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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라 눅13:1~5, 시51:5 2020.12.25.설교녹취 출처
눅13:1~3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오늘 본문은 '성탄절 설교로는 잘 어울리지 않는.. 참혹한 본문이 아닌가?'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성탄절의 의미와 맞닿아있는 본문이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이 본문을 중심으로 <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라> 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합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한 것이 잘못 됐다고 회개하기 이전에,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회개하라..
그래서 <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라!> 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은, 저나 여러분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일어날 일 중에
가장 크게 축하할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탄의 기쁨을 말합니다. 축하할 일이니까요.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성탄절, 그러니까 12월 25일 이라는 날짜는 중요하지 않아요.
12월 25일을 기념하는 그 취지가 중요하지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성탄절은 기쁨의 날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날이냐? 슬픔의 날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성탄절은, 우리가 1년 내내 누려야 할 기쁨을 샘솟게 하는 옹달샘 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하루가 아니라
성탄절의 하루의 기쁨을 말할 것이 아니라
성탄절 하루 때문에, 평생 누릴 기쁨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서울역에서 경부선이 출발할 때, 이미 출발지점부터 부산이라는 목적지를 붙이고 출발합니다.
이처럼 모든 과정은, 시작부터 그 끝(최종 목적지)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시작입니다.
이 시작에는 어떤 목적지, 어떤 끝이 담겨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탄절 이 기쁜 날인 거예요.
왜냐면 이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는 평생을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탄이라는 출발점이 담고 있는 궁극적 목적지, 그 끝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평생 우리의 기쁨을 담보해 줍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활화 한다는 것, 이것을 오늘 본문의 용어대로 바꾸면,
바로 회개를 생활화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탄이 기쁨이 되는 이유는
출발점이 기쁨이 되는 이유는
그 끝을 담고 있기 때문이고
그 끝은 '십자가와 회개'라는 단어를 통해
정의 될 수 있는 그런 끝이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항상 기뻐하라!'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 회개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살전5:16~19절에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랬어요.
그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뭡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상태를 계속 회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을
절대 안으로 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 는 뜻은
항상 회개를 밑바탕에 깔고 있음으로써 항상 기뻐할 수 있으므로,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지금 자기 삶의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는데 내가 기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기쁨을 의심하셔야 됩니다.
도둑이 도둑질을 성공적으로 했다고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마피아도 마약 장사를 잘했다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살인자도 살인을 했는데 걸리지 않았다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쁨 자체를 믿지 마세요. 기쁨은 얼마든지 죄악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성탄절을 기쁨의 날이라고 하는 이유는
회개를 바탕으로 하는 진정한 기쁨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회개는
진정한 기쁨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회개 없이 이루어지는 기쁨은, 전부 죄악의 발작증세 입니다.
죄악이란, 우리가 슬퍼해야 마땅한 건데
죄악 상태에서 기쁨이 있다면.. 그건 발작증세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쁨이 없다면,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하는데도 기쁨이 없다면.. 회개가 뭔지 모르고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뭔지 모른다고 한다는 얘기는 무슨 뜻입니까?
바로 우리는 '회개'라고 말할 때, <행위의 회개>에 익숙해져 있다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잘못한 행위를 뉘우치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쁨이 없어요.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정립해야 될 것은
회개는
"행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으로
"존재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질문할 수 있어요.
'뭐 때문에 평생 회개가 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되느냐?'
'항상 기뻐하기 위해 왜 회개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되느냐?'
'그냥 특정 잘못한 행위들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는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그렇게 잘못된 행위가 내 속에서 삐져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나의 체질을 회개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내 존재를 회개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사는 이 세상은, '나'라는 존재는
내 인격이 내 몸에 종속(일심동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내 몸이 살아 있는 동안 회개는 지속되어야 하고
내 몸에 인격이 종속된 상태가 죄이기 때문에
내 존재 자체를 회개해야 됩니다. 이게 근본적인 회개입니다.
그러면 행위의 잘못은, '잘못했습니다' 하고 말로 뉘우치면 됩니다만
'존재의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 '존재의 회개'는.. 내가 죽어야 되어집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바울은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 하셨고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 .. 다윗의 회개의 기도인데요, 시51:5
내 존재가 형성될 때 이미 죄속에서 형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다윗의 회개의 기도가 어느 때 드린 겁니까?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와 통간합니다. 왕권을 힘입어서 강압적으로.
