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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5장,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LNCK 2022. 8. 8. 15:32

 

성경 본문 주제   그 중 경고
히 1~2장 선지자, 천사와 예수님   2:1~4
히 3:1~4:13 모세와 예수님   3:7~4:2
히 4:14~8:5 대제사장과 예수님   6:4~8
히 8:6~10장 율법과 예수님   10:26~31
히 11~13장 믿음의 조상들과 예수님   12:14~29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히4:14~8:5           여러 설교 정리

 

저자는, 그리스도를 천사와 비교(1~2장)
모세와 비교한 후에 (3장)
믿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한 후 (4장)
이제 대제사장(아론 계열)과 비교하며,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을 설교합니다. 

 

히4:14~8:5절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5, 6, 7장에서 '장별로' 살펴볼 것인데요,   (*실제로는 4:14~부터 시작)

먼저 히4:14~8:5절의 줄거리, 큰 그림을 살펴보겠습니다.

 

유대교의 자랑인 세 번째 유산인 대제사장,

그 레위계 대제사장과,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비교하고,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믿다가 배도하고 부인할 때

그가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크겠느냐! .. 하는 내용이, 히브리서의 (5논증 중) 세 번째 논증입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과, 레위 계열 대제사장의 비교

 

①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

 

②레위지파의 제사장은 때가 되면 죽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지 않는 영원한 대제사장

 

③대제사장 예수님은 (레위 계열 대제사장과 달리) 죄가 없습니다.

 

④예수님은 매일 번제가 필요 없이, 단번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⑤레위 계열 대제사장은 땅의 모형이고, 예수님은 하늘의 실체, 참 대제사장입니다.

 

⑥레위 지파 대제사장들은, 제사장들은 옛 언약의 중보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되었던 새 언약의 중보입니다.

 

그래서 이 세 번째 논증 (인간 대제사장과 참 대제사장) 의 주제 구절은 이렇습니다.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이렇게 참 대제사장과, 레위 계열 대제사장을 비교한 다음에

세 번째 경고를 이렇게 내립니다. (히브리서는 5개의 논증과, 5번의 경고가 그 줄거리죠)

 

    6:4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것이 히4:14~8:5절의 큰 그림이자 줄거리였고요,

 

▲그 중 오늘 본문 <히5장의 개요>

:1~4절,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에 대해 설명합니다.
:5~10절,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단락이 핵심이죠.

11~14절, 젖을 먹는 자와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사명이라면 (위에서 아래로)
제사장은, 사람의 뜻을 모아서 위로 하나님께 전달하는 사명입니다. (아래서 위로)

 

특별히 대제사장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속죄 제사로 영단번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주님의 그 대제사장 되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또 내가 연약해서 혹시 범죄할 지라도,

우리는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그 속죄 사역을 또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표현한 성경은, 히브리서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탁월성을 강조하는데요...

▲서론 / 성경을 <권별로, 장별로 본문 전체를 해석>해야하는 이유는
성경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기 위함입니다.

안 그러면, 자기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거기에 적당한 성경구절을 성경 66권 가운데 몇 구절을 족집게로 뽑아내게 되는데, 

그게 성경 본문의 메시지와 우연히 일치 될 때도 있으나, 
많은 경우, 본문의 메시지와 상관 없는.. 그야 말로 ‘자기 말’을 하면서
자기 논리의 배경 및 뒷받침으로 성경을 끌어들이거나, 성경을 이용하는 (신성모독적) 과오를 범하기 쉽습니다. 

과거에 어느 교장 선생님은, 꼭 훈시를 하실 때마다 성경구절을 한 구절씩 인용하셨는데,
본인은 믿지도 않으시면서, 그렇게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연설하는 것이, 
전체 조회의 훈시 때, 연설이 한층 고상해 보인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극단적 예이긴 하지만, 설교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죠. 
전후 문맥 다 잘라버리고, 그 구절만 빼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워도, 
성경 본문 전체를 해석하고, 
그 전체의 밑그림 가운데서, 
본문이 증거하는 메시지를 찾아서 설교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성경적인 설교, 본문 중심의 설교’가 되겠습니다. 저도 열심히 분발하려 합니다.

특히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요5:39
그런데 권별로, 장별로
본문 해석을 충실히 하지 않으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교훈’ 위주로, 성경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이나 설교가, 노자, 장자, 논어, 맹자와 비슷한 수준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즉 삶의 요령이나, 생활의 지혜를 주는 책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죠.

