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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땅으로 내려오다

LNCK 2024. 3. 23. 16:30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다 (youtube.com)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다        행2:1~21     2024.01.21.      ☞ 사도행전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입니다. 
흔히들 그렇게 말합니다. 
'오순절 날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해서, 그래서 성령이 임했다. 우리도 열심히 기도하자!' 
'오순절 어게인!' 이렇게들 말하는데,  
본문을 우리가 다시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요!

 

◑도입 / 홀연히, 임의로 임하시는 성령

행2:1~2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홀연히'
갑자기라는 거죠.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때입니다. 

지금 어디에 모였습니까?
여기는 '다락방'이라는 말은 없어요. 그냥 '한 곳' 이라고 했습니다. 

1장에서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는데, 그들이 합숙하던 곳이었습니다. 
멀리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이니까요. 

근데 본문의 이 공간은, 그 다락방일 수도 있고, 다른 공간이 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디에 모였나, 모여서 무엇을 했나?' 우리는 자세히 몰라요. 

기도했을 가능성이 많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간절히 기도했더니 성령이 임했다. 
우리도 열심히 기도하자. 그러면 성령이 임할 것이다' 이런 등식이 
그렇게 성경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이 등식이 완전히 틀렸다는 뜻은 아니고요)

성령의 임재는 소중합니다. 우리가 늘 사모하고 기도해야 되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어떤 틀에, 하나님을 집어넣을 순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라면 오시고, 가라면 가시는 분이 아니시죠.
성경의 하나님은 자유롭게 행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이나, 어떤 공간에 
여기가 신령한 장소니까, 중요한 곳이니까... (임하지 않으십니다)
혹은 영적인 프로그램으로, 성령강림을 또는 성령의 은사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라도 그렇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우리의 경험도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한 현상이 역사적으로 많이 나타났는데, 우리도 경험하는데, 
언제 나타나는가요? 

물론 간절히 모여서 함께 기도할 때, 성령을 사모할 때에, 
말씀을 들을 때에, 찬양할 때에 성령이 나타나십니다. 
맞습니다. 압도적으로 그런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시카고에서 옷 장사를 했습니다. 
꽤 크게 하는 집사님이었는데, 어느 날 고속도로에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성령이 임했습니다. 

너무 강력한 체험이었어요.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도저히 운전을 계속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몇 시간 동안 차 안에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날로 이분이 사업을 정리합니다.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시카고 시내에 가면, 아주 위험한 동네가 있습니다. 

홈리스들, 마약하는 사람들, 에이즈 환자들이 막 득실거리는 그런 동네에 가서 
그분은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 홈리스들의 교회에, 정말 성령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했습니다. 

 

제가 시카고에서 목회할 때에, 우리 교회가 정기적으로 그 교회를 방문해서 함께 동역했습니다. 

운전하면서도 성령 충만할 수 있고요. 
어떤 분은 설거지하다가, 집에서 진공청소기로 청소하다가, 성령 충만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한적한 곳에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다가, 성령 충만을 경험하는 예도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참호 속에서 성령 받은 사람도 있고요. 

그래서 그런 책이 있습니다. 필립 얀시가 쓴 책인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 
전혀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을 체험하기도 한다는 거죠.

근데 생각해 보면요. 그것은 나에게 뜻밖이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렇죠. 하나님은 무소부재, 어디나 계신 분입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은, 내가 보기에 뜻밖이지만  
하나님 계시지 않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이 꽤 옛날 책인데,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까
개정판이 나왔어요. 개정판은 <어! 하나님 웬일이세요> 라는 제목입니다.

'어! 하나님 웬일이세요? 여기에 웬일이세요? 이 시간에 왜 오셨어요?' 
본문에 '홀연히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런 뜻이죠.

▲여러분, 성령이 임하시면 나타나는 현상도 다양합니다. 
-폭발적인 눈물, 회개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강력한 전도, 또는 은사의 나타남 일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아주 잔잔하게 깊은 평온과 위로를 경험합니다. 
고요하지만,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그래서 여러분, 성령충만의 가장 큰 표시는 뭔가 하면,
(은사의 나타남보다는) 하나님이 가깝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았지만, 저 멀리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했는데 
성령이 나타나시면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나와 함께 계신다'는 이 임재의 느낌이,

그렇게 생생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내 옆에 와 계신 것처럼 너무도 또렷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내 옆에 아내/남편이 있는 것보다,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게 더 생생한 거예요. 

