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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2장,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

LNCK 2022. 10. 26. 21:21

◈벧후2장,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


◑벧후2~3장의 내용 / "베드로의 세 가지 반박"

서신 내내 베드로는, 이 거짓 교사들이, 
자신과 다른 사도들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목적은, 이 교회공동체 들의 확신과 질서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1. 첫번째 반박  1:16~21   "부활, 재림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베드로는 먼저 회의론자들이 반복하는 비난을 언급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과, 세상의 왕이시라는 이 모든 이야기를 
베드로와 사도들이 꾸며냈다는 겁니다.  1:16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도 거짓이고요. *1:16의 '강림'은 재림을 뜻함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모하신 놀라운 순간에 대한 
자신의 목격담을 제시합니다. 막 9장의 이야기를 기억해 보세요. 

사도들은 또한 예수님이 왕으로 높임 받으시는 것(부활, 승천)을 직접 봤습니다. 

그 분의 말씀대로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이 사실이라면, 목격했으니까
그 분의 말씀대로 주님의 재림도 사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2 . 두 번째 반박    2:1~22(2장 전체)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

다음으로 베드로는 교회 안에 거짓교사들이 가하는 위협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이 제기하는 반박에 초점을 맞춥니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을 통해 
'모든 사람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구실 삼아, 돈과 성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교회로부터 엄청난 이익을 취하며, 말할 것도 없이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공의의 하나님께서 반역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상기시키죠. 

△그는 하나님이 심판하셨던 세 가지 전례를 떠올립니다. 2:4~11

-첫째는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이야기로서 
당시 유명한 유대 문헌인 <에녹일서>의 해석되어 있는데요. 

이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금기를 어기고 여인들과 동침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반역한 천사들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고대의 홍수 이야기,   창6~8장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꺼냅니다.  창19장

각 이야기에서 반역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이 언제나 신실하게 그분의 백성을 구하셨다고 말하면서 
롯의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그 후 베드로는 이 고대의 이야기들을 
거짓 교사들의 부패한 생활방식과 연결짓는데요.   2:12~22

그들 역시 돈과 성적 쾌락을 좇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며, 
하나님이 도덕적인 결정에 상관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오도합니다.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논하면서 
이를 마치 자기가 뭐든지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면허처럼 남용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후에 3장에서 바울서신을 언급하는 이유인데 
이 교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입니다. 
바울이 의미한 자유는, 그런 게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베드로는 이 교사들이 정말로 자유로운 게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사실 그들은 자기 육체의 정욕의 노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더 비극인데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기에, 갑절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죠. 

그들은 한심하게도 '개가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고 나서 구덩이에 뒹군다'는 옛 잠언의 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2:22

▲3. 베드로의 세 번째 반박  3:1~13   "최후 심판 부정에 대한 반박"

그러고 나서 베드로는 그 교사들이 최후의 심판을 부정하는 논거에 대해 다룹니다. 
거짓 교사들은 주장하길, '여러 세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태어났고 
그들은 소망의 성취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대체 약속된 예수님의 재림은 어디에 있는가?' 

베드로는 그들의 반박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 보임으로써 이에 답합니다. 
그는 우리가 사는 놀라운 우주를 둘러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과거에 어느 순간 무에서 유를    3:5~9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시려고 
하나님의 말씀이 극적인 방법으로 개입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며   
얼마든지 다시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말하죠. 

그래서 진짜 질문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가 인데요. 
베드로는 우리에게 인간의 시간 관념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아주 긴 시간은 
지극히 짧은 인생의 관점에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은, 사실 하나님의 인내의 증거입니다. 
이로써 모든 세대가, 그들의 이기심을 깨달을 기회를 얻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춰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앞에 회개하도록 말이죠. 

△그리고 그 은혜는 주의 날에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입니다.  3:10~13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날을, 소멸하는 불로 묘사한 이사야와 스바냐의 
예언의 시를 인용합니다.  ('주의 날' : 이사야34장, 스바냐3장 참조)

'하늘은 사라지고 스토이케이아는 불에 녹아버릴 거라고 말하는데요. 3:10
이 단어는 헬라어로 원소들을 가리키는데 
이 경우에는 물질 세계가 소멸되는 것을 뜻하죠. 

그러나 그보다는 천체, 즉 별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게 바로 베드로가, 이사야34:4에서 인용한 이 단어의 의미이며 

그 경우에 이 구절은, 말하자면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늘의 벗겨진다는 은유적 표현이며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주의 날이 세상에 임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불 같은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물질 세계를 폐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악과 불의를 드러내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하시려고 말이죠. 

