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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찌할꼬

LNCK 2020. 4. 28. 11:27

우리가 어찌할꼬? (youtube.com)

 

우리가 어찌할꼬          행2:22~47         2024.01.28.

 

사도행전 2장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1~13절 : 성령이 임하시다. 
14~42절 :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43~47절 : 그 다음에 성령의 공동체가 탄생하는.. 성령이 임해서 공동체가 탄생하는 거예요.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사건이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죠.↙
그러자 깜짝 놀랄 만한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rfcdrfcd.tistory.com/15981566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일,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말'의 사건이었습니다. 
높고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모두가 알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내 마음에 와 닿는 친근한 언어로 다가오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했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서 거하신 이야기! 
여기에 하나님의 열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고, 나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하시는 그 열망이, 
성령의 강림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시고 싶으신데, 근데 장애가 있어요. 뭘까요?

-거리가 멀어서? No
-우리가 못나서, 너무 수준이 낮아서 함께 하기 힘들다? 
그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낮추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내가 못난 것은, 하나님께는 문제가 안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이 죄를 치워야 됩니다. 죄라는 장애를 없애야 되는데, 어떻게 없앨까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하는 다짐으로 죄를 이길 수는 없겠죠. 

여러분 성경에 의하면 '죄'라는 놈은, 언제나 '사망'이란 놈과 함께 묶여 있습니다. 한 팀입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길 장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정복하셨습니다. 

그것을 확인한 것이 부활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죠. 하늘과 땅이 가까워졌습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고속도로가 생긴 겁니다. 

이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자유롭게 오셔서, 행할 수 있는 그런 새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신 것은, 무엇보다도 이 땅에 오신 역사적인 사건이고, 공동체적 사건이고, 
내 마음속에 오셨다는 개인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세 양상이 전부 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처음에 말(언어)의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담이 무너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구원을 이루셨는데, 
그 십자가 구원의 효력을, 현실화 actualize 하는 것이, 성령 강림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고 모신다' 그러죠.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부터는,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은 후에 어디 갑니까? 
성령님이 내 속에 영원히 계신다 그랬으니까, 죽어도 떠나시는 거 아니잖아요.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시는데, 만약에 내가 죽어서 지옥에 간다면,

성령 하나님도 거기에 따라가셔야 돼요. 그래서 성령이 임하신 성도는, 지옥에 안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령의 사람은, 천국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할렐루야!   마28:20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게 구원이에요. 이제는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시대가 된 거죠!  

 

◑베드로의 설교 '성령이 임하심으로, 구원이 실제화, 현실화 되다'

 

베드로는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2:38~40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구원을 받는데 어디서부터? '이 패역한 세대에서' 
패역한 세대는, 낡은 세대 라는 말입니다. 

그대로 가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 세대가 계속 됐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이 새로운 세대를 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세대, 영원한 시대입니다.
이 영원한 세대에 속한 삶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오래 산다. 무한정 리미트리스 limitless 라이프'가 아니라는 거예요. 
새로운 세대에, 그 영원한 세대에 속한 삶이 영생이고요. 
그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다'는 것과 사실상 똑같은 개념입니다.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럼이 영생을 얻는 조건이 무엇인가? 두 개입니다. 
회개하라,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죄 사함을 받을 것이다.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 

회개가 뭡니까? 뉘우치고 눈물 흘리는 것, '내가 죄를 지었어요. 큰 죄입니다. 벌받아 마땅합니다.' 
근데 판사 앞에 가서 눈물 흘리고 진심으로 반성합니다. 

그러면 죄를 용서해 줍니까? 세상에 그런게 어디 있어요? 반성하면서 벌 받아야죠. 
정말 절절하게 반성하면 조금 정상 참작은 해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성한다고 죄를 없이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없게 해주십니다. 그러니까 그냥 만만하십니까? 아니죠. 

세상에도 그런 거는 있습니다. 보석금 돈을 많이 내면 
구속되어서 재판 기다리는 동안에, 집에가 있을 수는 있어요. 
근데 그것도 죄를 없게 하지는 않습니다. 

