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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제8장 모세 / 존 라일 히11:24~26 스크랩
◑제8장 모세, 우리의 모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제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4-26)
▲1 모세가 포기하고 거부했던 것.
모세는 자기 영혼을 위해서 세 가지를 포기했다. 그가 드린 위대한 세 가지 희생은,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희생이었다(히 11:24-26).
1)높은 신분과 지위를 포기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 그녀는 바로의 외동딸이었고,
서열로 볼 때 모세는 언젠가 이집트의 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2) 쾌락도 거부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 쾌락은 지위고하,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좇는 환상이다. 이전에 모세의 입술에 놓였던 잔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들이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잔을 외면했다. 거절했다. 포기했다!
3) 부귀도 거절했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 모세는 가공할 만한 부와 재물을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보화를 가지려 하지 않고, 그것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는 거절했다. 그는 포기했다!
모세는 지위와 쾌락과 부귀를 한꺼번에, 즉시 거절했다.
젊은 날의 객기와 일시적 기분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나이 사십이었다.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이다.
그는 자기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잘 배운 사람이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행7:22).
아무리 많은 것을 거부한 사람이라도 모세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희생과 자기부인에 탁월한 사람이 많이 있지만, 모세는 그중에 발군이었다.
▲2 모세가 선택한 것.
모세가 선택한 것은 그가 거부한 것만큼이나 놀랍다.
그는 자기 영혼을 위해 세 가지를 선택했다. 그것을 통해 구원의 길이 열렸다.
모세는 그 길을 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세 가지를 선택했다.
1) 고난과 고통을 선택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 있는 안락과 편안함을 떠나 공공연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 섰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박해받는 백성이었다. 불신과 의심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들과 친분을 맺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들이 애굽의 폭압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무리 구하고 노력해도 안정된 가정과 조국을 되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고통과 시련과 가난과 궁핍과 불신과 염려와 심지어 죽음을 택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모세였다.
2) 멸시받는 백성과 함께 있기로 했다.
모세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던 유력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떠나 이스라엘의 자녀들과 함께 했다.
어려서부터 고귀하고 부유하고 화려한 사람들 가운데서 자란 그가
자신의 높은 지위를 버리고 낮아져 불쌍한 사람들-노예, 농노, 천민, 종, 압박받는 자, 빈민, 고
통받는 자, 벽돌 굽는 자-과 운명을 같이 하고자 했다. 얼마나 놀라운 선택인가?!
3) 치욕과 멸시를 선택했다.
바로의 궁전에서 떠나 이스라엘 진영으로 들어간 모세에게 쏟아진 비난과 조롱이 어떠했을지
짐작이나 하겠는가? 사람들은 그가 어리석고, 나약하고, 미련하고, 제정신이 아니고
완전히 미쳤다고 말했을 것이다.
모세는, 왕자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영향력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바로의 궁전을 떠나 이집트의 노예가 되었다!
이 모든 정황을 고려해 보면, 그가 모르고 그 길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나약하고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성경은 특별히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고 말한다(행7:22).
▲3. 모세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원리
모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놀랄 만한 그의 행동의 원천은 바로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행동했고, 믿음으로 선택했고, 믿음으로 이집트의 영화를 거절했다.
그의 모든 행위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목적을 모세의 마음에 두시고 그것을 보게 하셨다.
구원자가 이스라엘 무리 가운데서 태어날 것,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어진 위대한 약속이 성취되어야 할 것,
그것이 임박했다는 것을 모세에게 계시하셨다.
모세는 이 약속과 계시를 믿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믿었다.
하나님은 완전히 지혜로우신 분임을 믿었다. 하나님은 정말 자비로운 분임을 믿었다.
모세에게 믿음은 망원경이었다. 침침한 이성의 눈에 시련과 절망, 폭풍과 격랑,
피로와 고통만이 들어올 때, 모세는 이 망원경을 통해 저 멀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안식과 평화와 승리를 보았다.
모세에게 믿음은 해석자였다.
무지한 감각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명령을 불가사의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믿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넘치는 위로를 찾아냈다.
