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9 / 사도행전 강해 (86) / 참된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 YouTube
◈참된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행25:1~12
오늘 본문은 바울의 4차 변호입니다.
1차 변호는 유대인 무리 앞에서 진행되었습니다.
2차 변호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진행되었습니다.
3차 변호는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진행되었습니다.
4차 변호는 로마 총독 베스도 앞에서 열립니다.
오늘은 그 4차 변호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먼저 로마 총독이 바뀌었습니다.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뀌었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대로, 벨릭스가 불명예 퇴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를 이어 베스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이 베스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나마 알려진 몇 가지 정보들이 있습니다.
베스도의 재임 기간인데, 재임 기간이 굉장히 짧습니다.
AD 60년~62년까지 약 3년밖에 되질 않습니다.
제가 주석들을 찾아보니까요. 직무를 수행하던 도중에 질병으로 갑자기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하나 알려진 정보가 그에 대한 평판입니다.
전임 총독 벨릭스는 최악의 총독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베스도는 평판이 좋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유대를 다스렸던 총독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총독들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요세푸스의 문헌에 의하면, 그는 다른 총독에 비해서 덜 부패했으며
비교적 공정하고 온건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울도 기대했을 겁니다.
'이 사람이 오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줄 것이고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기대를 했을 겁니다.
과연 그 기대대로 되었을까요? 본문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25:1절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부임한 베스도의 첫 번째 일정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일입니다.
이 행보는, 정치적인 행보였습니다.
베스도는 유대를 다스리고 관할하는 총독 아닙니까?
유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이 있는 도시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계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도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이들과 관계를 잘 맺어야, 유대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임 후 첫 번째 일정으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지도를 한번 보시겠어요? 지도를 보시면 가이사랴는 위(북)쪽에 있습니다.
해안도시이죠. 예루살렘은 밑(남쪽)에 있습니다.
그러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갔더라' 라고 기록해야 옳죠.
그런데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여기만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다른 곳들을 보면 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라고 기록합니다. 왜일까요?
1)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서울과 같은 거죠. 옛적의 어르신들도 '서울로 올라간다'고 했죠.
그건 서울을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 지형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가이사랴는 해안도시입니다. 해변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고도가 거의 0미터이죠.
그러나 예루살렘은 고도 800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형으로 보면, 올라가는 길입니다.
◑25:2~3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그런데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자마자 처리해야 할 민원이 생겼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바울을 고소했기 때문입니다.
고소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려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산헤드린 유대자치법정에서 '바울을 재판하겠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재판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숨은 음모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매복해 있다가,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25:3
왜냐하면 재판으로는, 법적으로는 바울을 죽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접 자기들의 손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겠다'는 40명의 암살단이 생각납니다. 23:13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에 가서 협조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갇혀있던 안토니아 요새에서, 산헤드린 공회로 불러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때도 명분은 '재판을 위함'이라는 목적이었죠.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요새를 빠져나와서 산헤드린 공회로 가는 길에, 그를 죽이고자 하는
숨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길에
자기들이 노상에 매복해 있다가, 바울을 죽이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 계획이 또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본문의 시점은, 그때 (23:13)보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났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여전히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의 미움이 사그라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총독이 바뀌는 기회가 찾아오자, 다시 그 미움과 증오가 겉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나 집요하지 않습니까?
신약학자 그랜트 오스버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증오심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분명하고도 설득력 있는 경고를 듣게 된다.
우리의 증오심이 격분으로 내버려 둘 때, 우리의 감정들을 하나님께 복종시키지 않을 때,
우리는 맹목적인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는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탁월한 통찰 아닙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면, 시간이 지난다고 그 미움이 용해되지 않습니다.
그 미워하는 마음이 오히려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미운 감정이 딱 새겨지게 되면,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풀어지거나 해결되지 않으면,
그 미운 감정을 끝까지 품고 있는 게, 우리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사람 한번 손봐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 그 복수심에 마음이 빼앗깁니다.
사실은 그 순간, 저와 여러분이 미움의 종이 되는 겁니다.
