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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그리스도’ 베드로의 신앙고백

LNCK 2019. 3. 18. 19:54

주는 그리스도베드로의 신앙고백                8:27~33       여러 글 취합

 

  

우리는 무엇에 대한 답을 찾을 때 다른 사람이나 다른 정보에 많이 의존합니다.

특히 오늘날엔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덕분에 구글이나 네이버에 물어보면

그럴싸한 답들이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자신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묵상하고

발품을 팔아서 답을 찾는 노력은 쓰잘데 없는 시간낭비로 생각되고,

쉽게 남이 찾아놓은 답중에 가장 맘에 드는 것을 정답으로 삼아버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답은

비슷한 답일 수는 있어도 정답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8:27) 물으시고,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29)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의 대답은 비슷해 보이지만 정답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희가 생각하는 답'을 찾아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그 답을 찾았고 예수님은 그게 정답이라고 확인시켜 줍니다.

 

그렇습니다. 남이 이야기하는 답은 참조만 하면 됩니다.

어떤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영성이란 이런 것이고,

깨달음은 이런 것이라 해도 그건 정답이 아닙니다.

내가 깨닫고 체득한 답만이 정답입니다.

 

인터넷 검색이 아니라,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자기가 직접 그 답을 찾는 기쁨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반드시, 명백히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참 잘한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마귀도 압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고 해도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

그분과 개인적, 인격적 친밀한 관계를 맺고 따라나설 때라야

참 신앙인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직접 알려주십니다.

 

"인자가 반드시 must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openly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8:31~3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라는 말과

명백히 or 드러내놓고' 라는 말을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개역에는 '반드시'가 빠져 있으나, 새번역 및 공동번역에는 있음, 영어로 must, *헬, 데이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걸어야 하는 길을

‘드러내놓고 (명백히)' 가르치십니다.    *개역에 '드러내놓고',  영어로 openly,  

 

그 십자가의 길은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거쳐야 하고

반드시걸어야 하고

반드시실행해야 하는 길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드러내 놓고, openly, 공개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많은 고난을 겪는 일입니다.

곧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서 겪는 일입니다.

 

<둘째>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배척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여

그것이 진정 사랑임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비록 타인으로 부터 당하는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이지만,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셋째>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되는,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의탁과 믿음의 길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일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실행해야 할 일이요,

또한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반드시걸어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길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가르쳐야 합니다.

  


마가는 덧붙여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드러내놓고 openly) 하셨다."고 합니다. 8:32

말은 입밖으로 내는 순간 더 강력한 구속력을 갖게 마련이고,

공적으로 공포될 때는 배 이상의 무게가 얹힐 겁니다.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 당신이 몸소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이

어찌 수월한 과정이겠습니까만,

예수님께서는 방금 말씀하신 당신의 수난 예고를 더 명백히 하십니다.

그건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선포를 통해서

당신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시면서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관련글 : 나를 누구랴 하느냐?

 

적용

 

길을 잃으면 제자리로!

언젠가 밤길을 친구와 함께 걷다 목적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당황하는 저에게 친구의

길을 잃어 버렸을 때는

확실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라는 충고에 따라

 

애매한 곳이 아니라

확실한 자리에서부터 다시 길을 찾기 시작하여

목적지에 무사히 갈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항해 길을 떠나던 배들도

매일 밤 북극성을 찾아서, 그 별을 기준으로

자기 배의 방향을 잘 가늠하여

목적지까지 무사히 항해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그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길을 잃어 이리 저리 방황할 때

내가 돌아가야 할 처음의 출발 자리,

우리 배가 중심을 잡아야 할 북극성과도 같은 신앙의 중심은

과연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신앙의 출발지를,

신앙 중심의 정체성을 잃고

혼란의 어둠 속에서 헤매는지요?