그곳은 의가 편만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마지막 결론  3:14~18

 

베드로는 이것이 예수님과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가 선포해 온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라는 말로 결론 짓습니다. 

그들의 글을, 문맥을 벗어나 해석한다면 곡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도의 가르침은 같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교회에 보내는 그의 마지막 서신을 맺습니다. 
베드로후서의 어조는 아주 강렬합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기로 결심하셨다는 확신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파멸하는 죄와 불의를, 반드시 대적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때에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인류와 우주를 위해 새로운 미래의 길을 여실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후서는 온 세상을 향한 넓고 포괄적인 소망의 비전을 제시하며 
우리에게 우리의 일상을 점검해보라고 도전합니다. 
이게 바로 베드로후서가 전하는 내용입니다.


◑적용1 / 회심 vs 일시적 신앙

☞https://rfcdrfcd.tistory.com/15978906

 

◑적용2 / 이단의 특징들           벧후2:1~22         출처

※여기서 말하는 '이단'은, 특정 이단 교파도 뜻하지만
개인적으로 교인이라도 '이단성'을 가질 수 있음을 뜻함.


본문말씀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거짓 선생들에게 
얼마나 마음이 상하고 분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초대교회도 거짓 선생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거짓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왜 거짓은 항상 우리 주위에서 서성일까요?
진실이 있기 때문이고,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값진 것이 있기 때문에, 늘 거짓이 있고, 가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가 값이 없다면, 왜 가짜를 만들겠습니까?

기독교에 제일 이단이 많습니다. 기독교에 제일 가짜가 많아요. 
왜냐면 그게 진짜니까, 진리니까! 
진리가 있으니까, 가짜가 있죠. 

기독교는 그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 주님 오시는 날까지, 늘 가짜가 진짜보다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별'은 우리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속으면 속는 자의 책임이지, 누구 책임이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늘 깨어있고 근신하라는 것이죠. 
늘 분별하는 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사도 베드로는 사실 이 편지를 쓴 목적이 
그 초대교회에 슬그머니 들어와 있는 이 거짓 선생들, 거짓 선지자들  *2:1
주님의 복음을 희석하고 
그야말로 주님의 재림을 헛된 것이라고 그렇게 비방하고 
그리고는 세상을 따르는 자들이,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 자처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분개한 심정, 그야말로 격한 어조로 얘기하는 것을 우리가 듣게 되죠.

▲1절,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이단은, 처음에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요. 
이단 이라는 건, 말 그대로 '다를 이, 끝 단' 끝이 다를 뿐이지 시작 때는 똑같습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가짜 같으면, 누가 미혹되겠습니까? 
그러나 처음을 보면 정말 진짜 같아서 혹하게 되고, 
똑같아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속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더 열심일 거에요. 
여러분 이단들이 여기 교회를 공약하는 방법을 
특별히 신천지 쪽에서는 '산 옮기기 작전'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 교회에 신임을 얻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목사 눈에 들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 지도층에 빨리 들어갈 것인가?

그래서 늘 진실한 진짜 성도처럼 진실하고 진지하게 신앙생활 하는 거죠. 
'새벽기도에도 안 빠지고 나가라, 특별히 방언으로 기도 해라, 
목사 옆에서 귀에 대고 기도 해라' 이런 이단의 교회 공략법이 유튜브에 있어요. 
어쨌든 이단들이 슬그머니 들어와가지고, 왜 교회를 흔드느냐는 것이죠.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단들은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러 안 갑니다. 
기존 교인들한테 와서 빼가는 게 특징이에요. 

여러분들이 정말 슬그머니 다가와서 '성경공부 하러 가자'는데 
따라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슬그머니 따라갔다가, 슬그머니 넘어진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그런 역사로 점철돼 있어요. 
초기부터 이단들이 득식거리는 곳이 교회였어요. 

'구약은 성경이 아니다. 신약 만이 성경이다.' 
그런 말시온주의 이단이 초대교회에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림은 없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하여튼 성경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나중에 성경을 슬쩍 비트는 것, 

처음에는 성경을 자상하게 가르치는 듯하지만 
끝내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성경을 편집해 버리는 그런 수법은 
예나 지금이나 끊임이 없어요. 

그리고 그들 자신들만의 경전을 만드는 것도 
사실은 이단을 너무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요즘은 그러지도 않아요. 

