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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속의 야곱

LNCK 2019. 5. 1. 20:09

https://blog.naver.com/karamos/220307678101

◈이방인 속의 야곱      창34:13~19      2014.02.23.

서론

창세기 33장은 야곱이 비로소 형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인생의 최대 고비를 넘기게 되는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라는 암5:19절의 말씀처럼 
야곱은 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3장에서 형과의 갈등을 해소되었는데 
34장에 곰과 같이 더욱 무서운 문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형과의 갈등보다도 더욱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야곱의 딸이 겁탈당하고, 아들들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시므온과 레위의 세겜성 살해)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이 창세기 34장을 설교하지 않고 건너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 속에는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 
신앙과 삶의 가치관도 다르고 인생의 목적도 다른 이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도와 세상의 관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창세기 34장에는 
야곱과 그의 가족이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저지른 3가지 실수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야곱과 그의 가족은 세상과 너무 가깝게 지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 
무위도식하며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지나치게 가까운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을 다루는 원리는 한 마디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입니다.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세상과 너무 가깝게 지냈습니다. 
야곱은 일찍이 서원한 바가 있었는데, 그것은 벧엘로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벧엘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세겜에 정착했습니다. 
왜 세겜에 정착했겠습니까? 세겜이 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겜은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였고, 
목초지가 많아 목축을 하기에도 매우 적당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니 야곱은 서원을 잊어버리고 세겜에 땅을 사서 장막을 짓고 살았던 것입니다.

또한 그곳에서 야곱은 세겜 사람들과 거래를 하고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세겜 추장 말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만하니 그들로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창34:21

세겜 추장의 말에 “서로 통혼하자”는 제의를 한 것으로 볼 때, 
그들은 대단히 가까운 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열 한 명의 아들과 디나라는 외동 딸이 있었습니다. 
당시 디나는 열다섯 살쯤 되었습니다. 
디나는 집에 있어봐야 온통 남자 형제들뿐이었고, 외동딸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을 것입니다. 

창34:1절에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다는 것은 또래 여자 친구를 찾으러 나간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디나에게 외로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외롭고 대화할 상대가 없다보니 자기 또래의 친구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디나는 이 가나안 땅 원주민들이 얼마나 도덕적,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레위기 18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할 성적인 규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친상간이나 수간, 동성연애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레18:24절에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가나안 족속들은 근친상간, 수간, 동성연애와 같은 일들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과 더불어 진행된 우상숭배는 엄청난 도덕적, 성적인 부패를 가져왔습니다.

디나는 이러한 가나안의 문화에 대한 선이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또래 여자 친구를 만나러 밖에 나갔던 것입니다. 
야곱은 어른이었기에 가나안의 문화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어른이었고, 디나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렇기에 야곱은 디나에게 주의를 주었어야 마땅한 일입니다. 

“이 동네는 아주 위험한 곳이다. 절대로 혼자 집 밖을 나가선 안 된다. 
외출을 삼가라!”라고 경고하고 섣부른 외출을 금지를 시켰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무런 경고를 주지 않았습니다.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집 밖을 헤메던 디나는 세겜의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겁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34:26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디나는 겁탈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세겜의 집에 납치, 감금당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세겜’은 동네 이름임과 동시에 추장 아들의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19절에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치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 아비 집에 가장 존귀함일러라”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세겜의 추장 하몰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한 아들을 ‘세겜’이라고 이름을 짓고, 
‘너는 나를 이어 추장이 되어라’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성경의 기록대로 존귀한 자였지만 정욕의 노예였습니다. 
디나가 길거리에 홀로 다니는 것을 보고 그녀를 겁탈하고 그를 사랑하여 
집에 들이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감금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디나에게 일어난 일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고,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미리 디나에게 닥칠 위험을 경계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디나가 세상을 가까이 하도록 방치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밤이 늦도록 길거리를 방황하고 돌아다니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밤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밤에 헤매고 돌아다니는 것은 영이 맑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컴퓨터, TV, 영화를 홀로 보고 있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주일에 교회 나오든지 말든지 방임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세상과 가까워지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그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따로 구별해 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요17:16절에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우리가 세상을 가까이 하고 세상 사람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은 
영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세월을 방황할 때 
모세는 출애굽 2세들을 교육하면서 이렇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신 7:2~4). 
모세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여호와의 진노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는 불신자들과 혼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동업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불신자들과 동업해서 돈을 벌었다는 성도들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지나치게 친하게 지내지도 말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놀러 가는데 다 따라 다녀봐야 배우느니 술이요, 느는 것은 도박입니다. 
유익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도는 불신자들과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가 불신자와 가까이 하면 
언제든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과 가까이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야곱은 세상과 타협하였다.

