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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인가, 제자인가?

LNCK 2020. 9. 21. 12:41

◈교인인가, 제자인가?                   막3:13~19                    20.09.06. 스크랩,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BLwxwPmOYHY

 

마가복음 강해 우리 22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장면인데요.
이 새로운 장면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우시는 일입니다 매우 중요한 일이죠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기존의 종교체계를 예수님이 사용 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새로운 사람을 뽑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방법 알려 주셨는데 그 핵심에는 뭐가 있느냐? 사람입니다 사람! 
3년 공생애 동안 예수님이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으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주님이 나중에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남겨두신 게 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건물도 없고 조직도 없고 단체도 없고 무슨 재단도 없고 
12제자를 남기신 거죠

12제자를 세우신 것에는 중요한 원리와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냥 뭐 아무렇게나 한 게 아니고 매우 중요한 철학이 담겨 있어요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얻게 되는 놀라운 축복 중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삶의 흔적을 더듬어 가면 거기에서 모든 답이 나와요 
그게 뭐든 답이 다 나와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그 사역이나 그 삶의 모습에 우린 감탄하게 돼요
탁월합니다 뭐 비교할 수 없는 지혜가 서려있고 
어떤 것 하나하나에도 하나님의 완벽한 우리의 모델이 되시고 
우리의 로드맵이 되신 분이죠

그래서 우리가 요즘 (코로나19로) 어려움을 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따라가보면 
우리 혼란한 우리의 삶의 많은 문제들에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직장생활에도 그렇고, 사업을 할 때도 그렇고, 작은 가게를 유지 할 때도 그렇고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고... 어떤 조직에서 리더로 있을 때든지 아니면 사원으로 있든지 
이 복음서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더듬어 보면, 모든 답이 여기에 다 나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을 따라가면 됩니다
문제는, 어려운 게 뭐냐면,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거와는 완전 반대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우리의 상식, 우리의 살아온 삶의 경험과,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의 삶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면으로 래디컬한... 
아주 혁신적인 것들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대로 따라 하기 힘들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은 그건 답이에요 
정말 우리에게 분명한 원리와 철학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방식은 뭐냐? 
오늘 본문에서 보여 주는 것은 "소수 집중의 원리"입니다

12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정말 의외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위대하신 분이 12명이 뭡니까, 달랑 12명! 

오늘도 본당에 예배를 위해서 참여하신 분들이 계시는데 
뭐 그래도 12명은 ... 본당에 흩어져 않으면 보이지도 않아요

12명은 상징성이 있죠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거죠 

그와 같이 12명의 제자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상징하는 겁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만드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크게 보면 그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것 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12명만 뽑으신 것은 교육 환경적요소도 있다는 겁니다 
제자훈련을 할 때, 이 훈련을 제자들에게 시킬 때 
가장 적합한 환경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대량생산을 목표로 하지 아니하시고 소수에 집중 하셨다는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막 찍어내는.. 학교처럼 한 해에 대학은 수많은 수천명을 배출하지만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이 세상적인 방식과 현격한 차이가 있는 거죠 

세상은 가능한 많은 사람을 동원하고 많은 사람들을 일으켜야 이게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거창한 호칭, 거창한 조직들, 구호들.. 

주님은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어요
철저히 소수를 통해 다수를 변화시키는 방식을 선택하셨어요

여러분, 사람을 많이 동원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핵심 그룹이 중요합니다 core group 그 핵심 그룹에 변화가 없으면,
아무리 많이 모인다 해도 다 해프닝으로 끝납니다

규모가 클수록 우리는 성공이라는 등식을 갖고 있는 건 세속적인 생각입니다
만약 교인수가 많기 때문에 세상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위험한 생각입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원으로 교회가 세상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교회가 세상에서 질타를 막 받는데요, 굉장히 드셉니다

요즘 얼마나 많은 얘기가 되고 있습니까 
이때 가끔 교계 내에서도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지 말고 
우리가 무엇인가 소리를 내고, 기독교 천만이 움직여야 된다... (천만인지 아닌지 잘 몰라요) 

