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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8

LNCK 2022. 11. 10. 17:19

 

[Ep 8.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YouTube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8                      <P1~P6 보기 

최광 선교사, 중국에서의 북한 선교 간증기
※꼭 북한선교가 아닌, 다른 국가 선교사역에도 도움이 됩니다.


※지금까지의 줄거리

1998년 8월 8일, 최광 선교사, 중국 길림성 도착. 탈북자 성경통독 사역 인계받음    

1998년 11월 27일, 산동성 제남으로 사역지 이동

1999년 4월 7일 1기 파송예배/ 그 후 1기 사역자들이 연변으로 학생 모집하러 떠남

1조 유기풍, 김권능 
2조 민선주, 박무디 
3조 박요한, 진칼빈 (*파송 후 얼마 후 두 분이 연변에서 체포, 북송, 청진에서 순교)
4조 허익두, 전요셉    (전요셉은 조선족, 중국어 통역 담당)
5조 최바울 

박무디는 북경에 고아원 어린이 사역자으로 스카우트 되어 떠남

그래서 1기 사역자 중 남은 6명으로 2기 사역 시작 
기풍, 권능, 선주, 익두, 바울선생이 팀장이 되어 5개의 사역장 꾸림 (요셉 통역자)

1999년 6월부터 5개 사역장이 제남, 중경, 성도 등에 분산되어 2기 사역 시작됨
탈북민 학생들은 총30명 가량으로 운영됨

그러던 중 기풍, 선주 선생이 베트남 통해 한국행 실패로 결국 북송됨

2000년, 그 결과 사역장이 5개에서 3개로 통폐합, 학생들도 통폐합되어 
         쓰촨성 성도(청두)에서 모여서 성경통독 및 북한선교 사역 진행 

2000년 4월 14일  2기 사역자 파송 (아래 나옴)

.....................................................


◑제3장  땅끝을 덮는 하늘의 열정
 '북조선에 예수의 피를 뿌립시다!'

♣사역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 말게! 

2기 사역을 시작할 당시, 1기 졸업생들이 모집한 학생들은 모두 53명 이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 사역장을 떠났다. 

떠난 사람들은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대부분 술과 담배 때문이었다. 
선생들은 술 담배 때문에 학생들을 떠나보낼 때마다
좀 느슨하게 하면 안 되냐고 내게 항의했지만 
사실 누구 못지 않게 내 마음이 아팠다. 

기풍선생과 선주선생의 사역장이 무너지면서 
처음 모집된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중도 탈락하고 
이제 사역장 전체 인원은 23 명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으니 
이들 중에서 진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단 한 사람밖에 나오지 않아도 
이 사역을 계속 해야 했다. 

2월 말에 김의환 총장께서 사역장을 방문하셨다.   *2000년 초
작년 11월 초에 처음 오셨을 때는, 세 사역장을 돌며 말씀을 전해주셨고 
6개월 이상 성경통독을 하면서 주님을 영접하게 된 형제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김의환 목사님은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으로 북한에도 직접 가보시고 
러시아, 중국 등 여러 곳을 다니며 
'북한 복음화는 아직 때가 아니다' 라고 평소에 결론 내렸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사역장을 둘러보면서, 자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하시며 
나와 우리 선생들을 많이 격려해 주셨다. 

또 익두선생 사역장을 가셨을 때는, 어린 사무엘 형제와 충신형제가 
조리있게 말씀 전하는 것을 보고 너무 귀여워 '가방에 넣어 가고 싶다'고도 하셨다. 

 

나는 호텔에서 목사님을 만나서, 사역 정황을 보고 드렸다. 
이제 3개월 후면 지금 세워진 2기생 선생들도 연변으로 파송되어  *2000년 4~5월
새로운 학생들을 모집해 올 것이며 

 

그러면 지금 있는 23명의 2기생들 중에서 적어도 15곳 이상의 새로운 사역장이 
세워질 것이고, 사역장의 학생 인원도 150명 정도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지금 새로 세워진 모든 사역장 선생들이, 
이 문제로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다. 

'최선교사, 자네 지금 있는 이 인원도 먹이고 공부시키기 어려운데 
이제 150명까지 불어나면, 그 경비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그러니 사역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 말게!  지금 이대로 계속 끌고 나가게나!' 

사역의 확장을 위해 1기 선생들과 함께 1년 전부터 계속 기도해 왔고 
또 이 사역은, 확장없이 현상유지만 하는 것이, 성격상 불가능한 사역이었다. 

도중에 시험을 이기지 못해 포기한 선생들도 있지만 
1기 선생들은 사역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더 확실하게 북한선교의 사명을 붙잡으며 
선교사로서 한 차원 더 수준이 높아졌던 것이다.  *익두, 권능, 바울

또한 지금 학생으로 사역장에 와서 공부하는 형제들은 
자기들도 앞으로 사역장을 맡게 되고, 
북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다는 데서 
많은 위로와 힘을 얻으며, 그 힘든 사역장에 생활을 견뎌나가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세워질 2기 선생들에게 
파송을 하지 않고, 한도 끝도 없이 공부만 계속해야 한다고 하면 
대부분 지금 하는 성경공부에 흥미를 잃고 떠나가버릴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을 목사님께 설명하며, 나는 덧붙여 말씀드렸다. 
'목사님, 사역비가 힘드시면 더 이상 헌금하지 마시고 
그냥 기도로만 동역해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말을 내뱉고 나서야,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의환 목사님은 성복중앙교회 담임목사님으로 계시면서   *1933~2010
성복중앙교회를 중심으로, 잠실신천교회, 성남 금광교회, 세계로교회, 숭인교회, 
멕시코 한인교회 등 여러 곳에서 1년에 약 2천5백 만원 이상 모금해주고 계셨다. 

