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에2장 1~7 섭리의 화살

LNCK 2022. 1. 9. 08:11

섭리의 화살(에 2:1-7) | 이규현 목사 | 수특새 | 21.12.29 - YouTube
◈섭리의 화살         에2:1~7         2021.12.29.출처

◑배후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섭리

자 우리는 에스더 1장에서 왕후 와스디의 폐위 과정을 보면서 
바사 제국이 얼마나 허약하고, 또 얼마나 위험한 시대 속에 있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되죠. 

잔치의 초대에 불응한 것에 대한 괘심죄로 악법까지 만드니까 
나라가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2: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가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거늘'

재밌는 대목입니다. 노가 그치고 본 정신이 돌아오니까 
'그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노가 그쳤다는 말은 왕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그동안 잠시 이성을 잃어버린 거죠. 
그러면서 얼마 전에 일어난 일들을 이제 생각하는 장면이에요.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왕후 와스디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는 거죠.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와스디에게 너무 과한 짓을 한 것 아닌가?' 
'술이 문제야, 내가 정신 나간 짓을 한 것 같아!' 

▲분노한 상태에서는 어떤 결정을 하지 마세요!
여러분, 좋은 감정의 상태가 아닐 때, 내린 결정은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슨 결정을 내릴 때나, 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내 감정상태가 가장 좋을 때 결정해야 돼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결정을 내릴 때, '뭐 (이혼) 도장찍자' 이럴 때는 상태가 안 좋을 때예요. 
그러니까 감정이 격해 있을 때, 어떤 결정을 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탑 리더들, 굉장히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상태를 평정심으로 늘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탑 리더들은, 자신의 에너지의 70%를 
자신의 감정상태를 유지하는데 써야된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탑 리더가 감정상태가 안 좋아서 결정을 한 번 잘못 내리면 
그 공동체의 전체가 불행하게 되잖아요. 

그게 국가이면 대통령이 되고, 
만약 미국 대통령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미국 대통령이 감정상태가 안 좋아서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면, 
온 세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 왕의 감정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시스템은, 안전한 나라가 될 수가 없는 거죠. 
여러분, 감정은 잘 깨어집니다. 누구나 조심해야 될 영역입니다. 
한순간에 감정이 깨어지면, 이게 어디로 갈지 몰라요. 

▲자 왕은 이미 후회를 하지만 물은 엎질러 졌습니다. 
법령은 정해졌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어요.

그 법령은 자신과 신하들이 합작해서 만들었거든요. 
이제는 혼자 그것을 물릴 수도 없게 됐어요. 

자 신하들은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 혹시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법령을 물릴 수 없도록 해 놓았습니다. 

왕이 후회를 해도 더 이상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하들은 새로운 왕후를 뽑는 일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왕은 와스디를 사랑했고 그녀를 자랑스러워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잔치에 초대하고 싶었던 거잖아요. 
그는 와스디를 다시 불러들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순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어요. 

바사 제국의 왕도, 자기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마음대로 할 수는 상황이 만들어 진 겁니다. 

여기에는 왕에 오만과 실수, 그리고 신하들의 조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고 끝나면 안되죠. 

▲이 모든 것 안에, 무엇인가가 작동되고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행동을 넘어선 하나님의 역사하심!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나의 의도를 벗어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내가 아닌 어떤 다른 힘의 작용!

나중에 내가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작동될 때가 있어요.
그걸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매우 구체적으로 작동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 섭리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을 때도 있고,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자 이제 새로운 왕후를 찾아야 합니다. 
2:2절, '왕의 측근 신하들이 아뢰되 왕은 왕을 위하여 아리따운 처녀들을 구하게 하시되'

왕후 와스디의 폐위를 후회하고 있는 듯한 왕의 모습을 눈치챈 신하들이 
왕을 위하여 새로운 왕후를 찾도록 건의합니다. 

2:3 '전국 각 지방에 관리를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를 다 도성 수산으로 모아 후궁으로 들여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손에 맡겨 그 몸을 정결하게 하는 물품을 주게 하시고'

이건 아마도 화장품까지 다 줘서, 몸을 이렇게 단장하도록 한 것입니다. 
전국에 명령을 내려, 본격적으로 새 왕후를 찾도록 제한했습니다. 

