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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복음과 거짓 복음 고후5:15, 마7:13~14 출처, 정리
The True Gospel And The False
잭 푸닌
▲기독교인들을 두 부류로 구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들의 출생 기원에 따라서
로마 가톨릭과 Roman Catholics
개신교로 구분하고요, Protestants
*그들의 교회 정치 형태에 따라 감독교회 와 자유교회로 구분합니다.
감독교회 Episcopal 는 가톨릭처럼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고,
자유교회 Free church 형식은, ‘독립교회연합교단’처럼 개교회의 자유권을 많이 보장합니다.
*또 신앙 경험의 깊이에 따라 과거에
거듭난 교인과 Born again Christians
그렇지 못한 교인으로 나누었던 적도 한 때 있었습니다. Nominal Christians
(그러나 요즘은 이런 구분은 거의 안 합니다. 대부분 자기가 ‘거듭난 교인’이라 주장하니까요!)
*신학과 교리의 보수성에 따라
복음주의 교회와 Evangelicals
자유주의 교회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Liberals
*성령의 은사 체험 강조에 따라
은사주의 교회와 Charismatics
비은사주의 교회로 나누기도 합니다. Non-charismatics
*또 직업을 가졌느냐, 안 가졌으냐 여부에 따라서
전임사역자와 Full-time Christians
평신도로 이렇게 구분하기도 합니다. Laymen
▲그렇지만 저 잭 푸닌은, 위의 저런 형식적인 분류 말고,
내면적 신앙의 분류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신자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신자.. 의 두 부류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사실 어떤 교단이나 신학의 형식적 분류는 필요하더라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신앙이거든요.
1)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위 구절에, 명백하게
-자신을 위해 사는 신자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신자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수 십 억의 크리스천들이 있지만
‘신앙적으로’ 그들을 딱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비슷하게 빌립보서 2:21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즉 ‘자기 일을 구하는 사람’과 Those who seek their own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Those who seek the things of Christ
3) 마찬가지로 마6:33절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는데
이 구절에 근거해서는
-땅의 일을 먼저 구하는 자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로 구분할 수 있겠죠.
4) 또 다르게는
-돈을 더 사랑하는 자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로 구분되겠습니다.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위에서 제가 열거한 대로, 성경은 이렇게 신자를 <그의 내면적 신앙에 따라>
두 부류로 명백하게 분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니, 교인들은 그저 신자들을
교단이나 교회 정치 형태로, 즉 외적인 조직으로 분류하기를 편해 합니다만
그 외적인 조직 형태가 꼭 우리의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위에서 제가 제시한 이 ‘내면적 신앙의 분류’ 네 가지는,
남들이 나에 대해서 분류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내가 나 자신을 판단하고, 내가 스스로 분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신앙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도 오늘 나를 분류하는 방식은, 외적 교단적, 교리적 분류가 아니라
신앙적, 내면적 분류입니다.
만약 천국이 그렇게 분류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분류에 더 신경을 써야 되겠습니까?
▲오늘날 일부 신자들이 어느 교단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신앙생활 할 교회를 정하려 할 때,
특정 교단이나 특정 신학을 꼼꼼히 따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오셨습니다.
이 문제가, 어떤 교단이나 특정 신학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죄의 뿌리를 뜻합니다.
즉 우리가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죄,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뜻과 의지를 구하는 죄, (그리스도의 뜻과 의지를 구하지 않고)
우리가 몇 년을 교회에 다녔든지에 상관없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죄의 뿌리
-그 나라와 그 의보다 세상 일을 더 선호하고 우선순우에 두는 죄의 뿌리
이런 것들을 도끼로 잘라버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내가 어떤 정통교단, 신학을 추구하는지에 관계없이
나는 어떤 피상적인, 껍데기뿐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내 (습관적, 고질적) 죄로부터 구원받지 못하면,
내가 영원한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 죄의 뿌리를 도끼로 잘라주시도록, 우리가 늘 기도하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참으로 교묘하게도 오늘날 신자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정통 교단에 속한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주로 교회 역사가 긴 경우)
-내가 어떤 정통 신학에 속한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개혁주의가 이런 경향이 상대적으로 높음)
-내가 이름 난 일류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그 지역사회에서 큰 교회)
오늘날 우리 신자들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신자 각자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일에는, 사탄이 눈을 감기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신자들의 눈을 흐려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신경 써야 될 부분은 무관심하게 만들고,
정작 덜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아주 신경을 쓰도록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즉 자기는 ‘죄에 빠져서, 자기를 위해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정통 신학, 정통 교회, 일류 교회에 다닌다고... 그래서 자기가 더 우위에 있는 것처럼
안심하고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기독교계의 비극은
너무나 많은 자기가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2:21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위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33년 가량을 그렇게 사시고, 먼저 삶의 본을 보이시고,
제자들에게 권면하신 것입니다. ‘자기 뜻을 행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라!’
예수님도 자기 뜻을 행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까요?
100%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은, 그런 소원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제 예수님의 본으로, 또한 사도바울의 본을 보이심으로써
오늘날 우리 각자 역시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내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해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위의 요6:38절이 예수님이 12제자에게 주신 권면이라면,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신이 시인하는 사람이라면,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내 뜻대로 행하려는’ 그 죄의 뿌리가
잘려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성숙을 통해서요!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시러, 세상에 오셨으니까요!
