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Unlocking the Bible 1&2 Peter 베드로 전후서 P2 / David Pawson

LNCK 2022. 10. 21. 16:22

Unlocking the New Testament Part 28 - 1 & 2 Peter 2 - YouTube 

<동영상 한글 자막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래 번역문을 참조해서 다른 분들이 만들어 보세요!>

 

◈Unlocking the Bible  1&2 Peter 베드로 전후서 P2  

 

오늘 우리가 ‘베드로전서’의 세 개 주제를 다시 논하겠습니다.

전회에서 우리가 구원은 견고한 구원의 기초가 필요하며

그래야만 압박에 대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것을 논했는데, 고난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이 서신의 중점은 뜻밖에도 순종인데,

순종을 배워야 하고,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강조하는 순종은 고난을 대면할 때 뿐만 아닙니다.

 

1)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선은 위의 권세있는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시민이고, 신하(아랫사람)입니다.

그래서 황제를 존중해야 하고, 왕과 통치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국법이든 혹은 지방법이든 크리스천은 법을 지키는 시민의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응당 법을 지키는 시민이어야 하고, 세금을 기쁘게 내야 합니다.

 

당시 바로 인두세 때문에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수입에 대해 납부해야 할 세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응당 기쁘게 납세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납세에 있어서 불평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위의 사람을 존경해야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응당 충성된 시민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권세자들에게 하는 순종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죠.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행5:29

이 말은, 베드로가 거리에서 설교하지 말라고 권세자들이 명했을 때

베드로가 한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러므로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는 데는 제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부도덕한 일이나

혹은 하나님 율법에 위반되는 일은 명할 때는, 복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크리스천은 반드시 충성된 백성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반역해서 체포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권세자들에게 너무 공격적이어서 체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부 체제 반역자들) 초대 교회에서

첫 번째로 고난 받은 사람들의 이유입니다. *일부 그런 사람도 있었겠죠.

 

2) 두 번째로 초대교회에서 고난 받은 사람은

비기독교 주인의 학대를 받는 노예들이었습니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매우 불쌍합니다.

왜냐면 그 사람 전체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노예가 되면 자신의 돈이 없고, 자신의 시간이 없고, 아무런 권리도 없습니다.

 

많은 주인들은 노예를 학대합니다.

만약 노예가 크리스천이 되면, 주인이 그를 더욱 나쁘게 대했는데,

왜냐면 주인들은 그들이 노예를 끌고가서 큰 집단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에게 더 많은 압박을 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노예는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순종을 배우고 반항하지 말아야 한다. 공격적이거나 불평을 품지 말아야 한다’

라고 권면했습니다.

 

좋은 주인에게 순종할 뿐아니라 나쁜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이 반드시 좋아야만 순종하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인이 비록 가혹하더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3) 세번째 고난 받는 사람은 남편이 주를 믿지 않는 아내들입니다.

이것은 아주 힘든 상황인데, 이에 맞추려면 정말로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아내들이여, 당신들 남편에게 순종하라.

비록 남편이 주를 믿지 않더라도 그에게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아주 좋은 충고를 주었습니다.

아내로서 어떻게 주를 믿지 않는 남편을 도와주는 것인지를 말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권면은 오늘날 우리와 상반되는 방법입니다.

아내들이 남편보다 먼저 주를 믿었을 때, 우리는 통상적으로 두가지 일을 하는데,

먼저는 남편에게 끊임없이 설교하는 일이고,

두번째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크리스천 아내들과 함께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데요..

 

베드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권면하지 않습니다.

불신자 남편에게 ‘설교’는 제일 엉망적인 방법입니다.

 

베드로는 ‘아내들이여, 언어가 아닌 행동으로 그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합니다.

많은 크리스천 아내들은 교회에서 돌아오면 남편에게 잔소리하기를

‘오늘 저녁에 당신은 교회에 갔었어야 했어요.

목사님이 바로 당신의 문제를 설교했어요’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이런 아내들은 대부분이 3개월 후면, 자신이 남편에게 한 설교를 후회합니다.

아내들은 반드시 언어가 아닌 행동으로 남편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라. 그리고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살아라’ (벧전3:3~4절을, 사치는 하지 말되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라..는 식으로 해석하시네요)

 

벧전3장은 ‘미용 칼럼’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되느냐, 육체파 미녀가 아니고, 고상한 아름다움입니다.

