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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에 능통한 사람들을 책망함

LNCK 2022. 8. 25. 15:40

◈구약 말씀에 능통한 사람들을 책망함     약3:13~18      여러 설교 정리

 

◑본문의 정황

 

본문의 배경을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면, 왜 이런 본문의 권면을

야고보 사도가 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본문의 배경, 또는 정황을 유추하자면 이렇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게 된 것은,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행8:1

야고보서는, 그때로부터 약 6~10년이 지난 AD 40~45년 사이에 쓰여졌다고 보는데요. 주1)

 

본서 야고보서가 신약27권 중에 가장 먼저 쓰여진 성경이 맞는 것은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이렇게 ‘회당’이란 말이 나오는 것은, 당시 기독교가 유대교와 상당히 공유하고 있었던

초대교회 초기 시절이라는 증거이고,

 

본문에 또 하나의 증거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지혜와 총명’입니다.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지혜와 총명’은, 잠언과 전도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혜와 명철’인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아주 중요한 가치이며, 매우 익숙한 표현입니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언' 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고, '지혜'라는 말도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본서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주로 ‘유대교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이죠.

 

물론 이제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난 핍박으로,

이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로 흩어져서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방인 배경의 그리스도인들’도 새롭게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 ‘헬라파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제하는 일 때문에,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작은 소동이 일어나서.. 서둘러 일곱 집사들을 세운 일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행6장

 

정리하면, 지금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크게 3개 출신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 크리스천

-헬라파 유대인 크리스천

-사마리아, 소아시아 등지의 이방인 크리스천

 

▲지금 본문 약3:13~18절에서, 야고보는 어떤 성도 무리들을 혼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3:14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6

 

뭔가 초대교회 공동체들 속에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거죠.

그 다툼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초대교회가

-히브리파 유대인

-헬라파 유대인

-사마리아, 소아시아 등지의 이방인

이렇게 출신 배경이 서로 다르다 보니...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추정하자면,

어디까지나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이랬을 개연성이 크죠

 

지금 유대인들이 ‘지혜와 총명’을 자랑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탈무드’를 온 세계에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모세오경을 자랑하며, 성경도 줄줄줄 외고 다녔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앞서 (유대인들을) 이렇게 야단친 적이 있습니다.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그 연장선상에서 본문(3:13~17)에서 (*본문을 4:2절까지도 잡을 수 있음)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너희(유대인 크리스천)가 지혜를 자랑하지만,

그게 다툼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면.. 그게 참 지혜가 아니라는 거죠. - 이게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자기의 지혜와 총명으로.. 가르치려 들고, 자꾸 자랑만 하여, 다툼과 분열을 일으켰기 때문이죠.

 

△앞서 초대교회 감독(수장) 야고보 사도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이렇게 혼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와 소아시아 교회들이 이방인들이 주축이라 볼 때)

 

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지금 예루살렘의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주로 난민이 된 상황이고

소아시아 지역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주로 그 난민들을 받아주는 상황에서,

 

이방인 크리스천들 중에, 일부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그런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며..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혼냈습니다.

그게 약2장의 주된 내용이죠.

 

이제 약3장에서는 반대로, 야고보 사도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혼내고 있습니다.

-너희는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 3:1

-교회에서 성경 지식으로 다툴 바에야 너희가 가진 지혜와 총명을 자랑하지 말라 3:13, 14

(행15장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릴 무렵에, 이방인 교회들 가운데 구약 율법 준수 문제로 큰 다툼이 있었죠)

-참 지혜란 ‘성결하고 화평한 지혜’이다 :17

 

정리하면, 구약 유대교의 유산인 지혜, 이게 엄밀히 말하면 구약 오경인데,

그걸 자랑해서 다툼을 일으키면.. 참 지혜가 아니라는 거죠.

 

참 지혜는..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지혜이다.. 라고

야고보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에 이은 둘째 계명은

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잖아요. 레19:18, 마22:39

 

오늘날 나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여러 번 통독해서, 성경지식이 많은 것?

내가 새벽기도를 오래도록 해서, 영성이 깊은 것?

 

내가 그 무엇으로 스스로 자랑한다 하더라도,

다툼, 시기, 분쟁을 하고 있으면.. 그건 지혜도, 신앙도 아니요, 자랑할 거리도 못 된다는 거죠.

참 지혜, 참 말씀, 참 자랑, 참 신앙은.. 이웃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권면입니다.

