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달은 단군 이래 민족의 최대 비극 6.25 전쟁이 있었던 날입니다. 71년 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서 북한 인민군 20만명이 북위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시작을 했습니다.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남한 대한민국은 전쟁을 막아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소련이 제공한 탱크 244대를 앞세우고 남침했고, 인민군은 일본군이 만주에서 철수하면서 남긴 무기를 전부 차지했고 20만명이 한꺼번에 침략을 하니까 우리는 막아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된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38선에서 서울까지 곧바로 내려오면 1~2시간 거리입니다. 사흘간 막아냈다는 것 자체도, 국군들이 용감하게 버틴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본문말씀 사무엘상 17:47절,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지켜주셨습니다.
6.25 전쟁에 뚜렷한 기적이 5가지가 있었습니다. 71년 전 1950년 6.25때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어떻게 지켜 주셨는가? 그 기적적인 열매 5가지를 두 주일에 걸쳐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무엘상 17:47절은 소년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한 얘기입니다. 골리앗은 엄청난 장사 장군이고, 다윗은 어린 소년입니다. 그때 71년 전 6.25때가 마치 그런 시기와 같았습니다.
북한 공산군은 골리앗 같은 모습이고, 남한 군은 다윗처럼 아주 미약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삼상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6.25 전쟁도,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도 여호와께서 도우신 결과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걸 무리로, 백성들로 알게 하려 하셨다..는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 겨레, 우리 백성들에게 꼭 합당한 말입니다.
◑기적1. 유엔군이 참전한 것
북한과 남한사이에 전쟁 일어났는데 왜 신속하게 예상을 깨고, 유엔군이 참전했습니다.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이 참전해서, 북한군을 막아 한반도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유엔군이 어떻게 참전했을까요?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 되었습니다. 북한은 한 달 뒤인 1948년 9월 9일에 평양에서 북한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북한이 건국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라를 세우면 UN 의 인준을 받게 됩니다. 남한도 북한도 그해 유엔 회의가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파리에서 열린 유엔 회의장에 가서 새나라를 건설했다는 인준을 유엔에서 받게 됩니다. 남북한이 다 대표단을 파리 UN 대회장에 보냈습니다.
남한은 이승만 박사께서 대표단을 5명을 뽑아서 보냈습니다. 위원장이 장면 박사입니다. 위원으로 모윤숙 여사, 조병옥.. 이런 사람들이 같습니다.
왜 장면 박사를 보냈느냐? 장면박사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너무 유엔에서 여론이 좋지 않으니까, 교황청의 도움을 받으려고, 로마 교황의 도움을 호소하려고 진실한 가톨릭 신자인 장면 박사를 위원장으로 팀을 짜서 보냈습니다.
근데 파리 UN 회의가 1948년 12월 12일이 마지막 날입니다. 첫날부터 대한민국 건국 안을 유엔에 상정했는데, 소련 대표가 자꾸 방해를 하는 겁니다.
회의할 때 방해하는 발언을 '의사진행방해' 라고 합니다. '한국안'이 나오면, 소린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코리아는 독재자 이승만이 다스리고, 미군의 앞잡이고..' 이렇게 한 2시간을 떠듭니다.
그 다음에 소련의 위성국인 헝가리, 동독, 체코 대표가 발언하면서 의사를 방해 하니까 표결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1948년 파리 유엔 회의의 마지막 날이 12월 12일 일인데 그 전날 12월 11일 저녁에, 장면 박사가 한국대표 위원들 한테 '안 되겠습니다. 그냥은 안 되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교회를 찾아가서 우리가 철야 기도를 합시다!'
그래서 파리 시내에서 어느 교회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본국에서도 이승만 대통령과 장관들이 퇴근하지 아니하고 그날 국무회의실에 남아서 기도했습니다. 전국 교회에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다음날 회의 마지막 날인 1948년 12월 12일, 그날 인준을 못 받으면, 대한민국은 말하자면 출생신고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유엔군이 파병되지도 못했습니다)
근데 역시나 소련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코리아는 이승만 독재정치이고, 미국의 앞잡이라고 2시간을 작정하고 시작을 하는데, 갑자기 목에 결절이 와서, 숨이 턱 막히고 목소리가 안 나오고 숨이 가빠서 쓰러지려고 하니까 얼른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소련 대표가 2시간을 발언하고, 그다음에는 헝가리 대표, 그 다음은 동독 대표.. 이렇게 발언 순서를 다 짜 놨는데, 소련 대표가 2시간 발언할 줄 알고 그 다음 순서인 헝가리 대표는 회의장 밖에서 커피 마시고 놀았습니다. 2시간 있다가 들어가려고 했던 것이죠.
근데 소련 대표가 갑자기 목에 결절이 와서 막 숨이 가빠지고 병원에 실려 간 줄 몰랐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헝가리 대표는 그냥 밖에서 커피 마시고 있었는데.. 그때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코리아 건국 인준에 대해서 또 발언이 없습니까?' 반대할 사람이 밖에 커피 마시고 있으니까 회의장이 조용했습니다.
그럼 표결하겠습니다. 그래서 가부를 물었는데 48대 6, 기권 1표 즉 찬성 48표, 반대 6표 (반대는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 헝가리 동독 체코 이런 6 나라가 반대) 기권한 나라는 스위스 입니다. 그래서 통과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간섭하신 것입니다. 하필이면 소련 대표가 그 때 왜 목이 고장납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목을 건드리신 줄 믿습니다.
이어서 북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일성 정권 표결안이 이어서 올라갔습니다. 근데 반대 48표, 찬성 6표, 기권 1표 남한 인준한 것과 정반대로 결과가 나와서 북한은 인준 못 받았습니다.
이게 우리나라를 살린 겁니다. 왜냐? 그 뒤 1년 6개월 뒤에 인민군이 6.25날 쳐내려왔습니다. 이 날이 1948년 12월 12일이고, 625가 1950년 6월 25일 이니까 1년 반 전이지요.
1년 반 뒤에 북한 공산군이 공격해 오니까 유엔은, 한국은 유엔이 인정한 나란데 무법 집단이 공격을 해 오니까.. 그래서 유엔군이 참전한 겁니다.
그런데 유엔군이 참전하려면 유엔에 '안전보장이사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결정을 해 줘야 됩니다.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임이사국이 다섯 나라입니다.
다섯 나라 중에 하나라도 반대하면, UN 군이 참전 못 합니다. 미국, 소련, 중국 (당시는 공산화 되기 전 장개석 총통 때) 영국 프랑스 5 나랍니다.