△그런데 요즘은 PC가 있으니까, 성경 66권 1189장에 대한
<자기만의 주석>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아이큐가 300이 넘어가지 않는 이상
성경의 모든 구절에 대한 주석을 다 암기하기란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서, 계시록 등 
5년 전에, 10년 전에 연구해 놓은 자료나 주석이 있으면, 
의문이 생길 때마다, 또는 본문을 해석할 때마다
퍼뜩 자기 연구자료를 꺼내서 보면... 참 이해가 쉽습니다. 
(물론 그 자료는, 한 번 연구한 이후로는, 계속 때마다 업데이트 해나가는 거죠.)


◑해석 및 적용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은 5:5~10절에서 논증합니다. 간략히 살펴보면

5절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본절에서 대제사장으로서의 아론과 그리스도가 비교되고 있습니다. 
양자는 스스로 대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우월하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본절에서 시2:7인용

본절에서 '예수'라는 이름 대신에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이란,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멜기세덱과 같은 형태의 제사장이시라는 의미이며, 아론 계열과는 차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멜기세덱에게는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다는 거죠.

아래 표는, 참 대제사장과 멜기세덱 제사장의 유사점입니다.

 

그리스도 멜기세덱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음
(요8:58, 계1:4)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음(7:3)
대제사장이시며 만왕의 왕이심
(계19:1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면서
살렘 왕임(7:1, 창14:18)
생명의 떡과 포도주로 예표되는 자신의
몸과 피를 인류의 대속물로 주심
(마26:26-29)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줌
(창14:18)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레위 지파를 좇는
제사장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제사장이 되심(5절)
레위 지파 이전의 인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됨(7:1)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유사성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신 존재임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훨씬 앞서고요.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셨으며 인간이 느끼고 당하는 감정이나 어려움을 
똑같이 느끼시는 성육신하신 대제사장이심을 시사합니다(4:15).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고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죠. 

이는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며, 순종의 과정 속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본절은 고난받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본질이 불완전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해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온전케 되셨음을 뜻합니다.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6절) 
그리스도께서 율법하에 있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과는 다른 
약속의 은혜에 의한 (더 우월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나타냅니다.

 

△관련 설교 (적용)

 
4:14~16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신다 click 

-그 분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시고, 그 분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동정하시는 대제사장
'우리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시요...' (개역성경엔 ‘체휼’)
예수님은 우리를 동정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한 것을 다 아십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더욱이 완전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연약, 그 자체입니다.
얼마나 연약함이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불쌍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이렇게 동정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동정한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쉬운 것 같아도 사실은 어렵습니다.
 
왜 어렵습니까? 그 사람의 형편을 먼저 이해한 후해야 동정이 따라 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이 신고 있는 신발을 함께 신어봐야 비로소 동정하게 됩니다.
즉 그 사람의 처지를 내가 비슷하게나마 경험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동정한다는 것이 호락호락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안 당해보면 모릅니다.
어떤 자매가 결혼하고 신혼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남편이 중병을 앓게 되었을 때
교역자가 찾아가서 슬퍼하고 있는 자매에게
'참, 안됐지만 주님을 바라보세요. 우리 주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라며 위로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허황된 소리가 되기 쉽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기가 안 당해 봤기 때문에
그 새댁의 마음에 고통과 슬픔과 두려움이 얼마나 엄청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교역자 자신이, 과거에 결혼했는데 반년도 안 되어
자기 아내가 중병에 걸려 병원에 장기 입원하는 고통스런 상황을 직접 경험했더라면,
비슷한 어려움을 당하는 그 자매를 이해하게 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 설교 중 인용)

 

5:1~10  제사장의 마음으로 click 

-모세가 선지자라면, 아론은 대제사장이었고, 교회에 이런 역할도 필요합니다.

대제사장 아론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모세가 불이라면, 아론은 물입니다.
모세는 화를 내고 책망하기도 하면서 백성들과 싸우고
심지어는 하나님께도 거침없이 대듭니다.
 
하지만 아론은 다투거나 꾸짖기보다는 물처럼 사람들을 받아들입니다.
모세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에 종속되어 있다면 아론은 좀 더 안정적입니다.
모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고,
아론에게 중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모세가 진리의 수호자라면 아론은 공동체의 수호자입니다. 그래서인가요?
모세는 늘 하나님과 가까이 서있는 반면, 아론은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모세는 늘 음성을 높여 명령하고 지시하지만,
아론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을 위로합니다.
 
