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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와 해방 눅4:18, 갈5:1 2020.08.09. 출처
설교 "자유의 복음을 선포하시다" 중 29:30분~끝까지 녹취 *자유 관련글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 주시는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 하신다 그랬습니다.
억눌린 자들에게 해방을 주신다 그랬습니다.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여기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
여기서 '자유'와 '해방'이란 단어는 사실상 같은 단어입니다.
'해방'을 '자유'로 번역해도 됩니다. 헬라어 아페시스 liberty 로 같은 단어입니다.
포로 된 것, 억눌린 것 이건 모두가 다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로마에 억눌려 있고 로마의 지배 속에 포로된
그런 정치사회적인 자유를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결코 정치 사회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진정한 구원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었어요.
자유를 찾는 독립 운동.. 해야죠
그렇지만 그게 궁극적인 복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보다 근본적인 복음의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자유,
죄에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죄에 포로된 상태, 죄에 억눌린 상태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
보게 하는 것, 사탄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구세주를 알아 보는 눈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명 선언에서 핵심 단어는 "자유"입니다.
"해방"으로 번역되는데 같은 '자유'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가난한 자들에게 전한 복음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 '자유'로 번역된 이 헬라어 단어가
누가복음에서 다른 두 가지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1) 죄를 용서한다고 할 때 '용서'라는 단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눅1: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 aphesis(죄에서 자유)>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2) 빚을 탕감해주고 빚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죄의 빚')
눅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 aphiemi> 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aphiemi> 주시옵고'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죄를 '용서' 받는다는 단어는
빚진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고, 다같이 일맥상통 합니다.
그래서 포로 된 자가 자유케 되는 것 눅4:18,
또한 빚진 자가 면제 받는 것 눅11:4,
그리고 죄를 용서 받는 것 눅1:77, 이 모든 것이 다 한 단어로 '아페시스 aphesis' 로 쓰였습니다.
*명사, 동사는 aphiemi
이것은 서로 일맥상통 하기 때문이죠.
근데 구약의 보면 율법 가운데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나는 일을
제도화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희년이라는 제도였습니다. *레25:10
그 희년의 핵심은 '자유'입니다.
희년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은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자유인>으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형상의 핵심은 자유의지 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십니다.
이렇게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적 자유자 라는 뜻입니다.
자유자가 스스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자유자)로 만든 거예요.
동물들은 다 본능을 따라 살아갑니다.
일부 동물은 자기의 어떤 판단이 있지만 대부분 본능으로 돌아가요.
인간만 본능을 뛰어넘는 자유의지로
그 본능을 뛰어넘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위험이 있죠.
그것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배반할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가능성을 없애버리면 진정한 자유인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지 못한 거예요.
하나님은 그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은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떠났지요.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유'가 있어요.
대부분 자유가 뭡니까 물어보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것이 자유다' 라고 대답합니다.
얼핏보면 맞는 말 같지만, 그것은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
(하나님께는 하고 싶은 것만 하셔도 그 자유는 진리이고 옳은 것이고 합당한 자유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두 번째 자유가 있어야 돼요.
2) 그것은 마땅히 '인간이 해야 할 것, 지켜야 될 것을 지키는 자유'까지 포함해야
진짜 자유입니다.
왜냐면 인간의 자유는 의존적인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그 규칙을 지키는 한
인간은 자유로울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 규칙을 어기는 순간, 인간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까지 못 하게 되는.. 자유를 상실한 인간이 되어 버리는 거죠.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렇게 인간에게 거의 무한한 자유를 주셨지만
단 한 가지 규칙만 지킨다면, 인간은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근데 인간에게 있는 그 '의존적 자유'를
'절대적 자유'인 것처럼 착각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대로 했을 때
인간은 종이 되어 버렸어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죄를 영어로 transgression 이라고도 하는데 '선을 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을 넘어갔다는 거에요.
만물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존재하기 위해서 지켜야 될 규칙이 있어요.
그 규칙을 지키는 한 자유로운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는 하늘을 날개로 날 때 자유로운 거예요.
새가 가장 자유로운 모습은 어디서 봅니까?
하늘을 날 때 입니다.
(그래서 하늘 나는 비둘기를 종종 자유의 상징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새가 어느 날 생각하는 거죠.
'왜 내가 이 날개로 힘들게 하늘을 날아야 돼?
나도 저 육지를 달려 보고 싶어. 나도 육지를 달릴 자유가 있어!'
그래서 새는 운동장에 착륙해서 그 가냘픈 새 다리로 계속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날개로 나는 것을 놔두고 계속 뛰어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얼마나 부자유 한 것이에요. 그건 자유가 아니죠.
