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8 2020.12.16.큐티묵상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예수님의 승천 직전 본문 말씀에서
오늘은 ‘증인’이란 단어를 묵상해 보았다.
‘증인’이라고 할 때, 과거에 내가 가진 개념은
‘전도’를 중심으로 하는..
즉 지상사명, 대위임령의 감당을 주 임무로 하는 전도특공대 같은..
이렇게 미래적 개념으로만 ‘증인’을 이해했다.
그런데 오늘 묵상한 ‘증인’을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목격자’
이렇게 과거적 시각으로 이 단어를 이해해 보았다.
물론 ‘증인’이란 말이
그 두 요소를 다 포함하겠지만
어쩌면 ‘과거에 있었던 일의 증인’이 ‘미래의 증인’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즉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중심으로, 제자를 키우신 이유가
바로 ‘증인’을 만드시고, ‘증인’을 세우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2천년 전 당시에는 무슨 비디오도 없었고, 영상물도 없었으니
예수님은 당신의 지상사역, 공생애를
당신이 승천하신 후에
세상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줄 ‘증인’들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날이 ‘대역’과 비슷한데
예수님의 증인은, 그저 외모와 목소리만 닮은 대역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그대로 보여주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싱크로율 백퍼센트의 증인이
예수님은 필요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3년 반 전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을 미리 뽑아서 훈련시키셨고
이제 세상을 떠나시면서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 라고 *눅24:48
그들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사명을 분명히 알려주신 것이었다.
▲증인의 삶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앞 단락에서 엠마오 길에 글로바는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이라고 예수님을 평했다. 눅24:19
그런데 원문에는 ‘일과 말에’ *에르고이 카이 로고이
즉 어순이 개역과 다르다. ‘일’이 ‘말’보다 먼저 나온다.
영어로 mighty in deed and in word
즉 예수님의 복음은 ‘말’에 앞서 ‘일’이었다.
즉 '설교'에 앞서 '행함'이었다.
그 예수님의 복음, 즉 행하심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증인’으로 세우시고, 증인의 사명을 주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 이것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명이지만 (in word)
그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는데.. 그것은 너희는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라! (in deed)
즉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었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한 것처럼
너희도 그 증인이 되라!
즉 너희도 십자가를 지고 죽고 부활하여라!
이렇게 십자가와 부활이 뭔지를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증인’으로 세우신 목적이요,
너희들은 온 천하에 나가서 그것을
나의 증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이다.
그러니 12사도들이 온 세상에 나가서
하나같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다 순교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복음은 mighty in deed and in word 이다.
‘행함과 말에 능력있는’ 것이다. 눅24:19
그런데 말보다 행함이 더 앞선다.
사도행전1:1에도 이렇게 나온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영어로 both to do and to teach
여기도 ‘행하심’이 먼저 나오고, ‘가르치심’은 그 다음에 나온다. 순서가 그렇다.
그리고 그 행하심의 초점, 하이라이트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더 압축하면, 십자가이다.
부활은 증인이 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으면 저절로 된다.
그러나 십자가는.. 자기가 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자기가 결단해야 되는 면이 있다.
▲즉 오늘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산다는 말은
미래적 측면으로, 땅끝까지 복음 전파하는 증인.. 이런 뜻도 포함하지만
그보다 앞서
과거적 측면의 예수님의 행함과 가르치심 in deed and in word을
증인으로서, 자기가 목격한 것을 그대로 세상에 비디오처럼 보여주는 것인데
그 핵심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앞선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도
주옥같은 설교, 능력있는 설교, 권세 있는 설교를 하셨지만
만약 십자가를 몸소 지지 않으셨더라면, 그걸 거부하셨더라면 in deed
그 모든 가르침은 아마도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in word
링컨의 일화가 생각난다.