 

야고보서는 줄곧 ‘행함으로 온전해 지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약2:22

본문 3:13~17에서도, 여전히 지혜, 총명 이런 유대인의 전통과 자랑들이

행함으로 온전해 져야 함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약3:17~18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적용

 

▲1. 참된 지혜는 인간관계를 세우는 지혜입니다.

 

마귀에게서 온 지혜는.. 인간관계를 나눕니다.

우리 마음속에 솟아난 지혜가

위로부터 난 지혜인지, 땅에 속한/마귀에 속한 지혜인지를 분별하는

지침이 무엇 입니까?

 

그 지혜를 사용하는 결과로

-이웃들이 결속 되었는지

-이웃들이 나누어 파당을 이루었는지.. 살펴보시면 됩니다.

 

‘마귀devil’의 원어는dia+ballo곧 ‘사이를 가르다’는 뜻 입니다

마귀의 역사를 극복하지 못하면 부부가 분리되고, 부모와 자식이 등을 지고,

목사와 교우 들이 반목합니다.

 

노사가 대립하고 인간관계가 파열음을 일으키는 모든 현장이

바로 영적 전쟁터입니다

이 현장들에서 일하는 대표적인 귀신들이 바로 시기와 다툼의 영들입니다

 

약3:16절을 보십시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약3:14~15에서, 시기와 다툼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게서 온 지혜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다 좋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만 신령하고 좋은 것입니다.

 

어쨌든 시기와 다툼, 즉 마귀적인 지혜를 사용한 결과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6

 

△십자군과 성 프랜시스

최근 출간된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이야기>를 보면

십자군 전쟁 당시 그들이 아무리 그럴듯한 정당한 명분의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소위 십자군 지도자들 사이에, 얼마나 시기와 다툼의 영이 가득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약 6차에 걸친 원정 가운데, 성지 탈환에 성공한 적도 거의 없습니다.

성지 탈환 실패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왜냐하면, 1차원정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했는데,

그 성 안과 주변의 약 1백만의 사람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대량학살 했습니다.

 

만약 6번 다 성공했더라면, 그 대량 학살이 6번 계속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지탈환 안 하는 것이.. 차라리 ‘하나님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성지를 탈환할수록.. (그 명분을 이루는) 대량학살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으니까요.

 

그러나 같은 시기 13C에, 십자군과 정 반대의 길을 걸어간 성도가 있었는데,

아씨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와 그 공동체 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들의 평화의 기도를 기억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며..

자신을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가.. 오늘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한국교회에

아니 우리 사회에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기도야 말로, 진정한 지혜에서 나온 기도였습니다.

 

오늘날 힘이 커진 기독교는 *2000~2010년 상황

무슨 때마다 기독교의 세력 numbers을 과시하려 하고,

기독교에 대항하는 이단, 안티와 같은 세력들에 대해서는

마치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는 듯한.. 마귀의 거대한 유혹에 직면해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물질, 인맥, 세상 권세를 등에 업고 싸우려는 것은.. 마귀적 지혜입니다.

그러나 프란시스처럼, 평화의 기도를 올린다면.. 그것은 위에서 난 신령한 지혜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는 믿음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한 영국인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이 되면 늘 자기의 가족을 데리고

교회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루는 영국인 귀족이 그 나라의 소년 한 명을 하우스보이로 채용했습니다.

소년은 조용한 가운데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 귀족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뜻밖에도 영국인 귀족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이 집에서 일한 지 꼭 석 달이 지난 날입니다.

제 마음 속에 뜻한 바가 있어서 이제는 이 집을 떠나야 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저를 잘 돌보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국인 귀족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 막 정이 들려고 하는데

그만 두고 떠난다고 하니까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년을 이렇게 달래었습니다.

"얘야, 월급이 적다면 내가 좀 더 올려 줄테니, 떠나지 말고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느냐?"

 

그러자 소년은 놀랍게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돈 때문에 이 집을 떠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이 집에 오기 전에 한 가지 결정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독교를 믿어야 할 지, 그렇지 않으면 회교를 믿어야 할 지 망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작정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집에 가서 한 3개월 일해 보고,

그 다음 회교를 믿는 집에 가서 또 3개월 일해 보고 난 뒤에

제가 믿을 종교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3개월 동안 기독교를 믿는 집에서 일했으니까,

이제는 회교를 믿는 집에 가서 일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오."

 

소년의 말에 영국인 주인은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는 호소하듯이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왜 진작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 주지 않았느냐?"