2:4 '왕의 눈에 아름다운 처녀를 와스디 대신 왕후로 삼으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좋게 여겨 그대로 행하니라'

결국 왕은 꼼짝없이 허락하고 합니다. 이제 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모르드개의 등장

자 드디어 오늘 본문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죠. 모르드개 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서의 핵심인물 중의 하나죠. 

2:5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그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누군가를 소개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의 특징을 강조하는 것이, 가장 먼저 소개되겠죠. 

욥을 소개할 때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1:1

욥을 소개할 때, 첫번째 나온 단어는 '온전하고'입니다. 
그 인물을 소개할 때,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가장 먼저 나오는 그 말을 눈여겨 봐야 되죠.

다니엘을 보면,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단1:4
다니엘에게 강조된 것은 '흠이 없다' 이었죠.

그럼 본문의 모르드개에게 강조된 것은 무엇입니까?
2:5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그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제일 처음으로 그를 묘사한 말은 '그는 유대인이라' 입니다.
그의 프로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밝히고 있는 거죠.

여러분,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모르드개가 소개될 때마다 따라오는 말이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게 상징하는 의미는 생각보다 큰 것입니다. 

▲자 사람을 소개할 때 무엇이 먼저 나오는 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 '나는 나를 소개할 때, 무엇을 가장 먼저 언급하는가?' 

내가 나를 소개할 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제일 먼저 밝히고 있습니까?
내 직장, 내 직업, 내가 사는 지역, 내 선호 정당, 내 취미?

아니면 내가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을 자신있게 드러내고 있는가요? 
아니면 할 수 없이 밝히거나, 아니면 아예 숨기고 사는 것은 아닌가요?

'모르드개'란 이름은, 마르둑카 라는 바벨론식 이름을 히브리 식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의 이름 속에는 '마르둑'이라는 바벨론 신의 이름이 들어가 있죠.

당시 포로들은 이런 바벨론식 이름을 같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도 바벨론 식 이름으로 개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세계에서 사는 삶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겁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상 속에서 동화되지 않고, 속화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성도로서의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그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이요...' 2:5

▲3장에 하만이 등장합니다. 
이제 하만과 모르드개의 전쟁이 참 흥미롭습니다. 
하만은 누구입니까? 모르드개와 대립각을 세운 인물입니다. 

그리고 온 유대인들을 가슴 떨게 한 사건의 주인공이 하만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를 갑니다. 

하만이 왜 그렇게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었는가요?

왜냐면 하만은 아각 사람입니다. 에3:1
바로 아말렉 사람의 후손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숙적이었죠. 역사적으로 원수지간입니다. 

이제 에스더서에서 펼쳐진 전쟁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됐죠. 
모르드개와 하만의 싸움이 아니라, 실제로는 유대인과 아말렉과의 싸움의
재현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르드개의 족보를 언급하는 이유는     *2:5
결국은 그가 정통 유대인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포로기 이후, 유대로 귀환하지 않은 유대인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상들 가운데 한 명은 여호야긴 시대에 붙잡혔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여호야긴)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2:6
(*히브리어 원문에는 '모르드개'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연대도 맞지 않습니다.
그의 조상이 여고냐 왕과 함께 붙잡혀 왔는데, 그 조상은 문맥상 기스 2:5 를 가리킵니다)

지금의 시점은, 포로로 잡혀온지 백년이 넘었습니다. 
우리가 눈 여겨 봐야하는 것은, 그렇게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방 땅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다는 거죠. 
이게 아주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1백 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바벨론에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아있었다는 거예요. 


◑에스더서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 중에 하나는 <공동체>입니다. 

에스더서 안에서 또한 눈에 띄는 것은
이방문화 속에서 동화되지 않은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게 에스더서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려고 하는게 뭘까요? 
하나님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간 유대인 뿐만 아니라 
돌아가지 않고 바벨론에 흩어져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까지도 
하나님은 돌보시고 계심을 보여주는 겁니다. 

유대 영토안에 있는 백성들만 유대인으로 보지 않았어요. 
유대인이란, 이런 영토적인 관점이 아니에요.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오늘날의 크리스천에 비유)
그 유대민족으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에스더서가요!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성실하게 돌보고 계십니다.
에스더서는 이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 여기 안에 들어있습니다. 
에스더서에서는 유대인 공동체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분명히 드러나 있죠. *오늘날의 교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공동체적으로 바라보시고 계십니다. 
유대 공동체 전체가 몰살 당할 위기에서 건져내 주시는 이야기가 에스더서 입니다.

