를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이다.
거기서 귀결되는 왜곡된 하나님관들이 하나님을
복수에 차서 벌하시는 폭군으로 그려 두려움을 자극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하나님관을 재점검하기는커녕
만성적으로 활성화되어 있는 두려움 회로를 동양 명상으로 가라앉히려 한다.
하지만 동양 명상은 좌뇌를 불활성화한다.
동양 명상은 좌뇌의 기능을 정지시켜 정서적 초월 경험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2007년 정신건강연구소에서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2002년 이후 미국에서 동양 명상이 꾸준히 증가했다.
여러 과학 연구를 통해 동양 명상이 건강에 가져다주는 유익이 밝혀지기도 했다.
예컨대 심장박동, 혈압, 수술 후 불안과 고통 등은 감소했고,
우울증, 병에서 회복되는 기간, 주의력, 집중력, 학교 성적 등은 호전되었다.
앤드류 뉴버그 박사는 다양한 동양 명상법이 뇌와 몸의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주장하면서,
그런 명상 과정에 하나님이 꼭 필요하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동양 명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뉴버그 박사의 뇌 연구는
동양 명상이 뇌의 불균형을 초래해 현실 인식을 왜곡시킨다는 결론을 뒷받침해 준다.
뇌의 시상부는 데이터를 처리하는 중심부다.
모든 정보는 시상을 통과해 각각의 목적지인 신경세포로 간다.
현실과 비현실의 인식도 시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동양 명상을 10년 이상 한 피험자들은 시상의 활동이 균형을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뉴버그에 따르면, “시상은 주관적 현실과 객관적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개념이든 충분히 오랫동안 명상하면 현실과 비슷해진다.
당신의 신념은 신경학적으로 현실이 되고, 뇌는 거기에 맞추어 반응한다.”
요컨대 동양 명상은 사람을 하나님과의 인격적 우정, 성품의 실제적 변화,
두려움과 이기심의 극복으로 이끌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을 하나님과 분리하고,
현실을 외면한 채 초월적 도취감에 빠지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처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려 하신 게 아니라
온전한 자기희생의 사랑으로 뇌를 구사해,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음을 견디셨고 죽음과 대결해 이기고 멸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처절한 정서적 고뇌를 겪으셨다.
하도 고통스러워 가능하면 십자가를 면하게 해달라는 기도까지 하셨다.
인간의 내적 실상을 경험하신 것이다.
그러나 부처와 달리 명상으로 뇌의 기능 상태를 바꾸어 망상적 도취감을 만들어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죽음에 대한 생생한 두려움을
하나님과 인류를 향한 온전한 사랑으로 극복하셨다.
이로써 죄가 불러온 이원적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뿌리가 뽑혔다.
죽은 지 사흘 만에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한 예수는
하나님의 설계 원안대로 정화하시고 회복시키신 분이었다.
만일 예수께서 죽음을 피하셨다면
인류는 두려움과 이기심의 병에서 해방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인간 각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일을
성령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진정한 연합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
나의 에고가 죽고
새로운 삶,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냉철하게 현실에 맞서고
자신의 이기심과 씨름하여
결국 그리스도께 순복한다.
그럴 때 그 분의 사랑,
초자연적 중생,
새로운 동기를 염원하게 된다.
그리고 두려움에 쫓기던 삶에서
자유롭게 된다.
우리가 도달하는 자리는
영원한 선악의 우주가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연합이다.
안타깝게도 하나님 개념이 잘못된 신학들은
선악이 영원히 공존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신학은
사고를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하며
따라서 영적 싸움의 연쇄 반응을 일으켜
뇌와 몸을 훼손한다.
또한 이기심을 자극하고
하나님의 본 계획을 방해한다.
우리를 구원하는 치유체계는
하나님이 설계하신 우주의 작동 원리대로
그 분이 사랑이라는 진리에 기초한다.
그리고 그 진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히 계시되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14:9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명상적 도취감 속에 숨어있지 않는가?
오히려 영원은 두려움과 이기심이 없는 우주
하나님의 사랑의 법대로 다시 통일된 우주에서 살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기뻐 외칠 것이다.
‘사망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고전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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