다섯 나라 중에 하나라도 반대하면 유엔군이 참전할 수가 없습니다. 소련이 당연히 반대 하겠지요.
근데 회의가 시작되었는데 그때 UN 소련대표가 야콥 말리크 입니다. 그가 출석을 안 한 것입니다. 시간은 지났는데 말리크가 회의장에 안 오니까, 다른 4 나라가 합의해 가지고 UN 참전이 결정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이 연구 대상입니다. 그 중요한 회의에 소련 대표 말리크가 왜 참석 안 했을까? 학자들은 지금도 연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날 말리크가 설사가 났다. 뭐 비행기가 연착했다.' 또는 미스테리라고 그럽니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신 줄 믿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야콥 말리크가 뭔 이유인지 오지 않도록 말린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전쟁을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전쟁은 창과 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삼상17:47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한국교회 교인으로서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요,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으로서 그런 신앙을 확실히 가져야 됩니다.
◑기적2. 해방 후 공산주의를 지지하던 민심이 자유민주주의로 확 바뀐 기적
여러분, 그때 해방 이후에 도저히 우리나라가 공산화 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에 미군정청 에서 남한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했습니다.
이제 곧 새로 세워질 신생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할 것인가/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할 것인가? 전국에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온 줄 아십니까? 국민의 78% 가 공산주의 하겠다고 나왔습니다. 미군정청에서 조사한 보고입니다. 지금 문서로 다 남아 있습니다.
그러고 당시에 공산당에 아주 능력이 있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박헌영입니다. 박헌영은 사상이 잘못되어 그렇지, 아까운 사람입니다. 충청남도 예산 출신인데 서자(첩의 아들)입니다.
그렇지만 머리가 좋아서 그때 경성제일고보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감리교 성동교회에 다녔고, 청년회에 참석하고 성경도 배우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20세 되던 해에 중국에 가 가지고, 공산주의 학습을 받고 완전히 가치관이 바뀐 거지요. 그 후로 평생 공산주의 혁명가로 살 것으로 맹세를 했는데.. 그 즈음에 8.15 해방이 됐는데 그 다음 날부터 전 서울 시내의 전봇대마다 이런 선전물이 붙었습니다. "박헌영 위대한 지도자여, 어서 나타나셔서 이 민족을 이끄시오!"
공산당은 선전 선동에 뛰어납니다. 서울 길거리 벽보에, 전봇대에 "박헌영 동지여, 어서 나타나시라" 그렇게 선전한 뒤에 일제시대의 일본 헌병을 피해 가지고 전라남도 광주에 벽돌 공장에 숨어서 공장 일꾼으로 있으면서 남조선 공산당을 지도했습니다.
그때는 아주 공산당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느냐? 1917년에 러시아의 공산혁명이 성공했는데, 러시아가 얼마나 큰 나라입니까? 그걸 삽시간에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고, 레닌이 전세계에 선포하기를 '전세계 피압박 민족을 해방하겠다. 소련 공산당은 전 세계에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하겠다!'
공산당이 얼마나 철저하게 했느냐 하면,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계셨던 상해 임시 정부에, 소련의 스탈린이 금을 세 마차를 보냈습니다. 신생독립국의 독립을 지원한다고! 아마 지금 시세로 거의 뭐 한 200억이 되는 그런 돈을, 마차 3대에 실어서 임시정부로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뭐 공산당 인기가 얼마나 높아 지겠습니까? 부자 지주를 없애고 다같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 그러니까 당시 청년들, 지식인들이 공산당으로 몰려들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해방 직후에 공산주의 체제를 해야 된다고 응답한 국민이 78%, 당시 공산당원이 100만이었습니다.
100만의 소작인들, 청년들이 공산당 하겠다고 지지했는데, 유일하게 반대하고 나선 곳이 교회와 이승만 박사 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그렇게 공산당이 인기가 있을 때에 "아니다. 공산당은 망한다. 왜 망하느냐? 하나님을 부인하고 물질을 숭상한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억압한다. 이런 체제는 망할 수밖에 없다."
전세계 지식인들 중에 '공산당은 망한다'고 맨 처음에 선포한 사람이 이승만 박사 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기 좋던 공산당이,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에 큰 실수를 해서 그걸로 한국의 인심이 확 바뀐 겁니다.
박헌영이 그때 투표 했으면 이승만 대통령이 뽑히는 게 아니고 박헌영이 대통령으로 뽑히게 되어 있었습니다. 78%의 지지율이었고, 당원이 100만명 이었으니까요.
근데 박헌영이 무슨 생각을 잘못 했냐면, 그 100만 당원을 조직하다 보니까 자금이 많이 들지 않습니까.
돈 있는지 지주나 사업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승만 쪽에 줄을 섰고 민족주의자들은 김구 선생 쪽에 줄 서고, 북한은 김일성이 차지하고.. 박헌영은 돈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박헌영이 돈이 없어 쩔쩔 매면서, 조직을 운영하느라 안간 힘을 쓰다가 자기가 죽는 꾀를 냈습니다. 위조지폐를 만들어 가지고 당비로 쓰고 그러면서 한국 경제를 흔들고, 미군정 정치를 흔들면.. 자기들이 유리하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뚝섬 지역에, 일본 시대에 돈 찍어내던 정판사 인쇄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이 일본군이 물러난 다음에 빈집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걸 조사를 해 보니까 돈 찍던 기계가 지하실에 남아 있는 겁니다.
그걸 알고 박헌영과 남로당이 그 집을 통째로 샀습니다. 사가지고는 낮에는 공산당 선전문을 인쇄하고, 밤에는 일꾼들을 다 퇴근시킨 뒤에, 공산당 핵심당원들이 밤새 돈을 찍었습니다.
새벽에 한 트럭씩 싣고 나가서, 그 위조지폐를 전국에 뿌려 가지고 공산당을 유지했는데 너무 많이 찍었어요. 위조지폐가 자꾸 나도니까 사회가 어려워지니까 미군정 청에서도 이건 이상하다고 여겨서 경찰을 풀어서 조사를 했는데 뚝섬에 '조선 정판사'가 수상하다는 단서를 잡고,
밤중에 급습해서 돈 찍는 현장을 잡았습니다. 그러고 돈찍는 판을 압수해 가지고 조사를 해 보니까 그때 돈 찍는 일꾼이 열 두 명인데, 12명이 전부 공산당원이에요.
그래가지고 조사를 해 가지고 박헌영이 주모자 임을 밝혀내고 수배령이 내려졌습니다. 박헌영은 숨어 있게 된 겁니다. 그때 12명 중에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찍는 책임자가 박낙준입니다.