눈부시게 육체적으로 아리따움은 40세 이하에 속하고,

고상한 아름다움은 40세 이상에 속하는데, 저는 진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본 제일 아름다운 여자는 미쓰 해리스입니다.

제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84세였는데, 얼굴에 주름이 아주 많았습니다.

제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제가 실례인지 모르나, 당신의 얼굴이 매우 아름답군요!’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저의 상상밖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정말로 못 생겼어요. 저와 데이트 하려는 남자가 없었어요.

저와 춤 추러 가려는 남자도 없었어요. *춤 같이 추는 문화

하지만 제가 27세 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 그 주에 저의 마음이 날듯이 가벼워 졌고, 저는 너무 기뻤는데,

이는 그가 저를 그렇게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심지어 예수님더러 이 기쁨을 가져가라고 하였어요.

왜냐하면 제가 이 기쁨만 너무 좋아한 나머지,

예수님을 의지하지 못할까 염려해서 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우울함을 가져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제가 유일하게 들었던 말인데

하나님더러 자기 기쁨을 가져가 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면, 누구와 닮게 되는 것을 아시죠?

그래서 제가 오늘 이 얼굴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미쓰 해리스(84세)의 이 말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그는 ‘베드로전서’ 3장에서 아름다워지는 비결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당신이 늙을수록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표시입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 아닙니까? 맞습니다.

혹시 다시는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움이 뭡니까?

 

베드로는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그러면 남편과 교제가 더욱 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남편이 ‘예수님이 저의 아내를 더욱 아름답게 하였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남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아십니까?

‘예수가 나의 아내를 빼앗아 갔다. 내 아내는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아내들은 하루종일 교회에 가서, 모닝커피모임도 가지고, 성경공부도 하면서

마치 경주마처럼 영적으로 끊임없이 앞을 향해 질주하는데,

하지만 남편은 아직도 출발 지점에 머물러 있고,

자신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이 집의 가장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실제적인 충고 하나를 해도 되겠습니까?

 

한번은 제가 사우스웰스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후에 어떤 부인이 저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제가 문제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녀에게 ‘당신이 남편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가 ‘있어요’라고 했어요.

‘당신의 남편이 당신의 문제입니까?’라고 하니 그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문제를 남편과 얘기했습니까?’라고 하니,

그녀는 아직 얘기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나는 ‘왜 남편과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왜 저한테 물으려고 합니까?’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남편은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저의 문제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래도 남편과 먼저 얘기해 보시지요?’라고 하니

그녀가 말하기를 ‘목사님은 이해를 못하는군요. 그는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는 영적인 일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영적인 문제를 묻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아주 간단합니다. 당신이 그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 남편을 통해, 남편에게 말을 한다는 것을

당신이 믿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하니

 

그녀는 ‘하지만 그는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녀에게 ‘한번은 하나님이 나귀를 통해 사람에게 말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귀를 통해 사람에게 말을 하기까지 했는데,

당신 남편을 통해 당신에게, 하나님은 얼마든지 말씀 할 수 있습니다.

 

10명 여자들 중에서 9명이 이 방법을 받아들였고, 그리고 웃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이 (불신) 남편을 통해서도,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예외였습니다.

그는 화를 내면서 갔고, 그녀는 한 달이나 제게 화가 난 표정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당신이 신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데이빗 파슨을 절대로 찾아가서 문제를 상담하지 말라.

그는 남편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조금도 동정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18개월 후에 제가 세임로워-웨스턴 벨리 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녀가 또 왔어요. 그녀가 제게 말하기를

‘제가 또 다른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제 남편의 문제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무슨 문제냐고 물으니,

‘만약 남편의 영적 생명이 저보다 많이 성숙되었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하여 제가 그에게 ‘이것이 진짜입니까?’라고 물었어요.

 

그가 ‘진짜에요. 저의 남편이 오늘 예배 뒷자리에 앉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녀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그녀가 말하기를

‘제가 당신한테 한달동안 화를 냈고, 후에 제가 방법이 없어서

저의 문제를 저의 남편과 상의했었어요. 결국 그가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우리 부부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놀랐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어 남편도 놀랐고, 저도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날부터 그가 신앙에 대해 관심 생겼고, 지금은 그가 주를 믿습니다.

