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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3장, 대낮인데 캄캄한 세상

LNCK 2022. 11. 1. 14:20


◈대낮인데 캄캄한 세상      미가3:1-12      여러 설교 정리

해가 없어서 어두워졌다는 게 아니라, 
백주 대낮인데, 영적으로 캄캄한 세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중세 암흑시대처럼 되어버린 것이지요.

본문 미3장을 분해하면
1~4절, 정치지도자들의 죄악상
5~8절, 종교지도자들의 죄악상
9~12절, 지도자들의 죄악으로 인한 예루살렘 멸망 선언
 

미가서는 3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들으라’로 시작합니다. *1:2, 3:1, 6:1

1~2장이 첫 번째 설교,
3~5장이 두 번째 설교,
6~7장이 세 번째 설교죠.

본문 미3장도, 미가 선지자는 당시 사회 지도층이었던
백성의 지도자, 제사장, 선지자에 대하여, 그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지적하는데요


◑성령충만한 지도자의 특징 

미가서 3장에 대한 훌륭한 설교 한 편을 소개합니다.
☞미3:1~8 성령충만한 사역의 세 가지 특징 (tistory.com)
그 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령 충만한 사역은 “죄와 허물”을 다루는 것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3:8 

이렇게 성령충만한 미가는, 그들의 허물과 죄를 지적했습니다. :8

▲2. 성령 충만한 사역은 “권능” Power 있는 사역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3:8 

미가는 자신의 사역의 근원이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었다’고 했죠. :8

▲3. 성령 충만한 사역은, 악한 지도자들에게 대한 심판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3:1-3절을 찾아보세요. 아래에 나옴.  

곧 이스라엘 사회의 지도층 (정치 지도자, 제사장, 선지자) 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그들의 죄의 지적을 서슴지 않고, 담대히 대면했습니다.

위 설교는 ‘성령충만한 지도자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했다면
아래는 ‘타락한 지도자의 부정적인 면’을 살펴보겠습니다.
 

◑타락한 지도자의 특징

 

고대사회가 주로 그렇듯이 당시는 제정일치의 사회였습니다.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가, 사회 고위층으로서 모든 권력을 독식하던 시기였죠.

이들의 특징이 본문 미3장에 다음 세 가지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지도자들입니다. 회사에서 팀장을 하기도 하고요...
이런 우리가 경고를 받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될 그들 지도자들의 잘못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 선지자(5, 11절), 선견자(7절), 통치자(1, 9절), 우두머리(1, 11절)가 나오고
제사장(11절)이 나오는데... 
통치자 / 제사장 / 선지자로 요약되는.. 당시 사회 지도층입니다.

본 장에서, 이 셋을 구분해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듯하지만
서로 공유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통합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타락한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착취합니다. 1~4절

1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2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3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우리가 치킨이나 생선을 ‘발라 먹는다’라는 말을 쓰는데
미가는 지적하기를, 통치자들이 백성들을 ‘발라먹었다’는 것입니다. :2~3

신문에서 읽은 글인데,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너무 백성들에 대한
세금이 무겁게 부과되고, 부역(동원 의무노동)이 심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농민들이 다 손놓고 구경만 했다는.. 그런 글을 봤습니다.

얼마나 사실인지 더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백성들이 도저히 낼 수 없는
세금을 부과하고 노역을 시키고 그러면
사람들 마음이 ‘이판사판이니 뒤집어져라’ 마음먹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남북왕국은, 하나님이 나서셔서 뒤집어 엎는다는 것입니다.
즉 앗수르와 바벨론을 불러와서
백성들을 발라먹는 통치자, 제사장, 선지자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죠.

△비록 사회주의 지도자였지만, 전세계에 존경받는 인물이 호치민입니다.
TV 여행 채널에도 가끔씩 소개되는, 호치민 시에 있는 그의 유적지를 가 보면
그가 입었던 색 바랜 인민복,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 그가 쓰던 타자기, 
그리고 안경.. 그게 호치민의 전재산이었다고 합니다. 