그러나 지나간 다음에 그렇게 말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일화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실천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삶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위로부터 난 지혜'를 추구해야 합니다.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위의 '위로부터 난 지혜'가 성경말씀을 뜻하기도 하고,

'지혜의 말씀'을 뜻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12:8

 

'지혜의 말씀'이란.. 어떤 상황에서 위로부터 딱 주어지는 통찰력, 하나님의 음성을 뜻하며, 그게 말씀일수도 있죠.

'지식의 말씀'이란.. 어떤 상황에서 갑자기 생각나는 '성경 말씀'을 뜻합니다.

 

본문의 교훈은, 우리가 '성경 지식'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난 지혜(의 말씀)'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아래는 그 예를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이삭 목사께서 직접 만난 어느 북한 성도님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도살당할 양들처럼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도

죽기까지 주님께 순종한 이 북한성도들의 이야기는

1995년 북중 국경의 한 중국도시에서 벌어진 실화입니다.

 

“여보세요?”

1995년, 제 이삭 목사가 미국에 들어가 있는데

북중 국경에서 사역하고 있는 형제에게서 미국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통화내용은 북한성도의 탈출을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동네전화를 해가지고, 그때는 핸드폰이 없을 시절이었으니까요.

제가 연락을 해 놓고는, 북한에 그 성도들이 있다는 그분들을 나오라고 그래서,

점심을 같이 할 수 있도록 약속을 했습니다.

 

제가 도착을 했습니다. 그분들은 4명의 어른들이 나왔습니다.

제일 나이 많은 분이 79세, 그 네 분의 늙은 분들이 나오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질문이 뭐였느냐면,

“왜 나오시려고 그러십니까?”

요 말 한 마디를 하는데 뜻밖에 그 노인분이

“찬송 한번 마음껏 불러보고 싶어서..”

 

더 이야기할게 없어서

“알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언제 나오시겠어요?” 그랬더니

 

“빠를수록 좋소.”

“몇 명이나 되세요?”

“예순 다섯 명이요”

 

“어른들만 입니까?”

“아니야, 애도 있어. 내 손녀도 있어. 정보가 들어왔는데, 우리 모두 잡혀서 수용소로 끌려간다나봐”

 

“알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리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이 노인 분이 “잠깐만”

“네?”

“잠깐만 내가 나가서. 하나님께 직접 물어보고 결정하면 안 돼?”

 

“그러셔요.” 기도를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뚜벅뚜벅 걸어 나가신 그 분은, 한 10분 만에 다시 돌아오셨는데

발을 땅에 질질 끌며 돌아오시더라고요.

 

“왜 그러세요?”

보니까 그 분은 음성이 벌써 달라지셨습니다.

 

“내가 나가서 (하나님께) 물었소.

‘하나님, 저 미국에서 온 이목사 라는 사람이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따라갈까요?’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를 북한 땅에 남겨놓은 줄 아느냐?’

 

그러니까 노인이 그 음성을 듣고,

‘우리가 그럼 매 맞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에요?’

 

‘물론이지’

‘아니 하나님, 그러면 우리가 굶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에요?’

‘물론이지’

 

‘우리가 잡혀서 수용소에 끌려가게 되었는데요. 하나님?’

‘몰라서 묻냐?’

 

이 말 한마디에

‘네 하나님.. 순종하겠습니다.’”

 

저는 그 노인 분과 헤어지기 전에 인사를 하려고, 그 분을 끌어안으려 했습니다.

그 분은 끌어안으며 인사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릎을 꿇고, 내려다보는데

신고 온 신발에 구멍이 뚫려서, 엄지발가락이 삐져나와있었습니다.

그 엄지발가락에 제가 입술을 대고 키스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우는 동안, 제 머리에도 뭐가 떨어지더라고요.

그 할아버지도 울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가 일어나서 인사를 다시 하고,

떠나면서 “안녕히 계세요.” 그랬더니

“무슨 인사가 그러냐”

“왜요?”

 

“천국에서 만나자! 그래라”

“네,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를 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몇 걸음 떠났는데, 등 뒤에서 그 분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롬8:35

 

*추천 글 / 사역자의 교만과 성경  rfcdrfcd.tistory.com/15974388

 

◑절별 해석 (특별한 내용 없음) ..........................................................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지혜'애 해당하는 헬라어 '소포스'는 유대인들이 교사, 서기관, 랍비를 가리킬 때 사용한 전문용어였으며

'총명'의 헬라어 '에피스테몬'도 특별한 지식이나 훈련을 받은 전문인을 가리킨다.

