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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세기 대학생 선교 운동의 역사

LNCK 2020. 7. 2. 15:37

◆18세기 대학생 선교 운동의 역사

 

개신교 세계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대학생 신앙/선교 운동의 역사와 똑같은 맥락이다 .

 

1. 할레 대학

 

개신교(프로테스탄트)는 16세기 종교개혁1517 에서 태동되었다.

그 후 2세기 동안 개신교는 생존에 급한 나머지 해외 선교에 있어서 진척이 없었다.

18세기에 개신교 최초의 선교 운동은 독일의 할레 대학과 '경건주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경건주의는 "진짜 회심한 자는 경건한 삶, 전도, 선교의 열매를 당연히 낳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건주의자들의 극성(열심)은 기성 교회와 어울리지 못하고 분파로 내몰렸다.

그래서 그들은 1694년 할레에서 대학을 열었다.

"할레에서 프랑케의 사역은 전 세계로 선교 사역을 위해 나가는 학생들을 낳았다"(워커)

할레 출신이 인도에 선교사로 떠난 것은 윌리엄 케리보다 약 1백년 전 이었다.

 

2. 진센돌프와 모라비안 선교 공동체

 

진센돌프는 1710-1716 7년간 할레에서 공부했다.

그는 졸업 후, 유산으로 받는 재산으로 넓은 땅을 사서 '제2의 할레'를 계획했다.

그의 사유지에 피난 온 모라비안 형제들이 정착하면서 '모라비안 선교운동'이 시작됨.

모라비안 형제단이 단 20년 만에 이룬 선교의 업적은 앞서 2세기 동안 영국 국교회와 개신교 전체의 선교 사역보다 더 큰 것이었다.

 

그들은 선교를 일상적인 일common affair로 받아들였다.

1930년까지 이들은 약 3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성도 12.5명당 1명꼴이었다.

1727년 이 공동체는 인도, 그린랜드, 북아메리카, 이집트, 남아프리카 등지에 선교사 파송함.

18세기 잠자던 개신교회계에 해외 선교의 선구자였음.

 

3. 신성클럽과 웨슬레 선교 운동

 

18세기 중엽, 모라비안들이 열심히 선교의 불길을 일으킬 때 하나님은 웨슬레를 준비하셨다.

1726년 웨슬레 형제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생 신앙 공동체 holy club을 조직한다.

당시 신성 클럽은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꽉막힌 규칙/감리주의자)이었지만,

웨슬레와 휘필드 등을 배출, 당시 선교지였던 미국 복음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존 웨슬레에게 가장 큰 감명을 준 스승은 바로 진센돌프이다.

그는 1738년, 영국 올드스게잍에서 모라비안의 설교를 듣다가 회심의 체험을 한다.

그 후 독일 예나jena에 소재한 모라비안 공동체를 방문한다.

후에 그가 세운 킹스우드 학교 일과표를 보면, 모라비안 Herrn Hut의 그것과 똑같다.

 

18세기 선교는 경건주의 프랑케>모라비안 진센돌프>신성클럽 존 웨슬레의 족보이다.

이들은 할레 대학, 옥스퍼드 대학 등 청년기 시절 대학생 신앙 운동에 열심이었다.

 

 

◆19세기 대학생 선교 운동

 

라토렛은 19세기를 '위대한 세기' The Great Century로 일컬었다.

개신교가 비로소 19세기에 들어와서 힘찬 노력으로 복음 전파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세계의 패권은 과거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천주교 국가에서

영국과 미국 등 개신교 국가로 넘어오게 된다.

구미 선진국의 식민지적 확장이 선교의 확장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1. 건초더미 기도운동

 

미국에서 해외 선교를 처음으로 시작한 선구자는 월리엄즈 대학생 사무엘 밀즈Mills 이다.

MA州 월리엄즈 대학 에서 다섯 명의 학생들이 윌리엄 캐리의 소책자(Enquiry...)를 읽고

감동을 받고 매 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에 캠퍼스 강가에서 기도 모임을 시작하게 된다.

 

1806 8월, 강변에서 기도하던 5명의 학생들은 갑자기 만난 폭우를 피하기 위해

건초더미 아래로 갔다. 거기서 리더격인 밀즈는

"우리가 자원하면 우리는 할 수 있다"We can do this if we will"

는 말로 다른 학생들을 격려하여 그 자리에서 선교사로 헌신/서약케 했다.