몰몬은 몰몬경을 만들었고, 통일교도 자기들이 경전인 '원리강론'을 만들었지만 
요즘은 그러면 너무 이단이 티가 나니까, 경전을 만들지 않는 이단들이 많습니다.

여기 보니까 '이들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결국은 주님을 부인해요. 

그러나 요즘 이단들이 주님을 부인합니까? 
아니에요. 입만 열면 예수님 얘기해요. 

이단들도 설교할 때마다 예수님 얘기합니다. 
오히려 예수님 얘기를 더 많이 해요. 
그래서 사실은 분별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나 오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사실 처음부터 주님이 주인이 아니고, 
본인이 주인 된 것을 속이고 들어왔기 때문에 
이단은 처음부터 스스로 멸망을 자취하는 자' 라고 말합니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1

그래서 자멸의 길을 시작하는 거에요. 
여러분 진리가 없으면, 멸망의 길도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는 순간, 스스로 멸망을 택한 것입니다. 

오늘 그 이단들이 왜 처음부터 멸망의 길을 가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슬그머니 교회에 들어왔는지를 한번 보십시다. 

▲2절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첫째는, 이단들은 여러분 정말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을, 세상에서 얻지 못하고 
대신에 교회에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에요. 

세상에서는 속이기가 오히려 쉽지 않아요. 
세상에서 속이기 쉽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와서 뭘 얻으러 온 겁니까?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것들을, 여기 교회에서 얻겠다는 거에요. 

그게 뭡니까? 그게 돈이요. 그게 성이요. 그게 권력, 명예... 그런 것들이에요. 
그래서 교회에 들어와서 그런 걸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실 본인이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왜 여기 와서 여자들한테 관심을 가지고, 다른 이성들한테 관심을 가지겠어요?
저는 여기서 정말 진실하게 남녀가 만나서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면 
주례할 용의가 있지만 
처음부터 이성을 찾을 목적으로 여기 오면, 그건 좀 곤란하죠. 

'교회에 자매들이 많더라' 그래서 오는 형제들은 조심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매 하나 채 가지고는,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왜 교회에 이성을 꼭 만나러 와야 합니까? 
왜 교회 와서, 여기서 사업 얘기, 비즈니스를 해야 됩니까? 
왜 교회 와서, 여기서 다른 사람보다도 더 인기를 얻어야 합니까? 
왜 여기서 남의 윗자리에 올라가려고 하십니까? 

무슨 교회 직분 제도가, 그게 계급입니까, 위계질서 입니까? 
교회 직분이, 이게 위계질서, 계급 질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담임목사'라는 말을 쓰지 않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다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 앞에 서면 여러분 다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서는 누가 높고 누가 낮은 자가 없고, 누가 크고 누가 작은 자가 없어요. 
하나님은 절대적 기준이고, 그분 앞에 서면 높낮이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단들은, 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그런 것들,
세상에서 추구하다가 못 추구한 것들을, 여기서 자꾸 찾는 거예요. 
교회에서 한 자리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서 다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적인 문제는 오늘날 교회가 심각합니다. 
여러분 교회나 교회 밖이나 이혼율이 똑같습니다. 
그리고 성적인 스캔들도 교회나 밖이나 비슷해요. 

그래서 정말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도 정말 순식간에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교회에 음란의 영이 얼마나 뒤흔드는지 몰라요. 
특별히 교회의 성가대, 무슨 찬양대에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저는 정말 우리가 이 시대에, 음란의 영이 얼마나 사회를 뒤흔들어 놓는지 
여러분 상상도 못할 정도예요. 
초등학생들이 우리가 상상못할 짓을 하고 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이미 어른 흉내를 다 내고 있어요. 

이런 음란한 영들이, 이 세상에 이렇게 편만하게 퍼졌는데 
교회에는 안 들어왔을 것 같습니까? 
교회도 그냥 우리가 한 순간에 그냥 넘어지게 만들어 놨어요.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반가워서 악수도 하고, 허그도 하지만 
순식간에 틈타니까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그렇게 간단치 않아요. 
그게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끊임없이 음란의 영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운데 음란한 영이 사로잡힌 사람이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가 예배가 안 되는 것이죠. 
찬양할 때 그런 게 들면, 찬양이 아니죠. 그냥 노래가 되고 말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전하는 진리의 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죠. 

▲3절,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음란과 탐심이 그들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을, 자기 이득을 삼기 위해서 사람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득을 삼는다'는 게 뭐에요. 이익을 취하려 한다는 뜻이죠.