'천만 기독교가 힘을 합치면 아무도 기독교를 무시할 수 없도록.. 우리도 움직일 수 있다' 
뭐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해요 막 답답하니까 그런 말도 할 수 있지만 위험한 발언입니다

왜 위험한 발상인가요, 주님의 가르치신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에요 
주님은 숫자를 많이 동원하여 혁명을 일으키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그런 방식은 또 다른 힘의 저항을 받습니다 그럼 투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주님은 투쟁의 방식이 아니라, 당신을 핍박하고 죽이려 드는 자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 제자는 누구입니까? 스승을 따라가는, 그 스승의 길, 주님의 길을 따라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탁월하신 분이, 그토록 많은 무리들이 환호하며 추종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12명만을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나요?

어떻게 보면 무능해 보이고 어떻게 보면 직무유기처럼 보입니다 
12명을 데리고 뭘 하시겠다는 건가요

너무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할 일도 많고 상황도 위급한데 12명?

정말 아이들 언어로 얘기하면 '폼이 안 나는' 겁니다

 

생산성이나 효율성을 따진다면 전혀 주님의 이 방식은, 12명의 저자는 .. 아닙니다 아니에요

세상은 빠른 방법, 금방 효과 나는 것을 하고 싶어하죠.

그래서 말을 해도 '한방, 대박' 이런 말을 많이 쓰죠.

 

주님의 방식은 겉으로는 많이 원시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게 보시죠

12명, 이 제자를 뽑으신 것 안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실패처럼 보였지만 최고의 전략이었어요

 

주님은 12명을 통해 이루어질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셨어요

한 알의 밀알이 썩어 나무가 되고,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냥 씨앗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그 씨앗 안에 있는 생명, 그 생명의 파워!

그걸 보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60: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작은 자만을 보는 게 아니고, 그 작은 자 안에 천 명을 보신 것입니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약한 자이지만 바벨론이 넘볼 수 없는...

여러분, 숫자가 많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군가 하는 거죠.

 

여러분 직장도 보시면, 직원이 많다고 뭐 일이 다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헌신도를 갖고 있는 그 한 사람! 백 명 몫, 천 명 몫을 감당합니다.

헌신도가 70~80%가 되는 사람 백 명, 천 명 보다

백 퍼센트 헌신된 committed 된 한 사람이 훨씬 더 낫습니다.

 

예수님께 완전히 미친 사람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변화된 소수가 대중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도 그런 얘기를 했죠. '창조적 소수 creative minority'

 

조직이나 시스템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사람이 변해야 됩니다.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 한 사람, 그러니까 여러분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금방 나타나잖아요.

오순절 성령 사건 이후에 베드로가 입을 여니까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데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이... 그 당시 제도권에 거대한 기득권을 흔들어 버렸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여러 사람 전체에 큰 충격을 줍니다.

행9장에 가면 바울이 나오는데, 바울 한 사람의 변화가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유럽의 문명을 바꾸고 세계 선교의 물꼬를 트는... 엄청한 일이 일어납니다. 한 사람이 변하니까!

 

 

◑교인과 신자(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도 구분을 하면

우리의 사람이 판단할 수는 없어요 그런 전제를 갖고서 구분을 하자면

교인과 신자가 있습니다.

 

신자(제자)는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입니다.

교인은 넓은 의미에서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출석하면 누구나 교인은 될 수가

그런데 신자는, 즉 성도라는 호칭은 달라요.

 

우리는 성도를 막 함부로 쓰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성도는 굉장한 단어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만이 성도이죠.

성도는 교인이 될 수 있지만, 그런데 교인이 모두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 더 구분할 수 있어요. 신자인가, 제자인가?

 

신자라고 해서 모두가 제자는 아닙니다.

신자와 제자는, 성숙도와 헌신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신자는 아직 여전히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에 완전히 위탁된 committed 상태가 아닙니다.