 

1808, 윌리엄즈 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NY州 앤도버 신학교에 진학하였고,

거기서 아도니람 져드슨 등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져드슨을 리더로 '학생선교단체'를 조직하게 된다.

 

1810, 밀즈와 져드슨 등 4명의 학생은 자기들을 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교회에 요구한다.

그래서 이들을 파송할 ABCFM(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이 결성된다.

이것은 미국 최초의 선교파송단체로 기록된다.

그 후 30년 동안 이 단체는 694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다.

 

1812년 아도니람 져드슨과 루터 라이스는 미국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받아 인도로 향한다.

 

참고로, 져드슨은 앤도버 신학교 졸업 후 모교의 강사자리와 보스톤의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배를 타고 인도로 향했다.

인도에서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미국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결국 1813, 져드슨은 미얀마(버마)로 사역지를 옮긴다.

미얀마에서 그는 23년 동안 신구약 성경을 미얀마어로 완역한다.

그는 미얀마인 1명을 전도하는 것이 호랑이 이빨을 뽑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을 남겼다.

 

정작 건초더미 기도운동의 주역이었던 사무엘 밀즈는 해외 선교사로 나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밀즈가 본국에 남아 더 많은 선교의 일을 해 주기를 사람들이 바랬기 때문이었다.

밀즈는 미국에 있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복음화해서 그들이 아프리카 자기 동족에게 선교사로 돌아가는 일을 꿈꾸었다.

그는 아프리카 단기 선교 답사 후 귀국길에 병에 걸려 1818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항해도중 소천했다.

 

지금 미국의 메사츄세츠 주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윌리엄즈시 월리엄즈 대학(IVY)에 가면

건초더미 기도운동 50주년 기념탑을 볼 수 있다.

당시 건초더미가 있었던 자리에 탑을 세우고 거기에 밀즈 등 당시 참석자 학생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윌리엄즈 대학생의 상당수는 그 탑이 무슨 탑인지 잘 모르고 있다....

 

해외 선교에 대해 잠자고 있던 미국이 꿈틀거렸다.

19세기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해외 선교에 포문을 열고 세계 도처에 선교사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전세계 선교의 인력과 재정의 절반 이상을 감당하고 있는 미국의 해외 선교는

대학생 선교 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대학생들이 잠자던 미국 교회를 일깨운 것이다.

 

★학생 자발 운동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World Missions, 이하 SVM)

 

SVM은 1888-1936년 까지 10만 명의 대학생이 선교사로 헌신하였으며,

그 중 무려 2만 명의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지금 미국에서 매 3년마다 열리는 어바나 대회의 시조이며,

한국에서 2년마다 열리는 '선교한국'의 기원이 된다.

 

SVM에 가장 큰 동기부여자는 바로 부흥사 무디이다.

앞서, 1882 무디는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1주일간 집회를 인도한다.

여기서 감명받은 상류층 학생들이 선교사로 헌신하고 떠나는데, 바로 '캠브리지 7인'이다.

이들은 선교사로 떠나기전, 영국을 돌면서 '선교 계몽 집회'를 가지면서 붐을 일으킨다.

(그래서 영국의 IVF가 탄생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들은 미국에 까지 건너가서 미국의 대학생들에게 강력한 선교 도전을 던진다.

 

1886, 미국의 대학생 선교단체 연합회(YMCA, 각 대학별 선교회)는

여름방학 기간에 26일간 헐먼산 수양회를 개최하면서 거기에 무디를 강사로 초청한다.

미국과 카나다의 89개 대학교의 251명 학생들이 참석해서 무디의 설교를 듣는다.

이 집회가 바로 SVM 탄생의 결정적인 산파 역할을 한다.

 

또한 기억해야 될 인물이 프린스턴 대학생 와일드Robert Wilder이다.

헐먼산 수양회가 끝난 후, 와일드는 캠브리지 7인의 행적(순회홍보사역)에 영향을 받아

1886-7년 사이에 미국과 캐나다의 162개 교육기관을 방문해서 선교 홍보 집회를 가진다.

순회 결과 2,106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에 헌신하게 된다.(서약서에 싸인을 받는다)

와일드의 결정적인 노력으로 1888. 11. 6. 뉴욕에서,

YMCA, YWCA, 및 신학교 연합회 대표가 모여 SVM을 결성한다.

 

1891 클리블랜드 오하이오, SVM 대회가 처음 열린다.

151개학교 대표 558명 참석한다.

31명의 선교사와 32명의 선교단체 대표들도 공동 참석함.

그 후 4년 마다(4년의 대학시절 1번은 참석하도록) SVM 집회를 열기로 결정하다.