하지만 그가 저를 따라 잡으려고 영적 생명의 진보가 신속했고,

심지어 저를 초월해서 앞서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녀가 말하기를 ‘이제 저는 그가 저를 앞서 간다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의 문제는, 바로 당신이 이 부부관계를 조종 manipulate 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과거에 남편이 당신보다 (신앙에) 뒤처지는 것도 싫었고,

이제는 남편이 당신보다 신앙에 앞서가서 또 싫다고 하는데,

당신은 그와 똑같이 함께 가는 것만 원하는 군요(조종하는군요)!

당신은 남편 곁에서 따라가는 것을 배우십시오.’

 

저는 아내들에게 말해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남편을 구원할 수 있을런지요?’ 묻는 아내들에게요.

 

제가 ‘(아내여) 교회에 나오지 마십시오!’

 

아내들이 다시 묻죠. ‘제가 어떻게 하면 남편을 회심시킬 수 있겠나요?’

 

제가 심각하게 말씀드리는데요. 그런데 제가 놀라는 것은

그래서 남편이 이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

아내들이 교회 나오기를 관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이 방면에서 아주 지혜로웠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아내들이여, 불필요한 고통을 스스로 받을 필요 없어요.

왜냐면 여러분이 스스로 남편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편들은 ’아내가 예수를 믿어서 더욱 좋아졌고, 더욱 아름다워 졌고,

소통이 더욱 쉬워져서 내가 교회를 가고 싶어하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에 아주 잘 이해하는데,

이는 그 자신도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4) 다음은 네번째 방면의 순종인데, 이런 순종은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앞의 세가지와 함께 강의하지 않았고, 제일 마지막에 놓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장로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운 자는 그들이 학습을 이끌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이스라엘을 향해 저주하는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는

오히려 부녀자나 혹은 젊은 자의 통치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징계는 정말로 매우 무섭습니다.

이렇게 부녀자에게 다스림을 받고

젊은 자(십대)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상황과 결코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1992년 경 영국 상황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늙은지 (장로)들이 리더합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젊은 자들은 장로들을 존경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라는 순종은 맹목적으로 하라는 순종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한다면, 아주 큰 긴장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의 태도입니다.

베드로는 (위의 4가지 예를 통해) 삶에서 공격하지 않는 태도,

보복하지 않는 태도, 폭력적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그리고 권리를 쟁취하지 않는 것(순종)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난이 임하여 올 때, 당신이 감당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준비를 잘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나를 해 드릴게요.

제가 항상 존중하는 크리스천 한 분이 있었어요.

그는 지금 나이가 아주 많고, 남해안에 살고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그에게 말하기를

‘저는 예수님을 위해 사자 lion 를 대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이 장로님의 대답이 아주 지혜로웠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오늘의 작은 전쟁에 충성스럽게 대면하면,

큰 전쟁이 임할 때, 그분이 당신에게 직면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의 권면은 아주 지혜롭습니다. 저는 그의 말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그가 저보나 나이가 많기 때문에 제가 항상 그를 존중하고,

그의 대답은 정말로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순종의) 태도를 양성해야 하고,

이를 기초로 삼아야 하고, 이를 기초로 할 때

고난이 임해도 당신은 대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의 한 구절의 뜻이 분명치 않습니다.

 

이에 대해 314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한번 말해볼게요.

당신이 서신서를 쭈욱 읽어가면

베드로전서의 이 구절에서 이해가 안된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벧전3:19~20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저의 책에서 ‘지옥’에 대해 한 쳅터 가득히 해석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보십시오. 이 구절에 대해 조금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의 육체가 죽임을 당했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영적으로는 부활했습니다.

 

전에 그가 이 영으로 말미암아 노아 홍수 때 배반한 사람들을 전도하러 가셨다고 했죠.

그리고 몇 구절 후의 구절에서 또 말하기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4:6

 

제가 염려하는 것은, 어떤 자유주의 전도자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사람이 죽은 후에 두번째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성경구절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고,

생사 사이에 넘어갈 수 없는 깊은 흑암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이 명백하게 ‘죽은 자들에게 전도하여 듣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구절에 대한 모든 다양한 해석들이, 이 명백한 뜻을 회피하려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각종 성경의 해석들은 모두 이 점을 회피하려고 하는데,

이는 이 구절이 참으로 다른 구절들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일반적 가르침은 ‘사람이 일단 죽으면 다시 주를 믿을 기회가 없다’는 거죠.

하지만 만약 겉으로 드러난 문자적 뜻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저는 해석할 때 제일 먼저 ‘단순하고 평이한 뜻’을 제일 먼저 봅니다. *simplest, plainest sense

 

단순하고 평범하게 해석이 안 되면, 다르게 해석을 시도하죠.