뭐 많은 일들을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위탁한 상태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완전히 위탁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공생에 동안에 군중들과 제자를 구분하셨습니다.

환호하는 그런 팬과 제자를 구분하셨어요.

 

팬들이 있습니다. 막 환호하는 사람들!

팬들은 그들의 목적과 그들의 필요가 따로 있습니다.

 

여러분, 제자와 군중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핵심적 기준은, 그 동기와 목적입니다.

 

군중은 자신의 필요를 가지고 따릅니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거죠. ego-centric

자신의 이익이 자신의 need가 충족될 때까지.. 그 목적으로 따르는 겁니다.

 

제자는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자기 중심성에서 떠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옮겨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군중은 자신의 목적과 이익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모였다가 흩어졌다 합니다.

1백 명 모이다가, 1천 명 모이다가, 열 명 모였다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무시하지 않으셨지만 제자에게 집중하신 거죠.

주님은 당신이 이용당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속 사회 속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가볍게 취미활동 정도로는 안됩니다.

여러분, 갈수록 믿음 생활이 어려워져 가고 있는 세상에,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그냥 단순히 멤버쉽을 갖고 있는 교인인가? 뭐 등록하는 거야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다른 거죠.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제자를 찾으십니다.

주님의 원리와 방식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주님은, 공생애에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제자들을 세우시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

마가복음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 이고

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 그것은 어떤 조직이나 단체나 어떤 군중을 일으켜서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변화시키셔서,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바꾸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제자 선발 이전에 주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요?

막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산에 오르사'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는 장면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가셨습니다.

 

홀로 시간을 가지실 때마다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 오르신 것은 특별히 하나님 아버지와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산에 오르심 -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매우 중요한 모범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공적인 활동과 개인적인 시간을 철저히 분리시키셨습니다.

 

매우 바쁘지만 외적인 활동에만 매몰되지 않으셨습니다.

허겁지겁 행동하거나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조용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아버지의 도우심을 구한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매우 의존적인 태도를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될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그 분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의존적인 모습! 이게 산에서 홀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우리 삶을 돌아보면, 우리의 실패의 자리는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고, 성급하기 때문에 실패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것은, 무능이 아니라 성급함입니다.

주변 사람들과 의논도 하고, 심사숙고를 하되, 최종적인 단계는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가져야 됩니다.

 

'주님, 이 순간에 내가 어떻게 행해야 되겠습니까? 주님 어떻게 할까요?'

무엇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까?

 

여러분, 매 순간 하나님께 물어야 됩니다.

 

▲여러분, 죄가 무서운 이유가 뭐냐면

죄를 짓는 순간에는 누구도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 죄 짓기 전에 막 기도하는 사람 있습니까?

여러분, 자기의 길을 자기가 선택해서 사는 삶이 뭐예요?

이게 죄의 특성입니다.

 

우리는 분주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자칫하면 조용한 시간을 가질 겨를이 없어요.

쫓기는 거죠. 일상의 압박 속에 다급하게 밀려오는 수없는 압박에 시달리다보니

생각할 틈도 없이, 기도할 틈도 없이 결정을 내려버리는 거죠.

 

젊은 청년들도 결혼하는데.. 물론 본인들이 심사숙고 했을지 모르지만

너무 성급하게 몰려서 결정하다가 사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을 보면, 스케줄이 가히 살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는 등

그러니까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고 몰려듭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와중에 자꾸 '물러나십니다 retreat'

아버지와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시는 겁니다.

 

누가복음에는 더 자세히 묘사합니다.

눅6:12~13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철야기도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밤이 새도록' 한 가지 기도제목에 몰두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자 선택이었습니다.

제자를, 밤새 기도하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를 뽑는 일이 얼마나 주님께 중대한 일인가를 알려주는 겁니다.

주님이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어요.

주님은 단독으로 행하지 아니하셨어요.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로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할 것도 없죠.

 

우리는 기도로 밤을 새우신 주님을 본받아야 됩니다.

충분한 기도로!