 

1913 캔자스 시티의 SVM 대회에는 755개 학교 대표 3,200명의 학생들이 참석한다.

1920 드모인스 대회는 절정에 달한다. 949개 학교 대표 6,890명 학생들이 참석한다.

 

그 후 1930년대 전후 미국 대륙은 유럽의 자유신학에 영향을 받아 영적 침체기에 빠진다.

1936 12차 인디아나폴리스 SVM 대회는 완전히 썰렁한 분위기가 된다.

1936 보수 신앙의 대학생들은 휘튼 대학에서 다시 SFMF(다음 호)를 결성한다.

 

SVM은 50년 동안 2만 명의 해외선교사를 배출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이 시기는 조선에 미국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하는 시기와도 일치된다.

1910년 조선엔 약 300명의 북미 선교사들이 주재하거나 이미 거쳐 갔다.

그들 대부분이 SVM 출신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 경건주의의 주장처럼, 또한 헐먼산 수양회를 보더라도

영적 부흥 운동은 선교 부흥 운동과 직결된다.

2) 이들은 매 3-4년마다 연합해서 지금까지 110년을 줄곧 내려오는 선교 대회를 열었다.

미국은 땅이 넓어서 한 자리에 모이기가 무척 어렵다. 하지만,

모든 선교단체들이 총 망라해서 그들은 선교를 위한 진정한 연합 운동을 펼쳤었다.

3) 대학은 장래 선교사의 모판seedbed 이다. 대학을 놓치면 선교를 놓치게 된다.

 

 

◆20세기 대학생 선교 운동

 

★학생 세계 선교 협회(Student Foreign Missions Fellowship 이하 SFMF)

 

1920년 드모인스 대회 이후 SVM(학생자발운동)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웨스트민스터가 독립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유럽에서 다가온 이성주의와 신학의 자유화는 미국의 청교도적 신앙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엎친데 덮친격인 경제공황으로 인해 성도들은 잠시 침체의 늪에 빠져든다.

따라서 1930년대 들어서 SVM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1936, 복음주의적 대학생들은 휘튼에 모여 다시 SVM의 부활을 꿈꾼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 풍조를 배격하고, 복음주의적 색채를 띤 SFMF를 결성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콜럼비아 신학교(현 콜럼비아 국제대학CIU)의 교장인 로버트 맥퀼킨Robert McQuilkin이었다.

초기에는 주로 휘튼대학과 콜럼비아 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SVM 선교 정신을 계승했다.

이들의 특징은 여름 방학 기간을 이용한 미국 순회 선교 계몽 사역에 주력한 점이다.

6주 동안 자동차을 이용해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선교 운동 확산에 힘썼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 어바나 대회(Urbana Conventions)

자동차와 기차를 이용해서 많게는 7천 명의 대학생들이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에

어바나의 일리노이 대학에 모여서 매 3년마다 나흘동안의 선교 대회를 가진다.

이 대회는 1945년 SFMF 와 IVCF 의 통합으로 부터 기인한다.

 

당시 IVCF가 북미 대학생 신앙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었다.

SFMF는 북미 대학생 해외 선교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었다.

이들 두 단체의 대표들은 서로 손을 잡았고, 1945년 SFMF가 IVCF 산하 선교부로 통합된다.

 

1948년부터 어바나 시에서 현재까지 계속 3년마다 대학생 선교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어바나는 지리적으로 미국 동서에서 오기에 가장 편리한 장소(한국의 대구쯤)이다.

'선교한국'은 역사적으로 SVM-SFMF-어바나 의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다.

'선교한국'은 1988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시작된 이후 매 2년 마다 개최되어 왔다.

 

[마치는 말]

1. 기독교 선교 역사는 Majority 보다 Minority 들이 더욱 활발히 개척해 나갔다.

천주교의 수도회, 할레대학, 모라비안, 웨슬레와 초기 감리교, SVM, SFMF, 어바나 등

강력한 힘을 지닌 기성 교회보다는 힘도 없는 작은 공동체 혹은 대학생들이 빛을 발했다.

2. 대학은 선교사 자원의 보고이다.

3. 신앙이 부흥되면 선교가 부흥되고, 신앙이 약화되면 선교도 약화된다

강력한 신앙 회복, 영적 부흥 운동이 일어나면 강력한 선교 운동이 자연히 따라 일어난다.

18C 경건주의 운동, 19 C 무디의 헐먼산 집회, 영국 집회 등이 역사적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