마치 오늘 바울을 죽이려는 이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의 영혼은 메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증오심은, 그냥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 마음이 들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은혜,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은혜, 축복해 줄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 은혜는 어디서 옵니까? 지금도 나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받아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로부터 나옵니다.
그 십자가의 자리로,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증오심은, 십자가 아래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살아오면서 해결되지 않는 분노가 있으십니까?
미움이 있으십니까?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으십니까?
그 미움을 주님께 복종시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거죠.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은혜를 구하는 복된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미움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그 생명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5:4절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베스도는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왜 베스도가 들어주지 않았는가요?
그 이유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누가의 신학적인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베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일에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얘기입니다.
베스도는 지금 유대인들의 음모를 모릅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그들의 숨은 계획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울을 지키시려고, 베스도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바울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를 좌절시키고 계십니다.
여러분, 참 기가 막힌 하나님의 보호 아닙니까.
또다시 바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있습니다.
내가 알고 간증하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큽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걸 빙산과 같다고 비유를 했습니다.
빙산의 물 위에 떠 있는 부분은, 그 밑에 있는 거대한 빙산의 일부분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내가 간증하는 은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때 나를 지켜주셨어, 하나님이 그때 나를 기가 막힌 방법으로 인도해 주셨어'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이, 그 밑에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그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겁니다. 주1) '데이비드 스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느낍니다. '하나님이 또 나를 지켜주셨구나.'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낍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아이들을 지켜주셨구나'
'큰일 날 뻔했는데, 그때 하나님이 이 아이를 지켜주셨구나'
이 하나님의 숨어있는 은혜가, 우리의 삶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일, 유대인들의 그 계획을 몰랐습니다.
가이사랴에 있으니까요.
심지어 베스도 총독도, 유대인들의 간계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시고, 베스도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청원을 거절하게 하십니다.
◑25:5~6절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대신에 베스도가 이들에게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부르는 대신에, 너희들이 나와 함께 가이사랴로 내려가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곧 가이사랴로 돌아갈 텐데, 바울을 고소하려거든
나와 같이 내려가서, 재판을 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이 베스도와 함께 가이사랴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2년 만에 다시 재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25:7절 '그가 나오매 (바울이 재판정에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그런데 재판을 보면, 새로운 게 하나도 없습니다. 고소의 내용이 새로운 게 없습니다.
2년 전에 했던 고소를 똑같이 또 다시 반복합니다.
그래서 누가가, 이 재판에서 고소하는 장면을 굉장히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게 없다는 거죠.
그리고 이번에도 물증이 하나도 나온 게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2년 전과 똑같이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 변화한 내용이 8절에 나오는데요.
◑25: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바울이 율법, 성전, 가이사에 대햐 똑같은 변호를 그대로 하는 거죠.
첫 번째 율법에 대해서 '나는 율법에 잘못한 게 없다. 나는 이단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정통이다.'
두 번째 성전에 대해서 '나는 이른바 성전을 더럽힌 적이 없다.
나는 성전을 모독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전을 존중하는 사람이다.'
세 번째 가이사에 대해서 '나는 로마의 황제에게 반역한 적이 없다.'
즉 로마의 평화를 깨트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2년 전에 했던 벨릭스 앞에서 했던 바울의 변호와 똑같습니다. 그러니 나는 무죄라는 것입니다.
◑25: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이제 베스도의 판결만 남았습니다. 베스도도 바울이 무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증이나 증인이 하나도 나온 게 없으니까요.
그러나 베스도는 판결을 내리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그도 유대인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는 부임한 지, 지금 2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과 좋은 출발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유대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베스도는, 전임 총독 벨리스가 어떻게 물러났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전임 벨리스가 어떻게 물러났죠?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 네로에게 탄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반감이 쌓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신임 총독 베스도는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바울을 풀어준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반감을 살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분노가 쌓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바로 판결을 내리지 못합니다.
대신에 바울에게 뜬금없는 제안을 던집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여러분, 굉장히 뜬금없는 제안이죠.