그리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우리야를 죽입니다.
간음죄와, 살인죄와, 거짓말을 하는 죄와
남의 이웃의 것을 탐내는 죄까지 다 짓고 나서
회개를 하는데 보니까..
자기 간음죄에 대한 언급도, 살인죄에 대한 언급도,
거짓말 한 것에 대한 언급도, 이웃의 소유를 탐낸 것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즉 행위에 대한 언급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은 채, 보다 근원적인 회개를 하는 겁니다.
시편 51편을 여러분이 읽어보시면
다윗의 회개는
'내 존재가 어머니 뱃속에서 처음 형성 될 때
그 때 이미 내 존재의 세포 하나하나마다
내 존재의 뼈 마디 마디마다 죄가 스며들어와서,
존재 자체가 죄덩어리 였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렇게 죄의 세포, 죄로 물든 뼈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극악한 간음과, 살인과, 거짓과, 탐욕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
라고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51편에!
그러므로 이런 행위들은
죄악된 존재와 체질로 부터 나온 열매일 뿐인 것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회개가, 진정한 회개가 되는 것이고,
이 회개 끝에 다윗이 참 평강과 기쁨을 되찾게 됩니다.
그렇게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평강이 주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이 자기 죄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이유는
행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존재를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회개에.. 평강에 이르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내가 기쁨을 누리고 있는 상태에서, 참 기쁨을 누리고 있는 상태에서
그 기쁨의 실질적인 내용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기쁠수 있는 상황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 밖에 없는 것이고
십자가를 생활화 한다는 얘기는
'죄'라는 얘기, '회개'라는 얘기를 단 한마디도 안 하고 있어도
그것은 바로 회개를 생활화 하는 것이며 (회개를 통한 나의 죽음, 자아의 죽음)
항상 회개를 내 삶의 밑바탕에 깔아 놓는 것입니다.
존재의 죄악됨을 회개함이, 자기 밑바탕에 깔려 있을 때만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밑바탕이 없으면, 기쁨도 기도도 감사도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빌라도가 자기의 군인들을 시켜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칼로 쳐 죽인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지금 왜 하고 있는 것일까요?
유대 역사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유대가 로마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소요가 없도록 유대 나라를 강압적으로라도 다스려야 할 총독 빌라도가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유대 사람들과의 갈등과 반목은 불가피한 겁니다.
근데 이 중에서 특별히 반감이 커서 돌출된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에
그 사람들을 빌라도가 죽이는 일은, 당시에 흔히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근데 이것이 왜 새삼스럽게 화제가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어진 성전 안에서 번제단에 제물을 드리다가
그 제물을 드리는 도중에 빌라도의 군인들이 와서 갈릴리 사람들을 쳐죽인 겁니다.
그러니까 화제가 된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화제가 된 것입니까?
어떻게 성전 밖에서 정치적인 민감한 사안에 의해서
총독과 식민지 나라의 사람들 간의 갈등이 불거져서
사람이 죽임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이해가 가겠는데...
왜 하필 성전에서 거룩한 제사 드리고 있었는데 죽임을 당한 것입니까?
그러니까 유대 사람들의 생각은
'아~ 하나님께 제사와 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겠는가
근데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있었는데도
이방인 (로마) 군인들이 들어와서 칼로 쳐죽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갈릴리 사람들)을 거부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린 것이다..'
이래서 새삼스럽게 화제거리가 된 것입니다.
(원래 예루살렘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을 좀 무시하는 문화도 당시에 있었고요)
어떤 경우는 유월절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는
빌라도가 3천명도 죽인 적 있다고 그래요.
빌라도가 아니더라도 로마 식민지 하에서 그런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지만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중에 (갈릴리 사람들이) 칼에 맞아 죽었으므로
여론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입니까?
'이건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이다!' 라고 유대나라의 여론이 형성된 겁니다.
이 사건을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드립니다. 어떤 의도로?
예수님은 지금 우리(유대인)가
외식 하는 사람이라고 그러시고
우리 유대인들에게 늘 못 마땅해 하시는 표현을 계속 쓰시는데
사실은 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다가 칼에 맞아 죽은 이런 사람들이 죄인들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재앙을 내린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고, 외식하는 것이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고 있음에도 위선적으로 제물을 드리고 있었으니까 죽은 것이지
우리처럼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왜 자꾸 우리 유대인보고 위선자라고 하십니까?