근데 그렇게 위세가 좋던 박헌영이 그 길로 도망을 가서, 체포령이 내렸으니까, 미군정 중에서 경찰 6천명을 풀어 가지고 '박헌영을 잡아라'고 하니,
그래서 박헌영이 어떻게 서울을 탈출 했느냐면 죽은 사람 상여가 나가는데, 그 관 속에 숨어들어가서 탈출을 했습니다. 상여가 나가니, 죽은 시체인줄 알고, 서울을 탈출해서 삼팔선 건너서 북한으로 갔습니다.
북한에 해주에 있으면서 함한의 공산당 운동을 지도 했는데 우리가 참 그때 대한민국이 참 위험했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하는데요 유엔에서 어떻게 결정 했느냐면 '우리 한반도에 남북한 동시선거' 남한 북한 다 1948년 5월 10일에 동시 선거 하기로 유엔에서 결정했는데, 북한 김일성 쪽에서는 UN 선거감시단이 못 들어오게 했습니다.
북한에 못 들어가니까 남한만 단독 선거를 했습니다. 박헌영 공산당이 뭘 잘못했느냐면 선거에 자기 당원들 출마 시켜서 당선되게 했으면, 100명 이상 국회의원이 당선되었을 텐데
선거 반대하면서, 테러, 막 경찰서에 불 지르고, 선거사무장들을 막 죽이기도 하고 테러 정책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망조가 된 것이지요.
사람이나 단체나 한 번 실수하면 조급해 지니까 계속 실수하는 겁니다.
그 때 공산당을 걱정하고 반대하던 사람들은 1948년 5월 10일 선거에 당당하게 출마 해가지고 몇 십 명이 당당하게 당선되었습니다.
박헌영이 지시하던 공산당은 선거를 보이콧 하고 테러를 일삼다가 민심이 공산당을 떠난 것이지요. 또 위조지폐 사건도 있었고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1950년 6월 25일에 6.25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박헌영과 김일성이 소련 스탈린을 찾아가서, '우리 6.25 전쟁을 할 테니까 승인해 주십시오'
공산당은 국제 조직입니다. 그 국제 조직을 '코민테른' 전세계 국제 공산화 기구 입니다. 그 대표인 스탈린을 찾아가서 '우리가 남조선을 해방시키고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니까 스탈린이 '그게 가능할까요? 미국이 가만히 있을까요?' 그러니까 박헌영이 큰 소리쳤습니다.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전국에 공산당 당원 수십만이 봉기해 가지고 한반도는 삽시간에 공산화가 될 겁니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착각이었어요)
◑기적3. 625발발 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사흘간 아무 이유없이 지체한 것
그래서 625가 시작됐는데, 서울 점령하는데 3일이 걸렸습니다. 근데 막바로 한강 건너 가지고 부산까지 쭉 내려 왔으면 미군이 올 시간도 없고, UN이 참전 할 시간도 없을 텐데 아주 지금까지 역사가들이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간 그냥 놀았습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독립군 운동하던 김홍일 장군이, 안양 수원 쪽에다가 방어선을 치고 준비해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가면서 시간을 지연시켰습니다.
근데 인민군이 서울에서 지체한 것은, 역사학자들이 지금도 의문스럽게 생각합니다. 김일성의 군대가 막바로 한강 건너가면 되는데, 왜 3일간 서울에서 그냥 헛시간을 보냈느냐? .. 여러 이론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해석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우리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정치적인 이유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박헌영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 하기만 하면 전국의 공산당이 봉기한다고 그랬는데.. 그가 몰랐던 게 있습니다.
그 전 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전국의 공산당 조직에 대해 자수 기간을 줬습니다. 그때 왜 그랬냐면, 1948년에 여수에서 <14연대 반란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순 반란 사건'이 아니라 '14연대 반란 사건'
내가 지난 주에 그에 관한 책을 읽고.. 내가 참 기도했습니다. 1948년 10월 19~27일에 여순 반란 사건 그러는데.. 나는 '여순 반란 사건' 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여수 시민들, 순천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걸로 국민들이 오해하기 쉽습니다. 사실은 여수에 있는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겁니다.
그러니까 '14연대 반란 사건'이라 그래야지, "여수순천반란사건" 그러면 국민들이 오해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지난 주에 서점에 가서 '여수순천반란사건' (14연대 반란 사건)에 대해서 책을 몇권 사서 읽었는데, 내가 기도했습니다.(역사 왜곡 때문에)
왜냐면 10권 중에 8권은 '이는 민중 항쟁이 다. 외국 투쟁이다.' 이렇게 미화하는 책이고 10권 중 2권은.. 여순반란사건(14연대 반란사건)은 해주에 있던 박헌영이, 여수에 주둔해 있던 14연대 속에 있는 공산당 세포조직에 지시를 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팩트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사가 사실 그대로 알아야지 자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색칠을 해 가지고, 역사를 잘못 이끌어가면 국민들이 역사를 잘 모르게 되지요.
우리 청소년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면, 아이들 머리 속이 빨개지지요. 사실대로 역사를 가르쳐야 되는데, 내가 서점에 가서 1948년 여순 반란 사건에 대한 책을 샀더니, 10권 중 8권은 역사를 왜곡했고, 2권은 바르게 말을 했더라고요.
근데 그 "14연대 반란 사건"이 왜 일어났느냐면 앞서 그해 4월에 "제주폭동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4 3사건
제주도에 김달삼 이라는 남로당 책임자가 있었는데, 해주에 있는 박헌영이 이런 지시를 내렸습니다. '5월 10일 선거를 거부하는 민중봉기를 일으켜라'
그래서 김달삼, 이덕구 이런 남로당 책임자들이 앞장 서 가지고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이 점점 커져 가지고 4 3 사건의 비극이 일어난 겁니다. (1947.3.1.~1948.4.3.)
그래서 4 3 사건에 대해서 '미 군정이 양민을 학살한 거다' '아니다. 공산주의 폭동이다.' 이렇게 두 패로 갈라져 있습니다.
근데 내가 보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정확하게 말했더라고요. 그때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 당선 된 뒤에, 미국의 AP 통신 기자가 와서 김대중 대통령과 대담을 했습니다. "제주 4 3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확하게 말했더라고요. "공산당 핵심 분자들이 일으킨 반란인데 진행 과정에서 진압하는 쪽에서 무리해서 양민의 희생이 많았습니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제주 4 3 사건이 터지니까 막 심각했습니다. 수만명이 서로 죽고 다치고 하니까.. 여수에 있는 14 연대를 제주도에 출동시켜서 그 폭등을 막아라.. 고 명령 내렸습니다.