지금 바울에게는, 어떠한 죄도 드러난 게 없습니다. 증거가 하나 나온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난데없이 '예루살렘에 가서 또 재판을 받겠느냐?'고 묻습니다. 왜일까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끝까지 정치적인 계산을 하는 거죠.
만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바울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암살단들이 매복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때 바울도 예상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이 제안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입니다.
바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법원으로 바로 올라가는 겁니다.
◑25:10~11절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가이사 앞에서의 재판, 이것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지면 로마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베스도도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바울이 로마시민권자 이기 때문에, 바울의 항소를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배석자들과 상의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25: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여기 '배석자'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법률 자문단을 말합니다.
당시 로마의 총독이나 관리들은, 판결하기 모호하거나 어려운 소송에 대해서는
자문을 구하기 위해 법률 자문단을 따로 두었습니다.
그들과 상의한 후에, 베스도는 바울의 상소를 바로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적용
오늘 우리는 이렇게 바울의 4차 변호를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기대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새로운 총독이 부임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전임 벨릭스와는 다른, 평판이 너무나도 좋은 베스도 총독이 왔습니다.
그런데 기대대로 되었나요?
기대 대로 바울은 무죄를 선언받고, 자유로운 몸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까?
아니죠.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입니다. 가이사랴에 온 지 2년이 지난 것입니다.
3차 변호와는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입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변한 것은 바울에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론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바뀐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베스도는 벨릭스보다 훨씬 평판이 좋았습니다.
그는 다른 총독에 비해서 덜 부패했으며, 비교적 공정하고, 온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벨릭스와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유대인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판결을 이끌려고 했습니다.
새로운 총독이 바뀌어도, 바울에게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재미있는 누가의 의도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오늘 베스도는 유대인을 의식을 했습니다.
25:9절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24:27절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여러분, 두 구절이 매칭되어 보이시나요? 두 절은 주어만 바뀌어 있습니다.
24:27절에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25:9절에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베스도나 벨릭스나 '도진 개진'이라는 것입니다. *오십보 백보
최악이라고 불리던 벨릭스가 가고,
최고라고 불리던 베스도가 와도...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도 바뀐 게 없습니다.
베스도가 아니라 더 뛰어난 총독이 와도
바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의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그것이 바울에게는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태도도,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입니다.
그러나 2년 동안 바울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죽이기 위한)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총독이 바뀌는 기회가 찾아오자, 그들의 미움이 마음이 다시 겉으로 드러났을 뿐입니다.
그들은 실태했던 그때의 암살 계획을 다시 꺼내고 있습니다.
바울을 미워하는 마음도,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만 상황에 억눌려 있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바울을 증오하는 그들의 세력은 더 커졌습니다.
처음에는 바울을 죽이려는 40명의 암살자들이 주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은, 40명의 결사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결사대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결사대가 사라져도,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또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대제사장과, 유대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나서고 있습니다.
더 막강한 권력자들인 거죠.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모든 유대 지도자들이 이 일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바울을 죽이려는 그들의 마음 또한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안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바울은, 2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놀랍게도
늘 그랬듯이, 그들의 손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바울을 붙드시고, 바울을 지키시고,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참된 소망, 영원한 소망은
누구에게 있는가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구원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주제
여러분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우리의 상황도 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2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요.
우리가 느끼는 상황, 체감하는 상황은 나아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상황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언제 우리 경제가 좋았던 적이 있었습니까?
어느 정권이 새로 들어와도, 거기에 소망이 있는 게 아닙니다.
뉴스를 보면, 경제는 늘 어렵다고 했습니다.
벨릭스가 가고, 베스도가 오고, 더 뛰어난 베스트 베스도가 와도 상황이 나아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에 소망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어디를 가나 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군가가 사라지면 또 다른 누군가가 찾아옵니다.
여러분 '빌런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사람이 모이는 집단 내에서
악당처럼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일정한 비율로 항상 존재한다는 법칙
40명의 주도자가 사라지자, 더 큰 놈들이 왔습니다.