그래서 하는 말이 '굿모닝 홀리 스피릿, 안녕하세요. 성령님!' 
가족들에게 인사하듯이 인사하며, 생생한 성령의 임재 안에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임재를 사모하고, 간절히 모여서 기도하는 것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은 자유롭게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고후3:17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성령의 자유, 하나님의 자유는 
언제나 인간의 기대를 벗어나고, 흔들어 놓고, 뛰어넘습니다. 

누구도 성령을 묶어 놓을 수 없어요. 내 생각 속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체 높으신 어른이 우리 집에 오시면 
'여기 앉으세요. 이거 드세요. TV 이거 보세요. 이 채널 재밌어요.' 
'아니 그 이야기는 하지 마시고, 그거는 내가 부담돼요.' 그럴 수 없잖아요.

어른이 자유롭게 거동하시는 것을, 우리가 도와드릴 뿐입니다. 
'목마르구나' 하면 물드리고요. 피곤하면 쉬실 수 있도록 해드리고요. 

'너 요즘 남편하고 사이가 어떠냐? 그 얘기 좀 해봐라'
그러면 나는 하기 싫어도, 성령님이 이야기를 시킬 때가 있습니다.
이 '성령의 자유'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성령이 임했다'라고 한다면, 
잘못하면 그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시지만, 홀연히 임하실 수도 있다는 거죠.

성령의 임하심을 우리가 제한/조종/컨트롤 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성령을 내가 나눠주는 것처럼 말하는, 그런 시도를 조심해야 됩니다.

 

과거에 은사집회 때, 일부 기도원 등지에서 일부 그런 시도가 있었습니다.

마치 내가 성령을 독점해서 나눠주는 듯하는..)

◑본론 / 오순절 성령강림은, 하나님이 돌아오셨다는 뜻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그림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영성을 대표하는 한마디를 꼽으라면 
시편 90:13 '여호와여 돌아오셔서 언제까지니이까?' 
이게 모세의 기도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그 간절한 바람을 절절히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지금 곁에 안 계신다는 거죠.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이 떠나셨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예수님 승천 직전에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도 똑같은 말이에요.

제자들은,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로 돌아오신 겁니까?'를 묻고 있었던 거죠. 

 

그럼 '하나님이 이 땅을 떠나셨다' ...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시편 74:9절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런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에요. 
근데 어느 순간인가 선지자가 끊어져 버렸어요. 사라져버려서 없어요. 

성령의 나타남이 없는 기간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요.

신구약 중간기에 특히 그랬죠. 무려 4백년 동안이나 하나님은 침묵하셨고,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땅의 바짝 마른 상태, 영적인 기근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 기갈이 끝나고 성령이 돌아온 사건이, 사도행전 2장인데,
그보다 앞서 눅3장에서, 그 징후가 나타났었습니다. 

눅3:21~22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에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대단한 사람이다' 할 때 '그는 선지자다' 그랬어요. 
선지자란, 성령이 임해서 하나님의 말을 하는 사람이란 뜻이죠. 

그러니까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시대가 다시 돌아왔나?' 
이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이상이었는데 말입니다.
본문 행2장을 보면,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역사입니다. 

 

이런 예를 들 수 있어요. 여기 어떤 도시가 있습니다. 
지중해 어느 섬에 아주 나쁜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그 지역을 장악을 했어요. 
자기들 마음대로 행패 부리고, 못 살게 굴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잡아 죽이고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도저히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도시의 백성들은, 본국의 수도에서 왕이 군대를 보내서
이 반란을 평정하고, 정의로 다스려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드디어 한 장군이 왔습니다. 그 도시의 반란을 진압하고 정복했습니다. 회복했습니다. 
이런 장군을 당시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소테르(헬), 구세주'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라 할 때 바로 그 단어죠. 원래는 이런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두고 난 이 장군이,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백성들이 깜짝 놀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 왕이 되셔야죠. 나라를 회복하셔야죠. 
이제 진짜 제대로 된 정의로운 그 나라를 회복하셔야죠.' 라고 붙잡습니다. 
그때 이 장군이 하는 말이 '내가 가면 다른 분을 보내겠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리듯이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게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아와 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시겠다' 했는데 
똑같은 현상을 두고 '내가 돌아오겠다' 하셨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후로 "누구든지" 성령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되다

 

'장군 이야기'를 다시 하면, 이 장군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바닷길로 갑니다. 
근데 그 바닷길이, 해적들이 득실거리는 굉장히 위험한 바다입니다. 