근데 그때 14연대가 제주도로 가는 배를 안 타고, 여수 순천에서 폭동을 일으킨 겁니다. 주도자가 지창수 상사 와 김지회 중위 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 진영(극좌파)에 반대하는 장교들 몇 십 명을 현장에서 쏴 죽이고
반란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 좌익들이 편승해서 일어난 사건이 1948년 10월에 일어난 "14연대 반란 사건" 인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 그 일로 인해서 그해 12월 1일에 국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와 정부, 국회에서 "반공법, 국가보안법"을 만들었습니다. 줄여서 국보법이라 그럽니다.
이 법을 만들어 가지고, 이 체제에 도전하는 군대 내에, 공무원 내에 이런 적색분자, 남로당 핵심을 다 뽑아서 잡아낸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국보법입니다.
그 국보법이 통과된 뒤에 군대 안에 대령, 중령, 소령 등 장교를 위시해서 한 5천 명을 잡아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약 5천 명은 조사가 시작되니까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때 소령 한 사람이 대한민국 군대 내에 '남조선 군사 조직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군대 내에서 군인들을 포섭, 조직하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그 사람이 박정희 였습니다. 당시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당원으로서 군대 내의 조직책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근데 그의 상관인 송요찬 이란 장군이 사람이 너무 아까웠어요. '이 사람은 유능하고, 정직하고, 참 총명한 사람인데 국보법에 걸려서 죽어서 되겠는가?' 그래서 사형선고 받은 박정희 소령을 찾아와서 설득했습니다.
'당신이 그리 허무하게 죽지 말고, 전향을 해서 대한민국에 충성 합시다.' 그래서 박정희가 마음을 바꿨어요. 그리고 군대 내에 있는 남로당 공산주의자 200명의 명단을 넘겼어요. 그니까 국군을 정화 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 현대사는 상처투성이 입니다. 후에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어서 나라를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지요.
나는 우리 현대사 100년을 읽어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나는 그렇게 믿게 됩니다.
시편 33:10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러분,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무슨 주의니.. 하나님이 폐하신다는 겁니다. 아멘 하시지요? 하나님이 다 없애시는 겁니다.
▲나는 북한에 여러 번 갔지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가? 뭘 도울 수 있을까?' 그래서 제가 여러번 갔었는데요. 가서 보면 몸으로 느낍니다.
내가 북한 함경도에서 감자 농장을 했습니다. 시범 농장을 운영했었는데 감자 캐는 날에 거길 방문했는데요. 내 옆에서 감자를 같이 캐던 동네 아줌마가 나한테 그래요 '남조선에는 거지가 득실거린다던데요?'
'아줌마가 잘못 들었어요. 부자가 많지요!' 그랬더니 '듣던 거 하고는 다르네요' '다르지요 나도 남조선에서 들을 때는, 북한사람은 다 굶어 죽는다고 들었는데 와 보니까 아줌마도 살아 있지 않아요!'
그랬더니 그 아줌마가 그래요. '아이고 빨리 통일이 되어야 쓰겠네요' 그래서 '아주머니 남조선 목사가 여기에 와서 감자도 같이 캐고.. 이게 다 통일이 시작된 게 아닙니까?' 그래서 농장에서 감자 농사가 잘 됐는데 '평양에서 추방 해라!' 지시가 내려왔어요.
그래서 나진 선봉 시 인민위원장 (나진 선봉 시장)이 나한테 와서 '섭섭합니다마는 물러나셔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장이 지금 그렇게 잘 되는데 왜 물러나라 하세요?' 그랬더니 시장이 '김 선생, 너무 빨리 잘 됐시요. 천천히 잘 돼야지.. 인민들이 칭찬하고 구경하고 그러니까 평양에서 소문 듣고.. 내보내라 그럽니다. 우린 평양이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그게 백성을 생각하는 정부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번에 야당(국민의 힘)이 36살 살짜리 대표를 뽑았죠? 여러분 그걸 나쁘게만 볼 거 아닙니다. 그거는 시대가 변한 겁니다. 새로운 시대로 미래를 향해서 대한민국이 나가는 겁니다.
근데 그 사람이 쓴 책이 있습니다. 새 당대표 이준석 씨가 쓴 책을 잠깐 제가 읽었는데 통일에 대해서 쓴 글이 있었습니다. 통일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주 간단하게 썼어요. '그게 뭐 어려울 게 있느냐, 남한의 헌법으로 북한을 흡수통일 하는 거 외에 길이 있냐? 북한 김정은 체제는 없어지고, 자유 한국으로 흡수통일 해야지 다른 길이 뭐 있느냐?' 여러분도 찬성 하시지요?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이번에 국힘당 대표된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주십니다. '세상의 사상, 세상의 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독재주의.. 다 사라진다. 내가 없애 버린다.'
시33:11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러분, 대한민국이 통일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로 발전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12절 우리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아멘 하시지요?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하나님이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 선택된 백성이 영어로는 초선 피플 chosen people 입니다. '조선'은 하나님이 초선(선택)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뽑으신 우리 나라는 하나님이 복주시는 나라입니다. 우리 통일왕국시대에 세계에서 예수 잘 믿고, 정말로 자유와 평등이 성경 안에서 어우러져서 살기좋은 대한민국, 세계가 존경하는 대한민국으로 앞으로 나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 감사합니다. 6.25의 비국이 일어난지 71년이 지났습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 이 나라 한국 교회가 세계에 빛나는 나라,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 인간의 주의와 인간의 사상은 다 무효화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빛을 발하는 좋은 나라, 좋은 교회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신 주님께서 이 나라, 이 백성, 이 교회를 축복하셔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33:12 이 말씀대로 이루어 질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 신실한 성도님들 가정 가정마다 심령 심령마다 복을 주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 하나님을 섬겨서 축복된 나라, 정의로운 나라, 공평한 나라, 자유와 평등의 어우러지는 성경적인 나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 일에 우리가 열심히 헌신해서 열매를 맺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6.25 전쟁에 일어난 기적 5가지 P2 2021/06/20
6.25 전쟁, 그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공산화를 우리가 방지하고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6.25 전쟁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가?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살피는 시간입니다.
◑기적4. 김구 선생이 아니라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이 된 것
6.25 전쟁에서 우리가 공산화되지 아니하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던 공로는
아무래도 이승만 전 대통령, 초대 대통령의 공로가 절대적이었습니다.