믿음은 모세에게, 모든 지위와 명성은 땅에 속한 것이고, 헛되고 공허하고 잠시 지나가는 것일 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참되고 위대하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권속에 속한 왕이며,
귀족 중의 진정한 귀족이었다. 지옥에서 으뜸보다는 천국에서 꼴찌가 되는 것이 더 나았던 것이다.
믿음은 모세에게, 세상적인 즐거움은 “죄가 주는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세상의 즐거움은 죄와 함께 버물려져 있어서, 세상의 즐거움을 따라가는 사람은 죄로 이끌리고,
영혼이 파괴되고, 하나님께 싫어 버린 바가 된다.
안일하게 죄를 짓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고 순종하는 것이 훨씬 낫다.
믿음은 모세에게, 신자는 천국에서 이집트의 보화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원한 상급,
도둑이 훔쳐 가거나 좀과 동록이 슬지 않는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은 썩지 않을 것이다.
믿음은 모세에게, 고통과 고난이 실제 악이 아니라고 말했다.
고통과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이다.
은혜의 자녀가 영광에 이르도록 가르친다. 고통과 고난은 우리의 타락한 의지를 정화시키는 묘약이다.
고통과 고난은 우리에게 있는 찌꺼기를 녹여 없앨 용광로이다. 세상과 우리를 묶는 올무를 끊을 검이다.
믿음은 모세에게, 모든 치욕과 멸시는 “그리스도의 능욕”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과 멸시를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믿음으로 본 것들이 곧 그의 삶의 실체가 되었다. 그의 믿음이 우리가 아는 모세가 되게 했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믿음이 말하는 바를 믿었다.
모세가 세상이 주는 지위와 부귀와 쾌락을 거부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는 저 멀리 앞을 내다보았다. 열국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재물이 날개짓 하고 달아나 버리는 것과, 쾌락이 심판과 사망으로 이끄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적은 무리만이 영영히 서는 것을 보았다.
모세가 멸시받는 백성과 고통과 치욕을 선택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는 그 이면에 있는 것을 보았다. 고통이 잠시 동안만 있으리라는 것과,
치욕은 사라지고 영원한 영광만이 있으리라는 것과
멸시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영광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라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다.
그가 옳지 않았는가? 비록 그는 죽었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바로의 딸이 누구인지 기억조차 못한다. 바로가 다스렸던 도시가 어디였는지 알 수도 없다.
이집트의 영화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성경이 읽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세의 이름은 남아 있다.
지금도 여전히 살아서 “믿음으로 사는 자는 행복하다”고 증거한다.
▲4. 모세의 믿음의 역사의 합당한 결과로서 우리가 따라야 할 실천적 교훈
1) 모세처럼, 세상보다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정치인은 자기 자리를 박차고, 부자는 그 재산을 다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어떤 지위에 있든 고난을 각오하라는 것이다.
안 좋게 보이는 것을 더 많이 선택하고, 좋게 보이는 것을 더 많이 포기하고 거부해야 한다.
오늘날 세속적 기독교가 득세하고, 사람들은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지 않고, 어떤 희생도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대가도 치를 필요가 없는 값싼 기독교는 아무 가치도 없다.
자기 영혼에 대한 간절함이 있고, 주일에나 겨우 교회 가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성경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신약성경의 성도처럼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제 곧 여러분은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일을 견뎌야 하고, 자기 영혼을 위해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지금도 십자가에 대한 적개심은 여전하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여전히 멸시받는 적은 무리이다.
참된 복음적 기독교는 여전히 치욕과 멸시를 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은 여전히 나약한 광신자요 미련한 자로 취급받는다.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누구를 섬길지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동시에 양편에 설 수 없다.
그리스도의 친구면서 동시에 세상의 친구가 될 수는 없다. 이 세상 자녀들의 틈바구니에서 나와야 한다.
그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많은 조롱과 어려움과 반대를 감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될 것이다.
이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기꺼이 해야 한다.
적은 무리가 붙잡고 살아가는 생각을 따라가야 한다. 이런 삶은 대가를 치른다.
도도하게 흘러가는 다수의 생각을 거슬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길은 좁고 험하다.