 

여기 이 구절을 단순하고 평이하게 해석하자면,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기간에 여전히 활동하셨고, (주무신게 아니라)

의식이 살아 있었으며, 실제로 누군가와 의사소통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도 모두 의식이 뚜렷했고, 그리고 예수님과 의사소통을 했다고

명백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벧전3:18~20

 

여러분이 교회에서 당연히 이런 가르침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금요일이면 끝나고, 그리고 주일이면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토요일에는 무엇을 했는지를 모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항상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기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아무런 의식없이 무덤에서만 누워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말하기를 ‘그 기간에 예수님의 육체만 죽었을 뿐이지

하지만 그의 영은 살아 있었고,

그분은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 가서 전도를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베드로가 (2천년 전) 첫 부활주일에 예수님을 만난 상황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났다는 것을 알지만,

어디에서 만났고, 어느 때이고,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거의 상상이 되는데,

베드로가 ‘예수님, (지난 이틀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를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세상이 있지 아니하고 음부 Hades, Sheol 에 가 있었고,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 있었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3:18~20기록

 

베드로가 ‘당신이 음부에서 3박3일동안 계셨는데, 무엇을 하셨습니까?’라고 반드시 물었을 것입니다.

 

3박3일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수요일 오후에 죽었는데,

각종 증거 모두가 이 점을 가리켰고,

 

우리 모두는 틀렸습니다. 그는 안식일 전날에 죽었지만 그 안식일은 토요일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그 안식일은 하나의 특별한 날이라고 하였습니다(High Sabbath).

매년 유월절은 모두 그 안식일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AD29년에 죽었는데, 이는 거의 확정되었습니다. *BC4년에 탄생

그해 니산월 15일, 바로 유월절의 첫날, 그날은 목요일이고,

그 날은 특별한 안식일이었습니다.

 

14일은 바로 수요일이었고, 유월절 전날이었는데, 이것은 단지 저의 추론입니다.

하지만 모든 (역사적, 성경적) 증거가, 이에 부합됩니다.

 

사실 예수님이 어느 요일에 죽었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것은 그가 당신을 위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3박3일 죽으셨던 것입니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아침까지면 3박3일이 되지 않지만

만약 그가 수요일 오후 3시에 죽으셨다면,

그리고 토요일 저녁 6시에서 밤12시 사이에 부활했다면

복음서의 기록과 완전히 부합됩니다. *사흘만에 행10:40등

 

토요일 저녁 6시는 한 주의 시작인데, (유대력에 이하면)

 

우리는 로마의 달력에 근거해서 성경을 보지, 유대 달력으로 보지 않습니다.(잘못입니다)

 

(토요일 밤) 그때는 한 주의 시작이고, 아침이 되지 않았는데 무덤이 이미 비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해석일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이 추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신약성경의 어떤 자료가 맞지 않습니다.

이 추론은 모든 증거에 부합되고, 그리고 명확한 모순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3박3일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우리 다시 보겠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내가 그 몇 일동안 전도하였느니라’고 했을 것이고,

‘누구에게 전도했습니까?’,

‘노아 홍수 때 죽은 사람들에게 전도했느니라’고 했을 것입니다. 벧전3:18~20

 

이는 그 죽은 사람들도 뚜렷한 의식이 있었다는 표시인데,

우리도 죽은 후에 뚜렷한 의식이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 것이고, 기억력이 있고, 몸만 죽어 있고, 영혼은 죽어있지 않습니다.

 

사망은 육체와 영혼은 갈라놓는 것이고,

미래 부활할 때 육체와 영혼이 다시 결합하는데,

하지만 그때까지는 조금 오래 기다려야지요.

 

예수님이 한 주도 되지 않는 시간에, 세 단계 전체를 경험했습니다.

그가 태어나서 죽으시기 전까지 ‘육체가 있는 영’이 되었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영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육체를 무덤에 두었지만, 그의 영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노아 홍수시대 때에 배반했던 사람들에게 전도했으며,

그리고 부활하신 주일날 아침에 육체와 영혼이 다시 결합하였습니다.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기까지 뚜렷한 의식이 있었고,

뿐만 아니라 전도하였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영혼 수면설’을 가르치는 곳은 이단 sect입니다.

육체가 부활하기 전에 영은 잠자고 있었다라고 가르입니다. 이것은 주제 밖의 말입니다만.