여기 교회에 거래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 교회에 장사하러 왔다는 거예요. 
여기서 이득을 취할 게 뭐 있습니까? 

여러분 교회에서는 여러분들에게 이득줄 게 하나도 없어요. 생명밖에 안 줍니다. 
여기는 여러분들에게 옛 생명을 버리고, 
거룩한 생명, 영원한 생명, 진리의 영으로 충만케 하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어요. 

그걸 하러 왔는데.. 이 사람들은 이득을 삼으러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일들 때문에 이 땅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노아의 심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그 예입니다.

▲10절,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이 더러운 정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 특징이 '당돌하다, 자긍하다'는 거예요. 
그렇게 자랑이 많고, 그렇게 목이 뻣뻣하고, 그렇게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교만이 끝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저주에 가까운 말을 듣게 됩니다. 

▲12~14절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여러분, 이거 보면 우리가 취미생활 하는 것도 참 조심스러운 일이에요. 
우리가 그들을 얻기 위해서,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시간을 보내지만 
자칫하면 우리가 중심이 흐트러지는 순간,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은 그들과 함께, 짐승의 흉내를 내기 시작하고 
짐승처럼 살기 시작하는 것이죠. 

여러분 얼마나 이게 듣기 거북하지만 진실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대부분 짐승이에요. 짐승처럼 삽니다. 
짐승도 새끼 밥 먹고, 짐승도 뭐 관게하고, 짐승도 자기들끼리 싸움 해서 
우두머리도 되고 다 그러고 살아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되찾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되찾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으신 바 그 목적대로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고 

그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기뻐할 것이고 
하나님을 영원히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우리 성도는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대로, 지음받은 목적대로 사는 것, 그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하나님을 늘 의식하는 것 
그분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 때 우리는 진정한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될 거에요. 

사도 베드로는, 이제 곧 순교할 거예요. 곧 죽을 거에요. 
그러나 이 교회는 영원해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이 세우신, 주님이 피값으로 사신 이 교회만은 
거룩을 지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때문에 지금 이렇게 어조가 흥분한 거에요. 

▲15절,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민22~24장에 보면, 거기 나오는 발람 선지자는
출발이 나쁘지 않았어요. 괜찮은 선지자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결국은 돈의 유혹을 받고 빠져드는.. 
그래서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16

▲19절,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여러분, 누구든지 죄에 진 자는 '죄의 종'이 됩니다. 
음란에 지면 '음란의 종'이에요. 탐욕에 지면 '탐욕의 종' 아닙니까. 

마12:43~45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지금 악한 세대가, 여러분, 진리를 모르지 않아요. 예수님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음란으로 돌아가고, 다시 탐욕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귀신이 나갔다가 일곱 귀신을 도로 데리고 들어온다는 거죠.

여러분 '군대 귀신'을 보지 않았습니까. 
한 사람 안에 귀신이 여럿 들어가면 다중인격자가 되는 거예요. 

사도 베드로고 답답하니까 그 당시 속담을 들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21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차라리 복음을 모르는 게 낫죠. 성경을 안 읽는 게 낫죠. 
몰랐으면 나중에 알 기회가 있고, 
구원 안 받았으면 나중에 구원받을 기회가 있을 터인데 
복음을 듣고도 또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가면 
여러분, 개가 토한 것을 먹는 것과 같고, 돼지가 들어온 곳에 또 눕는 것과 같다는 거에요. 

여러분 한번 우리가 진리의 길을 걷기로 결단했으면 
주님 따르기로 결단했으면 끝까지 따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가다가 또 뒤를 돌아보고 롯의 아내처럼 소금 기둥되지 마시고 
한번 떠났으면 천국 입성 할 때까지 끝까지 가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한 주석 스크랩 (추천)

 

▲1절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민간에'는 문자적으로 '사람들 사이에'라는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한편 '거짓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과는 달리(1:21),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지 않고 자신들의 말을 하는 자들로서(신 18:20, 렘 14:14)
하나님의 계시적인 뜻보다는, 백성들의 기대에 맞게 거짓 예언을 일삼는 자들이다.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선생'은 '교육자'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일반적인 '지도자'를 가리킨다.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이 백성들을 미혹케 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과 비교함으로 
백성들을 미혹하는 그들의 특성을 밝히며 경계시키고 있다.
'거짓 교사들'이 '거짓 선지자들'을 계승하여 분명히 일어날 것임을 암시한다.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이단'은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헬, 하이레시스, 여기서 heresy 가 나옴. 
'멸망케 할 이단'이라는 말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사람들로 하여금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함을 나타낸다. 