에스더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그 유대인 공동체를 건져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그 백성들을 살려내시는 이야기!
여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을 보여주십니다.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공동체를 보존하신다는 겁니다. 

언약 백성으로서의 공동체!
이것은 신약의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도 공동체적이에요.  *개인적부르심과 아울러
그냥 개인만이 아니고,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한 개인이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은 유대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하셨는가요? 
그 공동체는 하나님이 친히 만드셨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공동체는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냥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아요. 
교회공동체, 교회는 독특한 곳입니다. 그냥 단체와 조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세운 언약안에서 구별된 모임입니다. 
믿음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금도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세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지상의 교회을 세워가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공동체와 함께 하셨듯이!

그래서 교회를 보십시오. 신비로워요.
2천년의 역사속에 시련과 핍박을 받아왔지만
교회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흥황해 왔습니다.

이게 인간적인 세력확장이나 조직관리로 가능한 것일까요?
오늘의 세계의 초일류 기업들도, 조금만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2천년의 역사 속에 견고한 조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 계속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정체성이에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통하여, 그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귀중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망할듯 하면서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또한 에스더서를 관통하는 큰 주제요, 흐름입니다.

교회는 보십시오. 약한 듯 보일지라도 약하지 않아요.
2천년의 역사속에 보면, 교회가 완전하지도 않아요. 허물도 많아요.

본문의 디아스포라, 이 바사제국에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허약하고 연약한 백성들이에요.

오늘 지상의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연약해요. 허물이 많아요.
완전하지 않아요. 실망할 때도 많아요.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면 실패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모르드개가
'유대인'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먼저 밝히는 것은
이제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선수로 뛰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자 드디어 에스더가 이제 등장합니다.

2:7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에스더 라는 인물이 이제 살짝 고개를 내미고 있습니다.
처음 소개되는 에스더에게 특이한 게 없어요. '부모가 없었다'는 말 외에는.

그의 유대식 이름은 '하닷사'입니다.
'그의 삼촌의 딸'이면 모르드개와는 사촌지간입니다.

자 가정적인 배경을 보면 불우해 보입니다.
포로민으로 태어난 것도 어려운데, 에스더는 부모까지 없는
이런 어려운 삶의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2:7절에 깔려있는 전반적인 에스더에 대한 분위기는 뭘 강조하려고 합니까?
바사제국의 권력의 상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어림도 없죠. 왕국 근처에 가기 어려운 신분이다.. 라는 것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힘없고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유대의 이름 없는 여성에 불과하다.. 는게 강조되는게 있어요.
그래서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자기 딸같이 양육했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있어
모르드개와 에스더와의 연합, 결속력.. 과 연관이 되는 것이죠..

위기의 시대에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철저히 서로 공조해야 했습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의존적입니다.

에스더에게 기대되는 것은, 모르드개의 말에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에스더가 나중에 중대한 결정을 하는 계기에는
모르드개로부터 어릴적부터 받은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 그러나 아직 에스더는 이야기의 전면에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모르드개로부터 양육을 받아온 처녀로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에스더에게 특별한 게 없다는 겁니다.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면,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 무엇인가 암시하는 대목이죠.

자 평범한 유대여성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직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을 불러서 사용하시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브라함, 모세, 신약의 바울 같은 인물 정도는 되어야 쓰임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특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죠.

물론 세상은 그렇습니다. 세상은 잘난 사람들의 리그인 경우가 많죠.
세상에서 높아지려면 무엇인가 특별해야 돼요. 어디에든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어중간하면 안돼요. 세월이 갈 수록 더 그런 거 같아요. 특출해서 남의 눈에 띄어야 돼요.

그리고 잘난 것만으로도 안돼요. 자신이 어필을 해야 돼요.
적극적으로 자신을 홍보해야 돼요. '나를 불러달라고..'

그래서 이력서를 쓸 때도, 모든 것을 다 끌어서 써요. 경력을 부풀리는 거죠.
경쟁이 과열된 문화속에서, 조금이라도 남이 가지지 않은 스펙을 만들고자 돈과 연줄을 동원합니다.