저는 창세기 34장을 읽으면서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침묵입니다. 
왜 그는 자기 딸이 겁탈을 당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세겜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당신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 싶다”고 해도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5절에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의 돌아 오기까지 잠잠하였고”  

무슨 옆집 아저씨도 아니고, 아버지인 자가 옆집 여자도 아닌 자신의 딸이 겁탈을 당하고 
감금을 당한 상황인데도 잠잠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세겜의 아비 하몰은 야곱에게 먼저 와서 사과를 해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 아들이 당신의 딸을 겁탈했으니 미안합니다. 
내 아들이 당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니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와야 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몰이라는 자는 사과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디나를 겁탈한 세겜도 납작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어야 합니다. 그리고 디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니 
제 아내로 삼게 허락해 달라고 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오늘날 이 상황을 형법으로 본다면 세겜이라는 자가 지은 죄는 성폭행죄, 약취유인죄, 
감금죄 등 최소 징역 20년은 선고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강하게 사과를 요구했어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여기에는 추측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디나가 레아의 딸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디나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딸이었다면 그는 강력한 사과를 요청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디나의 엄마인 레아는 야곱이 그렇게 사랑한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보니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체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 못했으니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둘째, 좀 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34:30절에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시므몬과 레위는 레아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은 같은 어머니를 둔 여동생 디나가 
겁탈을 당했다는 소식에 칼을 가져다가 세겜의 남자를 모조리 죽였습니다. 
여동생의 복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한 그들에게 야곱은 “네가 냄새를 나게 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아들들을 스컹크 취급하는 것입니다. 
스컹크는 가스를 살포해서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동물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이 냄새를 냈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온 집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괜히 말을 잘못해서 자기도 죽을 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딸이 겁탈을 당했다는 사실, 겁탈한 자들이 아무런 사과를 하지 않은 사실, 
아들들이 거짓말하고 살인을 저지른 사실보다 
자신의 목숨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딸의 정조나 아들들의 도덕은 어떻게 되든지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비겁하고 타협적인 자세입니다.

야곱은 이러한 비겁한 타협 정신을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배웠습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아버지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두 번, 아버지가 한 번, 
그리고 자신도 한 번.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딸이 겁탈을 당한 순간에도 
아무 말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비겁한 침묵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이러한 비겁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사람은 확실히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불의한 일에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당한 비난에 항거하지 않으면 세상은 더욱 교회를 해치려 들 것입니다. 
세상이 목회자를 비난 합니다. 일면 타당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도 욕을 먹어야 한다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왜 하나님 아버지까지 다같이 싸잡아 욕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그들에게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먹을 것을 주고, 옷을 주고, 모든 것, 심지어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으면서 욕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욕을 먹는 것은 감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욕할 때도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비겁한 침묵으로 대응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해 전 공영방송에서 기독교는 나쁘고 이슬람이 좋다는 취지의 편파적인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에서 이것을 두고 토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지켜만 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조경식 장로님과 저는 “우리는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남들이 당신들의 아버지를 모욕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10대의 버스를 빌려 방송국 앞에서 데모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공영방송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 중에 
그런 종교 편향적인 프로그램들이 현격하게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욕을 먹는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왜 저들로부터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요18:22절에는 대제사장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을 하니까 대제사장의 하속 중의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막대기를 사용해 간접적으로 때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하속은 손으로 때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요18: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셨지만 
하속 하나가 부당하게 때리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정당한 항변을 하셨습니다. 
더 때릴까봐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세상가운데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싸우지는 말되,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것은 괜찮지만 모욕하는 것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비겁한 타협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비겁하게 침묵하고 타협했습니다.