충분한 기도로 시작한 일이 아니면.. 실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힘들게 한 분은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기도 안 하고 성급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와 그 하나님의 응답 없이!

 

여러분, 이걸 배우셔야 됩니다.

 

 

막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여기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제자를 선택하는 결정권은 주님이 갖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를 세울 때도 많이 기도해야 됩니다.

 

큰 무리가 따라다녔지만 모두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12명만 뽑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를 (주도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요15:16절에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하나님이 택하신 것입니다.

 

제자의 열정보다 주님의 부르심이 우선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싶다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주님의 부르심이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소명이란,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열심이나 의지가 강조되는 것보다

먼저 부르심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따르겠다고 굳게 결의해도,

어느 순간 무너집니다. 인간의 신념이나 의지적인 것은

오래 가는 것 같아도 오래 못 갑니다.

 

누가 부르셨는가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의 명료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출3장에서도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정확하게 받습니다.

'모세야!' 하고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지 못하면, 언젠가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워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나를 부르신 분이 누구인가 알기 때문 입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제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죠.

요즘 교회 다니는 것, 등록하는 것.. 이런 것 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 당시 2천년 전에, 1세기에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따르는 자가 거의 없는

그 시대 속에서 그 그리스도에게 자기 삶을 위탁하고 제자로 따르는 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어요.

 

자신의 삶의 방식을 다 바꾸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냥 생각으로 예수 믿는다, 교회 다닌다.. 가 아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모험이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렇지만 부르심에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힘은

나를 부르신 그 분이 누구신지 알기 때문에,

그 부르심 안에 개런티(보증)가 다 들어있습니다.

 

국가가 부르면 군인으로 입대하면,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이잖아요.

국가는 부른 그 군인을 먹이고 다 책임져 줍니다. 요즘은 한국도 군인 월급이 작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르셨다면, 그 분이 누구인가를 안다면

그 분이 책임지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제자들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정말 연약하고, 실패하고, 도망가고, 배반하고...하지만

그러나 나중에 요21장에 보면,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을 다시 세우십니다.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이 중요합니다. 부르신 분이 중요합니다.

제자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 부르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그 분이 책임지시고 끝까지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보화가,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 그 구원의 마지막 순간까지 책임을 지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자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제자도의 핵심이 나옵니다.

 

막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

 

여기 제자도에 중요한 3가지가 나옵니다.

 

함께 있게 하심, 보내심, 권능을 주심 입니다.

 

▲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이것이 제자도에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제자는 누구인가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입니다.

 

다른 많은 것들이 있지만, 제자도의 핵심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스승인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시는 방식입니다.

 

무엇을 하는가, 즉 어떤 활동이나 사역이전에

주님과 함께, 주님 앞에 머물러 있을 줄 아는 사람!

 

주님의 제자훈련의 방식은 독특합니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수시키는 방식이 아닙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강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밀폐된 관계속에서 한 것이 아니라, 아주 열린 관계속에서,

삶을 다 함께 공유하는...

 

저는 2천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이 방식을 보면 놀라워요.

어떻게 2천년 전에, 이런 기가 막힌 방식을 취하셨을까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제자란 배우는 사람이란 뜻이죠.

어떻게 배우느냐면, 생활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제자 훈련 방식은 '도제' 식입니다.

12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12명이 넘으면 도제 식은 힘듭니다.

 

12명과 함께 하면 굉장히 친밀해 집니다. 삶을 다 오픈하게 되죠.

사실 이런 방식은, 그저 지식을 가르치는 방식보다는 아주 위험합니다.

강의시간만 딱 가르치고, 집에 와서 쉬고 하면... 쉬웠을 텐데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만나면 안전하거든요.

가까이 가면 약점이 보이고 냄새가 나고.. 서로 다칩니다.

 

그냥 약간 멀리 떨어져서 사랑과 존경을 나누는 것이 좋지

너무 가까이 해서 생활을 나누다 보면.. 위험해 집니다.

스승-제자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다 드러내시고 오픈하셨어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완전히 다르셨어요.