'가만히 끌어들여'는 함께 들여와 비밀리에 퍼뜨린다는 의미로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이 직접 미혹하는 것과는 달리 
거짓 교사들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미혹할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특징 중 하나이다(고후 11:13-15, 갈 2:4, 유 1:4)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사신'의 헬라어 '아고라산타'는 '아고라조'('구속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주권적인 인도'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출된 것과 관련이 있는 단어로(삼하 7:23), 
'거짓 교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의미이다. 

▲2절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호색하는 것'은 온갖 종류의 반복되는 성적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방 종교들이 갖는 특성을 잘 나타내 준다. 
거짓 교사들은 이방 종교에서 우상 숭배를 하며 성적 방탕에 빠지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도 미혹하여 집단적으로 타락케 한다.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호도스'(길)이다.

'진리의 도'는 교리가 아니라 윤리적인 삶의 양태를 나타낸다.
거짓 교사들의 부도덕하고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롬3:23, 24, 딤전 6:1).

▲3절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그릇된 교리나 논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미혹된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경제적 욕구와 이익을 채우려 한다.
(딛 1:11, 딤전 6:6, 유 1:16)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지체하지 아니하며'와 '자지 아니하느니라'는
하나님께서 깨어 계시사 거짓 교사들의 죄악을 간과하지 않으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거짓 교사들의 죄악된 행위를 내버려두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심판하여 멸망시키실 것이다.

▲4절
본절부터 10절까지는 의롭고 공평한 심판에 대한 예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하고 범죄하는 것을 간과하지 아니하시고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미혹하고 있는 거짓교사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범죄한 천사'는 아담의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 반역한 천사들을 가리킨다.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지옥'의 헬라어 '타르타로사스'는 헬라 신화에서는 반역하는 신들이 
형벌을 받는 곳이었으나 베드로는 악한 천사들이 마지막 심판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특정한 장소로 언급한다(유 1:6, 에녹서 10:4, 54:4,5). 

한편 '어두운 구덩이'는
문자적으로 '흑암의 쇠사슬' 혹은 '어두움의 결박'(유1:6)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범죄한 자들이 결박당한 모습을 나타낸다.

악한 천사들이 마지막 최후 심판을 기다리면서 고통 중에 기다린다는 종말 사상은 
구약성경과(사 24:21, 22) 다른 사도들에 의해 이미 언급되었다.
(요 16:13, 고전6:3, 계 20:7-10). 하나님은 타락한 천사들을 지옥에 결박하여 
두시고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이다.

▲5절
헬라어 본문에는 본절은 물론 6, 7절에도 '카이'(and)가 나타난다. 
이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실례가 계속됨을 나타낸다(유1:5-7).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문맥상 노아 시대의 악인에 대한 심판을 시사한다. 
베드로는 노아시대의 홍수를 언급함으로 
하나님께서 현재나 미래의 악한 것들을 남김없이 심판하실 것임을 강조한다.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의를 전파하는'은 바울이 말하는 법정적 개념에서의 의가 아니라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나타낸다(1:1). 

베드로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구원받은 수가 적음과 
심판의 명확성을 나타내고자 한다.

▲6절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소돔과 고모라 성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주변이 온통 재로 덮인 것과 같이 
실제로 온 성이 재로 덮였다.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경건치 아니할 자들'은 '경건치 않는 일을 행하는 자들' 
곧 '배도자나 거짓 교사들'과 같은 자들을 가리킨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패역한 
거짓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경고의 본이었다. 

또한 '본'은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에 대한 주의 진노가 
모든 세대에 알려지기를 원하셨음을 암시한다.

▲7절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무법한 자'의 헬라어 '아데스몬'은 
부정 접두어 '아'와 '본성' 혹은 '자연적 양심의 법'을 의미하는 '데스모스'의 
합성어로 인간의 본성적인 양심의 법조차 무시하는 부도덕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음란한 행실'은 변태적 성욕으로 인한 반복되는 
호색적 행위를 가리킨다(2절, 창 19:4-11, 벧전 4:3). 

한편 구약성경에서 '롯'은 세상적인 죄악에 빠져 있었던 인물로 언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롯을 '의로운 자'로 언급하는 것은 
외경의 전승을 따른 것으로(지혜서 10:6)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에 비해 의로웠음을 의미한다. 