 

만약 문자의 뜻 그대로라면, 예수님이 그 세대들을 향해 전도한 것인데,

하지만 그 무리에게 뿐이었습니다. *홍수 세대

 

여기에서도 복음은,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명백하게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것은 죽은 후의 두번째 구원받는 기회일까요?

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지 그 무리(홍수 세대)에게 뿐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 또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가 있다고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에게만 두번째 기회가 있었을까요? 이제 하는 말은 제 자신만의 추측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 주장을 믿지 않아도 제가 뭐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저의 추측인데, 나중에 제가 천국에 가면 똑똑하게 물어볼게요.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이 축측이 맞는지/틀렸는지 알려드릴게요. 하하하

 

저의 추측은, (홍수 때) 한 세대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께 불공평하다고 항의할 수 있어요.

‘당신이 우리 모두를 멸하고,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와 공평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명령하여 그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저도 심판날에 사람들이 ‘제가 불공평했다’고 신고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이것은 단지 저의 추측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불공평했던 방법을 보충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는 공의로우시고, 누구 편들지 않는데, 아마 이것이 그 원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성경을 해석할 때, 내용을 비틀어서 우리 생각에 맞추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본문을 제일 단순하고, 제일 간단한 뜻으로 받아들어야 하며,

덧붙여 과장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여기 구절에서 다른 사람이나 혹은 두번째 기회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과장 해석 하면 안 돕니다)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 경은, (1809~1892)

금년은 그의 사망 100주년으로 축하하는데, *1992년 설교

이 구절을 ‘더욱 큰 소망 larger hope’ 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후에도 여전히 구원 받을 수 있는 소망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보편구원론 universalism 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이상은 ‘베드로전서’를 논한 것이고,

이제 우리가 ‘베드로후서’를 보겠는데, 베드로가 두번쩨 편지를 썼습니다.

 

이 작은 도표를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작은 그림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앞에서 ‘히브리서’ 강의 할 때 너무 복잡한 그림을 사용하여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모두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 논하기를,

(제가 조금 후에 강의하기 때문에, 지금 도표를 먼저 그리지 마십시오.)

 

‘베드로후서’도 똑같은 사람들에게 쓴 것인데,

하지만 완전히 다른 상황을 논하였습니다.

시간도 몇 년 지났고, 스타일도 다릅니다.

 

아마 이 두권의 서신을, 다른 기록자가 기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구술하고, 누군가가 필사)

 

그는 바울의 서기였던 실루아노에게,

베드로전서 서신을 교정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벧전5:12

 

하지만 이 두 권의 서신은 여전히 유사하고,

베드로가 사용하기 제일 좋아하는 단어도 여전히 이 두번째 서신에서 나타났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두번째 편지는 베드로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저는 베드로가 기록하였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의 좋아하는 표현(입버릇 같은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설교자들이 자신의 입버릇 같은 말이 있는데,

(크리스 당신도 입버릇 있어요. 당신도 저의 입버릇이 무엇인지 응당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의 입버릇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배로운 precious’ 맞지요?

이것이 베드로의 제일 선포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이 두 권의 서신을 보면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계속하여 ‘우리의 보배로운 믿음’, ‘보배로운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무엇이든 모두가 보배로웠어요. 그는 제일 보배로운 진주를 찾았으며,

그는 ‘보배로운’이라는 단어 사용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당신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당신이 아끼는 어떤 사람이거나

어떤 물건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나의 제일 보배로운 소유’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편지(벧후서)도 베드로가 기록하였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대필자로 이 편지를 기록하였다고도 믿습니다.

이이것 벧후서가 벧전서와 스타일이 왜 다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또한 후서의 내용도 전서와는 완전히 다른데,

이는 그가 이 후서에서는 ‘교회 안에서의 위험’을 논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면하는 압박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교회 밖에서 오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교회 안에서 오는 것인데,

교회 안에서 오는 압력이 더 위험합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는데, 사탄은 밖에서 교회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밖에서 공격할수록 교회는 더욱 커지고 더욱 견고해집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탄생한 후의 처음 3세기 동안에는

크리스천이 정기적으로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철의 장막이 무너지기 전에는, 죽의 장막 아래서는

어느 마을에 가면 주민의 85%가 크리스천인 곳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의 장막이 무너진 후, 교회는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그건 비극이죠

동독 목회자들이 말하기를, 철의 장막이 무너지기 전에는 교회 개척이 더 쉬웠다고 합니다.