오늘도 혹시 신앙의 길을 잃은 방황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님의 물음에 즉각적인 베드로의 정답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란, ‘주인이란 뜻인데

내 전 존재의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따라야 할

참 하나님이요, 내 왕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반쪽짜리 정답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은 하늘의 계시로 깨달아 알았지만, *반쪽 정답

그 분이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임은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런 예는 베드로의 배반 사건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쓴잔을 거부했기에,

베드로는 그 뒤로 입으로만 수제자였지, 몸은 배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16:22~23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입으로는 어떤 충성도 다 합니다. 그 어떤 맹세도 다짐도 다 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뿌리치고 도망갈 가능성,

예수님을 배신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남들이 봤을 때는 그럴듯한 신자, 잘나가는 목회자,

괜찮은 주의 종으로 보이고 인정받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우리의 시선이 멀어지는 그 순간

언제고 주님으로부터 등 돌릴 가능성, 주님을 배반할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의 교만한 반박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rebuke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8:32, 16:22

 

항변했다는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에 반박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이 틀렸다고,

자기가 한 수 가르쳤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렇게 우리도, 자기의 틀린 주장을, 항변하고 강권하고 강요할 때가 있는데

저도 과거에 그런 아픈 기억이 하나 있어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한 자매님)가 젊은 시절, 한 번은 고령의 어느 공동체에서

어린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치는, 봉사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지만

사정상 아직 가지 못하는 아이(지진아)들을 위해

기초적인 것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서너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중 한 아이가 문제였습니다.

 

그 아이는 ㄱㄴ은 물론 1,2,3,4 도 쓸 줄 몰랐습니다.

1,2,3,4ㄱㄴ을 쓸 줄 모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줄을 똑바로 내려 긋지도 옆으로 긋지도 못하는 심한 학습장애 아동이었죠.

 

그런 경우를 처음 당한 저로서는 너무나 당황했답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죠.

 

1시간 내내 그 아이만을 붙잡고 줄을 똑바로 긋는 연습을 했습니다.

손을 잡고 그려도 보았지만,

혼자 그리게 하면 역시나 그리지 못했죠.

문제는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다음 날 다시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그 아이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아이의 집으로 찾아갔죠.

 

그런데 저를 그 아이가 저를 보더니

갑자기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뜻하지 않은 추격전이 펼쳐졌고,

한 동안 계속되는 추격전에

저는 순간 꼭 잡겠다는 의지로 좇아갔습니다.

 

아이는 위협을 느꼈는지 달아나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만에 붙잡았는데 아이는 겁에 질려 파랗게 변해있었습니다.

 

다른 봉사자들과 책임 선생님도 놀라서

무슨 일인가 하고 다들 나와 보고

아이는 펑펑 울고 저는 정말 난감하더군요.

 

그날로 저는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서

다른 일로 옮기게 되었죠.

한 마디로 봉사 단 이틀만에 잘리고 만 것이죠.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왜 그렇게

아이가 무섭도록 좇아갔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아마도 "집착"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는 무조건

교사의 질서에 편입되어 따라오기를 바랐던

나의 생각에 대한 집착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나의 질서에 대해 집착하게 되니

정작 중요한 것을 망각해 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에 화를 내며 그것에 집착하고 말았던 것이죠.

 

본문에서 베드로는,

자기 생각, 자기 질서에 사로잡혀서

그걸 너무 확신한 나머지

스승님을 한 수 가르치고 있습니다. 스승님을 핀잔주고 rebuke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이상에 사로잡혀 집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예수님의 사명은 잊어버리고

오히려 자기의 격정적 감정에 휩싸여 예수님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은 물론 그렇게 달아나며 우는 아이를 끝까지 뒤좇지는 않지만

다른 모습 안에서 여전히 집착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특히나 공동체의 다른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해 주었으면하는 생각은

끊임없이 제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고 있죠.

 

그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되새깁니다. 8:33

 

 

................

 

서론

 

본문 배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은 복음서의 분수령으로 봅니다.

이후부터 예수님께서는 장차 있게 될 십자가와 그 수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전반부(1:1~8:26)에서는

감춰져 있고 힘겹게 성장해 가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전합니다.

 

한편 베드로의 고백으로 시작되는 복음의 후반부(8:27~)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얘기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의미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바알신의 예배 중심지였고,

희랍의 자연신 의 탄생지이며

산으로 올라가면 세계의 지배자로 자처한 로마황제의 신성을 상징하는

흰 대리석 신전이 있는 곳이다.

 

그런 흰 대리석 신전을 뒤의 배경으로 해서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서 물으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엄청난 고백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언자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답변에 예수님께서는 반응이 없으십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제자들의 생각이 더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외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고백은 순간적 재치가 아닙니다.

평생을 섬기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다면 축복입니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니 구세주란 고백은 엄청난 신앙 행위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는지요? 진심으로 할 수 있는지요?

질문에 답해 보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