아마 가상으로 김구 선생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아마 공산화를 막지 못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구 선생은 한성 감옥에서 1899년에 사형수로서 갇혀 있으면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중에
선교사들이 들여보낸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 받음)
한성 감옥이 너무 비좁아서, 당시 사형수는 목에 칼을 차고, 손에 수갑을 지우고, 발목도 수갑을 채우고
했으므로 한 사람당 0.2평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감옥이 넓지 않는 공간인데 꼼짝 못 하는 형편이었죠.
그래서 성경을 펴고 읽을 자리가 없으니까, 앞에 앉은 수인 등허리에 성경을 펴놓고 읽었습니다.
근데 성경을 한 장 읽고 나서 넘길 수 없으니까, 손은 묶여있고 하니까
옆의 수인한테 '책장을 좀 넘겨 주시오!'
근데 옆의 수인이 그렇게 못할 형편이면, 김구 선생은 자기 입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그렇게 성경을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이야기,
로마 군인들한테 뺨을 맞고 가시면류관에 찔리고.. 그 얘기를 들으면서
'아~ 이 어른이 내 신세하고 비슷하구나! 이런 어른이면 나를 이해해 주겠구나!'
워낙 한성감옥이 힘들었습니다. 빈대, 모기, 벼룩에 뜯기고, 몸은 꼼짝달싹 할 수 없이 묶여 있고
그리고 한성감옥은 주로 사형당할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밥 자체가 모레 절반, 보리 절반 그런 밥을 먹였습니다.
거기에 6개월만 있으면 이빨이 전부 빠졌다고 합니다.
그런 곳이니까 성경의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해가 되는 거지요.
'이런 어른이면 내가 당하는 고난을 이해하시겠구나!'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깨닫고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전 조선의 기독교인이 40여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40여명의 거의가 백정, 하층민들이지요.
이승만이 양반으로서는 첫 번째로 교인이 되었습니다.
교인이 된 뒤에, 그 정치범으로 있는 사람들을 열심히 전도해서
감옥에서 이승만이 전도한 교인이 41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중에 이상재 같은 훌륭한 일꾼들, 그때 전도 받은 41명 중에 민족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근데 밖에 있는 선교사들이, 이승만이 배재학당 다닐 때 워낙 총명이 있으니까
6개월 만에 영어를 다 떼고, 선교사들과 영어로 대화하고
6개월 후에 후배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이런 재주 있는 사람이니까
이승만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하니
'앞으로 조선 교회를 위해서, 조선 나라를 위해서 '이 젊은이를 살려야 겠다' 생각을 하고
선교사들이 고종 황제를 만나는 자리에서 부탁을 했습니다.
당시 고종황제의 신변이 위험했고, 명성황후(민비)가 일본 자객들에게 시해를 당했습니다.
고종황제는 주위 사람들을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선교사들이 밤낮으로 불침번을 썼습니다.
선교사들이 권총을 차고 고종황제의 신변을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고종은 고맙지요. 선교사가 고종 황제 한테
'폐하, 우리가 폐하를 이렇게 도와 드렸으니 우리 부탁도 좀 들어 주십시오.
이승만 청년이 아주 총명하고 아까운 인재인데, 역적으로 몰려서 사형 선고를 받고
지금 사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좀 살려 주시오!'
그러니까 고종도 선교사들이 자기를 많이 도왔으니까, 그래서 무기로 감형을 시켰습니다.
그 선교사들의 요청에 의해서 사형 당하지 않고 무기로 떨어졌다가
그 후에 10년으로 감형 되었습니다. 사형이 풀리면 목에 칼도 풀어주고, 손 묶은 것도 풀어줍니다.
그러고는 선교사들이 영어로 된 책을, 경제, 사회, 정치, 세계정세 골고루
감옥에 차입을 시켜 주니까, 이승만은 감옥에 있으면서 독서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고 감옥안에서 강좌를 열었습니다.
그 이승만이 수인으로서 하루에 한 번씩 강연한 시간에는
간수들까지 와서 교육을 받고 했습니다.
근데 청년 이승만이 예수 믿고 난지 5년 뒤에 1904년에 러일전쟁이 터졌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사이에 전쟁이 터졌는데, 이기는 나라가 조선을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은 벌써 망하게 되어 있었지요. 러시아가 이기면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고,
일본이 이기면 일본이 차지하게 되는데.. 러시아가 국내 사정이 급해서 전쟁을 중도해 포기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일본이 이겼으니까 당연히 한일 합방으로 가는 거지요. 1910
그렇게 고종황제가 '아~ 이러다가는 나라를 잃겠다' 싶어서..
'러시아나 일본보다 더 센 나라가 어디냐?
그 나라에 부탁을 해서 우리나라의 국권을 지키도록 특사를 보내야겠다!'
그때 미국이 제일 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특사를 보내 가지고
'우리가 일본한테, 러시아 한테, 중국한테 먹히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특사를 보내자!'
그렇게 작정을 하고는..
근데 특사를 보내려면 영어를 잘 해야 되지요. 그래서 고종은 신하들한테 물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영어를 누가 잘하냐?'
'영어라면 이승만입니다!'
그래서 한성감옥에 수감된지 5년 7개월만에 영어 잘하는 턱에 석방이 돼가지고 고종황제 앞에 섰습니다.
'그대의 모든 걸 사면해 줄테니, 미국에 특사로 가서, 미국 대통령에게 나의 친서를 전달하고
우리나라를 지켜 달라고 해라'
그래서 이승만이 고종황제의 특사로서 미국에 간 겁니다.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도 전달하고 했는데
그 사이에 일본이 조선을 먹어 버린 거예요.
그러니 외교 활동을 할 수도 없이 나라가 망해 버렸습니다.
망해 버린 나라에 돌아올 수도 없고, 차제에 미국에서 공부하자!
그래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과거에 감옥에서, 배제 학당에서 닦은 영어 실력이 출중하니까
워싱턴 DC에 있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학사를 받고,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를 받고
프린스턴에 가서 박사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이 사람이 천재였는지 5년 안에 다 해치웠어요.
그러니까 미국 사람들이 감탄을 해 가지고, 그 이승만 대통령의 프린스턴 대학의 박사학위 지도 교수가
우드로 윌슨 교수 였습니다. 윌슨 교수가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지요.
그가 대통령이 되어 가지고 국회에 가서 연설을 하는데
이승만 박사의 박사 학위 논문이 "전시의 중립 활동" .. 전쟁시에 중립 활동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것이 이승만의 박사논문인데, 지도교수였던 윌슨이 대통령이 되어 가지고 국회 연설 하면서
그의 논문을 인용까지 했습니다. *Thomas WoodrowWilson
그의 논문이 우수하니까, 프린스턴 대학에서 그걸 학생들에게 읽히려고 인쇄를 해 가지고 돌려서
그 당시에 많이 보급이 되었습니다.
