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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5장. 일절 부담을 주지 않으신 예수님

LNCK 2020. 11. 24. 17:43

 

◈일절 부담을 주지 않으신 예수님            눅5:16                  2020.11.24.큐티묵상

 

 

눅5장을 읽어보았다.

뭐가 뚜렷하게 잡히는 게 없어서 두 번 더 읽어보았다.

대략 5가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자신의 ‘사명선언문’ 대로 행하신 주님

앞서 눅4:18~19절에 그 유명한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이 나온다.

그 후 예수님은 자신이 천명하신 사명선언 그대로 행하셨다.

 

-제자 4명 부르심 눅5:1~ – 눈을 열어 천국과 영생을 보게 하시고

-문둥병자 고치심 눅5:12~ – 질병에 눌린 자를 풀어주시고

-지붕 뜯고 내린 병자 고치심 눅5:17~ - ‘네 죄 사함을 받았노라’하시며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셨고

-마태 부르심 눅5:27~ 세리 마태에게 은혜의 해, 희년의 해방을 누리게 해 주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을 붙잡지 않으셨다. 전도하신 후에 그냥 사람들을 자유롭게 돌려 보내셨다.

 

눅5: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오늘날 현대인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끈적거리고 치근대며 달라붙는다’일 것이다.

 

25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대학원생 청년이 하루는 정색과 질색을 하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어제 동네 교회 전도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을 와서,

집주인인 저랑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저희 집 대문에 교패를 떡 붙이고 가셨습니다!’

 

청년은 하도 성화에 못 이겨 심방 한 번 받은 것인데,

여전도사님은 그것을 ‘이제 우리 교회 교인이 되었다’라고 이해했거나

아니면 '교패 붙이는 정도는 별로 실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좋아할 수도 있다..'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해와 이해의 충돌이었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교인들은 전도를 하는 것인지, 교세를 확장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 하자는 것인지... 그렇게 대시하며 밀어붙인 결과

오늘날에는 그 부작용, 반작용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몰라도 교회는 싫다’는 사람들, 특히 그런 젊은층 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도만 하셨지... 사람들을 붙잡지 않으셨다.

전도하고 그냥 다 자유롭게 자기 길을 가도록 놔 주셨다.

 

간혹 TV에 보면, 강태공이 애써 낚시를 하고는, 잡은 물고기를 다 풀어주던데

예수님이 바로 그런 자세로 일관하셨다.

아예 그런 데(세 확장)는 관심이 없으신 모양이셨다.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제자 4명 부르심 눅5:1~ 그들은 자진해서 주님을 따랐다. 어떤 강요나 부담감도 없었다.

-문둥병자 고치시고 눅5:12~ 그를 풀어주셨다. 오히려 제사장에게 보내셨다. :14

오늘날로 치면 전도해서 남의 교회 보내주는 식이다.

 

-지붕 뜯고 내린 병자 고치심 눅5:17~

얼마나 사람이 많이 운집했으면 지붕을 뜯어야 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내일은 저 동네에서 모일 터이니, 다 거기로 모이세요!’ 하지 않으셨다.

그보다는 ‘각자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세요!’ 하고 돌려보냈을 개연성이 크다.

 

-세리 마태를 부르심 눅5:27~

이건 교인 숫자를 갉아먹는 실수 일 수 있다.

세리 1명 얻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하셔서 같이 식사하신 일은

따르던 교인 99명을 잃어버리는 자해 행위였을 것이다.

당시 세리 마태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게 꽤 있었을 것이다.

  

▲부담을 주지 않는 전도 방식  

어떤 교인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불교는 부산에 가면 범어사 가고, 강릉에 가면 낙산사 가고, 서울에 오면 봉은사 가고

천주교는 부산에 가면 대청성당 가고, 강릉에 가면 강릉성당에 가고, 서울에 가면 명동성당에 가는데..

개신교는 자기 교회와 남의 교회가 구분이 뚜렷해서,

타 도시에 가서 남의 교회에 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명절이 아닌 이상, 교인들이 타 도시에 출장이나 여행을 가서

그 지역의 개신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아마 극소수이거나 거의 없을 것이다.

 

불교 신자가 범어사, 낙산사, 봉은사를 자유롭게 드나들듯이

지방의 타 교회를 드나들기가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는 것이다.

개신교의 ‘개교회주의’가 가지는 장점과 동시에 단점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과거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Crusade(전도집회)를 각 도시에서 열었지만

자신의 교회나 선교회로 모이라고 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그 지역의 교회들로, 결신자들을 보내는 방침을 끝까지 고수했다.

 

반면에 데이빗 윌커슨 목사는 처음에는 World Challenge(1958)라는 선교단체를 세워 전도만 하고

교회를 개척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하나님의 인도로 뉴욕에서 타임스퀘어 교회(1987)를 개척하셨다. 각각 부르심이 달랐다.

 

18세기에 대비되는 두 사역자가 있었는데 그 유명한 휫필드와 웨슬리이다.

두 분 다 말을 타고 다니며 일평생 열심히 복음을 전했고, 하루 2번 이상 설교를 하셨는데

두 분이 달랐던 점은

휫필드는 교회를 조직하지 않았고,

웨슬리는 교회를 조직했다는 점이다. 각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었다.

