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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두 아들 출18:3~4
출18:3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 함이요
4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서론
모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모세의 두 아들이 우리에게 어떤 예표가 되는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모세에게 아들이 둘 있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 것이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모세가 아들이 둘이 있다는 사실은, 두 번씩이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출18장 본문에도 밝히고 있고,
행7:29절에 스데반의 설교에도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나으니라.”
성경은 왜 모세의 아들이 둘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일까요?
모세의 두 아들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는, 보통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 자기가 못 이룬 소망을 자녀의 이름 속에 표현하기도 합니다.
모세의 두 아들도 모세가 이름을 지을 때는, 그 당시에 자신의 감정을 반영한 것입니다.
첫째 아들 이름은 3절에 보니까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게르’라고 하는 것은 나그네입니다. ‘솜’이라고 하는 것은 “이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곳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는 의미로 맏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고 40년을 애굽 궁중에 지냈지만
살인죄를 저질러서 결국은 애굽에서 쫓겨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만나게 되고
결혼을 해서 나은 첫 아들이 게르솜입니다.
그 때 모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내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고 왕궁에서 살다가 이 광야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아 내 심정이 참으로 참담하고 쓸쓸하다.’
그런 마음으로 모세는 첫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들의 이름은 뭐라고 지었습니까? 엘리에셀입니다.
엘리에셀은 ‘나의 하나님은 돕는 자’ 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에셀’이라고 하는 말은 사무엘 선지자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에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해서
‘에벤에셀’, 도움의 돌(stone of help)이라고 했다는 데서도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모세는 둘째아들의 이름을 “나의 하나님은 돕는자시라.”는 뜻을 가진 ‘엘리에셀’이라고 지었습니다.
모세의 두 아들의 이름을 볼 때
우리는 40년 광야생활 중에 모세의 심경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 아들을 낳을 때에는 쓸쓸하고 처량하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로운 마음도 이방 땅에서 오래 살다보면 환경에 적응하게 됩니다.
낮선 곳에서도 오래 살다보면 그곳이 익숙해집니다. 타향도 고향이 됩니다.
그리고 적응해서 위로를 받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1986년도에 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의 뉴올리언스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뉴올리언즈는 재즈의 고향 아닙니까? 유명한 재즈싱어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루이 암스트롱도 그곳 출신입니다.
뉴올리언스에 가보면 길거리에서 흑인들이 나팔을 불면서 재즈연주를 합니다.
제가 거기 처음 가니까 만나는 이는 흑인이요 길거리에도 흑인이니 얼마나 낯섭니까?
그 당시에 우리 맏아들이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첫날밤에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제 처가 따라 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도 따라 울었습니다.
첫날 밤에 온 식구가 다 울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낯선 곳에서도 한 5년 살다보니까 고향 같고,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5년 만에 한국에 오니까 오히려 한국이 낯설고 타향 같았습니다.
사람은 적응력이 있는 존재입니다. 모세도 둘째 아들을 낳을 때가 되어서야
환경에 적응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첫 아들을 낳을 때는 마음이 황량했지만
미디안 광야에서도 양치기 노릇하고 오래 살아보니, 거기도 살만한 곳이 아니겠습니까?
아내도 얻고, 자녀도 있고, 장인도 있고, 할 일도 있으니 모세의 마음에 위로가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에 대한 절망을 극복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사라졌습니다.
‘아하 내가 이곳에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셨구나.
나의 하나님이 돕는 자가 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둘째 아들 이름에 반영한 것입니다.
모세의 두 아들의 이름은 이 땅을 사는 우리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우리는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먼저,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게르솜’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존재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이방인이요
객으로 사는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렇게 고백하며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짐승과 인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짐승은 나그네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짐승은 자연 환경 속에서 그저 누울 때 있고 먹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편안합니다.
짐승이 고향이 그리워서 눈물을 흘렸다 하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없습니다.
대 자연이 짐승의 고향이고 돌아갈 본향이 따로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마8:20
여우는 동굴 하나 있으면 만사오케이입니다. 거기서 잠도 자고, 거기서 먹기도 합니다.
거기가 곧 호텔이요 아파트입니다.
‘내가 이 동굴에 살다가 죽으면 천국에 돌아갈 것인가? 본향에 돌아갈 것인가?’하고 근심하는 여우 보셨습니까?
공중의 새도 처마 밑에 비가 올 때에 비를 피할 곳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공중의 새가 “나는 고향이 그립다.” 이렇게 노래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머리 둘 곳 하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신 것입니다.