보석금도 그렇게 어마어마한데, 죄를 완전히 없애버릴 길이 있다면,
그 얼마나 엄청난 걸 지불해야 될까요? 상상도 못할만큼 클 겁니다. 

그 대가를, 예수님이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회개만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시대, 믿음의 시대가 열렸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언제나 가능했던게 아니라는 거죠. 
십자가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새 시대이고, 복음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세례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표시입니다. 

여기에 뭐가 포함되는가 하면 '죽어도 천국 간다'는게 포함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물론 복음이라 그럴 때, 
'예수 믿으면 죽어도 천국 간다'는게 중요한 핵심인 건 사실입니다. 

이것만 해도 너무 크죠. 너무 놀랍죠. 기뻐 뛸 일이죠. 
그러나 이것도 너무 작은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선물에 비하면, 전체에 비하면 너무 작은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자기 백성 삼으시고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삶, 풍성한 삶, 그리고 플러스 만물의 회복 전체가 구원이에요.
그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데, 조건은 뭡니까? 예수 믿는 겁니다. 회개하고 세례 받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다 용서하시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으면, 구원 얻는 새 시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셨어요.

근데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내게 성령이 임하셨으면.. 성령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면,

내가 새사람으로 살게 되고, (이제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요) 그게 구원 받은 표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   2:14~40

 

여러분 이것이 복음인데, 이 복음은 오랫동안 예언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의 설교에도, 선지자가 두 명이 나옵니다. 
선지자 요엘과, 또 한 분은 30절에 '그는 선지자라' 했는데, 다윗을 가리키죠.

누가복음 맨 처음에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지금 누가가 써내려가려고 하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전체에
'우리 가운데 일어난 일'은
사실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fulfilled, 이루어진, 성취된 일'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무슨 말을 했고, 

그 예언들이 무슨 의미인지를 들여다 보아야 됩니다. 

▲1. 다윗의 예언부터 살펴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고, 장군이고, 탁월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다윗을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2:30

베드로가 보기에는, 다윗의 대표 정체성이 '선지자' 라는 거죠. 
오늘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 중에 어떤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누구인가요?
 
회사에서 팀장이고, 교회에서 집사이고, 아버지에게 아들이고, 집에서는 남편이고 아빠입니다. 
이런 여러 정체성들이 있는데, 그쪽에서 가장 중요한, 딱 하나만 꼽으면.. 그게 대표 정체성입니다. 

'다윗이 선지자다'라는 말은,
다윗이 역사적으로 여러 업적들이 있죠. 
전쟁에서 이기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었고, 여러 업적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예언한 선지자'의 역할이었다는 거죠. 
그것이 다윗의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뭐라고 했는지 25절부터 함께 읽습니다.
2: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를 깊이 만나 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다윗은... 사랑을 받으면서, 눈이 뜨입니다. 깊은 사랑은 다윗의 눈을 밝게 해줍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 
남다른 통찰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나를 그냥 버려두실 리가 없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가, 우리의 이 짧은 인생이 끝나면, 그대로 끝나버릴 리가 없다'

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한 것입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했는데  :27
다윗이 자신을 가리켜서 '주의 거룩한 자'라고 했을까요. 아니죠. 

더 중요한 것은, 결정적으로
'다윗은 죽어서 그 육신이 썩어서, 시체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겁니다. 무덤이 있다'는 거죠. :29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정말 그 영생을 받기에 합당한, 거룩한 분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윗, 다윗' 그랬지만 
다윗 그 자체로는 세상에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1장에서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했는데, 
그렇게 물어봤을 때에, 그들의 머리를 채우고 있던 회복은 어떤 그림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 과거의 다윗 왕을 생각했을 거예요. 
'다윗의 시대여, 다시 한번 오라'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지지와 환호를 보냈던 거 아닙니까. 

   지난 한 주 동안에 죽어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주 심란한 시간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못할 수가 있나?'  *2024년 아시안컵 대회, 졸전으로 4강에서 탈락

   그 벤치에 앉아 있는 독일 출신 감독 얼굴을 봤다면 
   '저 자리에 거스 히딩크 감독이 앉아 있었더라면...' 
   한국 축구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려줄 그분을 기대하며 상상했을 겁니다.

