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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감사 눅17:11 2013.11.21. 스크랩 감사(절) 설교모음
*원제목 : 아홉 명은 어디에 있느냐
인생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미경의 관점이고 또 하나는 망원경의 관점입니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똑같이 무엇인가를 확대해서 보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정반대 이지요
현미경은 너무 작아서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실제보다 더 확대 해서 우리가 보게 해주는 그런 도구입니다
망원경은 정반대로 실제로는 아주 큰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우리 육안으로는 실제 크기를 볼 수 없는 것을,
실제 크기로 우리 눈에 작게 보이지만 실제 크기대로 보이게 해주는 그런 도구죠
이 두 가지 도구를 우리의 인생에 적용해보면 불평이란 현미경과 같습니다
실제로는 아주 작은 것인데 불평하면 불평할수록 그것이 더 점점 커지게 보입니다
실제 문제보다 더 크게 만드는 효과가 있지요
감사란 망원경과 같은 효과를 발휘합니다
실제로 너무나 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눈이 어두워, 죄의 마음에 갇혀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크기를 다 보지 못합니다 너무나 작게 보이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감사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를 실제 크기처럼 보이게 해주는 것이죠
감사는 우리의 영안을 밝게 해주고
실제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실제 크기대로 보게 해주는 그런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불평의 눈으로 우리 인생을 바라보지 않고
감사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다시 한번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주일이 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말세에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교만하고..'
이 모든 말세에 나타나는 죄의 증상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목록 중에 보면 우리가 때로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쉽게 넘겨버리는 목록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치 아니하며" 라는 말씀입니다
딤후3:2 감사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말세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죄의 증상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레벨에
그러한 죄의 증상에 "감사하지 않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롬1:21절에 보면 '감사 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수준의 죄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동격으로)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상태에서
첫 번째 등장하게 되는 죄는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감사치 않는 것은 늘 그러기 마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 우리의 대표적인 마음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 이것은 죄의 증상이요
죄의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앞에 나와 고침받은 열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감사하지 않았던 9명의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이 지적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17:17
9명은 어디에 있느냐
10분의 1만 감사했다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불치병 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당시 그 나병을 고침을 받았지만
그 중 한 명만 감사하고 9명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9명은 어디에 있느냐?
수치적으로 10분의 1만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감사하지 아니한 9명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는가, 그렇게 큰 은혜, 그렇게 큰 기적을 체험하고도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지?' 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과연 온누리 교회 성도가운데 정말 9/10가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을까?
과연 10분의 1을 넘을 수 있을까? '감사하는 인원이 10분의 일을 진정 넘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두렵고 떨립니다
우리 인생의 시간 가운데 하나님께 받은 축복 가운데
(감사가) 10분의 일을 과연 넘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이 9명의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죠
왜냐면 그 아홉 명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고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한 믿는 사람이었다는 거지요 *불신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어도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론 / 오늘 본문에는 3단계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단계는 문제와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 부르짖는 기도의 믿음!
기도하는 믿음 부르짖는 믿음
자신의 문제와 아픔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그런 믿음의 단계를 먼저 보여 줍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들을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10명의 나병환자들이 동일하게 그 믿음으로
예수님께 간청했죠
나병의 문제는, 육체적인 질병도 심각한 질병, 몸이 문드러지고 썩어 들어가지만
느낌이 없어서 손마디와 몸이 다 떨어져 나가는 엄청난 무서운 질병이기도 하지만
더 무서운 면은 사회로부터 격리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그 지역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 되는 것!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무서운 고통은 소외와 격리되는 고통이었죠
갈릴리 지역에 있던 나병, 또 사마리아 지역에 있던
나병 환자들이 모여 있던 곳이 바로
그 두 지역 사이에 있었던 길목이었던 것이죠 *눅17:11
누구도 지나가지 않는 길목, 그 길로 지나갈 바에는
차라리 며칠이 더 걸리더라도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었지만
예수님은 부득이 굳이 그 길로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곳에 바로 버림받은 영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걸어 가야 될 길이 바로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받은 그런 영혼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우리가 찾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2013.11.24일에 그래서 광야교회, 그 영등포역 근처에 노숙자들 사역하는
광야교회 임명희 목사님께서 노숙인들을 초청해서 하는 그 예배 인도와 축복을 해 달라 그래서
저희 교회가 후원도 하고 같이 가서 예배도 그리고 그럴겁니다
함께 참여 하실 분들은 함께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많은 나환자들) 가운데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왜 부르짖었을까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불치병,
우리와 같은 영혼들을 고쳐주는 분이라는 것을 그들은 듣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님을 찾아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일반인들이, 건강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사람들은 돌을 들고 경계 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들이 일반인들이 사는 주거 지역으로 오면 돌을 쳐서 죽여도 율법에 의히면 괜찮았습니다
율법은 그들을 정죄하는 것보다는 더 큰 피해를 전염병으로 막기 위해서
그런 엄격한 법을 만들었던 것이죠 어쩔 수 없는 제한조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곳으로 가셨던 것이죠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간절히 부르짖었죠
"주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것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인지
기도를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십니까?