근데 이제 윌슨 지도 교수가 '자네가 박사 학위 받았으니 미국 시민권 줄테니까
미국 대학에서 교수 생활에 해라!' 그러니까 이승만 박사가
'내가 조국 독립을 위하여 살아갈 사람인데, 미국 시민권 받아 가지고 교수로 있으면
우리 해방 운동에 지장이 있다..' 그래서 미국 시민권도 안 받고, 교수도 안 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했습니다.
1945년에 해방된 뒤에 이승만이 당연히 해방된 나라에 귀국을 해야 하는데
이승만이 고집이 세고, 자기 주관이 센데다가 '공산당은 이거 망한다' 하고 주장했지요.
1917년에 레닌혁명으로 소련이 공산화 되었는데
그때는 미국하고 소련이 친했습니다. 2차대전 때 동맹국으로 히틀러를 막았으니까요.
그래서 공산당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았는데
전 세계 지식인들 중에 첫 번째로 '공산당은 망한다. 공산당은 인류에 해를 끼치게 된다!'
이렇게 정식으로 말하고 글을 쓴 이가 이승만 박사입니다.
사람들이 '왜 공산당을 그렇게 나쁘게 말하냐?' 물었더니
이승만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공산당은 빼았는다.
그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망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공산당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유물론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유물론은 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승만이 철저한 반공정신을 가지고 미국 지도자들 한테
'정신 차려라! 너희들이 공산당을 그렇게 대하다가는
나중에 백성들이, 미국 청년들이 잘못될 것이다!'
이러니까 해방 이후에 한국을 통치하고 있던 미군정청 에서
이승만이 귀국하는 것을 방해를 했습니다. 근데 그때 누가 도왔느냐면
이승만이 프린스톤 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에 '한국 조선 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프렌드 오브 코리아! 한국의 친구들'이라는 후원회를 만들었는데
그 후원회 회장이 하루는 자기 사위를 데려왔어요.
그러면서 '내 딸이 얼마 전에 결혼을 했는데, 사위가 웨스트포인트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장래가 유망할 것 같으니, 이박사가 좀 만나 보시오!'
그래서 만난 사람이 맥아더 소령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맥아더 소령 하고 얘기를 해 보니까, 신앙이나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이나
보통 청년이 아니거든요. 이승만 박사가 딱 감을 잡았습니다.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미국을 이끌어나갈 지도자가 되겠다..'
그래 가지고 40년간 친구로서 맥아더에게 공을 들였습니다.
심지어 조선국보인 고려자기, 이런 것을 구해 가지고 맥아더 한테 선물로 주고
늘 자주 만나서 교제를 했습니다.
해방된 뒤에 미군정이 이승만이 조선에 오는 것을 방해하니까
그동안에 맥아더는 태평양 사령관이 된 거예요. 이박사는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가야겠는데, 당신 부하들인 미군정이 나를 방해하니
내가 귀국하도록 해 주시오!' 그러니까 맥아더가 자기 전용 비행기를 내 줘 가지고
그 맥아더 전용기를 타고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당시 해방정국은 상당히 소란했지요.
지금 좌파 우파, 진보 보수의 싸움 이것은 그때에 비하면 봄날씨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좌우대결이 얼마나 격렬했든지, 수천 명이 서로 죽이고 죽고 암살하고 뭐 굉장했지요.
그당시 미군정청 조사에 의하면, 우리국민 여론조사에
'해방 이후의 코리아가 공산주의를 채택해야 되느냐, 민주주의를 채택해야 되느냐?'
그 설문조사에 국민 78% 가 '공산주의 해야 된다' 라고 답했던 시절입니다.
그때 남한의 공산당 지도자가 박헌영 인데 아주 천재입니다. 조직과 선동에 아주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충남 예산 사람인데, 조선 노동당을 조직해가지고 당원 100만명을 모았습니다.
게다가 국민들의 78% 가 '신생 대한민국은 공산주의로 나가야 된다' 하니까
투표를 하면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가 없는 거지요. 박헌영이 대통령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방 이듬해 1946년 4월에 박헌영이 죽을 꾀를 쓴 거예요. 왜냐?
1백만 당원을 운영하고 집권하는 운동을 하려니까 자금이 모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위조지폐를 만들었습니다.
일제 시대에 조선 돈을 찍던 인쇄소를 사들여서, 지하실에 돈찍는 설비를 해 놓고서는
낮에 일꾼들이 '공산당 해방일보'라는 신문을 찍어내고
저녁에 인쇄소 직원들 다 퇴근 시키고, 공산당 지도부 12명이 밤새 돈을 찍었습니다.
그때 돈 100원 짜리 지폐를 엄청나게 찍어 가지고, 밤새 찍으면 한 트럭이 나왔습니다.
이걸 전국에 돌려서 공산당 당비로 썼는데, 너무 많이 찍었어요.
위조지폐가 막 돌아다녀서 인플레가 되고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조사를 시켰더니, 위조지폐 찍는 장소가 뚝섬에 있는 '조선정판사' 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미군정청이 돈 찍는 현장을 발각하고, 돈 찍는 판을 압수하고
그 12명을 조사를 해 보니까 뒤에 박헌영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박헌영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박헌영이 북한으로 도망을 가서, 당시 김일성 밑에 가서 부수상 및 외무부 장관을 했지요.
김일성이 수상이었죠. 그냥 이름만 있지 실권은 다 김일성 한테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제 6.25 가 터졌는데...
우리 나라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에 이승만 대통령 체제로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그때 태평양 미군사령관 맥아더를 초청을 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 때 맥아더 사령관이 경축사를 했어요.
'프레지던트 승만 리, 우리 미군은 당신 나라의 국민을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당신 나라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축사를 그렇게 한 것입니다.
◑기적5. 625때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사흘을 지체한 이유
-남한 공산당의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렸으나..
남로당 조직이 1949년에 와해 되어버려서, 봉기가 일어나지 못한 기적
근데 이제 그 1년 반이 지나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시에
북한군대가 전 전선에서 침입을 해 오니까
근데 이승만 한테 이게 보고가 들어간 것이 오전 열시 반입니다.
