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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5장, 아기를 통한 구원, 하나님의 유머

LNCK 2022. 11. 3. 20:41

◈미5장, 아기를 통한 구원, 하나님의 유머              여러 설교 정리

미5장의 <개요>

-메시아의 탄생 예언 (1-4절)
-메시아의 통치 (5-9절)
-메시아의 정화 작업 (10-15절)

성경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적용되는 책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은
-미가가 살아있던 당시에도 예언, 성취되고
-예수님의 탄생 때도 예언, 성취되고
-장차 세상 끝날에도 예언, 성취되리라 봅니다.

미가 선지자는 북이스라엘과 수도 사마리아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고, 
장차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의 성취로 본다면, 메시아는 히스기야입니다.
그는 앗수르의 18만5천의 군대로부터 예루살렘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척결하고, 종교개혁을 당시에 이루었습니다. (5:10~15)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예표였습니다.


◑본문 해석

▲메시아의 탄생 예언 (1-4절)

미가 3-5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에 대해서 증거하는데, 
오늘 본문 5장은 장차 이루어질 메시아를 통한 온전한 회복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절,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을 ‘딸 군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처럼 보입니다. 
‘딸’은 ‘약한 존재’이고, ‘군대’는 ‘강한 존재’입니다. 

무너질 수밖에 연약한 나라 백성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딸’이라는 단어는 ‘사랑하는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나라 백성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싼다’라는 것은 바빌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친다’는 것은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난 뒤에 지도자들이 당하게 될 모욕에 대한 예언입니다. 

‘재판자’는 판사, 법조인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행정, 입법, 사법 등 3권을 모두 가진 통치자를 뜻합니다.

‘뺨을 친다’라고 하는데, 뺨을 때리는 것은 고통을 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욕을 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뺨을 치는 것이 손이 아니라 
막대기(목자들이 맹수를 쫓아낼 때 사용하는 도구)라면 달라집니다. 

모욕과 함께 고통도 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대항하고, 친애굽 적이었다고,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메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유다가 그토록 모욕을 당하고,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될지라도, 
참 목자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본절은 1절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침략자로부터 수치를 당하는 것과 대조로
더 이상 패배도 수치도 당하지 않게 하며 이스라엘을 온전하게 다스릴 자이신 
참된 왕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마2:6절의 출처죠.

미가가 '베들레헴'의 옛 이름 '에브라다'를 첨가한 것은 
본절의 베들레헴이 스불론의 베들레헴과 다른 지명이며(수 19:15)
다윗의 집을 가리키는 것임을 시사하기 위함이죠. 

미가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을 통해서 본절의 내용이 
다윗의 집에서 나온 메시야 왕과 연관됨을 암시하고 있죠.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메시아가 곧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메시아가 태어나시는 베들레헴은 로마나 에베소, 알렉산드리아와 같이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들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유다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예루살렘과 같은 곳도 아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유다에서도 아주 작은 도시였습니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도시에, 
비천한 직업의 목수의 아들로, 빈방이 없어서 구유에 누우신 것은 
세상에 아무리 작고 초라하게 여겨지는 사람, 낮고 보잘것없게 여겨지는 사람도 
다 품어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아주 강력한 상징입니다.

3절,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수들의 압제 아래에 있게 될 것이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마침내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여인이 해산할 때라고 하십니다. 

(3절을, 바벨론 포로기에서 돌아오는 예언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남은 자가 돌아온다’고 했지, ‘포로’라는 말도, ‘바벨론’ 이란 말도 없죠.)

지금 문맥은 ‘아기가 태어나서 얻게 되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으리니’의 징조와 비슷합니다. 사7:14

아기가 태어나서.. 이스라엘이 구원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아기는, 미가 또는 이사야 당시에는 ‘히스기야’ 였습니다.

그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은.. 다윗 왕가 출신이란 뜻이죠. 5:2

4~5a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본절은 메시야의 사역을 나타냅니다. 
'능력'과 '이름'은 동일한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하나님의 존귀와 능력을 나타냅니다. 

메시야는 하나님 존귀와 능력을 가지고 '땅 끝까지' 다스리십니다. 
그의 통치 원리는 세상 지도자처럼 무력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꼴을 먹이는 목자로서, 
우주의 주인으로서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리실 것입니다(시 2:8,  72:8).