이들이 행했던 이 고백으로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왜 그 고백이 나오지 않습니까?
신학적인, 성경적인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나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자기가 자기를 볼 때 별로 불쌍하지 않는 거예요 괜찮은 거예요
그러므로 그런 기도를 할 필요가 없는 거죠
자신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거지요
우리 모두는 다 괜찮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되는 저희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거지요
'하나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병들었을 때 고난 당할 때 어려움이 있을 때
문제 속에 있을 때만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 (평소) 영혼의 상태를 보고
'하나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1단계)
이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이렇게 불렀습니다 *예수, 에피스타타! 눅17:13
보통 선생님(랍비)이란 단어는 그 당시에 가르치는
자에 대해 부르는 호칭이었지만
이들은 다른 단어(Master, 에페스타테스)를 썼습니다
높은 곳에 계신 분, (신적인) 권위를 가진 분,
능력을 가지신 분 이란 단어를 썼습니다 *Master, 에페스타테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부르짖습니다
이들은 멀찍이서 멀찍이서 부르짖었습니다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은 예수님과의 거리가 멀리 있었지만
영적으로 보면 이들은 아주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환경과 법으로는 가까이 갈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오도록 하시는 그런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10명이) 이러한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다 감사한 것은 아니라는 거죠
이런 기도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사람은 적었다는 거지요
내가 기도한다 그래서
내가 꼭 감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기도와 감사는 다른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 앞에 오랜시간 나간다 할지라도
그 기도 가운데 감사의 분량이, 감사의 내용이 얼마나 되는가를
우리가 함께 점검해 보자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믿음의 단계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자 이들의 부르짖는 기도에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눅17:14 예수께서 그들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의 몸을 보이라'
그러자 그들은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 내가 너희를 고쳐주리라!'
왜 갑자기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좀 엉뚱해 보이는 말씀이죠?
이것은 율법에 대한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에 나병환자들이 참 많았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들 중 하나는
나병환자 중에 고침을 받거나,
자연적으로나 혹은 어떤 계기로
나음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검사하는 역할을 제사장들이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 몸을 제사장들에게 보이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전제되어 있는 거죠
제사장에게 가는 사람은 나은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나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서 확인 맞는 거죠
그럼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말씀은
그 이면에 어떤 전제가 있는 겁니까?
'너희는 이미 고침 받았다' 라는 선언인 것이죠
근데 문제는 그들에게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는 거지요
현재 그들은 아직 나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제사장에게 간다는 게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라는 거지요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있는 자리에서 '이제 너희가 다 나았으니 제사장에 가서 확인 받으라'
그랬으면 합리적인 절차입니다 근데 순서가 바뀐 것 같습니다
제사장의 가서 먼저 보이라고 하니, 지금 낫지도 않았는데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니 바로 그때 무엇이 요구되는 겁니까?