그런데 이 장군이 가는 길에, 그 해적들을 다 제압하고 평정했습니다. 
이제 이 바다는 안전한 평화의 바다가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 바닷길이 열린 거예요. 

그 길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간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면,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늘로 가는 길을 내시고, 하이웨이를 만드시고 
그 하이웨이로 성령이 내려오셨다... 둘을 같은 사건으로 봐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본국과 도시가 무척 가까워진 것입니다. 
언제든지 원하면 오고 갈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이렇게 통했다는 거예요. 
그게 오순절이에요. 아주 활발한 교류가 일어납니다. 

예전에는 이 길이 워낙 험했기 때문에, 해적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주 극소수의 용감한 사람들만 오갈 수 있었습니다. 

거기 가서 왕도 보고요. 그의 말도 듣고요. 거기서 경험한 말을 전합니다. 
그게 누군가 하면 선지자들이에요. 아주 소수만! 

그런데 이제는 이 바닷길이 안전하게 열려서, 
누구든지 본국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인가 2:17~18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들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모든 육체' 즉 모든 사람이 
이제는 누구나 하늘과 땅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늘의 은혜를 누리고 산다는 거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거죠. 

자녀들이, 젊은이들이, 노인들이, 남자 노예들이, 여자 노예까지... 즉 모든 계층이!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은 선지자들에게만 알려졌습니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예수님 직전까지는 그것마저도 끊어졌죠. 

 

다른 나라들의 예를 봐도요, 왕에게만 신이 말해요. (물론 귀신이든지 가짜 신이지만)  
혹은 아주 특권층의 소수 사제들에게만 신의 뜻이이 전달된다... 그러잖아요. 
뭐 드라마 같은데 많이 나오잖아요. 

근데 성경은 다릅니다. 노예(남여 종)들이 예언한다는 거예요. 
'노예들이 신의 뜻을 알고 신의 뜻을 말한다' 
이게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건지 아십니까? 

본래 노예들은요. 자기 생각이 없어야 돼요. 
심지어 오늘 같은 현대 사회에서도, 직장에서 하급직들은 자주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 
'너는 생각하지 마,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에게, 이 사회가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너는 생각하지 마, 꿈꾸지 마, 그냥 지금은 공부만 해, 시키는 대로!' 
꿈이 있을 수가 없어요. 

▲2:18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여러분 남종과 여종에서, 여성노예  

여성이 차별받는 당시 사회에서, 여성노예라면, 그러면 얼마나 엄청난 차별을 받았겠습니까?

오늘은 통합측 총회 '여전도회 주일'인데요. 한국에서 1898년에 여전도회 활동이 시작됐습니다. 

이것도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봉건 조선 사회에서, 기독교가 큰 개화의 물결을 가져왔지요.

 

그런데 놀랍지 않습니까? 이때는 2천년 전입니다. 
이때 '여종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가히 혁명적인 선포이지요.

제가 어릴 때, 아니 대학 다닐 때만 하더라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고 공공연히 말을 했어요. 
여자들은 뭐 사람 취급도 안 했다는 거죠. 

근데 1898년에 한국에서 여전도회를 만들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건데, 
이거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행2:18절의 성취입니다. 

여기서 오늘의 한국 교회가 세워졌을뿐만 아니라 
오늘 한국 사회에서 그래도 여성들의 권리가 이만큼 인정받는 것은
정말 기독교 여성들의 이 선각자적인 활동 덕분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아니었으면, 이 땅에서 여성들의 삶은 
오랫동안 질곡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 소수의 특권층 사람들만 하나님의 뜻을 독점하고,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 
그 많은 평민들 모여들 중에 똑똑한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그 여성들 중에 열정이 있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그걸 다 눌러 놓으면, 이 사회가 발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남종과 여종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공동체로 출발했잖아요. 

그리고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사회가 깨어나고 경제가 발전되는 것도.. 이게 우연이 아니에요.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지금 행2장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본질을 살피고 있습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말하고, 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거죠.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까?'라고 애타게 부르짖던 사람들은
겨우 선지자들이 이제 다시 등장해서,
하나님 뜻을 전달해주는 시대의 회복 정도를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은, 창조 때 그 하나님의 뜻, 
모든 사람이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았고,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산책하면서 누리던 친밀감을 회복하는...
그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가 점점 flat world(피라미드 상하 구조가 없어진 편평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게

시대적인 트렌드인데,

본문 행2장에 성령의 강림하심은, 적어도 계시의 영역에 있어서, 또는 그 이상으로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는...

