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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삶의 원칙 P2 / 잭 푸닌

LNCK 2021. 12. 20. 18:12

https://www.youtube.com/watch?v=nYs_XwLwrXQ 

예수님의 삶의 원칙 P2 / 잭 푸닌 - YouTube

 

◈예수님의 삶의 원칙 P2                      눅10:38~42, 행17:30                          출처
The Principle of Jesus' Life  / 잭 푸닌 

*출처 동영상의 30분 18초부터~끝까지 정리                    

 

예수님께서 베다니 촌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가셨던 일을 기억하시지요?

마르다는 당연하게 식사를 대접하고자 부엌에서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부엌에서 마르다를 돕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제자들 틈에 섞여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었거든요. 눅10:39

 

그러자 마르다는, 마리아가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자기를 도우지 않자 마음이 몹시 언잖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가 마리아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0

 

그러면 그녀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일어나 가서 언니를 도와주라'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마르다를 나무라십니다.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들로 염려하고 있는구나.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나쁜 건 아니다. 무슨 죄를 지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것은 네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지, 내가 시킨 일이 아니다'

 

앞서 P1에서도, 예수님은 많은 일을 하신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시키신 그 일만을 감당하셨다고 했는데

 

지금 본문의 마르다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

 

오히려 마리아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일 뿐이다'  one thing is necessary 눅10:42

즉 여러 가지 일, 또는 많은 일이 아니라

주님이 시키시는 일, 그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그 한 가지 일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회심하고 저 자신을 쳐다봤을 때

하나님께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제 마음에, 눅10장의 이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일 뿐이다'  one thing is necessary 눅10:42

 

즉 여러 가지 목표가 분명치 않은, 많은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한 가지 그 일만 하면 된다!'

그것이 그때 제가 받은 응답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리아가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 잭 푸닌의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네 삶에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제가 그날 깨달은 것은, 주님을 섬기며 그 분을 위해 아주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성경말씀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 듣는 일을 통해서, 또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제게 시키시는 특정한 일을 분변하는 것, 

그래서 그 일을 (핀셋으로 집듯이)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럴러면, 분주하게 일에 뛰어들기 전에,

조용히 성경을 읽든지 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된다는 것이죠.

 

지난 50년 이상 제가 주님을 섬기면서 발견한 것은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제가 이 땅을 떠나기 전에

'잭 푸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뭔가 유용한 일을 했다'는 것을 제 스스로 알고 싶고,

또한 그런 평가를 사람들로부터 받고 싶어요.

 

하지만 그것은, 마르다처럼, 내가 하기 원하는 일을 지치도록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르다의 봉사는 좋은데, 문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중을 물어보지도 않고요.

 

▲많은 사람들이 마르다처럼 그렇게 주님의 일을 합니다.

많은 것들을 계획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심지어 휴가 때는 해외로 가서 봉사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그런 일도, 자기가 좋아서, 자기 열심으로 할 수 있다는 거죠. 마르다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들을

자기 스스로의 열심으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자기 명예와 자기 이름과 자기 칭찬을 위해서요!

 

여러분, 성경 시대에는 종이 있었는데,

종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이 그 종에게 하라고 시킨 그 일을 정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키지도 않는 일을 열심히 했다고, 종이 칭찬 듣는 것은 아니에요.

 

열심있는 성도라고 해서, 자기가 하기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힘들게 하는 것이..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상당히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게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 가운데서도 아주 많은 분들이

주님을 섬기기 위해, 이런저런 봉사의 일들을 많이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기를 원하시는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보십시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님 저는 주님의 뜻을 행하기 원합니다'라고 하지만

뜻이 하늘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되요.

우리의 봉사가 온전한 봉사가 되려면, 뜻이 하늘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되요.

 

천사들은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면서, 주님을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무차별하게 많이 하지 않습니다.