 

지금은 동독 주민들 모두가 서방 나라처럼 돈을 숭배하고,

교회 나가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당시 철의 장막이 넘어질 때 기쁘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복이기도 하고 화이기도 합니다.

지금 동유럽의 교회는 과거 같지 않습니다. (식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복음을 전하는 문은 이미 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울 수 있는 힘대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중국은 (1992년 상황) 여전히 죽의 장막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더욱 더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교회 내부에서 교회를 파괴하고, 적대감을 조성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압박입니다.

(내부의) 이단이 (이단적 가르침이) 오히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교묘한) 압력입니다.

‘베드로후서’는 바로 이런 더욱 큰 위험을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여러분이 ‘베드로후서’를 읽을 때, 특히 제2장을 읽을 때 내용이 ‘유다서’와 거의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다섯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는데,

성경에서 두 저자가 동일한 내용을 기록할 때

다섯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는데, 이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느 해석을 선택하느냐입니다.

 

예를 들어 ‘미가서’와 ‘이사야서’인데,

‘이사야서’ 2장과 ‘미가서’ 4장을 여러분은 주의하셨는지요?

 

‘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와 미가가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인 성경에서 이런 상황을 보았을 때 다섯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첫째는 베드로가 유다의 말을 인용했으며,

둘째는 유다가 베드로의 말을 인용했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베드로와 유다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했거나,

넷째는 베드로와 유다가 이 문제를 함께 토론했는데,

즉 해결 방법에 대해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그리고 각자 편지를 썼습니다.

 

다섯째는 성령님이 그 두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유적으로 선택하십시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다섯 번째 해석은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사람을 워드 프로세서 처럼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계시는 사람을 타자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님이 베드로와 유다 두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주었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베드로와 유다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가 누구의 말을 인용했든지, 아니면 두 사람 모두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했든지

그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는 증거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일 가까이 있는 제자중 한명이고, 유다는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던 사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도 ‘벧후2장’과 ‘유다서’가 아주 짧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두 교회가 같은 문제에 부딛쳤는데, 제가 4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제가 강의한 ‘유다서’ 테프를 들으셨다면

제가 무엇을 강의하려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유다서’는 제일 쉽게 소홀히 할 수 있는 짧은 서신인데,

오늘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더는 논하지 못하겠네요.

 

하지만 교회에는 네가지 부패한 상황이 있는데,

교회안에 네 가지 질병 증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암이 퍼진 것입니다. 그 증상이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부패한 신앙고백 corrupt creed 입니다.

믿는 신앙이 변했는데, 크게 두 방면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감정적인 것으로 보았고, sentimental view of the grace of God

2) 그리스도의 신격을 혼합주의적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syncretistic view of the person of Christ

 

제가 여기에서 비교적 복잡한 단어를 사용하여 양해 부탁드립니다.

먼저 다른 한 방면을 보겠는데,

syncretistic view of the person of Christ 란,

그리스도를 많은 신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유일한 주가 아니고, 그는 단지 많은 신들 중의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비교적인 종교입니다. 그는 구원 받을 수 있는 한 길인데, 하지만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많아서 그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유일 only’이라는 이 단어는 쉽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깎아 내렸고,

그를 구원 받는 하나의 길이라고 하였는데,

하지만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2) 또 하나는,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정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기를 좋아한다.

죄를 범했는지 안 했는지 상관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무슨 영향을 가져오는지 상상해 보세요.

 

3) 부패한 신념 creed은 부패한 행위를 초래하고,

당신의 신념이 당신의 행위에 영향을 줍니다.

 

당신이 만약 기독교 신앙을 변질시키면

부도덕적인 행위가 교회에 들어가게 됩니다.

 

부도덕적인 행위가 베드로와 유다가 편지한 교회에 이미 들어갔습니다.

 

만약 현재 삶의 방식이 중요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미 천국 가는 티켓이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했든지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완전히 감정적인 생각입니다.

(진리를 따르지 않고, 사람이 불쌍하니까 센티하게 감정적으로 말해주는 거죠)

 

오늘날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주 보편적입니다. 이로써 크리스천들은 당연히 계속 죄를 범해도 되고, 하나님의 긍휼을 악용하여 부도덕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행위가 부패하기 시작하면, 그의 성품이 바로 부패해집니다.

여기서 (벧후) 이런 부패한 신념이 성품에 대해 영향 주는 것을 묘사했습니다.