이 사실을 부인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 길을 따라가라. 희생과 자기부인 없이는 구원받는 신앙은 없다.
모세처럼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포기하는가?
아니면 세상이라는 애굽에 빌붙어서 “나는 이게 꼭 있어야 해. 그것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어”
하고 말하지 않는가? 여러분이 고백하는 기독교에는 십자가가 있는가?
땅의 것을 추구하며 사는 주변 사람이 여러분의 신앙 때문에 불편해 하고 거북해 하는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두루뭉술하게 풍조와 유행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는가?
복음 때문에 받는 고통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가?
자신의 믿음과 실천으로 인해 사람들이 여러분을 멸시하고 수치를 준 적 있는가?
바로의 딸을 떠나 기쁨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어 본 적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 본 적 있는가?
이것은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질문이다. 하지만 이 길 외에는 없다.
성경이 그렇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한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5-27).
많은 사람들이 은혜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영광은 누리고 싶어 한다.
일은 하지 않으면서 일한 삯은 너무도 원한다. 추수는 바라지만 수고는 하지 않는다.
거두기를 바라면서 뿌리지는 않는다. 상급은 원하면서 싸우지는 않는다.
"쓴잔을 마셔야 단잔을 느낄 수 있다“는 번연의 말처럼,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2) 세상보다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게 하는 것은 믿음밖에 없다.
다른 것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지식도 못하고, 느낌도 못하고, 정기적으로 행하는 종교적 외양으로도 못한다.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자라가는 신앙을 위해서는 반드시 살아 있는 기초가 있어야 한다.
그 기초는 다름 아닌 믿음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전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성경 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이에 어긋나는 모든 교리는 누가 가르쳤든 다 거짓이라는
실제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가진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의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칭찬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칭찬을 더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모세와 같은 선택을 한다.
장차 얻어 누리게 될 일에 대한 기대 때문에 지금 잃어버리는 것이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항상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에게서 자신의 필요한 것을 얻고,
그분을 자기 영혼의 만나로 누리는 습관이 있어야 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3) 신앙이 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이고 불경건한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세처럼 살고자 하는 생각을 한순간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 쓸모도 없고 유익도 없다.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라 불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그리스도 교회에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단 두 부류만이 있을 뿐이다.
4)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는 참된 비결은, 위대한 믿음에 있다.
은혜와 은사와 재능에 대해서는 생각도 많고, 말도 많이 한다.
반면에, 믿음이 은혜와 은사와 재능의 뿌리요 어머니라는 사실은 잘 잊어버린다.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 사람은 그가 가진 믿음만큼만 갈 수 있다.
사람의 삶은 자신이 가진 믿음의 분량에 비례한다. 자신이 누리는 평화, 인내, 용기, 열심, 사역 등은
다 그가 가진 믿음에 비례한다.
웨슬리나 윗필드, 벤, 헨리 마틴, 비커스테스, 찰스 시므온, 맥체인과 같은 탁월한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그들의 은사와 은혜가 아니라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하나님이 제시한 은혜의 모태에 영광 돌리고,
그들의 믿음을 칭송하라. 믿음이야말로 이들이 나타낸 모든 성품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기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도는 믿음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행위가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부지런함은 다름 아닌 믿음이 역사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담대함이 무엇인가? 의무를 정직하게 담당하는 믿음이다.
그들을 그렇게 거룩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 살아 역사하는 믿음 때문이었다.
믿음이 눈에 보이게 드러난 것이 거룩이다. 거룩은 성육신한 믿음이다.
믿음은 모든 성품의 뿌리이다. 뿌리를 바르게 하면, 곧 많은 열매가 맺힐 것이다.
여러분의 영적인 번영은 항상 믿음에 달려 있다 믿는 자는 구원에 이를 뿐 아니라,
결코 목마르지 않고 승리한다.
견고한 믿음으로 이 세상이라는 물 위를 성큼성큼 걸어 위대한 일을 이룰 것이다.
철저하게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여러분이 믿는 바를 살아 내라.
모세를 모범으로 삶아 그의 자취를 따라가라. 가서 모세가 했던 것처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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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글『거룩』제8장 모세, 우리의 모범 / 존 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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