그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아무리 올라가도 더 잘한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에서는 경쟁에서 밀린 낙오자들로 가득합니다.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이 갈 곳이 없어요. 그들은 변방의 외인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나를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방송에 보면, 참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무명의 가수로 오래동안 언더그라운드에서 참 가난하게, 어렵게 지내온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은 자신을 알리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지만
대중이 기억해주는 가수로 남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린 친구들이 나와서, 우열을 가리는 경연장에서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너무 안쓰러워요. 그 잔인한 경쟁의 구조 속에서 무대에 올랐지만
쓸쓸하게 다 사라지고, 한 명만 남는 세상, 그 경쟁의 각축장...

▲자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나라는 잘난 사람만 등용하는 나라가 아니에요.

우리가 자주 속습니다. 특별해야 쓰임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에요.
에스더에게서 특별한 것을 볼 수가 없어요.

아니 성경에 어떤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정말 성경이 성경인 것은, 인간을 미화하지 않아요.
인간을 인간그대로, 솔직하게 기록한 책은 성경밖에 없어요.

다윗이 영웅처럼 보이지만 여지없이 그가 깨어지는 것을 봅니다.
성경은 구태여 밧세바 사건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어요.
다윗이 영웅이 될 수 없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어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다니엘 같이, 에스더 같이 되라는 말은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겠죠..
그러나 다니엘이나 에스더는 영웅이 아니에요.
인간은 영웅이 될 수 없어요.

간혹 자기가 영웅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무너짐을 봅니다.
노아는 온전한 자요, 의인이었지만 말년에 추태를 보입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실수투성이 입니다.
믿음직한 인간은 없어요. 믿음직한 인간?
한 때는 믿음직했던 사람도, 세월이 흐르면서 실망스러워집니다.

믿음직했던 아버지가, 나중에는 아들을 의지해야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돼죠.
한 때 믿음직했던 남편도, 아내가 돌봐야 될 때가 옵니다.

믿음직해서 지도자로 뽑았는데, 나중에는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믿음직한 인간이 존재할까요? 믿음직한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여러분, 하나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영웅적으로 쓰임받고 싶어합니다. 명예의 전당에 내 이름이 등재되기 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에요. 누가 나를 부르시고 누가 나를 쓰셨는가가 중요하지요.

그러니까 핵심은 하나님에게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각자 역할이 다를 뿐이지,
내가 어떤 역할을 맡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 있으면 되는 겁니다.

우리 편에서는 큰 역할, 작은 역할이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데 있어서, 배역이 다를 뿐이지
특별한 배역은 따로 없습니다.

특별한 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게 아니에요.
아무리 영웅적인 일을 해도, 하나님이 빠져버리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뭘까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 편에서 나를 사용하시면 되는 거죠.

하나님은 연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기를 쓰고 써달라고 해서, 쓰임받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용하시는 거에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은 왜 에스더를 사용하셨는가요? 우리는 모릅니다. 
그냥 하나님이 에스더를 부르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성경에 없습니다.

에스더에게 드러낼만한 스펙이 있습니까?
그는 모르드개에게 홈트 받은 이력밖에 없어요.  *홈트레이닝

답은 하나에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에스더를 사용하셨다는 거죠.

그런데도 우리는 에스더의 이력서를 복사하려고 합니다.
에스더가 되는 법, 에스드 학원에 다니려고 그러는 거죠.

여러분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한 시대에, 한 역사적 사건 속에 에스더가 들어있었던 거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누구라도 사용하실 수 있다..'

내가 실력을 갖췄다고 쓰임받는 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이 쓰시면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것은 세상의 문화 속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일어난 증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고 섭리라는 것이죠.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그것으로 안 돼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거죠.

섭리란 무엇일까요?
쉽게 설명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His story 속에 우리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야기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섭리안에 있으면 두려할 일이 없어요.

하나님의 섭리안에서는 헛된 일이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귀결됩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섭리의 성취 과정을 보여줍니다.

세상 나라는 순간적입니다. 인간이 이룬 업적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가 이루어져가는 과정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는 것같이 믿을 수 있습니까?
이게 과제 중의 과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비로운 일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뜬 구름 잡는 것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어떻게 볼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분명이 있는데, 그게 섭리입니다.

신자는 그 하나님의 섭리를 읽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에스더서를 통해서 계속 그 작업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꼼꼼하게 지금 에스더서를 계속 조밀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놓치지 않고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는 눈이 띄어야 돼요.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연결이 되어 있어요.