 

동물적 본성이 인성보다 커지고, 인간은 본능에 의해 행하고,

개성이 탐욕스러워지고, 머릿속에 탐욕이 가득하고, 성품이 변하고,

더는 신뢰할 가치가 없다고 하고, 쉽게 물결을 따라 흐르고, 바람에 흔들리게 됩니다.

여기에 각종 묘사가 있는데, 사람의 성품이 명백하게 부패했습니다.

 

4) 네번째 부패는 대화입니다.

교회 사람들은 불평하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원망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지도자에 대해 반발했고, 각양각색의 혼란을 가져옵니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 모두는 부패한 신념을 논했습니다.

신념이 부패하면 행위가 부패해지고,

행위가 부도덕하게 변하기 시작하고,

이어서 성품도 따라서 부패해지고,

성품이 부패히지니 언어가 바로 부패해지고,

이로써 교회에 많은 혼란과 원망이 나타나고,

지도자에 대해 비평하며 불평하고, 불순종했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황폐해졌는데, 오늘날에 많은 교회에 이런 상황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발견했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 모두에서는 이런 상황을 강하게 싸웠습니다.

 

이런 상황이 교회를 파괴하는데, 외적으로 오는 압박이 아니었고,

안에서만으로 교회를 넘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는 핍박을 절대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후서’의 양식이 ‘베드로전서’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사람이 기록했다고 믿습니다.

 

어느 한 단락에서 구원을 논했는데,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는 위험을 논했고,

그리고 자신을 응당 어떻게 예비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며 인용했습니다.

 

이 그림은 ‘베드로후서’의 첫부분을 요약한 것인데,

바로 구원을 논한 부분이고, 이 그림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고, 믿음의 기초위에 세워졌습니다.

여기에 언급되는 믿음의 계단이 문앞까지 통했습니다.

 

‘베드로후서’에는 이 계단들을 논하지 않았고,

이것은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논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를 여기에 넣었습니다.

 

첫 걸음은 회개이고, 두번째 걸음은 세례이고,

세번째 걸음은 성령 받음인데,

대문까지 통하는 믿음의 계단은 이 세 개뿐입니다.

 

제가 쓴 ‘크리스천의 중생’이라는 책에 아주 명확하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 걸음을 넘어야 합니다.

회개, 세례, 성령 받음으로 믿음의 기초인 하나님 집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면 안에 계단이 있는데 (일곱계단),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래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다른 한편에서는 소망이 건축되는데,

그는 영광의 문으로 통하여 우리더러 부르심과 택함에 확고부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부르심과 택함에 확고부동해지고 싶다면

계단 아래쪽에 서 있으면 안 되고, 반드시 위로 올라가야 확고부동해지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가 강조하기를 ‘한면으로 이 계단을 올라가면

다른 한면에는 미래의 소망이 건축되고, 더욱 오를수록

하나님의 미래의 역사에 더욱 확실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 중심으로 기초를 닦아야 하고,

한면으로 오르면, 다른 한면은 소망이 건축되고,

제일 높이까지 올라가면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제일 위에는 발코니가 있는데, 당신이 바로 그 발코니로 영광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 당신은 영광스럽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리고 거기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계단 입구의 (믿음이란) 소파에만 앉아있지 마시고,

계단으로 올라가서 위에 거주해야 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단을 대처하는 방법은 바로 영적 성숙입니다.

아랫층에 있는 사람은, 틀린 가르침을 아주 쉽게 믿습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이단과 틀린 가르침을 쉽게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틀린 가르침을 듣고 믿으면

자신이 뒷문으로 나온 것을 발견하게 되고,

줄곧 언덕을 굴러 내려가고, 줄곧 아래로 굴러 내려가고

결국에는 타락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여기에서 중요한 말들을 했는데,

이런 사람들은 공의로운 진리를 듣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것이

타락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한 말이 확실히 듣기 힘듭니다.

이런 사람은 개가 돌아서서 자신이 토한 것을 먹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개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신 분이 계십니까?

그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바로 이러하니라.

