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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6장. 심판대에서 민심 얻기

LNCK 2020. 12. 7. 15:01

 

 

심판대에서 민심 얻기   눅16:9, 요일2:1, 행9:36~37    2020.12.07.큐티묵상

 

눅16: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오늘 묵상은 ‘천국 심판대에서 내가 재판을 받게 되는 날

누군가 나를 변호해줄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났다.

 

위 눅16:9절,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는 구절에서

나는 이 점을 생각해 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천국의 심판대 앞에서 “당황”할 일을 맞딱뜨리게 될 것 같다.

성경에 그 심판대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마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천국의 심판대 상황이, 자기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간다는 얘기다.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 적은 숫자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좋은 판결을 받을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재판장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신다.

 

이때 필요한 것이 나를 변호해줄 사람들이다.

그 변호자들은 재판관은 아니지만, 그래도 재판에 영향을 안 미칠 수 없다.

 

내가 가난한 자들, 학대 받는 자들, 병든 자들, 고통 받는 자들을

항상 예수님 이름으로 돌아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그들이 나중에 백보좌 심판대에서 나를 변호해 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빚을 몰래 차감해 주는 불의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주인의 재무 담당자인 자기 재량으로서, 빚을 차감해 주었다는 해석이 있다.

 

금융권에 대출을 받을 때, 그 대출 책임자가 이자 비율을 정하는 재량과 비슷하다 하겠다.

즉 자기 돈은 아니지만, 남의 돈이지만, 그 돈을 ‘지혜롭게’(16:8) 잘 사용했던 것이다.

 

필리핀 휴양지에서 우연히 수염을 많이 기른 또래의 독일 남성을 만난 일이 있다.

뭐 하는 사람인가 물어보니, 그는 자기가 필리핀 산지에 학교를 지어주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소개로 공사현장까지 찾아가서, 한 번 둘러본 적이 있다.

옛날 우리나라 시골의 초등학교 같은 규모의 2층 콘크리트 벽돌 건물을 짓고 있었다.

 

이 공사의 재정은 누가 대느냐고 물어보니

자기가 독일의 관공서나 회사를 방문하거나 편지를 띄워서

그 기관이 예산의 어느 정도 %를 구호복지사역에 책정해 놓고 있는데 (아마 법적으로 의무)

자기가 직접 그 예산을 섭외해서 타온다고 내게 알려 주었다.

 

별난 직업의 사람이었다. 선교사도 아니고 그저 일반 사회인인데

자기나라 독일 기관의 돈을 끌어와서

저계발국가에 산지에 학교를 지어주고 있으니

선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마음만 있으면,

꼭 자기 돈을 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를 사실 많이 볼 수 있다.

어떤 자선단체가 있다고 가정할 때, 내가 직접 도울 형편이 안 되면

내가 그 단체를 내 주위 사람에게 소개해 주면 된다.

 

그러면 나도 본문의 ‘지혜로운 청지기’처럼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혜자들은,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를 좋게 변호해 줄 것이다.

 

▲이렇게 변호를 받은 사람의 예를 생각해 보니, 먼저 도르가가 떠오른다.

 

행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베드로를 청하는 일도, 도르가 자신은 할 수 없었다. 이미 죽어서 다락에 누워 있으므로.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베드로를 초청해 모셔왔다.

 

행9:39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과부 여러 사람들이 도르가를 위해 울었다.

그리고 도르가가 만들어 주었던 옷들을 내어보였다.

 

결국 ‘변호자’들이 도르가를 다시 살린 셈이었다.

그녀는 베드로의 기도를 통해,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본문과 관련해서 또 이런 말씀도 생각이 난다.

 

사14:10 ‘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9절부터 읽어보면, 이사야가 바벨론 왕의 죽음을 예언하는 내용인데,

죽은 장군들과 열왕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환영하며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도다’라며 바벨론 왕을 조롱한다는 것이다.

 

지하세계에서 바벨론 왕을 환영하는 축하잔치(?)를 준비하느라 소동이 일어나는 장면이다.

바벨론 왕이 죽였던 모든 장군들, 왕들이

지하세계에 들어오는 바벨론 왕을 환영하기 위하여 부산을 떨며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나 사이에 주로 재판을 받겠지만

거기에 방청객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변호인도 계신다.

 

안타깝게도 바벨론 왕의 방청객들은,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바벨론 왕의 죽음을 즐기거나 고소해하고 있었다.

 

항상 최후와 심판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진짜 회심한 사람의 증거다.

그러나 진정 회심치 못한 사람은.. 언제나 현실과 땅만 쳐다보고 살며,

내세와 심판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남방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이 생각난다.

 

눅11: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 두 구절에서도

피고인은 ‘예수님 당시 세대 사람들’ 또는 ‘지금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데,

증인 또는 방청객이 나오는데 ‘남방 여왕 시바’와 ‘니느웨 사람들’이다.

 

결국 피고인들은 좋은 판결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내가 착안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정, 백보좌 심판대 앞에는

하나님과 – 나 .. 이렇게만 등장하는 게 아니고

 

거기에 수많은 증인, 방청객, 변호자, 고소자들이 함께 등장할 것이라는 예를

성경을 통해 살펴본 것이다.

 

▲변호자도 계신다

요한일서 2장1절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구절은 온갖 죄를 다 지은 타락한 죄인까지도 다 변호해 주신다고 믿으면 큰 오산이다.

 

문맥은 이렇게 되어 있다.

요일2:1a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신 분이 계시니..’

 

즉 자기가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쓰지만

현실은 죄를 안 짓는 완벽한 삶을 살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거의 90%이상 온전하게 사는 성도가 10% 실족했을 때, 이 구절이 적용된다.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눅16:9절을 묵상했는데, 예수님만 나의 변호자가 되어주시는 게 아니라

나의 수많은 지인들이, 천국에서 나를 변호해 줄 수 있도록

오늘 내가 ‘지혜로운 청지기’의 삶을 살게 되기를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