베트남 국민들이 그를 존경하고, 똘똘 뭉쳐서 프랑스를 물리치고
미국까지 손을 떼게 만들었던 것은, 그의 청렴결백한 리더십이 
온 국민적 단결을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2. 타락한 선지자, 통치자들은 ‘돈을 휘둘렸습니다,’ 

5~7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릴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거니와

11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 타락한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1. 이들은 이상 vision 을 보지 못합니다. 

6절,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여기서 ‘점친다’는 말은 좋은 뜻입니다.
병행법으로 해석하면 ‘이상 vision’과 대비되는데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뜻이죠.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지도자들에게 그 시대를 향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또 비전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타락한 선지자(제사장, 통치자)에게는 
이런 말씀과 이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낮인데도 해가 져서 캄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떠난 상태입니다. 

6절에 ‘밤을 만나리니, 흑암을 만나리니’ 라고 한 것은
환한 대낮인데도.. 영적으로 흑암의 밤을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7절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릴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거니와’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거죠.

당시 앗수르, 바벨론에 의해 남왕국, 북왕국이 망할 때에
하루 아침에, 단 한 번의 전쟁으로 망한 것이 아닙니다.

수 십 년에 걸친, 여러 차례의 대적의 침입에 의해, 서서히 나라가 망해갔죠.
그런 작은 국지전들이 벌어졌는데.. 대적이 침략해 왔는데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적들을 물리쳐주지 않으십니다.
세상에 낭패가.. 그런 낭패가 또 있을까요?

유치원 다니는 아이가, 놀이터에서 동네 초등학생 형에게 몇 대 얻어 맞았어요.
아이는 너무 분한 나머지, 집에 와서 아버지를 끌고 나가려 합니다.
근데 만약에 아버지가 ‘너 잘 맞았다!’ 그러면 얼마나 낭패겠습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3. 이들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깨닫지 못합니다

11b절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우리는 선민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겐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 라고 믿었죠.

사실 이들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망하여 성전이 불에 탈 때까지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망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만큼 신학이 (성공주의로) 잘못되어 있었고, 영적 안목이 어두워져 있었죠.

▲정리하면, 통치자, 제사장, 선지자 등 백성의 지도자들은
본문 미3장에서 그들의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백성들을 착취하고, 뼈까지 발라먹었다는 것입니다. 1~3절
-돈 때문에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11절

그 결과, 
-지도자들이 “영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비전을 보지 못합니다. 앞날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6절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7절
-영적으로 병들어서 ‘망하고 있는데도, 망하지 않는다, 잘 된다’라고 합니다. 11절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지만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헛소리만 지껄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잃은 선지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거짓 예언자는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과 멸망으로 이끕니다. 

 

◑적용

▲1. 미가는 <사회 정의>를 강조한 선지자입니다.
미가에 앞서서는 엘리야, 엘리사가 활동했는데,
그들은 <바알 우상숭배>에 대항했고, 
<사회 정의>에 대해서는, 미가나 이사야만큼은 강조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남유다의 사회 정의가
아직 극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미가가 활동하던 시기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중에서도  *1:1
특별히 아하스 왕 시기라고 보는데,
남유다에서 가장 극악한 왕 2명을 들라면, 아하스와 므낫세입니다. 

   아하스에 대한 성경의 전반적인 평가는 우상숭배를 많이 한 악한 왕입니다.
   분명 남쪽 유다의 왕인데 역대기서는 비꼬느라고 그랬는지 
   '이스라엘왕'이라고 불러버립니다!

   즉 남유다 왕국의 아하스를 ‘이스라엘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한 경멸의 호칭이었던 것입니다. 
   대하28:19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다른 말로, 남유다가 타락해도, 아하스 이전까지는 
그렇게 극렬하게 막나가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아하스 이전까지는, ‘망나니 왕’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아하스 시대에, 사회 정의를 외치는 미가 선지자가 등장한 것은
‘시대적 요청’이었다는 것입니다. 
적합한 시대에, 적합한 선지자가 등장한 것이죠. 하나님이 이렇게 세우십니다.