열시 반에 자기 비서가 와가지고, '인민군이 전 전선에서 침공을 하는데 이번에는 심상치 않습니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서 중부전선 동부전선 서부전선에서 한꺼번에 내려오는 것이
이거는 정식 전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승만 대통령이 '1시간을 나한테 달라' 그래서 방에 들어가서 1시간 동안 기도했습니다.
1시간 동안 기도하고 나서, 11시 반에 '미국 대사를 불러라'
당시 미국 대사가 무초 대사였습니다. 그를 중앙청에 불러 가지고
'아무래도 이번에는 인민군의 전면 공격인 것 같으니
내가 기도하면서 네 가지 원칙을 세웠으니 협조해 주시오!'
그러면서 네 가지를 얘기했어요.
1) 한국에서 시작된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면 안 된다. 한국 전쟁으로 끝내야 된다.
2) 둘째는 우리가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국민총력으로 수행해야겠다.
돌멩이 들고, 도끼 들고.. 북한은 소련제 전차 무기를 가지고 훈련받은 군인이 내려오는데
우린 당신의 나라에서 무기를 안 줬잖아. 그래서 우리는 도끼들고 돌멩이 들고 싸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민 총력전으로 나가겠다.
3) 셋째는 우리가 전쟁 준비 없이 이렇게 싸우러 가는데
미국하고 소련이 삼팔선 줄을 그어서 우리나라를 분산시켰지 않느냐?
차제에 공산군이 그걸 어겼으니까, 이 기회에 삼팔선을 넘어서 통일을 시켜야겠다.
4) 네 번째는 우리가 힘이 약하니까 미국과 유엔군이 우리에게 무기를 지원해 주고 도와주시오.
이렇게 4가지를 제안한 거지요.
그래서 6.25 전쟁이 시작됐는데 그 다음 날 6월 26일에 보좌관들이
전황이 심상찮으니까 '저 부산으로 열차를 타고 피난갑시다.'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서울을 떠나면 지금 일선에서 군인들이 싸우는데 사기가 떨어질 거 아니냐?'
그래서 안 떠나고 있으니까.. 벌써 의정부까지 인민군이 진격해 가지고
서울 포사격 거리에까지 인민군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지요. 그때 얘기가 참 흥미진진합니다.
근데 인민군들이 서울을 사흘만에 점령을 했는데 막바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서 사흘을 허비한 것입니다.
그때 왜 인민군이 서울에서 사흘 동안 쉬었느냐, 남진하지 않았느냐?
그 이유에 대해서 아주 학자들의 논란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뭐냐면.. 이렇습니다.
1949년 4월 달에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렀어요.
스탈린이 둘 중에 누구를 지도자로 뽑을까 테스트 한 겁니다.
근데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까.. 박헌영은 너무 똑똑해요. (말을 잘 알 들을 것 같아요)
반면에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 출신이니까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스탈린은 김일성 한테 '소련 주둔군의 지원을 받아서 인민공화국을 세우시오.'
박헌영 한테는 '그렇게 참 고생해서 조선노동당을 일으켰는데, 김일성보다는 대선배인데,
당신의 수고를 치하합니다.' 라고 말로만 격려하고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소련의 스탈린은, 그 때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정한 것이지요.
그때 둘이서 '남조선을 우리가 공격해서 통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스탈린이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미군이 아직 있는데, 미군이 철수하면 몰라도 미군 있을 때 하면 안 된다.'
당시 남북 신탁통치로 나눠져 있었는데 그 다음 해인 1949년에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했습니다.
북한에서 소련이 먼저 철수하면서 뭐라고 그랬냐 하면
'우리도 철수했으니 미국도 철수해야 되지 않느냐?'
이래 가지고 1949년, 6.25 전쟁 1년 전에 미군이 전부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인민군이 자신감을 가지고 내려 온 거지요.
그때 박헌영이 스탈린에게 뭐라 그랬냐면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100만의 공산당원이 전국에서 봉기를 일으켜 가지고 남조선은 쉽게 떨어진다.' 라고 큰소리 친 거예요.
그래서 일설에 의하면,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간 머문 것이
전국의 노동당 당원들의 봉기가 일어나도록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근데 수십만 공산당원, 한때 100만에 가깝던 공산당원이 왜 봉기가 안 일어났느냐? (아래에 설명)
그 전해인 1949년에, 서울의 공산당 서울시 당위원장이 홍민표입니다. 이 사람이 아주 중요합니다.
박헌영만 북한으로 도망 가 가지고, 삼팔선 가까운 해주에서 남조선노동당을 지휘하고 있었고
그 밑에 김삼용이 대표였고, 그 밑에 서울시 당대표로서 홍민표가 있었는데
그런데 1948년 5월 10일에 유엔이 결정하기를
'남북 전체 유엔 감시하에 선거를 치른다' 라고 유엔이 결정했습니다.
근데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이 벌써 토지개혁도 하고, 군대도 만들고 다 했으니까
UN 선거감시단이 북한에 오는 것을 막았어요.
그래서 남한만 선거를 하는데, 서울시 당대표 홍민표가 상부의 박헌영 한테 건의하기를
'우리가 선거에 출마 해야 됩니다. 선거에 출마 하면
전국 국회의원 200명 중에 1백명은 당선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박헌영이 그 건의를 받아 보고서는
김일성과, 소련 주둔군 사령관 스티코프, 박헌영 세 사람이 만나서
'남조선이 1948년 5월 10일에 선거를 하는데
남로당이 이 선거에 참가를 해야 되느냐/ 참가를 안 하고 봉기를 일으켜야 되느냐?' 의논했습니다.
홍민표는 '선거에 참가해서 표를 2분의 1은 차지할 수 있습니다' 라는 의견을 올렸는데
세 사람이 회의해서 지시를 내렸어요. '선거를 거부하고, 테러를 일으키고, 폭동을 일으켜서
5월 10일 선거가 안 되게 해라!' 이렇게 지시가 내려온 거예요.
그러니까 홍민표가 너무 원통해서 대성통곡을 하고 3일간 밥을 안 먹었다고 합니다.
'이러면 조선공산당이 망한다. 절대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출마하면 전국의 당원들이, 60만이 넘는 당원이 있고
서울 시내만 열성당원이 6만 명인데.. 공산당으로 출마하면 1백석은 차지 할 텐데..
이걸 선거를 안 하고, 테러하고 폭동을 일으키면 어떡하냐?' 통곡하면서 밥을 안 먹었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주도 4 3 폭동이 일어난 것은
사실상 5월 10일 선거를 반대하는 폭동을 한 거거든요.