모든 역사는, 하나의 섭리하심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방여인 룻이 보아스와 연결되면서 다윗 왕으로 이어져요.
룻이 그 품삯을 얻기 위해서 밭에 나가서 일을 하는데, 보아스가 마침 밭에 나오자마자
눈에 확 꽂힌 여인 룻이 있었어요.

아무리 봐도 그게 무슨 매력적인 모습이 아니고, 정말 남루한 과부의 모습인데
보아스, 그 유력한 남자의 눈에, 확 룻이 그날 밭에 나오자마 꽂힌 것입니다.
이게 섭리라는거죠. 그 섭리 때문에
평범한 이방여인의 가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는 거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알려지죠.
마1장의 예수님 족보에 이름이 올려진 여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얼룩진 삶의  흔적을 가진 의외의 인물들이
구원의 섭리의 역사를 이루어가는데 쓰임을 받고 있는 거죠.

와스디도 에스더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는 도구들에 불과해요.
와스디도 에스더도 주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막론하고 사용하세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누구든지 사용하시는 겁니다.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은 언제든지 선수 교체를 하시기도 해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전혀 의외의 인물을 사용하신다는 거죠.
인간의 계획과 인간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죠.

▲자 2장 중간 부분에서 드디어 에스더의 이름이 이제 나오는 거예요.
자 1장에서 별 일이 다 일어났어요. 시간도 몇 년 상당히 흘렀어요.

1장과 2장사이는, 성경에 언급된 것 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뭘까요?
많은 사건과 그 숱한 사건들이 어느 방향을 항하여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지금 에스더가 딱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는 에스더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유대인 한 여성을 지목하고 있어요. 에스더는 완전히 수동태에 있어요.

에스더가 뭐 한 게 없어요. 나선 게 없어요.
스스로 어필하지 않았어요. 이력서 내지 않았어요.
내일 본문을 보면 더 분명해져요.

하나님이 그녀를 이끌어 내실거예요. 에스더는 수동태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수동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면, 우리는 당황할 게 하나도 없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섭리대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 담대함이 생겨요.

여러분 이게 (섭리는) 바람입니다. 소위 말하면 바람 wind 이에요.
사업도 바람이고요,  목회도 보니까 바람이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만든 바람이 아니에요.
바람을 누가 만들어요? 하나님이 불게 하시죠.

서핑을 아무리 잘 해도 바람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
파도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섭리의 화살은 에스더를 향하고 있는 거예요.
바람이 그쪽으로 불고 있는 거예요.

이건 희한한 일이에요, 설명이 안 되는 일입니다.
섭리가 있으면 모든 장애물을 뚫고 가는 거예요.
그 섭리가 뚫고 가는 거예요. 섭리가 돌파하는 거예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가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요.
어떻게 살던, 이렇게 살든 / 저렇게 살던 다 거기서 거기예요.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하든지 / 실패하든지 .. 그냥 도토리 키재기 입니다. 

우리끼리 평가하고 키재는 것은 별 의미 없어요.
하나님의 판정,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결정이 되는 거죠.

시간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 섭리가 이루어지는 일에, 부름을 받은 자가 복된 인생이죠.

하나님의 섭리 안으로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바사의 왕도, 와스디 왕후도, 에스더도, 모르드개도, 하만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거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살아갈 때,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부지런히 사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겸손하게 반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을 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손에 의해 사용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에, 자주 자주 절망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방향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을 때
여러분, 이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섭리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붙들어야 돼요.    *이 설교의 주제

요셉은 밑바닥으로 계속 흘러갑니다.
자기가 저항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인생이 자꾸 흘러가는 거예요.
요셉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그는, 그때 하나님의 섭리를 붙들어요.
나중에 요셉의 최종적인 고백이 뭡니까? 그 유명한 창50:20절 말씀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온갖 잡다한 일이 다 일어났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끊임없이 역사 하시므로
그것을 더 섭리의 방향으로 흐르게 하셔서
오늘 날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는
그 섭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와중에 별 우여곡절이 많이 일어나요.
그 무수한 장애물을 통과하게 하시고, 돌파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돌파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돌파하게 하셔야,
하나님이 일을 이루어 내셔야, 우리가 승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가십니다. 

만약 우리 열심으로 다 되었다면, 우리는 여기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을 거예요.
자기의 열심만으로 살아간다면, 인생은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갈수록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고, 세월이 흐를수록 주만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가심에
때를 따라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그 섭리의 한 가운데서 우리를 사용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