여러분, 주님은 위선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앞과 뒤가 같으십니다.

 

모순이 없으시고, 오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가까이 갈수록 더 매력적인 분이십니다.

 

여러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멀리서 볼 때는 좀 문제 있는 것 같았는데, 가까이 가니까 참 멋있고 괜찮은 사람인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은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관계가 오래 갑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다양한 성격, 약점과 오류 투성이고, 실수를 남발하고

잘난 체하고, 오른 편 왼 편 앉을 것을 따지고...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한 성격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거죠.

 

유명한 어떤 작가가 책을 썼는데, 그 책에는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모레로 장난 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의 격식과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근엄한, 그러나 그 안 내면에는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포장되어 있는 그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과 삶을 함께 했다면 그 위선이 금방 다 드러나버렸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단에서 설교하고 멋있게 포장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죠.

그렇지만 강단에 내려가서, 주일이 아니라 월요일 날... 삶을 오픈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24시간 같이 하면 감출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죠. 데이트 할 때는 뭐 멋있는 것, 매력적인 면만 보일 수 있죠.

그러나 함께 결혼해서 사는 것은 다릅니다. 다 노출되니까요. 감출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관계가 깊어지려고 하면 투명해야 됩니다.

삶을 노출해야 되는 것입니다. 노출이 적을수록 위장이 많이 하게 됩니다.

 

사실 큰 교회보다 작은 교회, 개척교회 목회가 어려운 것은,

교인들하고 늘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다 삶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함께 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신 것처럼.

삶을 나누는 동행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머물 줄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생활하고 여행하고..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가족과 같이 친구처럼 삶을 나누셨습니다.

 

우리가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비밀들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만납니다. 너무 가까이 오면 부담스러워요.

 

사랑방(셀 그룹)은 자신을 완전히 오픈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사랑방을 할 수도 없고

심방도 원치 않습니다. 자기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지키기 원하기 때문이죠.

어떤 것도 누구와 나누고 싶지 않는 사람은 제자의 삶을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고, 그 분과 많은 것을 공유하는..

 

제자가 주님과 동행하는 일은, 순간적인 흥분이나 감동만으로 안 됩니다.

일상에서 함께 걷는(동행하는) 법을 차츰 배워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만 다니는 사람은 그저 교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해야 제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를 닮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동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동행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행하면, 동거하면 닮음이 일어납니다.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이 비슷해지죠.

함께 동행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닮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동거함으로 공유하고, 그 공유함으로 서로를 닮아가는..

예수의 제자는 누구냐? 예수를 닮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닮는다는 것은, 먼저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어떤 게 그리스도의 성품입니까?

가장 대표적인 성품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온유해야 됩니다.

막 앙칼지면 안 됩니다.

 

겸손해야 됩니다.

이걸 보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보는 바, 사랑의 표현은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나는 예수 믿고 나서 정말 제자가 되었나요?

가족들에게 한 번 조용히 물어보세요. 자기가 정말 제자가 되었는지요.

 

5년 10년 신앙생활 했으면, 달라져야죠. 성숙해져야죠.

신앙생활한 연수만큼 더욱 성숙한 열매가 나타나고 섬김이 드러나야죠.

만약 변한게 거의 없다면.. 그건 10년 동안 종교생활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과 동행한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닮음이 온유와 겸손의 성품으로, 섬김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 예수님의 성품이 배어나오고 있습니까?

 

누구와 대화할 때도 보면, 돈을 어디에 많이 쓰는가?

섬김에 많이 쓴다고 말하는지, 아니면 자기를 위해 많이 쓰는지...

 

신앙생활은 다른 게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일상입니다.

주님께 붙어있고, 주님께 머물러 있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주님과 더 친밀해지는 것, 주님과 끊임 없이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때로는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때로는 책망도 하십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도 주님을 초대하고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식탁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초대하고...

식사기도 하고 그 다음에 반찬 투정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죠.

 

직장에서도 우리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

출근하고 운전하면서도 여전히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일상..