젊은 시절 링컨이 어느 마을에 가서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가 약속했던 시간보다 더 늦게 연설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유인즉, 그가 말을 타고 오는 길에 마을 입구에서
구덩이에 돼지 한 마리가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급히 말에서 내려서 그 돼지를 구해주느라고 .. 늦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옷에는 털어냈지만 아직도 진흙이 좀 묻어있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마을 사람들은, 그 날 링컨이 무슨 내용의 연설을 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링컨이, 그 마을 사람 소유의 돼지를 구해준 일은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아주 오래도록 기억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슈바이처 박사에 대해서 거의 모르지만
이런 말은 들어서 알고 있다.
루터교 목사이기도 한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복음은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1913년 그는 38세 때
아프리카 지금의 가나 람바레네로 갔다는 것이다.
복음이 뭔지를 자기 삶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는 람바레네에서 90세까지 살다가 소천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있지만)
즉 복음을 말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아프리카로 자원해서 들어간
이 점만 놓고 본다면
그는 아주 선각자였던 셈이다. *1952년 노벨 평화상 수상
▲어느 글에서 읽은 내용인데, 지금 출처는 찾을 수가 없지만
기억하는 만큼의 내용은 이렇다.
한국의 한 독신 중년 여성이 아프리카의 어느 황량한 부족마을에 정착했다.
그는 거기서 아무 건물도 짓지 않았다.
또 대도시가 아니고 시골 마을인지라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후원이 있었지만, 사역을 크게 벌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후원금이 필요 없었다.
그가 했던 일은, 복음을 전하는데, 그 방식은
예수님의 삶을
그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 삶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즉 그들의 선한 친구가 되어주고
동병상련을 함께 느끼고,
그러니 우는 자와 같이 울어주고, 웃는 자와 같이 웃어주었다.
물론 그런 일이 쉽지도 않고, 1~2년 만에 되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십년을 부족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친구가 되어서 지내다 보니
차츰차츰 그들의 마음을 하나 둘씩 얻게 되었다.
그리고 흑인 부족 사람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그 독신 여성의 삶을 통해서 차츰 배워가고, 믿게 되었다.
그러니 과거에 우리나라에 개척교회 하시던 분들이
새벽에 기도해 줄 뿐만 아니라
낮에는 각 가정을 돌면서
맞벌이부부 애들 봐주고, 청소해주고, 반찬해주고,
노인들 집에는 빨래해주고 하던 것이
헛된 낭비가 아니라.. 어쩌면 ‘증인의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증인은 증인을 낳게 되어 있다.
증인이 증인을 못 낳으면, 그는 애당초 증인이 아니었던 셈이다.
증인은 반드시 증인을 낳게 되어 있다.
왜냐면 제자들이 그 증인의 삶에 크게 ‘감동’되었으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던 것도
예수님의 삶에 크나큰 '울림과 감동'이 있었고,
'하늘의 영광'이 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큰 건물을 지으신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신 것도 아닌데
어쩌면 예수님은 가난하고, 집도 절도 없이 떠돌이처럼 사셨는데
그분의 가르침에는.. 능력이 있었고
그분의 삶에는.. 하늘 영광이 있었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는.. 영원한 영광과 권세가 있었다.
제자들은 그것을 본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 삶으로서.. 그분의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증인이 되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십자가를.. 고스란히 그대로 보여주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11:1
예수 믿은지 오래 되신 분들은, 그래서 신앙이 성숙해진 분들은
정말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 싶을 것이다.
그 증인은, 예수님의 행함과 말씀을 in deed and in word
자기 삶으로 비디오처럼 보여주는 것인데
그 중 가장 큰 능력은 십자가를 지는 삶에 있다.
자기가 제자로, 증인으로 살려고 하면,
성령님은 ‘자기가 어디 가서 죽어야 할지를’ 보여주실 것이다.
그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 십자가를 지고, 그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거기 가서 순종해서 죽으면
부활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증인들, 그의 제자들도 저절로 생겨나게 될 것이다.
왜냐면 십자가를 진 그의 삶에 (그의 제자들이) 크게 감동했으므로
그의 삶을 저절로 본 받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