천사장 미가엘과 가브리엘은, 다른 천사들의 뒤를 좇아다니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들은 모여서 그저 얘기나 하면서 놀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쉴새 없이 부지런히 움직여!'

천사장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시나요? 그들은 아버지 앞에서 가만히 기다립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브리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사렛에 가서 마리아 라는 처녀에게 가서 말하라.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거기서 섬기는 대제사장 스가랴에게 가서 이 메시지를 전해라'

 

그러면 메신저 천사 가브리엘은, 가서 그 일을 마치고 아버지 앞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시중을 들면서 말합니다. '다음은 무슨 일을 할까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내 삶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날마다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저 역시 이것을, 제가 그리스도인 삶을 시작한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발견했습니다. 그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성령충만하게 하셨을 때, 비로소 배운 것들 중 하나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아직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여전히 여기저기를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하나님을 위해 이것저것 또 다른 것들을 많이 하고 다니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적인 열심이 됩니다)

그러다가 자기 삶을 마칠 때야 비로소, 자기 삶을 다 허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혹시 죄로부터 자유로워질지는 몰라도 (이것도 어렵습니다만)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은 완수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내게 정하신 일에 대해

진지하게 하나님께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럼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이미 자기 인생을 절반 이상 허비해 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만회할 수 있을까요?

만회가 가능한 건가요? 

 

사도바울의 예를 보겠습니다. 그는 30년 가까이의 삶을 허비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면서, 온갖 잘못된 일들을 저질렀지요.

그런 사람은, 절대로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는 대략 62세까지 살았으니까 그 62년 중에 30년간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 했고

그래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약 33년 정도만 주님이 자기에게 시키신 그 일을 위해 헌신하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 중에 절반을 허비하고 살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죽기전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 요17:4

라고 말씀한 것과 같은 고백입니다. 

 

이것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일찍 예수를 믿었지만 이제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던 사람도

이제부터라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면,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사도바울의 고백이, 제게 다가온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딤후4:7

바울의 삶이 제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떻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어떻게 살 것을,

그러니 나의 인생의 큰 그림을 어떻게 다 미리 알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예지 foreknowledge' 라고 하는데요.    *미리 아심

예지는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하나님에 관한 위대한 진리인데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을 보십니다. (왜냐면 하나님께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항상 현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의 생애를 다 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생애도 미래까지 다 보고 계십니다.

 

바울은 자기 경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보는데요.

행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 overlooked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저 잭 푸닌은 이 말씀을, 과거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삶을 망친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했고,

그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형제여 괜찮습니다. 과거는 하나님이 간과 overlooked 해 주십니다.

지금이라도 그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삶을 통해 그분의 목적을 이루 실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처럼요!'

 

어떤 교회를 가면, 거기서는 '여러분이 죄의 용서만 받으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다'고만 말해줍니다.

마치 그게 전부인 것처럼 가르칩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처럼 행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아요. 요일2:6

 

그래서 여러분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신다'그랬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17:30

 

회개한다는 것은, 내가 가던 그 길에서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삶을 위한 (예지예정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의 인생 절반을 허비했을지라도

나머지 절반의 삶을 진정으로 헌신해서, 그는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딤후4:7

 

▲참고로, 여러분 지금 제 설교를 듣고 여러분 마음에 낙심이 드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지, 결코 낙담시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또 하나의 원칙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을 낙담시키거나, 정죄를 받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설교를 듣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삶의 원칙으로 삼으십시오.

 

그 말이 설령 성경을 정확히 인용한 말이라 하더라도, 여러분을 정죄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가 아닙니다.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condemn,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예수님은 세상을 정죄 condemn 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세상에 죄를 깨닫게 convict 하러 오셨습니다. 

 

정죄 condemn 는, 사람을 결국 파멸에 빠뜨리는 것이요,

깨달음 convict 는, 회개로 인도하여 그를 구원코자 하는 것입니다.