 

여러분, 주일 날 교회 다녀 오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은 종교활동에 불과합니다.

문제가 터질 때만 기도한다면 종교활동이지 동행은 아닙니다.

 

▲여러분, 요즘 같이 비대면 사회가 되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니까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진단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비록 비대면으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일상 속에서 평소에 주님과 대면하는 그런 동행의 삶을 살아왔다면

지금 코로나 사태로 가정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 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종교생활을 했던 분들은, 주일날 이 한 번 예배에 모든 것을 다 걸었기 때문에

그게 일시적으로 사라지니까... 신앙이 퇴보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일상적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도 주님과의 관계에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은 주일예배가 끝난 이후에 그때부터 내 신앙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종교인인지, 신앙인인지

교인인지, 제자인지!

 

우리 삶과 신앙은 어떤 것도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자훈련이라는 게 뭐 특별한 게 아닙니다. 삶의 전 영역에,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의 순간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 두는 것.. 그것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세속화된, 강력한 세속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후기 기독교 시대 즉 탈종교가 가속화되고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전통종교들 까지 부정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과 무신론의 세계가 거세진 이 시대,

교회는 바벨론과 같은 이 거대한 문화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갔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과 똑같은 비슷한 환경이

우리에게 지금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 오늘의 신자는 어디에 놓여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신앙의 전반을 돌아봐야 될 매우 중요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확인해야 되는 것은 뭘까요?

지금 나는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

 

다니엘서를 통해서 우리가 봅니다.

완전히 세속사회 한 가운데, 다니엘과 세 친구 외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거대한 세속문화의 화력 앞에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당당히 지켜내는 거죠.

 

참 크리스천은, 세상에 별 일이 다 벌어져도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를 따르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 같은 제자인가?

 

▲2천년 전에 12명의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도 알지 못하는 그 때에

그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제자로 나선 사람들...

그들은 오늘날의 주류처럼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아닌 제자로

그들은 점점 변해 갔습니다.

 

교인은 그저 예수님을 자기가 이용하는 사람이지만

제자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참된 제자를 오늘도 예수님은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너희 교회 교인이 몇 명이냐?' 라고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산에 어느 교회가 가장 큰 교회냐?' 라고 주님이 물으실까요?

주님은 그런데 전혀 관심이 없으실 것입니다.

 

한국의 십대교회가 어느 교회냐? .. 교회 사이즈가 얼마나 되느냐?..

주님이 전혀 관심 없으신 주제입니다.

 

'교회 몇 년 다녔느냐, 직분이 뭐냐?' 주님이 우리 개인에게 그렇게 물으실까요?

주님은 그런데 관심 없으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네가 내 제자냐?' 하는 질문입니다.

'네가 제자의 길을 걷고 있는가?'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어정쩡하고 모호한 신앙생활로는 자기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 다니는가? 그거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 예수를 따르는 제자인가? ..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이 질문 앞에 우리 각자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 이후 또 다른 시대를 우리는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겉치레적이고, 껍데기 신앙.. 그냥 모양만, 무늬만 Norminal Christian

그런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신앙은 공중분해 되고 말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입니까?

코로나 사태가 이것을 분별해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내 삶을 전적으로 위탁하고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을 따라가고자 하는

그래서 자기 삶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뿜어져 나오는

매력적이고 향기가 나는, 거룩한 영향력을 드러내는

가는 곳곳마다 빛과 소금으로 세상속에 당당히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분 각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두 패로 나눠지는 거죠. 마지막 시대에 두 패로 나눠집니다.

진실로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와,

형식적인 그런 노미널 크리스천.. 정확하게 나눠집니다.

나는 어느 쪽에 속해있는지를 진단하시고, 이 코로나 시대에 우리 신앙을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단순히 fan 이 아니라 disciple 이 되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도전이 됩니다.

그냥 교회 문화와 활동에 익숙한 교인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일상의 모든 일들 속에서 동행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예수 닮은 제자로, 작은 예수로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아름답게 기여하고 내 삶을 바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