믿음이 요구되는 겁니다
나은 줄로 믿고 제사장에게 가라는 거죠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여러분 여기서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증거를 보고 믿는 것은 사실 믿음이 아니라 확인 일뿐입니다
동의일 뿐이죠
보이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 증거가 없을 때
진정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오히려 그 믿음이 증거가 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게 히11:1절이 말씀 하는 것이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믿음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는 거지요
우리는 길이 열리면 걸어가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걸어가면 길이 열린다 라고 말씀하시죠
구약에 보면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엘리사에게 찾아온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네 몸을 7번 씻으라'
한 번 씻고 두 번 씻었을 때는 안 나았을 것입니다
요단강을 제사장들이 건널 때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널 때
발을 요단강에 담갔을때 강이 멈춰섰다 그랬어요
강이 멈춰선 다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빠질 것 같이 발을 물에 담갔을 때 그 강이 멈춰 섰다는 거지요
우리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 그 길로 가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네 믿음을 증거로 삼아 도전 할 때
그 길이 열리고 문이 열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기적에 체험하도록, 동참하도록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열명의 나병환자 들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제사장에게로 함께 갔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을 보여 주는 겁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가는 도중에, 가는 도중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진 거예요
그러므로 이들은 믿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사용함으로, 믿음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모두가 다 감사한 것은 아니었다는 거죠
기도로 하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서도 믿음을 사용함으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다 감사한 것은 아니다라는 거예요
▶3. 세 번째 믿음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침 받고 나은 받은 이후에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감사했던 한 사람의 믿음이 이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음에 절정, 믿음의 최고 단계는 바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며 감사하는 믿음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그 수는 매우 적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다수에 속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대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성도가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받은 은혜, 받은 체험에 대해서 감사로 하나님 앞에 응답해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한 명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죠
예수님이 그 상황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아홉 명은 어디에 있느냐?"
'열 명이 다 고침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몰라서 지금 질문 하시는 겁니까? 아니죠
이 질문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이 네가 어디 있느냐?'
질문하신 것과 마찬가지죠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죠
아담의 영적 현주소를 물으신 것입니다
이 9명의 영적 현주소에 관해서 예수님은 도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홉 명은 어디 갔을까요?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틀림없이 이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 제사장에게 갔을 거예요 가는 도중에 몸이 나았죠
그리고 제사장에게 확인서를 받아야만
가족과 사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더 빨리 제사장에게 갔을 겁니다
그리고 확인서를 받아서 어디서 갔을까요?
가족에게로 갔겠죠 사랑하는 가족에게!
'내가 이렇게 고쳐졌어 내가 이렇게 나았어'
가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고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친구들을 만났을 거예요
9명은 믿음도 있었고 그래서 기도했고
그래서 믿음을 사용해서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것이 감사하게 까지 이르는 데는.. (어려웠죠)
(왜냐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그런 욕심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는 심성이 가득히 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9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가운데 (9명 중) 한 명은 혹시 아닙니까?
어떤 학자는 이 9명의 문제를 이렇게 참 심각하게 지적했습니다
이 기적의 아이러니컬한 결과는
이들이 기적을 체험 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아주 가까웠다는 거예요
그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입고 고침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 '선생님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그렇게 기도할 때는
너무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고침 받고 나음을 받은 후
이들은 아이러니칼하게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 라는 겁니다
기도를 통해 기적을 체험한 후에 하나님과 더 가까워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잠깐동안의 기적의 체험 후에 오히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더 멀리 떨어지게 되는 그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이 본문을 가지고 하용조 목사님이 설교한 설교집을 보니까
너무 기가 막힌 설명을 잘 해 주고 계십니다
"기적만을 좋아하면 기적이 끝나면 감사도 끝납니다
기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나병환자 10명중에 나머지 9명은 기적에 만족했습니다
기적에만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 명은 기적도 좋았지만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만났습니다"
여러분이 차이를 분명히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그 기적을 체험했지만
기적을 만들어 주신 분에게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거지요
선물은 받았지만 그 선물을 주신 분 앞에 나가지는 않았다는 거지요
고침을 받았지만 고쳐 주신 분을 얻지는 못했다 는 거지요
<내 생애 마지막 달>이라는 책을 쓴 캐리 슈기 라는
미국 우드랜드 펠로우쉽 교회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열 사람 모두가 다 동일한 선물을 받았지만
그 중에 그 선물의 포장지를 벗겨서 진정한 진짜 선물 확인한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진짜 선물은 뭡니까? 나병 에서부터 낫는 것 그 이상의 축복은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었죠
감사를 통해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와서 경배하는 것이었죠
그것이 진정한 선물이었다는 거죠
한 명의 나병환자는 제사장에게 가는 것조차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거예요
그는 가는 도중에 고침을 받은 즉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