   어떻게 히딩크와 다윗을 비교하겠습니까마는,
   그보다 백배로 간절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왕을 그리워했고, 
   그 강성했던 시대가 다시 한 번 도래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거죠.

근데 지금 베드로의 말은, 다윗이 다시 와본들, 그도 죽었다는 거예요. 
저기 무덤에 누워 계신다는 거예요. (아마 베드로는 다윗의 무덤 가까운 곳에서 설교하는 듯) 

사실 다윗이 살아 있을 때도, 완벽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고생 많이 했습니다. 아들이 반기를 들 정도였어요. 
압살롬을 마냥 나쁘게만 말할 수도 없어요. 왜냐면 많은 부하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그 아들을 따랐어요. 

지금이 워낙 힘드니까 다윗 시대를 그리워하는 거지, 
그 시대도 완벽한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 많은 문제들이.. 다윗이 살아서 다시 출현한들,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바라는데, 진정한 회복은 무엇인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그리스도의 부활이 답이다' 라는 말이고, 
이것이 베드로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회복뿐 아니라, 
만물의 회복, 모든 인류의 영원한 운명의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옛날에 다윗이 말했던 말(시16편)의 의미를 
이제 와서 우리(베드로 당시 성도들)가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는 거예요. 

다윗도 시16편에서 예언은 했지만, 희미하게만 알았어요. 자기도 잘 몰랐어요. 
그 근거인 예수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눅10:23~24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구약의 선지자와 임금들이, 다윗 같은, 요엘 같은 사람들이,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사람들이 예언을 했는데 
그러면서 기다려 왔는데... 확실히는 몰랐어요.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것을 보고 '아 그렇군요. 이거였군요.' 손뼉을 치게 될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을 부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거예요. 

 

선지자들은, 캄캄하게 어두운 칠흑 같은 시대에, 횃불을 들고 시대를 비춘 사람들이었죠. 
그 빛이 비춰서 보이는 부분이 분명히 있죠. 그게 예언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해가 떠올랐습니다. 
해 아래 있는 사람들, 신약의 성도들은 해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깜깜한 밤에 횃불을 들고, 시대를 비추던 선지자들은,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평범한 신약의 성도들이, 그들보다 하나님의 뜻을 훨씬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죠. 
왜요? 해가 떠올랐기 때문이죠. 

다윗이 예언했던 그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구약시대를 살았던 다윗보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가 훨씬 더 잘 알 수 있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지금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다윗보다. 똑똑하다. 탁월하다. 잘났다.' 그게 아니고요.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해가 떠올랐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구원의 현실을, 
성령이 임해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셔서, 보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예수를 믿고 있는 겁니다. (라고 베드로가 설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원의 현실을 
지금 성령 안에서 보고 있으며,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더 또렷하게 증거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예언을, 우리가 그 의미를,
예언한 당사자인 다윗보다 더 또렷하게 알 수 있는 이유입니다. 

▲2. 요엘
같은 원리로 요엘서의 예언을 봅니다. 

 

2:16~21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인용하는 요엘의 예언에는 세 가지 주제가 나와요. 예언, 징조, 구원입니다.

1) 예언 : 모든 육체가 성령을 받고 예언하고 환상 보고 꿈을 꿀 것이다. 

2) 징조 : 피와 불과 연기, 해와 달이 막 피빛이 되는 이런 아주 무시무시한 징조가 나옵니다. 
   징조를 이야기하면요. 사람들이 관심이 확 거기에 쏠립니다. 무슨 재난 영화 보는 것처럼요.      

   그런데 진짜 중요한 핵심은 마지막 3)에 있습니다. 

3) 구원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여러분, 징조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징조를 세게 이야기하는 것은
구원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재난 영화, 헐리우드 영화 많이 보셨죠? 
이런 재난 영화을 보면요. 막 쓰나미가 올려오고, 컨테이너가 막 날아다니고 
건물이 막 부서지고 하는데... 결국 맨 마지막의 결론은 한 가족의 변화에요. 
싸우던 부부가 하나 되고, 뭐 부자가 화해하고요. 
아주 기죽어 지내던 청년들이 막 그냥 용감한 사람으로 바뀌고요. 
무슨 말인가 하면요. 여러분 세상 영화도, 재난적인 상황이 그 자체가 결론이 될 수 없다는 거죠.