메시아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통치하지 아니하시고, 
목자가 양을 목축하듯이 인도하신다고 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는 ‘서서(그가 서서)’입니다. 
목자가 서 있는다는 것은 자기 양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스리는 지역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땅 끝, 온 세상이고, 그분이 가져다 주시는 것이 평강이라고 하십니다. 


▲메시아의 통치 예언 (5-9절)

5~6절,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폐하게 하며 니므롯 땅 어귀를 황폐하게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와 병행되어서 등장하는 '니므롯'은  
앗수르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죠(창 10:8-12). 
니므롯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세상의 모든 제국들을 상징합니다.

앗수르 제국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는 유다에서는 
목자 7명과 군왕(장군) 8명을 내세워서 물리칠 칠 것이며, 
메시아께서 그들에게서 유다를 건져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에 중동의 패권자는 앗수르 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침략을 감행하면 
유다는 목자 7명과 장군 8명으로 대응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꼭 7명, 8명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7’은 완전수를 뜻하기에 ‘일곱 목자’는 ‘많은 목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8’은 일곱에다가 하나를 더한 것이기 때문에 7을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여덟 군왕’도 ‘많은 장군’을 뜻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메시아)’가 건져내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왕 시대에 아시리아 제국의 왕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유다의 여러 도시들은 초토화시키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유다는 속수무책이었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유다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의 군대를 쳤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아시리아의 군인 18만5천명이 송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국으로 돌아간 산헤립왕은 자기 신하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메시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이 누릴 복과 
승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9절,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야곱의 남은 자는 여러 나라 가운데와 많은 백성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그가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네 손이 네 대적들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7절에 '야곱의 남은 자는...여호와에게로 내리는 이슬 같고 
풀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이슬'과 '단비'는 풍요로운 소출과 연관시키기 어려우며, 
남은 자에 대한 묘사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면 '이슬'과 '단비'는 문맥상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이슬과 단비가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것처럼 
야곱의 남은 자들은 사람이나 인생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기대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목적은 이슬과 단비와 같은 남은 자들을 통해서 
모든 열국들에게 축복과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을 기대하는 남은 자들에게 이슬과 단비는 
축복과 구원이 될 수 있으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열국들에게 이슬과 단비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다음 절들에서 '이슬과 단비'로 표현된 남은 자들이 
'젊은 사자'로 비유되기 때문이죠.

8절, '야곱의 남은 자는...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미가는 남은 자와 열국과의 관계를 '젊은 사자'와 '양떼'로 비유하고 있다. 
남은 자가 앞절에서는 '이슬과 단비'로 표현된 것과는 달리 
본문에서 '젊은 사자'로 표상된 사실은 그리 생소하지 않죠.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서도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도(요 1:29) 묘사되고 
유대 지파의 사자로도(계 5:5)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죠. 

☞사자와 양의 양면성 예수님 https://rfcdrfcd.tistory.com/m/15980416


▲메시아의 정화작업 (10-15절)

10-15절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정화하시며, 
심판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10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이르러는 
내가 네 군마를 네 가운데에서 멸절하며 네 병거를 부수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여기서 화자는 미가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이시다. 
여호와는 남은 자들에게 축복과 구원을, 
대적자들에게 분노와 심판을 내리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 날에’,
'그 날에' 이것은 4:1-4에 언급된 메시야 도래의 날을 가리키죠. 

그 날, 곧 유다가 공격을 당하는 날에는 군마와 병거를 없애신다고 합니다. 
군마와 병거는 강력한 군사력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려고 하지 않고, 군사력을 신뢰하려고 했죠. 
그래서 군사력이 좀 구비되었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을 떠나곤 했습니다. 
그 뿌리를 자르시겠다는 것입니다.

11절 네 땅의 성읍들을 멸하며 네 모든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것이며

‘성읍’과 ‘견고한 성’도 무너뜨리신다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성을 견고하게 쌓고, 요새를 튼튼하게 지으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읍’과 ‘견고한 성’은 ‘세속적인 힘’의 상징입니다. 

그런 세속적인 힘은 하나님의 백성을 지켜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무너뜨리신다고 하십니다.

12~15절, 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 
내가 네가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내가 또 네 아세라 목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빼버리고 
네 성읍들을 멸할 것이며 내가 또 진노와 분노로 순종하지 아니한 나라에 
갚으리라 하셨느니라

본문은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우상이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실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숭배하게 한 이방 나라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자손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나라가 망하는 길로 
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려고 했습니다. 