여우와 공중의 새는 나그네 의식이 조금도 없지만
예수님은 철저히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성경은 그 삶을 나그네 인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벧전1:17절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도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는 지금 나그네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도 자기 자신을 나그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히11: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환경에 너무 만족하고 너무 잘 적응하고,
이 세상에서 참 행복을 누리고 평안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우월한 우수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철저히 만족하고 본향을 향한 나그네 의식이 없는 사람은 야수성을 가진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입니다.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없는 것은 우월성의 표현이 아니라, 열등성의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아 여기는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다. 내가 돌아갈 본향은 따로 있다.
내 본향은 어떤 곳인가?’ 하는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에는 ‘Heimweh’(하임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집을 그리워하는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the pain of homesickness)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처럼 우리는 본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여우나 공중의 새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설정할 때에도
마땅히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그네는 살아가면서 두 가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첫째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먹고 살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 때에는 방향이 있고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그것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세의 지위와 현세의 만족만을 위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나라 영원한 내세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살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도 나그네 의식은 반드시 반영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현세가 아무리 재미있고 아무리 행복하고 아름다울지라도, 그것은 지나가는 나그네길입니다.
잠깐 스치는 그림자처럼 지나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또한 일을 하되 타향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본향을 위해서 일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일을 해도 외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본국에 소망을 두고 일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림자를 붙들고 살지 말고 실체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내세, 영혼의 때를 위해서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무엇을 질문해야 합니까? “나는 돌아갈 본향이 있는가?”
우리는 나그네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돌아갈 본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날 밖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습니다.
한 아이는 힘이 강하고 지독하고 대장노릇을 합니다.
딱지치기해도 다 뺏고, 구슬치기해도 다 땁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는 힘도 약하고, 키도 작고, 얻어터지고, 코피도 나고,
딱지치기해서 다 빼앗기고, 구슬치기하면 다 잃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갑니다. 오후 네 시가 되니까 어두워지고 다섯 시가 되니까
해가 기울어 갑니다. 그러자 집에서 소리가 납니다. “얘야 들어와서 밥 먹어라.”
그러니까 힘이 약한 아이는 부모가 있고, 돌아갈 집이 있고, 따뜻한 김치찌개가 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달려 들어갑니다.
비록 힘없는 아이, 얻어터진 아이지만, 집에 들어와서 김치찌개와 김이 나는 흰 쌀밥을 떠서
입에 넣고 먹을 때에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힘 있는 아이는 자신을 불러주는 부모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습니다.
날은 저물고 ‘아이고 나는 어떻게 하지?’ 하다가 그만 추위에 떨어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처럼 돌아갈 집이 없는 이 아이와 같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돌아갈 소망이 있으십니까?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시면 영원히 천국에 들어갈 확신과 소망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최소한도 이 문제만큼은 명확하게 하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약에 그 확신이 없으시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해서 사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길만이 본향을 준비하는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은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말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그러므로 ‘내 영혼은 돌아갈 길이 없다. 오로지 게르솜, 나는 이방의 객이 된 것으로 끝이다.’
이렇게 느끼는 사람은 예수님을 마음의 구주로 영접하시는 확실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자 이십니다.
이제 둘째 아들로 넘어갑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엘리에셀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돕는 자시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첫아들을 낳고, 얼마 만에 둘째 아들을 낳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나이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의 터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상당한 기간이 흘렀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심정이 쓸쓸하고 외롭고 황량하다가, ‘하나님이 나의 돕는 자 되셨구나.’
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심령으로 바뀌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상한 심령이 치료되는 것은 금방 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미디안 광야에 추방되어 처음에 맏아들 낳을 때에는 쓸쓸함과 외로움이 있고,
영혼 한 구석에는 눈물나도록 찌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하 그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도와주셨구나.’
이것을 모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궁중에서 40년 동안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성장을 하다가
자기가 애굽 사람이 아니요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이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들통이 났을 때에 바로왕에게 걸렸으면 모세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모세는 살인죄도 저질렀고 죽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파서 묻었기 때문에
사체 은닉죄도 해당됩니다. 그 외에도 간첩죄, 내란죄 등이 있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틀림없이 사형 내지는 법정 최고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비록 미디안 광야 거친 곳이지만 모세가 쉴 곳도 마련해 주시고,
모세에게 장인도 주시고, 부인인 십보라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도 주시고 할 일도 주셨습니다.
그런 것을 가만히 뒤돌아보고 생각해 보니
‘아하 그렇구나. 내가 여기 있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구나.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돕는 자가 되어 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영혼에서 쓴 뿌리는 뽑히게 되고 은혜의 감격이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나그네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그네 길이라고 해도
동행자가 있으면 갈 만한 것입니다. 나그네의 여행길도 혼자가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혼자 다니면 재미가 없습니다. 먹어도 맛도 없고 좋은 것을 봐도 좋지가 않습니다.