징조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결론은 21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성경에서 재난과 징조를 이야기할 때, 그 재난 자체가 초점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에게 무언가를 촉구하십니다. '회개하라 구원을 받으라'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 읽을 때, 재난 자체를 이해하고 불구경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 그래서 exit 할 방법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 얻으려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랬는데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또 하나 '주'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죠. :36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합니다. 

베드로 설교의 결론이 36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지금 처음부터 예수를 주님으로 믿기 때문에 
이게 뭐 별 말 아닌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놀라운 말입니다. 

구약성경 요엘서의 예언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욜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이 말씀을 사도행전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으로 바꾸어 말합니다. 행2:21
왜 이렇게 했는가 하면, 베드로가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쓰던, 구약은 히브리로 되어 있고, 헬라어 성경 70인역을 보면 
'여호와'가 전부 '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면
다들 '여호와를 말하는구나' 라고 다 알아듣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가 쭉 설교하면서 맨 마지막에 결론은 
'예수가 추가 되셨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가 하나님이시다' 라는 고백을 하는 거죠. 

유대인들은 구약의 말씀을 따라서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 아주 레디컬한 일신론이었어요.
여기에 다른 신들이나, 신 비슷한 존재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그렇게 견고한 일신론적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주로 고백되고 경배되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만 주님이었는데,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키리오스다 라는 이 고백이, 
사실은 구약과 신약을 넘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발전입니다. 성서신학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하나님이시다. 메시아다'라고 할 때에
이 말씀을 당시 청중들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하나님이 마침내 보내주셨군요. 오 감사합니다.' 
그랬겠습니까? 아니죠. 무리가 도리어 죽였잖아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잖아요. '죽여라 죽여라!' 외쳤잖아요. 
멸시하고 침 뱉고 욕했잖아요. 
최소한 동조하거나 침묵함으로써 가담했습니다. 

제자들도 별다를 바 없었어요.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이 주님이신데... 
환영하고 경배하고 순종하기는커녕, 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죄인인 거예요. 
베드로까지 포함해서, 십자가 앞에서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였는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 
2:37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우리가 어찌할꼬?'
그렇죠.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세웁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본인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 자리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수단과 방법이 끝나는 그곳에서, 구원의 길이 열리는 줄 믿습니다. 

2: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여러분,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거예요. 
요엘이 말한 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이 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되는가 하면,

사실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 멀잖아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잖아요. 
근데 우리 앞에 오신 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으면 
이게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구원을 받는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나를 위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을 예수님이 이루셨어요. 
그 구원을 알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이 
우리 가운데 임하신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언제 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도 성령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의 기적은, 말씀의 사건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이 원하는 변화, 기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나한테 오셔서, 딱 한 가지 기적을 들어주겠다 그러면 
여러분은 뭐를 부탁하겠습니까? 

'우리 아버지 많이 아프세요. 좀 고쳐주세요.' 
'우리 집에 먹을 것이 없어요. 등록금이 없어요. 돈 좀 주세요.' 
'취업 좀 시켜주세요.' 
'우리 가족들이 서로 너무 싸워요. 이것 좀 어떻게 해주세요.' 
물론 그런 응답이 다 필요.해요. 

근데 여러분, 성경이 베푸는 기적의 넘버원은 말씀이에요. 
성령이 임하고 새 시대가 열리고 일어난 첫 번째 기적은..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 마음에 와 닿는 방식으로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처음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행3장부터 다른 기적도 많이 나올 겁니다. 
앉아서 걷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기도 하고요. 병고침도 있고요. 
아주 많은 기적이.. 다양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출발은 말씀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듣는 가운데
'듣는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거예요. 