또한 롯을 의인이라고 부른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의 호색적이고 변태적인 성욕의 
죄악에 빠져들지 않고 심령에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 때 구원을 받았다. 
베드로는 롯의 구원을 언급함으로 주님의 무조건적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하며 
수신자들로 하여금 낙심치 않고 이단들에 대해 인내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8절
헬라어 본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가 있어 
롯이 불심판에서 구원받은 원인을 상술한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롯은 날마다 죄악된 생활에 빠진 소돔과 고모라 성의 백성들을 대하면서 
스스로의 내적 고민 때문에 고통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롯의 의로움을 나타내며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합당한 근거가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불법한 자들 가운데 거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하여 고통하는 롯의 모습을 의로 여기시고 구원하신 것이다(창 19:4-11, 전 7:20).

▲9절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본절은 4절에서 시작된 심판과 구원의 실례에 대한 결론이다. 
'시험'의 헬라어 '페이라스무'는 죄악의 상태에 빠지는 유혹이 아니라, 
악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가 당하는 시련을 의미한다(눅8:13, 행 20:19, 벧전 1:6)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형벌 아래 두어'의 헬라어 '콜라조메누스'는 현재 수동태 분사로 (행 4:21) 
형벌이 계속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악한 자들이 현재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비적 심판을 받고 있으며 
최종적(最終的)인 심판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계20:11-15)

베드로는 본절에서 구원과 심판을 분명하게 대조하여 
의인에 대한 구원과 사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강조한다.

▲10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육체를 따라'의 헬라어 '오피소 사르코스'는 관사가 붙지 않았으므로 
'육체가 갖는 속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신령한 속성을 따르지 않고 윤리적 죄악을 행하는 것을 나타낸다.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주관하는 이'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2)혹자는 악한 천사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3)혹자는 제도화된 교회의 장로들이 갖는 권위 즉 '교권'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4)혹자는 '정치 권력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 중 첫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주관하는 이'의 헬라어 '퀴리오테토스'는 무관사로서 
'주권의 속성'을 나타내어(골 1:16, 엡 21) 온 주주와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담대하고'는 '당돌함'을 의미하며 
'고집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다데이스'는 
'아우토스'('스스로')와 '헤도마이'('즐겁게 하다')의 합성어로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거만한 행동을 가리킨다. 

한편 '영광있는 자'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제국적이고 행정적인 세력이라고 주장한다(Calvin). 
2) 혹자는 교회 통치자들이라고 주장한다. 
3) 혹자는 하늘의 천사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유 1:8). 거짓 교사들은 당돌하고 
교만하여서 하나님의 수종을 드는 하늘의 천사들마저도 무시하고 업신여겼다.

▲11절
개역성경에는 비교 접속사 '호푸'('이에 반하여')가 생략되어 있다. 
'호푸'는 앞절의 거짓 선생들의 행위와 천사들의 행위를 비교하여 
거짓 교사들의 교만함을 드러내고 있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고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본문은 더 큰 힘과 능력을 소유하였으나 송사하지 않은 천사들과 힘과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적하고 훼방하는 거짓 교사들을 비교하여 
거짓 교사들의 교만을 강하게 드러낸다(유 1:9, 계 12:9). 

한편 본문의 '천사들'은 '미가엘'을 가리킨다. *유다서 병행 구절에 의하면
이들은 다른 천사들과 악한 천사들보다 강하다(계 12:9). 
이렇게 강한 미가엘조차도 자신이 직접 훼방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모든 심판권을 하나님께 돌린다(유 1:9).

▲12절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필연적인 멸망을, 잡혀서 도살당할 짐승에 비유한다(계12:11-13). 

거짓 선생들의 무례하고 거역하는 행위는 
천사의 행동에 비하면(유 1:10) 아무런 생각이 없는 동물과 같은 것이다. 
거짓 교사들을 비롯한 죄인들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영적 진리를 잊은 채 
다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간다(롬1:24,25).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거짓 교사들의 행동은 동물과 같이 근본적으로 이성 없는 무지의 소치이다. 