이번에는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이, 발벗고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인생입니다. 어디를 가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때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자식들도, 나이가 들수록 키우기 편합니까?
제가 주변에 물어봤습니다. '언제쯤 되면 아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차라리 지금이 낫다고요. 지금은 귀엽기라도 하다고요.'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신경쓸 게 많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제가 어제 아내하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토요.일에는 학교를 보낼 수 없는가?
왜 토요일에는 학교를 쉬는가?'
여러분 건강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강도 나빠지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난다고, 우리의 형편이 나아지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삶을 에워사는 환경은, 사실 여전히 바뀌지 않습니다.
늘 힘들고 늘 어렵습니다. 오히려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벨릭스가 가고 베스도가 오면 달라질 거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는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40명의 암살단이 사라지면 괜찮을 거라고요?
그 뒤에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인생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도 바울을, 늘 그랬듯이, 약속대로 성도를 지키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바울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인도하고 계시는가요?
바울이 전혀 알지도 못했던 유대 지도자들의 암살 계획까지도
베스도를 통해 막아주고 계십니다. 25:2~4
바울도 몰랐던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바울의 생애 가운데 지금도 간섭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스도의 어처구니 없는 판결까지 사용해서,
바울을 약속대로 로마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 때문에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바라봐야 할 유일한 소망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시62:1절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5절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 도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도다' 62:2
☞시62편 오직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https://rfcdrfcd.tistory.com/15979655
그러므로 이번 한 주간도, 우리가 붙들고 살아야 할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이 상황이 지나면 나아지겠지...'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여러분 이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헛되고 변하는 소망을 붙들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기대고 뿌리내려야 할 소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작은 일에 갈피를 못 잡고, 손바닥 뒤집듯이 실망하고 낙심을 반복합니까?
애초부터 소망의 근원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이나 사람들은, 애초부터 소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다 인생인데요. 인생들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그들은 소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때, 우리의 삶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을 이루시기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붙들고 의지하는 헛된 기대에, 그 소망에 매어 있는 인생들이 아니라
진정한 구원이신 하나님께 매어 있는 인생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이루실 일들에, 우리의 삶이 부름받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그 자리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마치 오늘 바울처럼,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은혜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이
우리의 한 주간도 신실하게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믿음으로 또다시 우리 한 주를 살아냅시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소망으로 삼으십시다.
그리고 그분을 잠잠히 바라봅시다. 그분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일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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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청교도 작가 나다나엘 호손의「데이비드 스완」이란 작품이 있다.
이 단편소설은, 24살 난 데이비드 스완이
고향을 떠나 보스톤으로 취직하러 길을 떠나던 중
단풍나무 숲 한가운데 있는 샘터 옆에 누워 단잠에 빠져 있는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다.
먼저 자식이 없었던 부자 상인 부부가 그 곁을 지나다가 잠든 스완을 본다.
그가 어쩐지 그들의 죽은 아들 헨리와 비슷하게 생겼다며 양자 삼을까 하다가
마차를 몰던 하인이 떠나실 준비가 되었다고 재촉하는 바람에 그냥 가 버린다.
다음에는 사랑을 찾고 있던 어여쁜 소녀가 우연히 그 곁을 지나다가
벌이, 잠든 그의 얼굴을 쏘려는 것을 발견하고, 벌을 쫓아준다.
그에게 호감을 느낀 소녀는 그가 잠이 깨기를 기다렸지만
너무 깊이 잠든 그가 좀처럼 깨어나지 않자, 그냥 혼자 길을 떠나버린다.
그 후에는 두 악당이 스완의 보따리를 가져가려고 접근한다.
만일 그가 깨면 처치하려고 비수를 그의 가슴에 겨누고 있는데,
마침 개 짖는 소리가 나자 개 주인(목격자)이 올까봐 그들은 도망가 버린다.
그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동안에,
부잣집 양자가 될 뻔 했던 기회,
아름다운 사랑을 만날 뻔 했던 기회,
또한 강도를 만나거나 살해당할 뻔 했던 기회들이 계속 지나가고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