다시 말합니다. 성령의 강림, 성령이 이 땅에 오셨다... 역사적 사건이고 
성령이 우리 공동체에 오셨다... 공동체적 사건이고 
성령이 내 마음속에 오셨다는... 개인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1) 성령강림은 지난주에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씀을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 rfcdrfcd.tistory.com/15981566

 

2) 성령강림은 공동체적 사건이다. 
우리는 개인주의 시대에 살기 때문에
2000년 전에 쓰였던 성경을 이해하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성령은 공동체 영이다' 라는 말도,
대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면,
'내가 개인적으로 성령을 받고 싶은데, 성령을 소유하고 싶은데, 성령 충만하고 싶은데 
그 방법은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공동체적으로 임하시는 성령

 

근데 성경을 연구해 보니, 그게 아닙니다. 물론 우리 마음속에 계신 성령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정말 강하게 생생하게 역사하는 곳은, 언제나 함께하는 공동체에서 입니다. 

마18: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아멘 
믿음은 처음부터 공동체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령충만 해도,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어요. 
한 개인이 누리는 성령의 임재는 한계가 있어요. 

그리고 이게 온/오프예요. 
누구든지 밀도 있게 늘 성령과 동행하는게 아니고요. 깜빡깜빡, 온오프 해요. 
때로는 메말라요. 

젊은이들 하는 말로 '아무리 영발이 세도, 그 개인이 정말 신실하고 경건하고 열정적인.. 
영적으로 탁월한 사람이라도, 
그 한 사람보다는, 함께 모인 두 세 사람이 훨씬 더 소중합니다. 

그 모임이 훨씬 더 아름답고, 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예요. 모이기를 힘써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방으로 모이는게 그만큼 소중하다는 거예요. 
함께 삶을 나누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성령은 공동체의 영입니다. (공동체에 임하시고,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영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긴 말씀이지만, 
1~13절 : 성령이 임하시다. 
14~42절 :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43~47절 : 그 다음에 성령의 공동체가 세상에 탄생하는.. 성령이 임해서 공동체가 탄생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해서,
한 개인이 담대해지고, 한 개인이 멋있어지고, 한 개인이 신실해지는 것 이상의 
(행2장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공동체 탄생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어떤 공동체인가 44절부터 함께 읽습니다.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것이 성령이 하신 일입니다. 공동체를 만드신 거예요.
여러분,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도, 공동체가 하는 겁니다. 

행2장에 나오는 본문의 설교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설교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가 중요하죠.

이 설교를 편의상 '베드로의 설교'라 부르지만 
사실은 14절에 보면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12명이 함께 서서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공동체가 함께 말씀을 전한다는 거예요. 

이걸 보시면 1장에서 맛디아를 뽑아 놓은 이유가 분명해지죠. 
이스라엘 온 지파를 향해서, 공적인 증거를, 공동체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개인주의 시대에, 교회에 참 어려움이 많은데 
그 중에 한 가지가 '개교회주의' 입니다. 

'내 교회만 잘 되고 다른 교회는 죽쑨다?'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공동체의 영이고, 설교도 공동체의 증언입니다. 
이게 요즘에는 무슨 개인기처럼 인식되어서, 막 여기저기 막 그냥 몰려다니는데, 
그게 교회의 타락이에요. 

물론 하나님이 다양한 설교자를 통해서, 다양한 지역, 
다양한 각각의 공동체에 맞는 말씀 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본적으로 성경은, 공동체가 함께 읽는 책이에요. 
설교는 공동체의 증언입니다. 

금년에, <사도행전 말씀 네트워크>로 
전국의 수백 교회가 함께 설교합니다.

이 전체가 함께, 같은 성경 연구 자료를 나눕니다. 
그리고 또 소그룹으로, 설교자들이 대여섯 명씩 매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직접 만나시기도 하고요. 온라인으로 만나기도 하고요. 만나서 함께 말씀을 나눕니다. 
그냥 같은 본문으로 설교한다는 것 이상의, 아주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은혜로운 간증이 매주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뭐 별거 아닌 거 같아도요. 예수님 말씀 하셨잖아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 할렐루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함께 할 때에, 성령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 하나님이,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에게 깊어지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 '구원의 확신'입니다. 

'내가 죽으면 천국 갈 거야'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그 하나님이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다...' 이거 믿으면, 두려워할 바가 없어요.

이 생생한 성령 임재의 경험을, 나 혼자서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할 때 
말씀의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에 
계속해서 우리가 그 가운데서 깊어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더 깊이 복음 안으로 들어가고 
더 멀리 세상으로 갈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