이런 의도에서 유대인들이 말씀을 드렸던 거예요.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뭡니까?
▲먼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이 갈릴리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악에 합당한 일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의 본래 의미가 뭡니까?
빗나감의 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대신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돈을 사랑했던지, 건강을 사랑했던지,
자녀의 형통을 사랑했던지, 집안의 화목을 사랑했던지, 아내나 남편을 하나님보다 사랑했던지..
그런 내가 빗나감의 죄를 지은 것을 '하마르톨로이'라고 되어 있어요, 2절에 '죄인'의 헬라어가.
그 빗나감의 죄, 소원이 빗나가든지, 사랑이 빗나감의 죄를 지었음을 알고
존재를 불살라 죽이는 회개를 하는 것이었으면 좋은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돈을 사랑하고 있고, 가족을 사랑하고 있고,
나라를 사랑하고 있고, 내 형통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그 빗나간 죄인의 존재적인 잘못됨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오히려 빗나가고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소원을 관철하고,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제물을 드리고 있었으니까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빗나감의 죄'를 말씀드린 거예요. *하마르티아
그럼 이렇게 비참하게 죽임 당하지 않고 있는 너희 모든 사람들은
죄가 없기 때문인줄 아느냐? 아니다!
제사를 드리다가 칼에 맞아 죽은 갈릴리 사람들과
너희 죄악의 무게를 천칭 저울에 달아 보면
머리카락 하나 만큼도 너희가 더 죄가 작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들이 이렇게 칼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진 이유는
너희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롭고 주권적인 역사였다 라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로 멸망의 예를 경고로 보여주신 것)
그러면서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실로암 망대도 마찬가지로 특별히 언급을 해야만 되는 일화가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첫 번째 사건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춰봅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제사 중 죽음
▲존재의 회개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죄인'는 '하마르톨로스' 인데, '빗나간 사람'을 뜻합니다.
근데 4절에 실로암망대가 무너져서 죽었을 때도 똑같은 형태로 대답을 하시는데
이때 원어에 나오는 '죄인'은 '오페일레타이' 라는 헬라어로
이것은 '빚진 자' 라는 뜻입니다. 이 두 개가 의미가 약간 달라요.
그래서 행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를 회개할 때에
내 존재에 두 가지 체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체질이란
-빗나가는 체질과 (하마르톨로이 죄인)
-빚지는 체질이라는 것입니다. (오페일레타이 죄인)
빗나가는 체질과, 빚지는 체질인 내 존재를 회개하기 위해서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겁니다.
행위의 회개는, 행위를 조목 조목 따져서 잘못했다고 뉘우치면 되지만,
존재의 회개는, 존재 자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한..불가능한 것입니다.
근데 이 존재의 회개를 위해서
구분할 수 있는 두 가지 죄악적 체질이 있는데
그 두 가지 죄악적 체질이란
-빗나감의 체질과
-빚지는 체질입니다.
▲오늘은 이 <빛나감의 체질>에 초점을 맞춰봅니다.
결국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것도,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다가 칼에 맞아 죽은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안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 하시기 위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럼 왜 하필 이 사람들,
갈릴리 사람들과, 망대가 무너져 죽은 18명, 이들만 죽임을 당해야 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셔서 하신 일이니
우리가 '왜 그렇습니까?' 라고 말할 이유가 없고
또 죽은 갈릴리 사람들과, 죽은 18명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이들이 어떤 점 때문에, 이렇게 선택이 됐는가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죠.
다만 지금 주님이 중요시하는 것은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니까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뭐냐?'
'회개하라, 존재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많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처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은, 그 망대를 짓는 공사에 참석했다가 죽은 거거든요.
실로암 망대를 짓는 공사에 참석한 행위를 한 것도 아니지만
너희가 똑같은 죄인이 것은, 존재의 체질이 그들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빗나간 죄"는, 소원의 과녁이 빗나간 것입니다.
사람에겐 어떤 바램이 있잖아요. 그 바람의 타깃이 빗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빗나감이 체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죄 라고 말하는데
회개는, 원죄로 인해 나타나는 열매인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의해 체질이 되어버린 원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원죄의 열매를 회개해 갖고는, 원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원죄는 내 존재에 박혀 있는 체질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공백의 흡입력 때문에 우리는 소원을 하고 뭘 바랍니다.
근데 이 소원이,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소원하는 것이 (과녁을 빗나감이) 체질이 되었다는 겁니다.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 말고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되는 대상,
육체의 오감이 파악하는 상황,
이것을 소원합니다. 이게 과녁이 빗나간 소원입니다.