   ☞휫필드와 웨슬리 http://blog.daum.net/rfcdrfcd/10824698 (강추)

 

공생애 3년반 동안 예수님은 굳이 분류하자면 웨슬리나 윌커슨 보다는

빌리 그레이엄, 휫필드 과에 속하신다.

자신의 사명선언문 대로 열심히 전도하셨지만.. 절대 조직을 하지 않으셨다.

 

혹시 예수님은 ‘우주적 교회 Universal Church’를 염두에 두신 것일까?

어쨌든 따르는 사람들 모두를 양떼로 인정하시고 그들을 기르셨지만

그들을 어떤 테두리 안에 넣고 조직하는 일을 일절 하지 않으셨다.

 

5병2어 기적 때 사람들을 50명씩 앉도록, 잠시 구역을 나누신 적은 있지만

그날 당일 한 번 나눈 것으로 끝이었다.

12사도들을 교구장으로 세우지도 않으셨고, 팔레스틴 전역을 교구로 나누신 적도 없다.

 

오늘날의 교구제도, 교회제도가 불합리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은 다 각자 위로부터 받은 부르심대로 사역하면 되는데

꼭 천편일률적일 필요는 없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오늘날에는 휫필드보다는 웨슬리 스타일이,

빌리 그레이엄보다는 데이빗 윌커슨 스타일이,

비조직-우주적 교회보다는 조직-가시적 교회스타일이 더 곽광 받는 시대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조직교회, 지역교회, 교단교회가

전도와 확장에 너무 과열되어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자유롭게 신앙생활 하도록 배려해 주지 못하고,

우리 교회, 우리 예배, 우리 헌금... 이렇게 강조하다 보니 (안 그럴 수 없겠지만)

그런 공격적 전도방식으로 인해 

이제 전체적으로 기독교 감소의 원인이 되고 있다.

소위 ‘무례한 기독교’ 때문에!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19 사태가 터져버렸다.

앞으로 (교계의) 시국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쉽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비대면 예배와 인터넷 예배가 일상적 예배로 점점 강세를 띄고 있다.

 

이제 앞으로 예수님 같은, 조지 휫필드 같은, 빌리 그레이엄 같은 (그 외도 많겠지만)

전도를 하되 출석을 강요하지 않는..

제자도를 가르치고 유도하되, 꼭 우리 교회 울타리 속에 쑤셔넣지 않는..

병자를 심방하고, 각종 중독자들을 복음으로 치료하되 헌금 부담을 일절 안 주는..

그런 ‘전도자’들이 많이 나오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엡4:11, 5직임 중 '전도자'

 

하나님 나라에는 이런 사람도 필요하고, 저런 사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꼭 천편일률적 스타일(전통적 목회)을 고집하다가는, 사탄의 나라와 싸울 때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성도들을 푸시하지 않는 방식은 상당한 인격과 인내심을 요구한다.

큰 교회는 모르지만, 중소형 공동체에서

푸시하지 않고 누가 성가대를 하겠으며, 누가 주일학교 교사를 하겠으며,

은근히 부담주지 않고 누가 자원해서 헌금을 내랴. 다 눈치를 보면서 봉사하게 된다.

 

그렇지만 꼭 예배에 많이 모이는 것이, 꼭 성가대나 주일학교가 잘 돌아가는 것이,

꼭 주님의 뜻이 아닐 수 있다. 특히 강요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부모가 사춘기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눈치주다가.. 압력 넣다가.. 강요하다가.. 그래도 자녀는 절대 말 안 듣는다.

자녀가 철이 들어서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순종할 때까지 기도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데

 

가만히 따져보면 그게 가장 빠른 방식일 것이다.

괜히 자녀에게 압력 넣고 강요하다가 100% 반항한다. 빗나간다.

그래서 부모와 원수되면.. 나중에 철이 들어서 돌아오기가 더 힘들고 늦어질 것이다. 상처 받았으니까!

 

예수님은 왜 그리 느긋하셨던 것일까?

왜 모으지도 않으시고, 압력 넣지도 않으시고, 강요도 하지 않으신 것일까?

 

그들이 성령 받고, 철이 들고, 회심하고, 변화되기를

자발적으로 변화되는 그 때가 오기까지

예수님은 속이 부글부글 타셨겠지만.. 인내하며 기다리셨던 것 같다.

기도만 하시고 그 때가 오기까지 참고 기다리신 것은 아닐까?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5:16

 

그러므로 이제는 전통적 공격적 전도방식보다는

정말로 물 위에 씨앗을 뿌리고 기다리는...           *전11:1 참조

오직 하나님이 싹이 트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기 까지 기도만 하며 기다리는

그런 느릿느릿한 거북이 방식의 전도도 채택해 볼 일이다.

어차피 토끼처럼 마구 달려간다고 되는 것은 아니니까!

 

전도를 하되 그냥 가만히 기도만 하면서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한 번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관련글 : 예수님은 자원하는 섬김을 원하신다 http://blog.daum.net/rfcdrfcd/15974197(강추)

 

은퇴하신 목회자들 중에도

-국내외로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우주적 교회'를 돕는 분이 계시고

-여전히 또 새롭게 지역교회를 개척하셔서 '가시적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 계시는데

각자 부름 받은 대로 하실 일이다.  편집장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