바다 속 물고기가 '왜 나는 물만 먹어야 돼? 나도 육지의 풀도 먹고 싶어!'
어느 날 스스로 그냥 몸부림치면서 바다에서 뛰쳐나와서 육지로 튀어나왔어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 일식 집으로 가는 거죠.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축구 선수가 골키퍼 외에는 공을 손으로 잡을 수 없는데
'내가 왜 발로만 공을 차야 돼?' 그리고 손으로 공을 들고 뛰는 순간
그 선수는 경기장 밖으로 나가야 됩니다.
존재하는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차는 레일 위를 달리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레일을 벗어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 규칙 안에서만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의 자유는 뭡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마땅히 지켜야 될 것, 해야 할 것을 지키는 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겼기에 인간은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몸은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마음은 수많은 것에 얽매여 있는 겁니다.
질병에 얽매이게 되고, 마음의 상처와 그리고 중독에 얽매이게 되었어요.
'내가 진짜 자유로운 삶을 사는가, 살고 있지 않는가?'는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고 있는가?
혹은 내가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하지 않고 있는가?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으로 향하는 자유입니다.
From 만이 아니라 To 까지 포함하는 자유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만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하는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이 두 가지를 합쳐야 돼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마땅히 있어야 될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이것이 진짜 자유인 거예요.
오늘 타락한 이 사회에 자유의 개념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습니까?
내가 진정 자유인인가? .. 알려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와 아울러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있느냐?
무엇을 가질 수 있느냐.. 와 아울러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
계속 갈 수 있느냐 만이 아니라
멈출 수 있느냐?
만일 스스로 하지 말아야 될 일,
멈출 수 없고, 그칠 수 없고, 중단할 수 없다면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하기 싫어 한다면.. 그 또한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어하는 것.. 이것이 진짜 자유인의 모습이에요.
만일 이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죄의 종 된 상태에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 이 '죄의 종의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고
그 벗어나는 길을 설명해 주셨고, 그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자유케 되는 길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너희가 자유케 되리라' 요8:36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
▲여러분,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의
핵심 3대 논문 중의 하나입니다.
그가 로마 카톨릭에 저항했던 이유는 <자유> 때문이었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들이
자유롭게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가
교회의 제도를 통해 억제되고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은 <자유>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이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왜 북한땅을 변화시켜야 돼요?
그 모든 백성들에게 자유가 임해야 되기 때문이에요.
오늘 우리가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나를 살펴봐야 돼요.
왜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입니까?
예전에 어떤 정치인들이 자유민주주의 에서 '자유'를 빼고자 했던 적이 있었는데,
민주주의 앞에 '자유'가 제일 먼저 들어가야 됩니다.
신앙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가 주도가 된 사회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자유'를 강조합니다.
그것(자유)은 인간이 하나님과 나누는 축복의 본질인 거예요.
그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될 질서를 지키는 자유인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이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그건 자유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하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유인 거예요.
진리를 따라 살수록, 우리는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내 마음 속에 자유함이 없는가요?
그것은 진리를 따라 살지 않기 때문이에요.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자유함이 있습니다.
이 자유함을 누리는 영혼의 특징은 뭡니까?
삶의 모든 의미가 짐이 아니에요. 삶이 짐이 아닙니다. 기쁨이 됩니다.
해야 할 모든 일들을 하고 싶어 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무가 짐이고,
살고 싶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죄의 종에 속박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거예요.
미국의 노예제도가 폐지된 그날, 남부지방에 노예들이 많았는데
그 날 남부지방의 닭들이 일제히 큰 수난을 당했다고 합니다.
왜냐면 많은 노예들이 아침에 일을 하러 나갈 때,
닭들이 꼬끼요 하면서 깨웠잖아요.
노예해방 되면서 그 분풀이를 닭에게 한 거죠.
아침마다 우리를 일찍 깨웠던 닭들! 하면서요.
그들은 사명감에 의해서 일하러 간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가서 일을 했던 거예요.
종이 아닌 자유인들은
아침마다 깨우는 알람 소리가
하루의 새로운 기쁨의 삶을 깨우는 시작이 되는 거예요.
아침에 우리를 깨우는 알람이 기쁨의 소리입니까?
아니면 부담과 종처럼 끌려가는 하루의 삶입니까?
그것이 자유인의 특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저희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역사는 언제 일어납니까?
먼훗날 언젠가 가 아니라 오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눅4:21
마리아에게 언제 성령으로 잉태 됐습니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잉태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두에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보지 못하는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시는 이 주님의 복음의 역사가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자유케 하셨으니
그 자유를 누리며,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의 멍에를 깨트리고 자유인으로
우리를 해방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죄에 포로 되었던 저희들, 사단의 종되었던 저희들을 자유케 하시고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셨으니
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