눅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마3:10
이 말씀은 세례요한이 선포한 내용이지만,
곧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건 우리 죄의 뿌리를 자르시는 일이고요, 즉 아담의 원죄의 영향력을 십자가로 끊어버리시고
-그런데 찍혀 (지옥)불에 던져질 나무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 백 ~ 수 천 년을 지배해왔던 천동설을,
자기 목숨을 걸고 용기있게 지동설로 선포했던 과학자가 바로 코페르니쿠스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계에도 이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소위 예수 믿고 세례 받은 교인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신앙에서 *지구 Ego 가 중심인 천동설에 비유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신앙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양 God 을 중심으로 돌아야
여러분, 천체를 관측할 때나, 땅을 측량할 때나,
기준점이 올바라야 합니다. 그 기준점으로부터 모든 계산이 출발하니까요.
기준점이 틀리면 모든 계산이 다 틀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Ego’를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모든 생각, 판단, 결정들이.. 결국은 다 틀린 결론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판단, 결정, 결론을 내리려면
먼저 기준점이 명확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틀리지 않는,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성경을 읽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기준점이 벌써 틀렸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읽어도,
자기 중심적으로 읽는 사람은
지동설 시대에 천동설을 믿고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천동설의 바탕 위에 세워진 모든 천체과학이론은 틀릴 수밖에 없는 거죠.
내 신앙의 모든 논리, 신학, 신념들이
아예 근본부터 잘못될 수 있는 것입니다.
뿌리부터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방종교, 우상숭배의 특징이 모두 다 ‘자기 중심적 신앙’입니다.
그들이 하루에 다섯 번을 시간을 정해서 기도한다 하더라도,
모두 다 자기 잘 되라고, 즉 기복적 목적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거죠.
우리는 기독교를 ‘이방종교’나 ‘샤머니즘’처럼 믿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니거든요. 이방종교지요!
기독교는 ‘나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오늘날 소위 잘 믿는 크리스천들 가운데도
이런 자기중심적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해서 열심히 신앙생활, 교회생활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 해석도 ‘자기 중심적으로’, 즉 ‘아전인수 격으로’ 합니다.
그런 속는 일이 늘 있어왔지만, 말세가 될수록 더 심해지리라는 것이
성경의 예언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열심히 전하는 복음이
‘자기 중심적 복음’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그건 복음이 아니니까요! ‘유사 복음’이라 할 수 있겠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틀린 복음, 유사복음을 전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참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 중심적이며,
하나님과 그 뜻을 기준으로 모든 세상 일을 판단합니다.
서두에 기독교를 교단이나 신학적 구분으로 구분해 보았는데,
오늘 우리 각자는 자신이 믿거나 선포하는 복음이
아래 둘 중에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는지 한 번 정직하게 판단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 중심적인 복음 man-centered gospel
-하나님 중심적인 복음 God-centered gospel
사람 중심적인 복음은, 그의 평소 관심과 설교가 주로
현실에서 평안한 삶, 질병 치료, 문제 (기도로) 해결, 필요의 채움, 성공과 진급.. 이런 주제들입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이미 확보되었으니, 이제 삶의 현실에 도움되고 격려가 되는 내용을 다루죠.
그런데 또 그런 안경으로 성경을 보면, 그런 메시지가 성경에 수두룩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기준과, 출발점이 잘못되었으므로, 전체적으로 잘못된 ‘인간 중심적 복음’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복음’이란 말도 붙일 수 없죠.
하나님 중심적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
평소에 회개하는 삶, 영적 성숙과 성장, 제자도의 삶, 재림의 소망, 십자가를 지는 삶,
중생과 그 이후의 성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 전도와 선교적 명령에 순종하는 삶 등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중심적 복음’에 빠지는 이유는
아직 정확하게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믿은 믿음은 ‘지식적 믿음, 지적 동의’에 불과하게 되죠.
그러나 ‘진정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결코 ‘자기 중심적 복음’에 빠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중심적 복음’을 믿고 전파하는 사람은
회개를 평소에 강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아와 자기 뜻과 의지와 행위를 회개해야,
진정 하나님 중심적 복음에 순종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온맘다해 사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평소 삶에서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강조합니다.
왜냐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 중심적 신앙의 ‘실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하나님 중심적 신앙’은, 어떤 자기 의지로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한 사람은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서, 자기의 내면이 변화되어 (아직 육신이 남아있긴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동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요!
이것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치신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를, 아래 구절에서 다시 한 번 살펴 보십시오.
‘그저 믿고 죄사함을 받으라!’ 만 아닙니다!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오늘날 내가 믿고 따르고 전하는 복음은 ‘넓은 문’입니까?
아니면 ‘좁은 문’입니까?
‘사람 중심적 복음’은 넓은 문입니다.
거기로 찾는 이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겠지만, 그 마지막은 파멸이 될 것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마귀는 미혹이 아주 교묘해서
‘교회 다녀라, 기독교를 믿어라’ 합니다.
그러면서 ‘넓은 문, 넓은 길, 인간 중심적 복음’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여러분 마23:15절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나옵니다. *"twofold children of hell"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복음을 듣고, 믿고, 배운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는 과연 ‘배나 더 지옥 자식’이 없을까요?
아니 더 많을 것입니다. 말세에 더욱 가까우니까요!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사람들보다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 마7:13~14
그러면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사람들과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 중에
누가 더 많겠습니까?
‘너희가 어떻게 듣는지 조심하여라.
자기가 듣은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빛과 명철이 주어질 것이고,
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빛과 명철마저도
빼앗길 것이다’ *눅8:18 풀어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