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P2 롬8:7~8 스크랩
존 파이퍼
◑전적 부패의 네 가지 성격
개혁주의에서는 전적 부패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전적 부패를 말합니다.
전적 부패란 무엇일까요?
네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로 우리 모두가 반항적입니다.
‘전적으로’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영광과 법에 굴복하는 데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이것은 논란이 큰 부분입니다. 내가 전적 부패했다고 말할 때,
이것은 내가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가 나의 타락한 본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저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죄의 종’입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래서 저는 은혜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잠시 여기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로마서 8:7~8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바로 저 자신이 이런 사람입니다.
제게는 두 가지 종류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모두 육신의 생각을 갖습니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두움을 너무 좋아합니다.
롬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죄의 종’의 길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또 에베소서 2:1절과 5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저는 전에 그랬고 당신도 전에 그랬습니다.
혹은 현재 그런 분도 있습니다. (죄의 종이요, 허물과 죄로 죽었음)
죽은 사람은 어떤 올바른 행동도 못합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44절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
요한복음 6:65에도 위 구절이 한 번도 나오죠.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14절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위에서 읽은 구절에서
‘할 수 없다 can not’라고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전적 부패해서, 자기 힘으로 어떻게 선하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모든 사람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기적적 구원의 대상이 되어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졌거나
-아니면 아직도 죄에 속박되어 있어서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더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력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너무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악을 너무 좋아합니다.
이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사람들은 많이 어려워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있지 않은 고정관념을 갖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오해합니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없다면, 우리의 (도덕적으로 살) 책임도 없다.”
사람들은 그런 보편적인 전제조건을 갖고 성경을 대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전적 부패해서) 인간이 그리스도께로 올 수 없다고 말씀한다면
인간은 그리스도께로 올 책임이 없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서 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매우 자주 정반대로 말씀합니다.
당신에겐 정말로 책임이 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두 가지 종류의 ‘할 수 없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30년 전에 그때 저는 이 문제를 두고 고민이 컸습니다.
‘물리적 할 수 없음 physical cannot’과 ‘도덕적 할 수 없음 moral cannot’이 있습니다.
‘물리적 무능’과 ‘도덕적 무능’은
이렇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당신은 책임이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당신은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차이입니다.
물리적으로 무능한 사람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의자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데 누가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물리적으로 의자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일어날 책임이 없습니다.
만일 일어나지 않는다고 죽이면 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의자에 앉아 있다고 합시다.
가령 저의 소파일 수 있겠죠.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합니다.
“일어나”
그때 당신의 내면에 도덕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당신이 소파에 앉아서 계속 편안하고자 하는 동기가
그 일어나라고 명령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동기보다 크다면
당신은 소파에 계속 앉아 있으면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 속의 동기, 사고 구조가 바뀌어야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는 하나님 없이는 그것이 바뀌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둠을 좋아하고 빛으로 나아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어둠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주권적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고
우리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전적 부패'라는 말의 의미는
내가 나의 부패성에 완전히 묶여 있어서
내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아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좋아합니다.
내가 하는 한, 나는 하나님을 더 좋아하게 되지 못합니다.
내가 어둠을 더 좋아하면서, 하나님을 더 좋아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 둘은 서로 적이 되며 상호 배타적입니다.
뚜렷이 기적적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더 좋아하게 되거나
어둠을 더 좋아하는 상태로 묶여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옥에 있어야 마땅합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의 미래의 결말을 많이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참 힘든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다른 누구보다 지옥에 대해 더 많이 말씀하십니다.
지옥에 대해 가장 끔찍한 이미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둠, 울며 이를 갊, 불, 죽지 않는 벌레, 영영한 형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며 가혹한 사도 바울의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지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지옥이라는 단어를 거듭거듭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매우 중시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일부의 이런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분개합니다.
그들은 지옥을 단지 자동적이고 스스로 선택한 마음의 굳어짐으로 약화시키죠.
그러나 성경의 지옥은 들어가면 면할 방법이 없고
영원히 거기 같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에서 사람들을 벌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그것을 '영영한 형벌'이라고 말했습니다.
영원히 진화되며 스스로 선택한 어둠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
지옥이 끔찍한 주 이유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사람들에게 영영한 고통을 선고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1절입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그것은 헬라어에서 가장 강력한 영원의 표현입니다.
그런 단어로 영영한 고난을 묘사합니다.