놀랍고, 혁신적이고, 관습 파괴적인 일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은 '한번 모여서 우리가 마음이 뜨거워졌다' 이 말이 아니고요. 
'완전히 새로운 새 창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라는 말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이 후에 설교하는데 
2:40절 '또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이 패역한 세대'
이미 낡아지고 있는 이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으니 
'새로운 시대에 속한 사람이 되라' 라는 게 구원의 메세지입니다. 

'패역한'을 NASB는 perverse 로 번역했어요. '왜곡된'이란 뜻이죠.  *스콜리오스, crooked, curved

선지자만, 일부 특권층만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왜곡된 세상이라는 거죠!

 

오순절 때 그 역사가 완전히 바뀌었고요. 
그 역사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성령을 사모해야 됩니다. 
행2:4절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라고 했을 때 
이것은 오순절 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4:8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란 말이 다시 나와요. 
베드로가 한번 성령 충만을 받았지만, 다시 충만해야 될 필요가 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모하는 것은, '2장의 오순절이 다시 와야 됩니다' 이게 아니고요. 
4장에 나오는 '계속적인 성령 충만'을 우리가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겁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하늘과 땅사이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소통이 일어났습니다

 

오순절로 인해서 하늘과 땅이 가까워졌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자주 (하늘을)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이쪽은 경상도 저쪽은 전라도, 그 사이에 강이 있었어요. 
그런데 다리가 생기니까, 서로 왔다 갔다 하니까 
막 서로 시집 장가가고... 장터도 왔다 갔다 하고요. 친구도 생기고요. 
한 10년 그렇게 살면요, 사람들의 말이 바뀌어요. 경상도 말과 전라도를 막 섞이고, 문화도 바뀝니다.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이 통할 때, 여러분 가정 생활도 바뀔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쪽에서는 참 화목하고 서로 존중하는 그런 가정 문화가 있고,
저쪽에서는 서로 무시하고 물어뜯는 가정 문화가 있습니다. 

근데 이쪽 사람이 저쪽으로 보고 '아 가정에서 사람들이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우리도 저렇게 돼야 되겠다' 하고 가정이 바뀌는 일, 
이게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늘과 땅이 통하니까요. 

하늘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땅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할렐루야!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사도행전 2장 마지막 절을 함께 읽습니다. 
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서로 함께 모이고, 예배 드리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여러분 이것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땅에서는 서로 할퀴고 물어뜯고 싸우잖아요.
이 험한 땅에서,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이게, 성령 충만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 하나님이 일하시는 결과인 거예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 땅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일이죠.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찬송가) 할렐루야!

그래서 이 큰 목적을 향해서 가는데, 그 첫 번째 발걸음이 뭔가 하면
'서로 말이 통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입니다. 

2:8~11절에 보면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 메데인, 엘람인, 부르기아, 밤빌리아, 애굽,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지도로 보면, 굉장히 멀리 당시 지중해 중요한 도시들 전부에서 다 이렇게 왔습니다. 
세계가 모여 있는 것이나 당시 개념으로는 마찬가지죠. 
'다 방언으로, 우리나라 말로 듣는다' 이 말입니다.

이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하고는 다릅니다. 
고린도전서이 방언은 기도의 언어입니다. 유익한 은사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소통이 안 돼요.

사도행전의 방언은 정반대 지점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외국어를 한다는 거예요. 
소통이 되기 시작한다는 거죠.
한국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사람들에게 일본말로 설교하고, 
말레이시아 사람들에게 말레이시아 말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너희는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리라' 그러셨잖아요.
이 말은 첫 번째로 지리적인 의미, 지리적인 장벽을 넘어서는 거를 의미하죠. 

그런데 아무리 멀리 찾아가도, 말이 안 통하면 소용 없어요. 답답하잖아요. 

땅끝까지 간다는 것은, 지리적인 장벽과 함께 언어적인 장벽을 넘어서는 겁니다.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는 겁니다. 그리고 사회 계층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거예요. 

여러분 같은 땅에 살아도요. 노예들은 사람 취급 안 하잖아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생각하잖아요. 
말이 저 사람들하고는 안 통한다.. 라고 생각하잖아요. 그죠. 