   남유다에 이사야 선지자도 같은 시기에 있었잖아요.
   네, 이사야는 예루살렘 왕궁에서 활동했고요, 
   미가는 (쉐펠라 라고 불리는) 남유다의 시골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메시지의 내용은 같았지만, 활동 무대가 달랐던 것이죠.

40년 전에 한국에서, 당시 군사정권이 활발할 때
보수 기독교는 .. 개인의 부도덕 immorality 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진보 기독교는 .. 사회의 부정의 injustice 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미가는 굳이 분류하자면, 후자에 속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정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두 분야에 다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대천덕 신부님이 한국에서 또 많은 영향력을 미치셨는데,
그 분도 사회의 부정의 social injustice 에 관심이 많으셨던
미가 같은 선지자이셨습니다.

그 분의 설교가 기억나는데, 마5:6절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신약에 나오는 ‘의’를 righteousness 로 번역하지 말고
justice 로 번역해야 더 정확하다고.. 그 분은 주장하셨습니다. 

그런 구절들을 righteousness (개인적, 내면적 의) 로 번역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justice (사회정의)에 관심이 없다고 힘주어 강조하셨습니다.  

정답은, 성경은, 하나님은 둘 다 강조하고 계십니다.
개인적, 내면적 의 righteousness를 추구하는 분들은, 
사회정의 justice를 무시하면 안 되는데
미가서가 ‘사회정의’를 부르짖음으로써, 묘하게 성경에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본문 미가서 3장은, 그래서 사회지도층의 죄악을 낱낱이
아주 까발리듯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북왕국에서는 아모스 선지자가 사회정의를 외쳤죠.
암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미가가 강조한 사회정의가 미가서 1~7장의 배후에 내내 흐르지만
본문에서 한 구절만 살펴보겠습니다.

미3:1~3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과거에 프랑스 대혁명이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서 왕정체제가 붕괴될 때
이상하게 사람들은 꼭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프랑스의 성난 민심들은, 가톨릭교회를 왕정과 동일체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교회가 사회정의 Justice 를 지나치게 무시하고
너무 왕과 귀족층에 편향적 (그들도 다같은 양떼이지만) 이었기 때문이었죠.

오늘날의 사회는 과거에 비하면, 너무나 민주적이고 공정하기 때문에
사회정의 문제가, 과거처럼 크게 불거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대 역사를 볼 때도 (모르는 젊은 청년들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5~6공화국 군사정권 시절에 대학생 젊은이들이 데모를 하다가
교회로 몰려가서 화염병을 투척한 일도 있었고, (그 데모대가 잘못 됐죠)
교회가 데모대를 대비해서, 만반의 소방 준비를 갖추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개인적 의와 사회 정의
즉 righteousness 와 justice를 둘 다 추구해야 되는데,
너무 개인신앙적 의만 추구하고, 사회 정의를 무시했을 때
그것이 피끓는 당시 대학생들의 마음을 자극한 것입니다. 

최근까지도 한국교회는 외국노동자 인권을 위해서 끊임없이 애를 썼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탈북민 복지를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의탁 노인들의 무료급식을 위해서도, 사회의 어느 누구보다
더 앞장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회정의를 위해 힘쓰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런 구제, 긍휼사역을
이제는 선교사들을 통해, 해외에까지도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사회 정의’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고 있습니까? 

...........

♣굶어도 떳떳하고 바르게 사는 것을 중시하는 가치관

오늘날 노숙자들 중에.. 어떤 분은..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1919년 3월 22일, <삼일 만세운동>이 터진 직후, 조선총독부 거물급 관리들은
한국 주재 선교사 대표 9명을 초청하여 좌담회를 가졌습니다.