바로 내가 거기 갑니다.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사랑함에 매여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너무나 낮추고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고
하나님의 무한히 존귀한 아름다움을 거듭난 이후 매일의 삶에서
짓밟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이후 매일의 삶에서 짓밟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듭나기 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거듭난 후에 단 하루라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저 존 파이퍼는 그런 날이 없습니다.
즉 저는 매일 크리스천으로서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죄를 지어야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고작 70년> 살며 죄를 지었는데
<수 억 만년 영원한> 지옥에 간다면
이것은 부당해’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심각성을 측정하는 기준은
당신이 공격한 분의 위엄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형벌도 영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지옥으로 향하고 있고, 노예상태이며
나의 어둠을 마음대로 사랑합니다.
부드럽고 따스한 멋진 내 옷깃에 달린
브로치를 어루만지면서 말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런 상태입니다.
◑이 전적부패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바로 복음이 해결책입니다.
복음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에
메시지의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습니다.
고전15: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이 짧은 구절 속에 복음의 여섯 부분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①첫째, 복음은 계획입니다.
‘성경대로’가 두 번 나옵니다.
②둘째, 복음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③셋째, 복음은 그 사건을 통한 성취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내 죄에 대해 뭔가 성취되었습니다.
④넷째, 복음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15:2절에서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라 말씀합니다.
복음의 사건과 성취에 참여하는 길은 <믿음>입니다.
⑤다섯째, 복음은 그가 성취하신 것을
나의 개인적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2
⑥여섯째, 복음은 영원하고 무한히 행복한 미래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함축된 용어는 복음, 구원, 제3자가 죄를 대신 지심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어떤 것에서 구해지고, 어떻게 되도록 구원받는다는 거죠.
그가 내 죄를 지셨다는 것은
내가 죄를 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유롭게 되어
그와 함께 거하며
그를 영원히 누립니다.
▲그 각각을 잠깐씩 살펴보겠습니다.
①복음은 계획입니다.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이것은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놓고 제비 뽑는 것부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것까지
유다의 배반까지
그 모든 것들이 수백년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기록이 구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한 단계, 한 단계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함축의미를 갖습니다.
죄와 사망과 지옥이 하나님의 계획을 망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사하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은
나중에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계획이었습니다.
이것의 함축의미는 계속 이어집니다.
②둘째로 복음은 한 사건이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혹은 그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복음은 없습니다.
아무도 복음을 비신화화 하게 하지 마십시오.
‘비신화화’는 루돌프 볼트만이 30년 전에 사용한 단어입니다.
제가 재학원에 다닐 때였죠.
그것이 지금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계속 이뤄져서 보수화되지 않게 하는거죠.
자유주의자들은 보수화된 것을 믿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자유주의는 항상 수정됩니다.
20년이 지나 자유주의가 보수화되면
새로운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매우 좋은 일입니다.
보통 30~40년이 지나면 옛 자유주의가 보수가 되어
수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조차 그것의 권위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복음은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비신화화하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희망 속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의미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③셋째로 복음은 성취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영광스럽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역사에 나타나기도 전에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성취하셨죠?
①첫째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베드로전서 2장 24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첫째로 그 순간에 당신이 2천 년 후에
지을 죄가 예수님께 전가 되었습니다.
②둘째로 우리 죄의 값을 지불하셔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당신이 값을 지불하고 산 바 되었다는 것을 아세요?
당신이 구원받았을 때 산 바 된 것이 아니라
2천 년 전에 산 바 되었습니다.
당신이 등장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③셋째로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를 감당했습니다.
로마서 8장 3절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누가 죄를 정죄하신 것입니까?
내 죄를, 내 육신의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하셨습니다.
이것은 대속의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모든 사람을 전망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이 짐을 지거라.
그들이 장차 올 텐데 나는 그들을 구원하려 한다.
그들의 죄, 나의 모든 진노와 정죄를 네 위에 두려 한다.
그렇게 하겠느냐?"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사53:10)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씩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죽으셨을 때 그것이 이뤄졌습니다.
④넷째로 그는 완전한 순종의 삶을 완료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입니다.
‘죽기가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는 전적 순종의 삶의 절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피조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완벽하게 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당신에게 전가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변화되도록 요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피조물보다 사랑하기 시작하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완벽하게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입니다.
저는 지금 적용 단계가 아니라
완수 단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직 등장하지 않아서 의롭다 함 받지 않았을 때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⑤다섯 번째로 그가 하나님의 영과의 가치를 입증하셨습니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입니다.