부부가 같이 가서 보면서 “참 좋다.” 그러면 “맞아 좋지!”라고 맞장구도 쳐주고,
같이 감격도 해야 즐거운 것이지 혼자 가서 맛있는 것 먹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동행자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루이지애나에 처음 갔을 때에 운전을 처음 배워서 운전을 하다가
시골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루이지애나는 사탕수수밭도 많고 목화밭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사탕수수 밭이고, 가도 가도 목화밭입니다.
하지만 제 처가 차에 있고 아이가 함께 있으니까 길을 잃어도 외롭지가 않았습니다.
차에서 자도 가족이 다 자는 것이고 길거리에서 자도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외롭지 않더란 말입니다. 동행자가 있으면 나그네길이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나그네 인생길에는 좋은 동행자가 필요합니다. 같이 동행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면
그거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우리는 좋은 동행자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동행하고 있으면 인생길이 든든하고 편안하고 재미있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교수로 있을 때에, 제 처가 교회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모든 사역자가 태국으로 일주일 동안 수련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애를 봐야 하지 않습니까?
큰 애는 벌써 대학 다니고 있는데 막내가 그 때 나이가 어렸습니다.
한 두 살 된 아이가 감기가 걸려서 코는 나오고 기침은 하는데
마누라는 외국에 나가 있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고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제가 돌 볼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이 감기 걸린 아이를 처갓집 시골 이모 집에 맡기고 오는데
아, 이놈이 감기 걸려가지고도 “아빠, 아빠!” 하고 우는 것입니다.
그거 떼어놓고 청향에서 대전으로 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눈물이 펑펑 나는지...
그래서 제 처가 돌아온 후에 내가 막내를 시골에 맡기고 돌아오면서 참 엄청나게 울었다고
하니까 제 아내는 웃었습니다. 사내가 그만한 일에 우느냐고 말이죠.
저는 인생에 아주 어렵고 고달픈 일에는 울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동행자가 없을 때는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딜 가든지 꼭 안 맡기고 데리고 잤습니다.
집사님 댁 가까운데 맡겼다가 밤에는 찾아가지고 와서 꼭 안고 잤는데
고거 안고 자니까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고 편안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인생은 참으로 동행자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길은 나그네길이요 늘 외국인 같은 그런 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길에도 좋은 동행자가 있으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면 이 길도 갈만한 길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누구와 동행하십니까?
우리 성도들은 두 가지 동행자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는 우리 성도들은 인생길을 함께 할 신앙의 동지, 기도의 동지와 동행하며 사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어떤 어려운 상황을 당해도 함께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지금 기도해주고, 지금도 눈물뿌리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든든하게 살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역예배를 나가든지 남전도회 여전도회를 가든지
형식적으로 참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전도회에서 기도의 동역자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멀리서 찾지 마시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 기도의 동지를 찾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역예배에서도 함께 기도해주는 기도의 동지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동역자의식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잘못 된 것이 어찌 안 보이겠습니까?
세워놓고 잘못 된 것을 지적하면 일분에 백 가지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사람이 자기를 봐도 백 가지는 골라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약점만 보고, 갈구고, 딴지 걸어서 넘어뜨리지 말아야겠습니다.
또한 독불장군처럼 ‘나는 혼자 살아도 내 힘으로 살고 성도들의 기도는 소용없다.’
이러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나그네입니다. 혼자 가면 좋겠습니까?
기왕에 가는 거 같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내가 어려우면 나는 누구에게 기도부탁을 할 것인가?
나에게는 기도의 동역자가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시고 구역예배도 잘 참석하시고,
전도회도 잘 참석하시고, 인사도 하시고, 밥도 잡수시면서
부지런히 진실된 마음으로 교회 안에서의 모든 교제에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 인간은 동행하다가 배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배반하지 아니하는 동행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요, 예수님과 동일본질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요, 예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와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동행하심이요,
예수님의 동행하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날마다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고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의 나그네 길도 확실한 동반자, 영원히 배반하지 않는 동반자인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살만한 인생길이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위대한 성도들도 모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입니다.
창5: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창6: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우리 나그네 인생길도 살만한 것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모세의 두 아들로 예표됩니다. 우리는 게르솜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홀로 살지 아니하고 엘리에셀,
‘나의 하나님이 나의 돕는 자시라.’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의 삶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게르솜과 엘리에셀,
모세의 두 아들을 떼어놓지 마시고 우리 마음에 두 아들을 다 품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은 돕는 자시라!” 여러분, 어려운 문제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돕는 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무제한입니다. 한계가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무제한적인 도우심을 받으시고, 날마다 이 도우심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셔서 나그네 된 여러분의 인생길이 살만한 인생길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