둘째는 세속적 가치관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유다가 강한 경제력을 가질 수 있고, 강한 국방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갖추어지면, 저절로 나라가 지켜지고, 
저절로 신실한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끊임없이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들이 ‘양’이라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시력도 좋지 않고, 먹이를 구할 능력도 없고, 
자기를 보호할 힘도 없음에도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패망과 심판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긍휼의 하나님께서 영원한 목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적용 / 하나님의 유머, 어린아이를 통해 구원

지금 미가 선지자는 북이스라엘과 수도 사마리아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고, 
장차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예언하고 있는데, 우스꽝스런 것은, 
그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어린아기로 탄생’할 것이라는 거죠. 5:2~3

세상에 코미디, 유머도 이런 게 없습니다. 
지금 상대는, 세계 최강의 전쟁 기계들.. 앗수르입니다. 
앗수르는 나라의 모든 조직이 군대조직이었습니다. 군수, 도지사 이런 게 없고
전부가 대령, 대위, 중사... 국가가 그런 군대 시스템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남아있는 고고학 유적(부조 등)을 보면,
앗수르는 포로를 끌고갈 때, 사람 코에 철사줄 같은 것을 꿰어서
마치 짐승 끌고 가듯이 끌고 갔습니다. (몇해 전 IS의 잔인성이 혹시 이들의 후손?)

그런 극악한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대비책은 메시아인데,
그것도 아기부터 탄생시킬 거라는 거죠. 인간적인 관점에서 정말 속터질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유머는.. 종종 나타났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정말 골리앗은 콧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그와 아울러 블레셋 모든 진영에는, 일제히 ‘뭐 하자는 거지?’ 하면서
골리앗을 뒤따라 모두 콧웃음과 비웃음과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사사기 시대에.. 사람들이 모두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때,
하나님은 어린 소년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보다 더 어렸을 것입니다.
그때는 엘리 제사장 말고는, 다른 어른은 없었나요? 

하나님은, 밤마다 잘 때 엄마를 보고 싶어 했을 어린 소년에게 말씀하셨고,
그를 키우셔서.. 결국 사사기 시대의 혼란을 해결하는 솔루션으로 삼으셨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예언할 때 태어난 ‘구원자 아기’는 히스기야입니다.
그럼 히스기야가 25세에 왕이 되어, 
그의 재위 6년에 북왕국 사마리아가 앗수르 살만에셀에게 함락됩니다. 왕하18:10
앗수르는 여세를 몰아, 남유다를 침공하게 되죠.

그러니 30세에,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아주 젊은 나이입니다.
그럼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물리칠 때, 무슨 군대나 무기의 힘으로 이겼나요?

아닙니다. 그냥 기도의 힘이외에는 별로 동원한 다른 수단이 없습니다.
만약 군대가 얼마정도 있었다 해도, 그건 앗수르의 18만5천에 비하면
정말 애와 어른의 싸움과 같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앗수르 군대는, 당시 고대 근동을 정복한 ‘전쟁에 노련한 배테랑’들입니다.

이 글의 주제는 ‘어린 아이가 강한 대적 원수 마귀를 물리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모략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었죠.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그렇다고 애들을 앞세우고 나간다고.. 모두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십자군 전쟁이 패배로 이어지자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한 것은 기사들이 아니라 어린이들이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3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자원했다. 
주로 가난한 농민들의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기는커녕 남쪽으로 가는 도중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아이들이 제노바에 도착하자 
그곳의 선량한 시민들이 이들을 양자로 삼거나 
음식과 돈을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예루살렘으로 항해를 떠난 극소수 아이들도 절반은 익사했고 
나머지는 북아프리카에 도착했으나 
노예로 팔려 나갔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전말이다. 

당시의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이들이 예루살렘 재점령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감격에 떨며 “우리가 자고 있을 때 아이들은 깨어 있도다!” 
하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불리우는 1212년의 일이다. 
아이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소년 소녀들의 십자군 이야기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성전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켜 
5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무턱대고 선량한 아이들만 동원한다고.. 다 승리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죠.
그래도 오늘날까지, 특별히 ‘예언 분야’에 있어서, 
innocent한 아이들의 예언은.. 큰 효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갔다온 소년’ 뭐 이런 제목의 책이 미국에서 밀리언 셀러가 되는가 하면
이장림의 ‘다미선교회’의 예수님 재림 날짜 예언도, 아이가 예언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확인 요

▲여기서 ‘아이 또는 아기’라는 것은
그가 꼭 육체적으로 미성숙한, 어리고 연약한 몸을 가진 아이 라는 뜻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영어로 helpless 라는 말을 쓰는데, 다른 그 어떤 수단도 의지할 수 없는.. 