왜냐하면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고민하는 문제는
어떤 미국인도 고민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두 가진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잘해주시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에 대해
아무도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런 미국인을 알면 손을 들어보세요.
매일 이런 문제로 양심의 고민을 하는 미국인이 있나요?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지?
나는 이렇게 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고
하나님의 의를 모욕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선하시지?“
바울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저의 죄를 간과하셨을 때
하나님은 불의해 보이십니다.
불의가 무슨 뜻이죠?
내가 하나님을 낮춰 보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무한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 죄를 따지지 않으시고
그것 때문에 나를 벌하지 않으시면
완전히 불의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변화되고 난 후 성경을 읽어보면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가치의 영과을 높이시는 분이
매일 그 영광을 짓밟는 사람들을 천국에
들여보내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러면서도 여전히 의로우실 수 있습니까?
의로우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십자가가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에 우주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내 아들에게 하는 것
그가 자발적 사랑으로 십자가를 감당하는 것은
내가 나의 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즌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나는 의로울 뿐 아니라
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한다.
그래서 저는 복음을 사랑합니다
오, 저는 복음을 사랑합니다.
저는 십자가 없이, 저의 죄를 가지고
심리적으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적용입니다.
‘당신이 믿으면..’
적용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것을 좀 더 말하겠습니다.
복음은 값없이 제공됩니다.
복음이 만약 이렇게 전파된다면 어떨까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것을 가지려면 그를 위해 성취하고
그를 위해 의로워지고, 새롭게 그를 위해 살기 시작하고
그를 위해 업적을 이루면 됩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거짓 복음을 정죄하기 위해 갈라디아서에서 열렬히 싸웠습니다.
“행위로 예수님과 연합된다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복음은 믿음으로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받아들이겠느냐? 그를 네 보물로 삼겠느냐?
그를 네 구원자로 삼겠느냐? 그를 네 대속물로 삼겠느냐?
그 분을 네 모사와 주로 모시겠느냐?
그 분을 네 삶의 가장 큰 보물로 삼겠느냐?’
‘주님, 나는 부족하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면
무엇을 갖게 되는지 아세요?
용서를 갖게 됩니다.
믿는 사람은 다 죄사함을 받습니다. 행10:43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롬3:28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됩니다.
고후5: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롬8:15~16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당신은 성화되고 앞으로 영화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벧전3:18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접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복음이십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 축복입니다.
나는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자유와 스스로 충분하다 생각하는 영광 속에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
물질적인 것들을 사랑했습니다.
표범이 자기 무늬를 바꿀 수 없듯이
나는 변화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부패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잔을 드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새 언약의 피다’
그것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새 언약이 뭐죠?
이 잔이 예수님의 피를 나타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피는 새 언약을 보장합니다.
새 언약이 뭐죠?
렘31:31~33, 겔11:19, 겔36장, 렘32:40절 등
구약에서 이렇게 약속합니다.
‘그들에게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그들의 마음에 내 율법을 새기겠다.
그리고 그들이 내 율례 안에 행하게 하겠다.’
그것은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변화됩니다.
돌 같은 마음은 죽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없고
하나님을 즐거워 할 수 없고,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수 없으며
물질을 위해 살며 자기 생명을 낭비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위해
십자가로 그 마음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전파와 성령의 능력으로
그 마음을 당신에게 주십니다.
돌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이제 그 마음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향이 있고
예수님을 믿는 경향이 있고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고
예수님을 즐거워하는 경향이 있고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이 그런 것을 가져옵니다.
왜냐면 이 잔은 새 언약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은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새 언약이 명령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내 율법을 네 마음에 새기겠다
네가 내 율례 안에 행하게 만들겠다
네 마음에 나를 경외함을 주어서
네가 나로부터 돌아서지 않게 하겠다”
이것이 렘32:40절입니다.
십자가 덕분에 우리의 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부패성 속에 머물렀다면 삶을 낭비했을 것이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정의가 예수님의 피로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정죄를 대신 당하셨습니다.
나의 부패, 나의 타락, 나의 눈멂,
죽은 상태, 강퍅함, 하나님의 뜻에 자원하지 않음, 노예상태가
복음 전파와 성령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깨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새 언약의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 삶이 낭비되지 않으려면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그 삶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0가지가 있습니다.
독신생활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결혼생활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도둑맞은 경험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암에 걸렸을 때의 경험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긍휼의 마음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등등 20가지가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