이 좌담회의 목적은, 삼일운동의 근본적 원인을 분석하여
재발을 막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나온 선교사들은, 모두 20년 이상 조선에 살았던 고참들이었고
게일과 마팻은 30년 이상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선교사들이 의견을 모은 것은.. 한국인의 마음세계(정신세계)는
물질세계를 압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게일 선교사는 이 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조선인은 육신이 편해도 마음이 편치 않으면, 
육신의 위안을 큰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고대문화로부터 이어졌고, 그 작용이 복잡합니다.
나는 그 정신세계를 존경합니다.”

평양에서 30년 간 전도한 마팻 선교사는, 이 회의에서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조선인에게 물질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것’, 곧 ‘의’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굶어도 사람답게 대접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른 대접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 회의에서 선교사들이 분석한 것은
조선인은 굶어도 떳떳하고 바르게 사는 것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미년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은, 물질적으로 보다 나은 생활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굶어도 정의가 강 같이 흐르고
사람답게 대접받는 성경적인 인간 해방을 외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노숙인/행려인들 가운데도, 
그 정신세계가 올곧고 꿋꿋하신 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노숙인이라고 혹시 무시했다가는.. 큰 실수 하는 것입니다.  


♣연민과 동정이 있는 어리숙한 사회가 더 좋다

거리에서 만나는 노숙인은 대부분 ‘불쾌한’ 모습입니다.
잔뜩 술에 취해 아무 곳에나 드러누워 자거나 불결한 손을 내밀며
적선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행패를 부리고 욕설을 하는 노숙인을 마주친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신앙인의 선행에 대한 ‘의무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느 교우가, 노숙인 사역을 하는 저를 의식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걸을 하는 노숙인을 돕고 싶은데, 구걸한 돈으로 술을 사서 마신다고 하니
돕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냉정하게 뿌리쳤지만,
죄를 지은 것 같고, 마음 한구석이 여간 찜찜한 것이 아니네요.”

저는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돕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면..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돕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은 알코올 중독자 노숙인이 술 한 잔을 더 마실 수 있을 만큼
어수룩한 구석도 있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구걸한 돈으로 술을 마시는 노숙인에 대해
마음이 단단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냉정해도 됩니다.
그것도 그 사람을 위한 것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노숙인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 속에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연민’과 ‘동정’에서 출발합니다.
연민과 동정이 없는 사회를 어떻게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파리의 거지

*후원금을 받으시는 분들에게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기도 편지 newsletter를 좀 더 감동적으로 쓰실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거지처럼 구걸해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고요.

프랑스 파리에 가면, 누구나 걸어보는 미라보 다리가 있다.
그 다리 위에서 한 맹인 거지가 날마다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글귀를 적은 도화지를 들고 있었다.
‘저는 앞을 못 보는 맹인입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하루는, 어떤 노신사가 그 맹인 앞에 멈추더니, 말을 걸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실례지만, 하루에 얼마나 버십니까?”

맹인이 대답했다.
“예, 많이 못 법니다. 사람들이 인색해서 하루에 약 5프랑 정도밖에 법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제가 잠시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러더니 그 노신사는,
그 맹인 거지가 들고 있는 도화지 위에다가
싸인펜으로 몇 자 적어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기 길을 갔다.

약 1주일이 지났다.
그 노신사가 거지 맹인 앞에 다시 나타났다.
“요즘은 수입이 어떻습니까?”

“선생님, 참 신기하네요.
선생님께서 몇 자 적어주신 그 다음부터는
하루에 50프랑씩 들어옵니다. 수입이 10배나 늘어났어요!”

그 노신사가 몇 자 적어준 내용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아름다운 봄이 왔군요. 그러나 저는 그 아름다운 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낭만적인 프랑스 파리 시민들에게
‘저는 앞을 못 보는 맹인입니다. 도와주십시오!’ 라는 글귀보다는

‘아름다운 봄이 왔군요. 그러나 저는 그 아름다운 봄을 볼 수 없습니다!’
라는 약간 시적인 표현이,
그 다리를 산책하던 시민들에게, 더욱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