 

이러한 '지혜와 총명'은 1절에서 언급한 '선생이 되려하는 자들'을 암시한다.

 

한편 '지혜의 온유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프라위테티 소피아스'는

문자적으로 '지혜로부터 나오는 온유함으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지혜'는 헬라적 지혜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실제적인 히브리적 개념의 지혜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온유함'은 약함이나 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포괄적인 포용성으로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성취될 수 있는 부드러움을 가리킨다(갈 5:22,23).

 

야고보는 본절에서 선행과 온유의 근원을 믿음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지혜로 보면서,

선생이 되려는 자들에게 선생을 영예와 지위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삼지말고

참된 선생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서 비롯된 온유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행해야 함을 권면한다.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젤론'('시기')은 신약성경에서 긍정적으로도(요2:17), 부정적으로도 사용된다(행 5:17).

본절에 사용된 '젤론'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이기적인 열정을 의미한다.

 

또한 '다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리데이안'은 '이기적인 야망'의 의미로

자기나 자기편의 특권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것으로 인해서 '당파심', '불화'가 일어나기에

바울은 '당파심'이나 '불화'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전3:3, 고후 12:20, 갈 5:20).

 

당시 본서의 수신자들중에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과 열정 그리고 야망에 빠져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편을 만들고 당(黨)을 지어 홀란스럽게 만들며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런 자들을 향해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에 빠지지 말고 진리를 거스려 교만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즉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지혜는 세가지 특성을 지닌다.

 

'세상적이요' 이것은 하늘과 비교하여 부정적인 의미의 땅을 지칭하는 표현으로(고전 15:40, 고후 5:1)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기보다는 세상의 제한된 사고와 견해로 평가하는 지혜를 나타낸다.

이러한 지혜는 세상의 인침을 받은 일련의 모든 활동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전 1:20, 2:5,6).

 

'정욕적이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키케'는 '영적'인 것과 비교되는 '육신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 즉 중생하지 못한 자들의 특성이다.

 

'마귀적이니' 이것은 참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하지만(잠 2:6)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에 사로잡혀 중생하지 못한 자들이 소유하는 지혜는

마귀에 의해서 그 행동과 생각을 지배받고 선동됨을 나타낸다.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에

사로잡힌 거짓된 지혜의 특성을 정의한 것(15절)에 대한 근거임을 시사한다.

 

'시기'와 '다툼' 즉 이기적인 욕망과 열정 그리고 야망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인 생명과 사업을 파괴시키는 무질서와 악한 행위만 생산할 뿐이다.

그러기에 그러한 것을 유발시키는 거짓된 지혜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것이다(15절).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본절은 앞서 언급된 거짓 지혜와 대조되는 참된 지혜

즉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지혜의 특성에 대한 진술이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지혜는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천적인 것이다.

 

'성결하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그네'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지혜의 기본적 특성으로

성적인 순결의 의미보다는 모든 악한 태도나 동기가 없음을 의미하며

'거짓된 지혜'의 이기적인 동기와 대조를 이룬다.

 

'양순하며'

'잘 순종하는'이나 '유순한'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만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것과(14절) 대조되는 것으로

위로 난 지혜는 하나님께 잘 순응하는 성품을 소유케 한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는 상관 관계를 갖는다.

'긍휼'은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자들을 실제로 도와 주는 마음 자세로

이러한 긍휼을 드러낼 때 그 결과로 선한 열매를 맺게된다(마 7:17,18).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거짓된 지혜의 당을 만들고 구별하며

자기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위로 난 지혜는

구별이나 위선이 없는 공평함과 신실함이 가득하다.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본문은 '위로 난 지혜'에 대한 결론이다.

 

'의의 열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포스 디카이오쉬네스'는 '의로 이루어진 열매'를 뜻한다.

 

'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화평'과 긴밀한 상관 관계를 지닌다(시 85:10, 사 32:17).

 

이러한 의는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에서 비롯된 무질서와 악한 행위에서는 생겨날 수 없으며

오직 화평 가운데서 맺어질 수 있는 열매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인 화평을 소유하고 닮은 자녀이기에

화평을 이루어 '의'를 이루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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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렇게 서신을 써서 회람시키는 것이, 당시 문화였나 봅니다.

바울 서신을 위시해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3서, 유다서, 계시록 등

사도들이 서신서를 썼고, 이 서신서들은 대전-대구-부산-제주 .. 이런 식으로

흩어진 교인들에게, 교회들에게 전달, 회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