부모(하나님)밖에 모르는 아이를 뜻합니다.

위에서 앞서 언급했던 다윗, 사무엘, 히스기야..

또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8:17 .. 이 말씀도 마찬가지죠. 

하나님 말고는 다른 수단이 없는 사람, 
하나님 말고는 다른 도움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앗수를 물리쳤다는 거죠.

▲우리 피부에 가장 와 닿는 게 물질입니다. 
어떤 사역자는 부모를 잘 만나서, 부모가 결혼할 때 집을 장만해 주었습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이때 ‘부모의 역사’는 나타날지 모르나,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기 어렵죠.
왜냐면 그 사역자는.. 그래도 기댈 언덕이 있고, 힘들 때 가서 부빌
자기 집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자기 전대,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을 때, 거의 일용할 양식밖에 없을 때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거죠.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물리친 것이, 
애굽의 군사 원조를 요청한 것도 아니요, 어디 기댈 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한 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힘!”, “히스기야의 능력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윌리엄 보든은, 백만장자의 상속자였으나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선교지로 떠났죠. 
우리 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자기 재산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겠다는 각오를 가진 사람들!

이런 분들에게서 ‘어린아이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최근에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1 >라는 책을 읽는 중입니다. 
최광 선교자가, 중국에서 탈북자 선교를 하는 감동적인 스토리인데
참으로 우스꽝스런 것은, 처음에 중국에 갈 때
비행기표 빼고, 단 돈 4만원 들고, 선교하러 간 것입니다. 

그러다가 선교비가 고갈나서, 탈북민들과 먹거리가 떨어지면
다같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러면 신기하게도 주님이 채워주셨는데,
급할 때는 조선족 집사님이 방문해서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듬 해(2000년 경)에는, 탈북민이 30~40명으로 늘어나서
충칭과 쓰촨성 청두에 사역장(선교센터)을 네 곳을 유지하면서,    
매달 5백만원 이상의 사역비가 들었지만.. 

최광 선교사는, 무슨 후원 약속을 받고 간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믿음 하나만 갖고
맨주먹과 빈손으로 갔는데... 하나님이 채워주시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혹시 사역비가 넉넉하지 않고, 쪼들릴 때가 있었답니다.
“돈이 많아도,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는 사역이기에 
그때 그때 꼭 필요한 물질만 주셨다” 라고 그는 간증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사역자나 퇴직자에게 공통적인 위험이 있는데,
돈이 있어서 사역(사업)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었으면, 시도하지 말았을 일을
돈(퇴직금)이 두둑하게 있어서, 이 일, 저 일에 손댔다가
결국 돈도, 세월도.. 모두 말아먹는 경우가 많거든요.

하나님은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시려고
꼭 필요한 물질만 주시지
아주 풍족하게 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능력의 근원이 ‘나의 약한데서’ 나오기 때문이죠.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정말 사역자에게 ‘아무 것도 안 들어오면’ 어떻게 하는가?
과거에 CCC에서 간사를 임명할 때, 후원금이 모금되지 않는 간사는
간사로 임명 ordain 하지 않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사역비가 모금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고 본 거죠.

▲앞서 4장에서도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4:6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본문은 메시야 왕국을 세우시리라는 소망의 말씀인데, 
메시야 왕국에 참여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은 '저는 자'와 '쫓겨난 자'입니다. 
바벨론 포로를 다녀온 자, 신약적으로 십자가를 통과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직접 심판하셔서 '환난을 받게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자기 땅에서 쫓겨나는 수치를 당하였고, 
'다리 저는 자'처럼 연약하며 무력한 존재로 전략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만을 바라보는 그들을 
다시 불러 모으셔서 남은 백성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평안하고, 안정적이고, 무탈하고, 사건사고 없이 살기 원하지만
그게 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복음 전하는 사도로 부름받은 사람은, 
결코 그렇게 편안하게 살 수 없죠.
일단 마귀가 그렇게 놔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는, 그 연약한 상황에서
어린아이처럼 간절히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세상 논리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 십자가의 승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