이미 죄에서 나와서 다시 죄로 돌아가는데,

마치 개가 돌아서서 자신이 토한 것을 먹는 것과 같고,

돼지가 깨끗하게 씻고 다시 돌아서서 흙탕물에 뒹구는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생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이, 진리를 알면서도 과거로 다시 가는 것보다 낫고,

은혜를 모르는 것이 은혜의 맛을 보고도 떠나가는 것보다 낫고,

진리를 듣지 못한 것이 진리를 듣고도 다시 죄로 돌아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은 사람을 나쁜 길로 인도할 수 있고, 믿음의 기초를 파괴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른 길로 가다가도 (도표의) 뒷문으로 나와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위층까지 올라가서 소망이 더욱 커지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고,

거기에서 영광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돌아온 길로 다시 가서

하나님의 분노와 그리고 심판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빛 같은 은총을 누리는데,

매우 경계가 되는 메시지입니다.

 

▲다음은 ‘베드로후서’의 마지막 한 장인데, 여기에서는 미래의 소망을 논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부의 한가지 압박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항상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시는데, 하지만 왜 아직까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제1세기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왜서 아직도 오지 않냐고 이미 물었습니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더욱 그렇게 물을 것입니다.

 

이미 이천년이 지났고, 예수님은 아직도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맞지요?

사람들 앞에서 비웃음을 당했는데, 이것은 정말로 참기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에서 사람을 비웃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가 강림한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3:4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비웃으며 말하기를 ‘기독교는 이미 이천년이라는 역사가 있는데, 하지만 상황은 좋게 변하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없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망이 있고,

우리의 소망은 미래 어느 날엔가 우주 전체가 큰 불에 탈 것이며, 큰 재난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홍수로 죽이지 않고 큰 불로 태워 죽입니다.

저는 한차례의 핵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주의 모든 원자 에너지를 방출하고, 그가 에너지를 원자에 함축해 넣었는데,

단지 그분이 에너지를 방출하면 모든 것이 타 버리고 없어집니다.

하지만 미래에 나타날 이 대화재 속에서 마치 불사조(피닉스)가 나타느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새 땅’을 설교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여호와 증인들에게 이 주제를 설교하도록 넘겨주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진리이며,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새 하늘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새 땅도 임한다고 하였고,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할 때 강의할 것입니다.

 

이 지구는 곧 미래의 중심으로 변할 것이고,

우리가 ‘새 땅’ 곧 새로운 지구에서 살게 되는데, 우리만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오존층, 해양 오염과 살림이 사라지는 문제로 걱정하고, 아주 긴장해 하는데, 그들은 이 지구만 있는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의 진상을 아주 똑똑히 알고 있고,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새 하늘 새 땅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와 매우 다를 것입니다.

다른 점은,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공의가 거주하고 dwell,

다시는 악이 없고, 죄악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어두움과 교활함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만약 너희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믿으면, 다른 사람이 비웃는 것에 아랑곳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진실을 알았다면 응당 어떤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답은 아주 간단한데, 즉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고, 짐 꾸밀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저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한 교회에 가져다 주는 부도덕 행위를

우리가 막을 수 있는 길은

이 점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 새로운 세계를 주목하고, 이것은 공의로운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이 점을 알면 공의를 지킬 수 있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을 품고 (도표의) 위층에서 살아야 하고,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잘 예비해야 합니다.

나팔소리가 들리면 바로 난생 처음 무료 비행으로 거룩한 땅으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천국에 와 보니) 정말로 멋있는 모임이구나!’

이것은 뉴캐슬에 있는 저의 조부 무덤 비석의 글입니다.

이 세 단어는 감리교 한 찬송가의 가사인데,

저의 조부 비석의 이름 밑에 이 말을 새겼습니다. ‘What a meeting! 정말로 멋있는 모임이구나!’

 

당신이 큰 소리로 예배하고 것이 싫다면, 절대로 가지 마세요.

그 때 천사장이 크게 외칠 것이고, 나팔소리가 죽은 자가 일어날 정도로 클 것이며,

그 때가 되면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앞 좌석에 앉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먼저 죽어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 때가 되면 당신도 앞 좌석에 앉게 될 것인데, 이는 당신이 먼저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에 모두 예수님과 한데 모이고,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강림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이 점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새 세상에 일부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잘못된 가르침을 들어도 믿지 않고, 더럽힘도 당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비록 말씀에서 떠났어도 당신은 여전히 자신의 순결과 흠을 지킬 수 있고,

이 부패한 세계를 상대하지 않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이 두개의 서신을 주셔서 감사하고, 이 두 서신은 우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교회에 (내부적으로) 이단이 나타나면, 그건 외적으로 오는 압력보다 훨씬 더 무섭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가 오늘날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는 미래에 ‘베드로전서’가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을 지키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