성령은 그 담을 무너뜨립니다. 언어의 장벽이 무너집니다. 
세계 많은 종교들 중에서 기독교의 가장 독특한 점은, 
창시자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첫 번째로 기록된 경전을 가진 유일한 종교라는 겁니다. 

불교의 불경이 뭐로 기록됐습니까? 석가모니가 쓰던 언어로 기록되었죠. 
이슬람의 꾸란은 마호메트가 쓰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쓰셨어요. 근데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어요. 
처음부터 언어의 장벽을 건너가는 겁니다. 아주 독특합니다. 

이게 뭐 이걸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는 처음부터 국제적이었다? 
좀 더 정확한 말은, 기독교는 처음부터 선교적이었다! 그렇죠. 

여러분, 선교는 단순히 몸만 가는 게 아닙니다. 지리적으로, 장소만 이동하는게 아니에요. 
내가 인도에 가서 선교하더라도, 
여러분 인도 사람에 대한 편견,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넘어 오만으로 가득 차면, 
선교가 아무 소용없잖아요. 그렇죠.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언어와 사회 계층도 넘어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넓은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넓은 마음으로... 
성령이 충만하면, 여러분 이 장벽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2:7~8절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된 것이 어찌됨이냐'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여기에 어떤 경멸이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아니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 갈릴리 사람들이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냐?' 

여러분 이 말 자체에, 이 땅에 있는 아주 뿌리 깊은 차별이 스며있습니다. 
사도행전 역사의 출발은, 그런 차별의 역사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이번 9월 로잔대회에 아주 중요한 가치가 폴리 센츄릭 미션입니다. poly-centric mission
중심이 다양하게 많다는 거죠. '다원화 선교', 중심이 여러군데라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이 중심이었고,
그 나라에서 후진국에 선교사를 보낸다.. 그랬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나라들에서도 선교사들이 일어나고, 보내지는 거죠.
'서구 교회들도 배울 게 있으면, 주목하고 배워야 된다' 이런 인식이 파급되고 있습니다. 
굉장한 발전이죠. 세계선교에 있어서 센터가 다극화 되고 있다는 겁니다.

   2020년에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오스카 상을 받았습니다. 
   그 상을 받기 몇 달 앞두고, 2019년 말에 미국 기자들이 물어봤습니다. 

   '감독님, 상을 많이 받으셨는데, 이번에 오스카 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 아카데미 오스카 상은, 영어가 아닌 외국언어로 되어 있는 영화, 
   미국 사람들이 자막으로 봐야 되는 영화는 잘 인정하지 않거든요.
   그전에 외국어-자막으로 된 영화가 작품상을 아직 아무 것도 못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상요? 그거 로컬이잖아요!'
   이게 엄청난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 사람들은 '아카데미 시상식' 하면서 
   이게 세계 영화의 중심이라 생각했어요. 

   봉준호 감독은 그전에 누구도 하지 못했던 말로, 
   한마디로 그냥 가볍게 응수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미국 사람들 중에서 기분 나빠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봉감독은 결국 오스카 상을 받았죠. 
   저는 봉감독의 '오스카 상은 로컬일뿐입니다. 오스카도 하나의 지역 상일 뿐입니다.'
   라는 이 생각 자체가, 우리 한국 문화의 역사에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고, 
   세계 영화의 역사뿐 아니라, 현대문화사의 한 획을 끊는 (큰) 사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도 한 지역이고, 한국도 한 지역 local 이고,
   인도도 세네갈도 또같은 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성경(사도행전)은 출발부터 '폴리 센츄릭 미션'입니다.
   이것은 구약부터 그렇습니다.
 
구약의 바벨탑 이야기를,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벨탑이 뭡니까? 
'여기 바벨탑이 세계의 중심이야' 라는 교만이거든요. 

바벨탑에 하나님께서 말이 안 통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에 소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말이 안 통하던 고통이 이제 극복이 되는 거죠.

'남종과 여종이 예언하는...'  행2:18
여기서 인간 사이에 모든 차별이 무너지는 복음의 보편성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쉽게 '바벨탑의 저주' 이렇게 이야기하는데요. 
흩어지는게 저주가 아닙니다. 
흩어져서 살아가는 것,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본래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인간이 탑을 쌓아서 하늘에 오르겠다는 그 교만과, 꼭 뭐가 함께 가는가 하면요, 
'여기가 세계의 중심이야' 하는 자기중심주의가 함께 갑니다. 