   *요16:8에서는 '책망 convict', 요8:9에서는 '양심의 가책', 엡5:11 '책망'

 

물론 죄를 지적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용서와 회복으로 끝나야 되는 것입니다.

정죄로 끝나면 안됩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을 정죄하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3:17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을 읽거나 여러 설교를 들을 때

죄에 대해서 깨우침(책망)을 받되, 정죄는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오랜 세월 그것을 몰랐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녔지만 정죄의 음성과, 깨우치는(책망의) 음성을 구별하는 법을

아무도 제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게 이런 것들을 얘기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는 이것들을 제 스스로 발견해 나가야 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너무나 많은 말씀들로 늘 정죄 받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설교를 한 편만 들어도 정죄 받곤 했습니다.

 

물론 정죄하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만, 

듣는 사람도, 그걸 정죄의 음성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언제나 깨달음, 책망, convict 하는 음성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자녀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정죄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인 성도들을 정죄하며 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입니다.

'잘 들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냐 이 멍청아,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너는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어... 네가 망쳐놓은 것을 좀 보라고!'

 

육신의 아버지들은 혹시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정죄하시지 않습니다.

 

잘못을 깨우쳐주는 것 convict 은 다릅니다.

선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일을 잘못 했구나!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란다. 

네가 그것을 잘못했지만 걱정하지 마라, 너는 다시 그것을 잘할 수 있다.

어떻게 하는 건지 내가 보여주마! 너는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다!'

이것이 깨우쳐주는 음성이고, 그 안에는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학교 교사와 좋은 아버지의 차이입니다.

과거의 학교 교사는, 무조건 학생들이 잘못한 점만 야단쳤습니다.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아버지는, 아이의 잘못을 깨우쳐주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나는 너희 선생이 아니고, 나는 너희 아버지다'

고전4:14~1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위 구절에서 바울은, 선생과 아버지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죄 condemn 와 깨우쳐줌 convict 의 차이인 것입니다.

 

선생과 아버지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10살짜리 소년이 있는데 수학 시간이었어요. 소년이 이해가 안 되는 문제가 있었어요.

제곱근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수학선생은 계속 진도를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나머지 다른 아이들은 다 이해를 하고 있거든요.

 

아이가 집에 와서 아버지께 제곱근에 대해 물었어요.

아버지가 설명을 해 줍니다.

그런데 아이는, 감은 잡았는데 그 날 확실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그러면 그 다음날, 아버지는 퇴근하고 와서, 또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쳐 줍니다.

아이가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계속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예를 든 것입니다. 

자녀인 우리가 뭘 잘못하면, 야단치고 혼 내고, 벌을 주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즉 정죄 condemn 가 아니라,

 

아버지는 인내심을 갖고서, 우리가 올바른 길을 깨닫고 찾아가기까지

두 번, 세 번 계속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깨우침 convict 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과 아버지의 다른 점인데, 바울은 자기가 선생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었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고전4:14~15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뭔가 잘못하는 것을 보셔도, 여러분을 당장 집밖으로 내쫓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오래 참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그것을 다 배울 때까지 너와 함께할 것이다'

 

여러분은 아직도 벌컥 화 내는 문제를 갖고 계신가요?

여러분은 그 문제를 극복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겠지만 실패했을 것입니다.

 

선생은 이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는 도저히 안 되겠다. 너는 이제 이 학교를 떠나가거라.

여기서 너는 결코 화 내는 문제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라'

 

그렇게 정죄하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은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 맞아, 나는 절대로 이 죄에서 승리하지 못할 거야!'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과거에 저 잭 푸닌도 분노의 노예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저를 그 죄에서 100% 건져내 주셨습니다.

 

과거에 오랜 세월동안 저는 분노의 노예였는데

이제 제 삶에서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하나님께서 제게 오래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넘어지면 또 깨우쳐주시고, 또 넘어지면 또 고쳐주시고,

그렇게 하기를 수 없이 반복한 가운데, 제가 지금 고쳐졌습니다.