대제사장은 깨진 관계를 복원하고, 조화를 회복시키는 데 헌신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창조적 균형을 유지하면서,
출애굽 공동체를 지탱해낸 두 기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몸에 이 기능을 다 가지셨죠.

 

우리 성도와 교회는,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제사장 역할을 성실히 감당해서,

하나님 앞에서 늘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 중보하며, 속죄의 기도를 드리며,

사회와 나라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에.. 제사장 적인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5:5~9  전적 순종 click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통곡과 간구를 “올려드리신” (제사장의 제사 역할) 것을 본받읍시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대제사장직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신성과 인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서 33년을 사셨습니다.
 
육체를 가지셨기 때문에 대제사장직의 직분이 무엇이냐면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는 것입니다.
죽는 게 힘듭니다. 순종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육체로 계실 때에' 라는 말이 무엇을 품고 있을까요?
 
그가 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들이시지만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있는 동안
그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연약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대제사장 직책을 완수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또 대제사장직분을 완수할 수 있고 순종을 끝까지 하십니다.
 
순종이 필요한데요, 육체가 연약하기 때문에 순종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종을 위하여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도 직책을 받았을 때 힘들면
그와 같이 기도하여 순종을 완성하자.. 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하셨을까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로..'
바꾸어 말하면 통곡기도와 눈물 기도로 기도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아주 놀라운 단어가 저를 기쁘게 하는데
제가 10년 동안 세계를 다니면서 기도자 학교를 하면서
우리의 기도가 제물이 되어
내가 하나님 앞에 영국을 위하여 재물로 받으셨고 영국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여기에 나왔습니다.
"올렸고"란 단어인데 아주 중요합니다.
 
‘올렸다’하는 단어는
‘올려 드렸습니다’라는 제사장적인 용어입니다.
 
‘어린양을 잡아 제물로 드렸다(올렸다)’ 인데
‘나의 눈물기도와 통곡기도를 제물처럼 올려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 기도자 학교의 테마인데 주님이 그렇게 바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이 어린양이시지요.
그런 데 자신이 죄가 죽게 되는 그 과정에서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순종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으니까
 
예수님 자신이
통곡기도와 눈물기도로 하나님께 올려드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올렸고’란 단어는 "프로스페로"란 말인데 희생제물을 바칩니다.
일례로, 밤새도록 자식을 살려달라는 어머니의 눈물기도를
하나님이 희생제물로 받아 그 자식을 살렸다면
이것이 위대한 제사장 적인 '올려드린' 기도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700일 연속 기도를 하나님이 이렇게 기도의 제물로 받으셨음을 믿으십시오.

 

 

5:7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하다 click 

-대제사장으로 통곡과 간구로 부르짖어 기도하신 예수님을 본 받읍시다!

 

5:8~9     걸음씩    온전함으로    P2    / 잭푸닌   click 

-대제사장으로서 순종하는 삶을 살려면, 고난이 뒤따르지만,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됩니다 

 

 

 

◑절별 해석 (더 자세한 해석) ...........................................................................................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자는 본절에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 직무의 세 가지 특징을 언급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된 자여야 한다. 
그래야만 백성들의 입장과 처지를 잘 이해하고 그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대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중재하는 중보자(中保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대제사장은 중보자적 역할을 이루기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된다. 

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본절은 대제사장에 대한 설명이다. 대제사장은 타인의 무지와 미혹을 용납할수 있는 자이다. 
'무식하고'의 헬라어 '아그노우신'은 '알지 못하다' 혹은 '모르고 죄를 짓다'라는 의미이며 
'미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노메노이스'는 '잘못 인도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10:26의 '짐짓'(헤쿠시오스) 즉 의도적으로 범죄하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로 
모르고 짓는 우발적인 죄를 시사한다.

대제사장은 이러한 성품으로 무지나 실수로 죄를 범한 자들에게는 동정을 베풀어 용납하였으나
(9:7, 레4:2,13,22,27, 5:2-4), 
의도적으로 범죄한 자는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제외시켰다(민15:30,31). 

대제사장이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동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다른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서 범죄할 수 있는 '연약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으며, 
또한 일반 제사장들보다 더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으나(출28: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죄지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율법은 대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 대비하여 
속죄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해 놓았다(레4:3-12;9:7).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일반 회중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직계 권속을 위하여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행하는 제사 중에 드리는 기도는 세가지이다. 

1)자신과 자기 가족의 죄를 위하여(3:8). 
2)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의 죄를 위하여(4:2). 
3)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하여(6:2). 