인간의 교만은 늘 제국주의로 나타납니다. 
지금은 제국주의라고 하는게 영토 침략은 안 해도요,
'문화적 제국주의' 
즉 우리 문화가 더 좋은 문화야.. 하면서 다른 문화를 경멸하는 태도, 이게 바벨론의 문화입니다. 
바벨론 같은 교만이죠. 

바벨탑 때는 땅이 교만하게 하늘로 올라가려 했습니다. 
오순절에는 하늘이 겸손하게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겸손 안에서, 세상에서 차별받던 사람들이
'아 나도 중심이 될 수 있구나!' 하는.. 복음 안에서 환대를 경험하는 겁니다. 

자기 언어로 복음을 듣는 그것이 환대잖아요. 
그 복음 가운데서 나를 안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예요. 

2:17절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여러분, 성령이 임하면 꿈을 꾸게 됩니다. 

예언을 하고, 꿈(환상)을 보고, 비전을 보고... 다 똑같은 말입니다. 
'노인들이 꿈을 꾸리라' 
'아이고 나는 은퇴하고 이제 내 인생 끝났다'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노인들이라도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는 겁니다. 

남자 노예들이, 여자 노예들이 예언을 하고, 꿈을 꿀 수 있다... 
여러분, 그 옛날에 노예들이 어떻게 꿈을 꾸겠어요? 

요즘 같은 현대사회에서도 젊은이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흙수저로 태어나서, 꿈을 꾸고 희망을 가지면 나만 괴롭지' 

그런데 그 옛날에 노예들이 어떻게 꿈을 꾸겠어요?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지... 뼈 빠지게 일만 하다가 인생 끝나는 거지...' 

그런데 그 인생에 성령이 임하니, 꿈이 생깁니다. 
고달픈 인생을 하나님이 안아 주시고, 위로해 주실뿐 아니라, 새로운 꿈을 꾸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 안에 안식을 주십니다. 
우리를 안아 주시고, 하나님이 힐링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 가장 큰 약점이 이거예요. 
위로와 힐링하고 끝나버려요. 

그래서 세상에 나가서 얻어맞고 와가지고, 예배드리러 오면 
'괜찮아 괜찮아 은혜 받았으니 괜찮다.' 그래요. 

일주일 동안 또 나가서, 얻어터지고 와 가지고 
또 교회에서 위로를 구하고...' 

여러분 사도행전의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담대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서, 역사를 이끌어 갔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청소년들에게 꿈이 있습니까?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성령 충만인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에, 그 주눅들어 있던 청소년들이 
눈치 보고 살던 청년들이 
성령 충만해서 당당하게 내 인생을 소중히 여기고, 
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럴 때에 이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3:17

여러분, 성령 받은 성도들이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와우, 저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인데 어떻게 저렇게 똑똑하게 말을 잘해요?'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깜짝 놀라는, 그 핵심이 뭔가 하면요. 
'아 똑똑하게 말 잘해' 사람들은 그랬지만 
성경이 뭐라 그랬는가 하면 '그들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4:13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이 전에 없던 지혜와 지식을 공급해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근데 이 본문에서 핵심은요. 말 잘하는 스킬이 아니라 담대함이에요. 담대함! 
여러분 담대하고 당당한 사람이 멋있습니다. 
자신감이 있어야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주눅들어 살아요. 눈치 보며 살아요. 
내 생각을 말했다가 창피 당할까봐... 
내 스타일을 드러냈다가 촌스럽다는 소리 들을까봐... 
눈치 보고, 기죽고... 그래서 일부러 자기를 깎아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생기가 없어요. 그러니까 매력이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요. 자유가 생기는 줄 믿습니다. 
담대하고 당당해지는 거죠.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아름다움, 그 생기! 
내 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자유! 
내가 믿는 바를 당당하게 말하는 자유! 

사도행전은 이 구절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28:31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야 멋있다. 야 멋있다...' 
성령의 사람은 멋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가지지 못한 자유와 담대함을 소유했기 때문에, 
믿는 바를 따라서 확신 있게 살기 때문에 
주의 사람들이 '우리도 저렇게 살고 싶다...' 그렇게 복음이 증거되는 거예요.

이 하나님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신 줄 믿습니다. 
그 성령 사모하며 누리며 당당하게, 멋지게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