◑3. 야곱의 아들들은 세상과 정면으로 무력 충돌하였다.

야곱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을 하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디나가 겁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의 아들들은 정당하고 용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14절에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욕이 됨이니라”

야곱의 아들들이라고 해봐야 나이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순수한 청년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 누이를 그런 이방인들에게 줄 수 없다”고 말한 첫 번째 반응은 
아주 정당하고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반응은 너무 지나친 행동이었습니다. 

두 번째 반응은 그들이 “세겜 지방의 남자들이 모두다 할례를 받으면 우리 누이를 주겠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또 나아가서 세 번째 반응으로 세겜 지방 남자들이 이에 다 좋다고 생각하고 할례를 받았는데 
가장 고통스러운 삼일이 되던 날 레아의 둘째 아들인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가 
칼을 들고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모조리 죽인 것이었습니다. 

레아의 맏아들인 르우벤은 이럴 때는 어디 갔는지 잠잠하고 
둘째 아들인 시므온과 셋째 아들인 레위가 용감했습니다. 

르우벤은 자기 서모를 겁탈한 사람으로, 장남은 장남인데 그 대우를 받지 못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세겜의 집에 감금된 디나를 되찾아 왔습니다. 이들은 무력으로 복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대를 맞았으면 한 대만 때려야지, 이것은 백 대를 때린 경우와 같습니다. 
너무 과하게 복수를 한 것입니다. 
사과를 받아내고, 이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했어야 하는데 
매우 지나친 복수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죽기 전 창세기 49장 5~7절에 시므온과 레위를 이렇게 저주하였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결국 시므온 지파는 유다지파에 속해 섞여 살다가 흐지부지 없어졌고,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이 피해를 주었다고 해서 무기로 대항하면 안 됩니다. 
고후10:4절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성도가 취해야 할 무기는 육체에 속한 무기가 아닙니다. 총과 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그리고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전도라는 영적인 무기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성전(Holy War)을 하는 존재들입니다. 
주먹과 칼, 무기, 정치적인 힘으로 싸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정치적인 정당을 만들어서 무력을 갖고 세상과 싸워서는 안 됩니다.

마13장에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다 뽑기를 원하시느냐고 물을 때, 
주인은 추수 때까지 기다리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추수 때에 가라지를 다 뽑아서 불에 던져 사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가 불상을 만들고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우리나라가 우상숭배 때문에 망하니까 불상을 다 부셔버리자!” 그런 짓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불상을 망가뜨리면 불교 신자들은 예배당에 불을 지를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시작으로 종교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 전쟁이 되면 기독교가 이기겠습니까? 세상이 이기겠습니까? 
기독교는 항상 소수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무력, 정치적 충돌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성도들이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 루터교가 생기고 개혁교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100년 후, 유럽에는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엄청난 종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독일을 중심으로 얼마나 거세게 일어났는지, 독일 인구의 절반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을 ‘30년 전쟁’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1648년 웨스트팔리아라는 곳에서 회담을 열고 
다시는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하지 말자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웨스트팔리아 조약’(Treaty of Westphalia)입니다. 1648 
그 이후 인류 역사는 근대기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절대로 성도는 무력으로 세상과 맞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이 야곱의 가문에 비상한 개입을 하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의 가문을 보호를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야곱의 가문은 창세기 35장 이후에 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이 살아남은 이웃들을 다 모아 야곱 가문을 멸절하자고 했을 것이고, 
야곱 가문은 패가망신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그의 가문을 특별히 보호하셔서 그들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가족들에게 모든 이방신에게 드렸던 우상제물들을 
세겜 땅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버렸습니다. 35:4
이제 우리 집안은 절대로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야곱이 달라고 해도 그 아내들이 내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환이 생기니 이제 다 내어 놓았습니다. 
야곱은 그렇게 우상을 다 버리고 서원했던 벧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야곱을 추격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너무 가까이 하지 마시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도 하지 마시고, 
세상과 무력으로 싸우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도님들에게 성령님이 강한 도우심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