사도 바울도 믿기 전에 행한 자신의 행동을 무지의 탓이라고 밝혔다(딤전 1:13). 
이렇게 거짓교사들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불법을 행하며 대적하여 
멸망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딤전 1:7).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헬라어 '엔 테 프도라 아우톤 카이 프다레손타이'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멸망 안에서 그들은 파괴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13절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본문은 거짓 교사들이 남들에게 불의하게 행한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들도 속임을 당하고 보응을 받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는 불의하게 예언하려다 멸망한 발람에게서 찾을 수 있다(민24:11).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낮에'에 대해서 혹자는 '날마다'로 이해하고, 
혹자는 '매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나 
'낮 시간에'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연락'의 헬라어 '트뤼펜'은 
사치스럽고 자유 분방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눅7:25). 
취하고 방탕한 생활은 일반적으로 밤에 이루어지나 
거짓 교사들은 이들보다 더 악한 자들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점과 흠'은 어떤 모양을 손상시키는 오점을 말하는 것으로(엡 5:27, 벧전 1:19) 
거짓 선생들의 불의한 행동을 가리킨다. 

또한 '간사'는 '어리석음' 혹은 '속임'을 뜻한다.
본절은 거짓교사들이 낮에도 밤처럼 향락에 빠진 생활을 즐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모임에서도 역시 자신들의 술 취하고 음행하는 
방탕한 행위로써 불의를 드러냄을 시사한다.

▲14절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마음 속에 있는 음란한 생각을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음심'의 헬라어 '모이칼리도스'는 문자적으로 '음녀' 혹은 '간음하는 여인'을 
의미한다(마12:39, 16:4, 롬 7:3, 약 4:4). 

본문은 음탕한 생각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거짓교사들의 방탕한 생활은 전혀 만족이 없으며 
그들은 지칠줄 모르는 육적인 정욕의 노예가 되어 죄악된 삶에 빠져 지내게 된다.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굳세지 못한 영혼들'은 본서의 수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3:16) 
베드로 자신의 연약했던 과거를 암시한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라'(눅 22:32)는 
명령을 들었기 때문에 거짓 선생들의 미혹 가운데 있는 수신자들과 
자신을 비교했음이 틀림없다.

'유혹하며’
거짓 교사들은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으로 꾀어 그들의 방탕한 생활에 동참하게 한다.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연단된'은 '체육으로 몸을 단련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탐욕적인 생활이 이미 습성화 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저주의 자식이라'는 것은 전형적인 히브리식 표현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 위에 있도다'라는 의미이다
(눅 10:6, 엡 2:8,  5:8, 살후 2:3, 벧전 1:14). 
이것은 그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암시한다.

▲15절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탐욕을 '발람'의 예를 들어 책망한다. 

'발람의 길'이란 돈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거짓 예언을 하고(민22:5) 
부도덕한 것을 교훈한 역사적 사실(민 31:16, 계 2:14)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베드로가 거짓 교사들의 탐욕과 불의에 대해 발람의 교훈을 
예로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함과 동시에 
거짓 교사들에게 멸망의 경고를 하기 위함이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베드로는 자신의 탐욕을 위하여(민22:22-24)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도덕한 행동을 하도록 미혹하였던 
구약의 발람의 예를 통해서(민 31:16, 유 1:11) 
불의한 삯으로 거짓된 모든 욕망을 소유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모습을 지적한다.

▲16절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발람에게 있어서 '자기의 불법'은 발락이 주는 불의의 삯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거짓으로 저주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고의로 어긴 사실이다. 이 책망은 나귀로부터 받았다.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본문은 발람이 책망받는 사건을 나타낸다. 
본래 선지자의 직무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발람이 자신의 소욕(所欲)으로 인해 거짓 예언을 함으로 
선지자의 직무를 외면하였고 그 결과 짐승 곧 나귀에게 책망을 받았다. 

베드로는 나귀에게 책망받는 발람의 예를 거짓 교사의 경우와 비교하여 
거짓 교사들의 교훈과 행위가 짐승에게 책망받을 만큼 사악한 행위이며 
'미친 자의 행위'와 다를 바없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강조한다. :16

▲17절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물 없는 샘'은 거짓 교사들의 교훈이 무익함을 시사한다.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는 물 없는 샘이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물 없는 샘'(창 37:24, 렘 14:3)은 
물이 갈한 자들에게 실망만 가져다 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 선생들의 교훈이 샘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만족을 줄 수 없는 물 없는 샘에 불과하다(마 12:43, 눅 11:24, 요 4:13,14). 