구약시대 대제사장에 대하여는 4:15에서 예수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죄는 없으시니라'고 주장할 수 없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과 그리스도의 차이는 
바로 '죄 있음'과 '죄 없음'에 있었다.

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대제사장의 직분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직분이 세습되었다(출28:1;민3:10;18:1). 

아론 집안 외의 사람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될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직접 부르셨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직분을 업적이나 성품 혹은 물질에 의해서 획득할 수 없는, 
타인과 동등한 연약한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임명(任命)된 존재이다.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저자는 앞에서 모세와 예수의 유사성을 비교하여 
모세와 예수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서 유사성이 있었으나(3:1-2), 
우월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음을 논증하였다(3:3-6). 

같은 방법으로 본절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아론과 그리스도가 비교되고 있다. 
양자는스스로 대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우월하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거하기 위해 시2:7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하늘의 특권을 지닌 자이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존재임을 제시한다. 

한편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라는 이름 대신에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저자는 앞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대제사장이심을 
논증하기 위해 시110:4을 인용하고 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이란,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멜기세덱과 같은 형태의 제사장이시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에게는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은 다음과 같은 유사성을 지닌다.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유사성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신 존재임을 논증하고 있다. 

아론계통의 대제사장은 오로지 제사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며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로서 훨씬 더 우월하시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본절은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음을 시사한다(2:14-18).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셨으며 인간이 느끼고 당하는 감정이나 어려움을 
똑같이 느끼시는 대제사장이심을 시사한다(4:15).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본 구절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 중 겟세마네에서 드린 고뇌에 찬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일 것이라고 주장하나(눅22:39-46) 
예수의 지상 사역 중 어느 특정한 순간에 적용시키기 보다는 
그의 대제사장적인 사역 전체에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에서 '올렸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세넹카스'는 
희생 제물을 '바치다'라는 의미의 제의적(祭儀的) 용어이다. 
이것은 1절에서 언급된 대제사장의 제사와 평행을 이룬다. 
대제사장이 속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물'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올린 '간구와 소원'을 의미한다.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경외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라베이아스'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있다. 
1)혹자는 '두려움'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기도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예수는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을 느끼셨으나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하셨다. 

2)혹자는 '율라베이아스'가 '잘'에 해당하는 접두사'유'(*)와 '붙들다'는 뜻의 헬라어 
'람바노'의 합성어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본문은 시22:24의 '부르짖을 때 들으셨도다'와 상응된다. 
이것의 일례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을 들 때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
라는 예수의 기도가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실상 예수의 기도의 목적은 고난의 잔을 옮기는 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었으므로(막14:32-36) 그의 기도는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하나님은 예수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 
이 사실을 저자가 본절에서 밝히는 이유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의 제사가 
항상 받아들여진 것은 아닌 반면에, 예수의 기도는 받아들여졌음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본문은 앞에서 언급된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과 연결된다. 
'죽음에서' - 예수께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예수를 지배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활을 통해 죽음의 영역을 극복하셨음을 시사한다.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고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마덴 아프 혼 에파덴'은 
헬라문학에서 오랫동안 쓰어진 관용구로서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며 순종의 과정 속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본절은 고난받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본질이 불완전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해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온전케 되셨음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통해 구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그의 백성의 대제사장으로 완전하다는 인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이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온전케 되신 결과로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본절의 '순종'은 앞절에 언급된 예수 자신이 행하신 '순종' 
즉 죽음의 고난을 받기까지 행한 철저한 복종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한 것과 같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그러한 순종을 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의 헬라어 '아이오니우'는 '끝없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참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참하늘에 속한 것임을 암시한다.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온전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칭하심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6절) 
그리스도께서 율법하에 있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과는 다른 
약속의 은혜에 의한 (더 우월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시사한다.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저자는 본절에서 '젖을 먹는 자'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한다. 
어린아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피오스'는 '유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올바른 언어를 구사하거나 정상적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결핍된 상태나
옳은 것을 분별하는 도덕적인 기준이나 '의'에 관향 원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의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신자들의 올바른 삶으로서의 '의'를 의미하며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의'가 된다는 측면에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의미한다.

젖을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위해야 하는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단단한 식물'은 문맥상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말씀으로(7:1-10:18) 
초신자들과 같이 어린아이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진리를 가리킨다.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는 자에 대해 저자는 본절에서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장성한 자’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어린아이'에 비해(고전3:1;13:11) 
상대적으로 온전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를 시사한다.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는 훈련(연단)과 진리를 통해 성숙한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게 되며 
그 분별력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여 범죄치 않으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