그러자 여수에 주둔해 있던 14 연대가, 제주 4 3 폭동사건을 진압하라고 파견되는데
거기서 이제 공산당 당원들이 군대를 돌이켜 가지고.. 여순반란을 일으켰죠.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주 4 3 사건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미국의 AP 통신 기자 하고 인터뷰를 했는데
AP 통신 기자가 '4 3 폭동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하니
김대중 대통령이 아주 100%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시작은 남조선 공작원들로 시작이 됐는데, 5 10 선거 반대 운동으로 시작이 됐는데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의 억울한 도민들을 너무 많이 희생시켜서 이거는 바로잡아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말이 정확했지요.
근데 여수 14연대에게 진압하라고 명령했더니
총구를 돌려서 여수에서 '14연대 반란 사건'이 터지니까
그해 1948년 12월 1일에 이승만 정부에서 국회에 무슨 법을 통과시키냐면
'국가 보안법 (국보법)'입니다. 우리 군대나 경찰이나 공직자나 국민 중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테러나 반란을 일으키는 적색분자는 색출해서 처단한다.'
이것이 국가보안법의 골자입니다.
국가보안법이 12월 1일에 통과 되니까, 공산당이 불법단체로 지정되어 가지고
할 수 없이 지하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1948년 12월 1일인데, 1949년에
6.25 나기 1년 전에 해주에 와 있던 박헌영이 지시를 내렸어요.
'수류탄 10,000개를 구해가지고 서울시 핵심당원 6만 명이 4월달에 봉기를 일으켜서
남조선을 미군정이 통치를 못하게 해서
9월 20일에 남조선노동당이 주도하는 총선거를 하게하라!' 이런 지시가 내려온 것입니다.
근데 뭐 홍민표가 그때 뭐 국보법이 통과되었는데다가
공산당이 지하로 숨어서 활동 해야 되니까.. 불가능한 거예요.
그러나 뭐 당의 지시니까 수류탄을 열심히 모으고 준비를 하는데
수류탄을 6,000개 까지 모았는데 발각이 되었어요. 수류탄 6,000개가 전부 압수되고
조직원들이 체포되고, 홍민표는 다행히 이제 몸을 피했는데
그래서 이제 자기 상관 김삼용한테 (그는 박헌영을 대신해서 남조선노동당 대표인데)
'이거 안 됩니다. 이거 9월 20일에 봉기가 안 됩니다. 수류탄도 압수당하고, 당 활동도 못하고
이번 봉기는 우리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김삼용이 해주에 있는 박헌영 한테 연락을 했어요.
'서울시 당대표가 9월 10일 봉기가 불가능하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박헌영이 무슨 지시를 했냐면
'서울시 당대표 홍민표를 북한으로 보내라' 지시가 왔어요.
홍민표가 평양에 가면 죽는 거거든요. '나를 지금 제거하려 하는구나!'
그래서 홍민표는 9월 어느 날 자기 은신처가 을지로 4가에 있었는데,
대낮에 정장을 하고서 을지로 4가에서 무교동 쪽으로 한 낮의 거리를 걸으니까
그때 특수부가 오제도 검사입니다. 이 사람이 참 애국자입니다.
영락교회 집사였는데, 반공 검사로 활약했습니다.
오제도 한테 연락이 왔어요. '홍민표(수배자)가 대낮에 을지로 거리를 활보합니다.'
그러니까 오제도가 당장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을지로에서 무교동 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뒤에서 누가 '홍민표 선생 아니십니까?'
돌아보니까 오제도 밑에 있는 젊은 검사입니다. '예 맞습니다.'
순순히 체포가 되었습니다.
오제도 검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월북을 해도 되는데, 왜 나를 체포하랍시고 대낮에 길거리를 활보 했습니까?'
그러니까 홍민표가 답하기를
'북한에는 벌써 박헌영 동지가 가 있는데, 나까지 가서 신세를 질 수 없지요'
그래서 오제도 검사는 홍민표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전향을 권했습니다.
홍민표는 오제도 검사의 집에서 저녁을 대접받으면서,
그의 근검한 삶에서 아주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제도 그러면 이승만의 오른팔 인데, 이렇게 검소하게 사는구나!' .. 마음에 감동을 받았어요.
'이 사람이면 내가 믿고 자수 해도 되겠구나!' 그래서 자수하고 전향한 것입니다.
그리고 홍민표는 자기 부하 16명을 모아서, 다 자기처럼 전향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니까 16명 전원이 울면서 전향서를 썼어요.
그리고 자기들 밑에 조직들을 전부 전향시키자 그래서
1949년 6.25가 발발 7 달 전에 조선공산당 33만명이 전향했어요.
그리고 나머지 전향을 안 한 특수조직반, 군대조직반, 경찰조직반.. 이 사람들은 전향을 안 했는데
다 조사해 가지고 290 명을 체포해 가지고 구속 시키니까
1949년에 12월에 가서는 남조선노동당이 거의 와해가 되어 버렸습니다.
북한이 그걸 잘 모르고 그 다음해 6월 25일에 남침을 해 가지고
전국적 봉기가 일어날 줄 알고 3일을 기다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제도 검사의 지휘로, 대거 남로당이 전향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인민군이 사흘 서울에 머물면서 전국적 봉기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는데.. 불발된 것이지요.
그래서 역사를 보면, 그 사연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줄 믿습니다.
본문 말씀에 다윗이 골리앗을 앞에 마주 서면서 '전쟁은 창과 칼에 있는 게 아니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라!
소년 다윗은 물매돌을 가지고도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전쟁에 승리 했습니다.
북한이 지금 뭐 원자탄, 미사일 그렇게 나오고 있지만
지금 식으로 말하면 '전쟁은 원자탄이나 무슨 미사일로 이기는 게 아니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줄 믿습니다!'
우리 한국이 이렇게 살아 남아 가지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신앙 생활 열심히 하고.. 이런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6.25 때 망할 수밖에 없던 나라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우하사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라
그 말씀 그대로 대한민국이 지켜진 거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도 우리나라에 하나님께서 계속 역사하셔서..
왜냐? 통일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까
통일이 돼 가지고 북한 공산당 김일성 체제는 다 물러나 버리고
대한민국 헌법으로 통일이 돼 가지고, 예수 잘 믿고 경제 건설해서
세계에 존경받는 대한민국 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거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1년 전에 시작할 때부터 '통일한국을 준비하는 교회!' 입니다.
우리가 변두리에 있는 작은 교회이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 감사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라'
그 소년 다윗의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응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가 고비고비 해방 이후 그 세월 속에 하나님의 역사하셔서
망할 고비들을 수없이 넘기고 나라를 지키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인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