한편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사상적 교훈을 '안개'로 표현한다. 
'안개'는 마치 세상을 소유한 것처럼 세상을 자욱하게 덮고 있지만 
광풍이 불면 한 순간에 걷힌다. 
이와 같이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영적인 생명력을 주지 못하고 
일시적이며 견고치 못하다(막 4:37, 눅 8:23, 유 1:12).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캄캄한 어두움'의 헬라어 '호조포스 투 스코투스'는 
'지옥'이나 사악한 자들의 종말적 운명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조포스'는 특별히 '땅 속의 어두움'을 말하기 때문이다.

▲18절
개역 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의 이유임을 시사한다.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허탄한 자랑의 말'이란 허풍으로 부풀린 헛된 말을 의미하는 것으로(엡 4:17) 
거짓 교사들의 사상적 속임수의 속성을 잘 나타낸다. 
그들은 사람들을 교묘하게 유혹하여 범죄하도록 유도한다.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이란 거짓 교사들은 물론 
그들에 의해 미혹당한 이교도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이성없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들이다(12절). 

한편 '겨우 피한 자들'은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서 겨우 벗어난 자들로서 
초보 단계의 신앙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거짓 교사들의 계략은 집요하여서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아 굳게 서지 
못한 자들을 여지없이 유혹하여 넘어지게 한다.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음란으로써'의 헬라어 '아셀게이아이스'는 수단을 나타내는 여격으로 
'음란한 행위들로'를 의미한다. 

이는 곧 '음란'이 이방인과 거짓 교사들의 대표적 속성일 뿐만 아니라 
신자들을 넘어뜨리는 수단임을 뜻한다. 
또한 '아셀게이아이스'가 복수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단순한 음란의 범위를 벗어나 육체를 이용한 온갖 종류의 음탕한 행위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19절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본문은 거짓 교사들이나 이들에게 미혹당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영광의 자유(롬 8:21)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고전 8:9, 10:23, 고후 3:17)를 오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갈 5:1, 요 8:32) 
자신들이 허탄한 가운데서 행하는 방종을 혼돈한다(3:15,16)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말대로 하면 온갖 율법과 육체에서 해방되어 
윤리 생활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자가 될 수 있다고 하며 
신앙이 깊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였다(18절).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비록 거짓 교사들이 입으로 자유를 준다고 떠벌려 미혹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하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당할수 밖에 없다.

'누구든지 진자는 이기는 자의 종이 됨이니라' 
당시 전쟁에서 패한 국가의 백성들은 무조건 승리한 국가의 종으로 끌려 갔었다. 
이와 같이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해 
죄의 정복을 당하여 죄의 노예가 되었다(요 8:34). 

▲20절
'만일 저희가' 
'저희'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된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2)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로서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한다. 
3)혹자는 거짓 교사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 가지 견해 중 첫번째와 마지막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즉 거짓 교사들과 그들에게 미혹된 배교자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진정한 지식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이방인 시절에 즐겨했던 죄악에서 돌아섰음을 시사한다.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이방인이었다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이 
거짓 교사의 미혹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도를 버리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이방인이었을 때보다 훨씬 더 악하여진다.
(마 12:45, 눅 11:26, 히 10:26)

▲21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의의 도'는 '진리의 도'(2절) 혹은 '바른 길'과 같은 개념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의미하며(마 21:32) 

'거룩한 명령'은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적 규범이다(2절, 막 5:1-7:29).  
  
베드로는 본절에서 배교자가 자신들의 과거 경험을 내세워 더욱 패역해지며 
고집스러워져 다시금 회개할 소망조차 잃어버리게 됨을 나타내고 있다
(2:20, 3:18, 히3:12-14, 4:6,  10:26, 38, 39,).

▲22절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이는 잠 26:11의 인용이다. 또한 사 56:10에도 유사한 비유가 언급되어 있다.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거짓 교사를 돼지에 비유하는 비유는 
헬라의 유대인들의 속담집 '아히칼'(Ahikar)에 나오는 격언으로 
'개'의 격언에서와 같이 과거로 되돌아 간 배교자들을 강조한다. 

돼지가 씻어서 깨끗하여졌으나 곧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가서 뒹굴어서 
더러워지는 것과 같이 본문은 거짓 교사들이 한번 옛 생활을 잠시 떠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과거를 잊지 못하여 
결국은 죄악의 쾌락으로 빠지게 됨을 시사한다. 

한편 '개와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동물로 간주되었고, 
주님도 진리의 말씀에 대적하는 자들을 비유할 때 사용하셨다(마 7:6). 

베드로는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가 배교하는 자들이 
얼마나 죄악에 탐닉하기 쉬운가를 드러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경계토록 권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