분노가 점점 사라지다가, 이제는 제 삶에서 분노가 거의 완전히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또한 종종 낙심에 눌려 있었습니다. 저는 빈번하게 낙담하고, 또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그 낙심이 이제는 제 삶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그 문제로부터 저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과 기도로 더욱더 성숙된 삶으로, 온전한 삶으로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지향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낙심하셨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옭아매는 죄가 무엇인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회개하고

여러분이 그 죄에서 돌이키시고, 그런 일을 계속 반복하는 가운데

점점 그 죄에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즉 점점 성화되어가는 것입니다.

반복된 회개가 결국은 죄를 이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의 자녀들아, 나는 너희가, 내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기 원하노라 (영어식 표현 Walk as I walked)

나는 너희가, 내가 살았던 방식대로 살기 원하느라 (한국식 표현)  요일2:6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다.. 라고 말하지 말아라.

그런 믿음 없는 말을 하지 말아라. 대신에 믿음의 말을 하여라.

주님, 저같은 죄인도 저의 죄악된 습관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 줄로 믿습니다.'

 

예를 들면, 은밀히 포르노를 보는 죄악된 습관에 빠져서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파괴하고 있는 분들도 아마 있을 것입니다.

 

이때 마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것을 그만두려고 애쓰지만, 너는 절대 그것을 그만 둘 수 없다!

너는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절대 그만 둘 수 없었잖아!

너는 계속해서 그것의 노예로 살고 있잖아, 너는 절대 안 될거야, 너는 그런 죄인이잖아!'

이것이 마귀의 정죄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셔서, 여러분이 승리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시되

특별히 성령님을 여러분께 보내셔서,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하도록 자신을 내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죄악된 습관을 완전히 극복할 때까지, 그 분은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처럼 행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그런 (성화의) 목표가 여러분께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 하는 수준에서, 그 목표로 만족하면 안 되고, 

내가 칭의로 구원 받은 후에, 성화를 이루고, 예수님처럼 닮아서 살아가야지.. 하는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로봇은 절대 잘못된 일을 하지 않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습니다. 마치 천사들과 같죠. (타락한 천사 제외)

하지만 하나님은 로봇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집에 자녀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로봇처럼 말을 잘 듣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로봇 같기를 원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격과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간의 인격과 자유의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 5살짜리 아이가 있는데

여러분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을 때, 그 아이가 달려 와서 아빠를 껴안아주면서

'아빠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결코 죄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5살짜리 로롯이 있어서

로봇이 현관 문을 열어주며 '아빠 잘 다녀오셨습니까?'라고 깍듯이 인사하는 것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기 원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자원해서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우리도 행하여 살 수 있도록 도우게 하십니다.

요일2:6, 고전11:1, 벧전2:21   *성경구절 녹음 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자녀의 삶의 모습을

당신이 직접 본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한 가지 예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주님은 귀를 여시고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사50:4

그리고 그 들은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온전하게(성숙되게)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그저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신앙생활의 끝이 아닙니다. 

 

칭의 받은 후에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성령님을 통해 여러분을 성숙되게, 온전하게 만들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기를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입니다. 곳곳에 이런 구절들이 나옵니다.

 

그렇게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는 주님을 믿으십시오.

주님이 아무 일도 못 하시도록, 그분의 손을 꼭꼭 묶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나를 절대 변화시키실 수 없어!' 이건 마귀가 주는 정죄감 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비극적인 예 중 한 가지가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마13:58

 

반대로 여러분이 주님을 믿으면, 그 분은 여러분 삶에 큰 일들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 저같이 형편없는 죄인에게도, 주님께서 뭔가를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저를 온전하게, 성숙되게, 주님을 닮게 해 주십시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1:6

 

그것을 이루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겠지만

믿음으로 여러분이 승리하게 되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