그래서 오감이 포착하는 대상 중에, 어느 대상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대상이든지, 하나님 말고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오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을 향하고 있는 내 빗나감의 체질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돈을 소원하는 '빗나감'의 죄를 짓고 있는 중에서 (하나님을 소원해야 과녁 맞춤)
본의아니게 사기를 쳤습니다.
돈을 소원하고 있다고 다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소원해도 나름대로 세상이 정한 법대로 정직하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근데 본의아니게 사기를 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돈을 벌려고 하다가 사기를 쳤습니다.
이 사기를 친 것이 너무 잘못 되어서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회개는.. 별로 크게 소용 없습니다.
자기 속의 존재가 바뀌지 않고 그대로이니까요.
진정 '죄'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회개가 됩니까?
그러면 건강을 소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자녀 형통을 소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죄의 근원을 못 보고 있는데 어떻게 회개가 가능합니까?
돈을 소원하는 죄만 제거하면, 나는 그냥 그대로 쓸 만한 존재인 것입니까?
내가 지금 건강을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건강 소원을 하는 것을 회개하고, 건강 소원 비는 것을 중단했어요.
그러면 나는, 건강을 소원하는 것을 중단 했으므로
이제 괜찮은 존재가 된 겁니까? 쓸 만 하게 된 겁니까?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되는 대상이나 상황을 소원하는 자체, 그 소원함이
육체를 따라가고 있는 우리 체질 자체가 문제라는 겁니다.
이 세상을 내 육체의 오감이 포착합니다.
근데 내 마음의 소원이, 왜 육체의 오감을 쫓아가고 있느냐는 겁니다.
육체의 오감을 따라감이.. 빗나감의 원죄요, 존재의 체질이 된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5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가 형성될때
이 아기는 행위를 단 하나도 한 게 없습니다. 무엇을 소원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뱃속에서 아예 사람으로서 생겨날 때,
죄가 세포속으로, 그 수 십 조 개의 세포 속으로, 뼈 마디마디 속으로 다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존재의) 회개를 통해, 그렇게 지독하고 악한 죄를 짓고도 다윗이 평강의 자리로 갑니다.
회개의 힘이 이렇게 무서운 거예요.
다윗은 정말 엄청난 죄를 지은 겁니다.
간음하고, 간음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 거짓이고
우리야에 관한 편지를 보내는데 그것도 거짓이었습니다.
그리고 살인까지 합니다.
이웃의 아내를 탐냈습니다.
무려 이 네 가지 죄만 지었습니까? 아닙니다.
왜 밧세바를 탐내기 시작합니까?
'하나님만으로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의 일계명도 범한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는데, 밧세바라는 다른 신을 둔 것이죠.
그러니까 사실은 십계명 전체를 어겼다고 해도 됩니다.
십계명이 일계명 안에 다 들어가 있다고 볼 때!
그런데 이렇게 지독하고 악독한 죄를 짓고도
'존재의 회개'를 함으로써 누구도 흔들수 없는 평강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이게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어떤 극악한 죄악을 행위로 짓든지 간에
자기 존재의 체질이 죄인인 줄 알고, 그 존재적 죄를 회개할 때,
그리고 그 존재의 체질이 바로 공허한 자기 마음의 채움을 위하여
육체에 오감이 종속되어 있음, 그래서 빗나감!
그것이 죄인 줄 알고 회개할 때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이시고 평강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성탄이 기쁜 이유가 뭡니까?
우리 모두가 다 체질적으로 빗나감을 밥 먹듯이 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근데 이렇게 빗나감의 삶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성탄절 첫째 날에 궁극적 지점인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의 존재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다윗처럼 십계명 전체를 어기는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도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고 '내 존재를 회개하면'
즉 육체의 오감을 따라 소원하는 빛나감의 체질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어떤 행위의 죄를 지었든지
당신 품에 안으시고, 다윗이 누렸던 절대 평강과 절대 기쁨의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인 성탄이 기쁜 날인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성탄절을 충분히 흠뻑, 최대한으로 기뻐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성탄에 담긴 궁극적 목적지인 십자가를 붙잡음으로
나의 체질이 되어 버린 빛나감(하마르티아)의 죄악이 사라지게 하심으로써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평강을 만끽하는 성탄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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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글눅13:1~5 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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