또 우리 사역에 시작부터 큰 관심을 가지시고 
물질뿐만 아니라, 기도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으며 
다른 많은 교회에 우리 사역을 소개해서, 후원자들을 연결시켜주시는 등 
아주 큰 역할을 감당해 오셨다.

이런 고마우신 목사님께, 그 말이 몹시 섭섭하게 들릴 수도 있었겠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닫고는 너무 죄송했다.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시던 목사님이 '사역장으로 가보자'고 하시며 
(호텔에서) 먼저 일어나셨다. 

먼저 권능선생 사역장으로 향했다. 
권능선생 사역장에서 예배드리고 교제하면서 
새롭게 세워질 2기 선생들에게 김의환 총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옆에서 이 사역을 지켜보는 나는, 돈이 많이 걱정되는데 
최광 선교사는 전혀 돈 걱정을 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실 거랍니다!' 

그러자 선생들도 목사님의 말을 반갑게 받았다. 
'맞습니다. 목사님!   돈은요, 하나님이 주실 거예요. 
저희는 돈 걱정 같은 건 안 함다. 
우린 처음부터 그렇게 훈련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 사역을 보면서, 많은 선교사와 목사들이 사역비를 걱정했지만 
나의 물질관은 시종일관 '돈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이었다. 

나의 이 믿음대로, 하나님은 또 그렇게 필요한 물질을 채워 주셨다. 

2기 사역으로 접어들면서, 몇몇 교회와 성도들이 정기적으로 후원해 주셨지만 
사역장마다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가 빈번하여, 재정은 늘 빠듯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부족함과 풍부함을 시의적절하게 겪게 하시며 
우리 사역을 훌륭히 인도해 주셨다. 

솔직히 사역장의 선생이나 학생들은 
풍부함보다는 부족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체험했다. 

권능선생 사역장에 이어, 김의환 목사님은 
익두선생과 바울선생 사역장을 둘러보며 말씀을 전해주셨고 
새로 세워질 2기 선생 (후보생)들을 보며 매우 기뻐하셨다. 

학생들 전원을 호텔에 초청하여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함께 청성산 유람을 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가자! 가자! 연변으로! 

2기 선교사 파송을 한 달여 앞두고, 나는 파송자금 마련을 위해 
2000년 3월 초에 한국에 나갔다가 4월 초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와서 보니 내가 없는 사이에 바울선생 사역장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 있었다. 

내가 중국으로 들어오기 3일 전에, 갑자기 공안들이 바울선생 사역장에   *성도
호구조사를 나와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제시할 신분증이 없는 지라, 바울선생을 비롯한 모든 학생들은 
곧장 공안국으로 연행되어 유치장에 갇혔다. 

'아이고 선생님, 우리 이젠 다 죽었습니다. 
여기 와서 이렇게 성경공부까지 하고, 한국에서 왔다는 선교사들하고 
맨날 붙어 댕기면서 살았지...(이것이 북한에서는 간첩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 떡대가리같은 천국인지 지옥인지.. 가보기도 전에 이제는 다 죽었슴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슴까? 아이구 선생님이 어떻게 좀 해보시오!' 

몇몇 학생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사역장 책임자인 바울선생 얼굴만 쳐다보았다. 
바울선생은 '에이 씨, 사람이 한번 죽지 두번 죽나? 
어차피 사람이 한번 죽는 거 아닙니까? 
까짓것 이렇게 죽으면 순교라는데, 그러면 천국 가는데 뭐가 무섭습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바울선생도 앞이 막막하기만 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빠져나갈 길은 없고 
이제 북조선에 북송되면, 죽는 것밖에 길이 없었다. 

그래도 선생인 자기까지 얼굴을 찌푸리면 안 되겠다 생각하고 
명랑하게 웃고 떠들었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옥문을 깨고 나왔는데 
비록 '가짜 바울'이지만, 진짜 바울처럼 한번 하나님을 찬양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애용하던 하모니카가 그의 호주머니에 있었다. 
바울선생은 하모니카를 꺼내서 찬송가 '천부여 의지없어서' 를 불었다. 

저녁이 되어 고즈넉한 유치장 안에, 하모니카 소리만 애절하게 울렸다. 
흐느끼던 형제들이 조용히 따라부르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다른 감방에 있던 중국인들도, 하모니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밖에서 당직을 서던 공안도 찬송가의 곡조가 싫지 않은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손장단을 맞추었다. 

잠시 후 공안들은 형제들을 모두 불러냈다. 
'니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야?' 
'우리는 조선족이요!' 

그러자 공안들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에다 집 주소들을 다 써라!' 

바울선생이 제일 먼저 볼펜을 들고 쓰기 시작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종이가 다음 사람에게 넘어갔다. 
'하나님은 공안원 선생님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공안원 선생님이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공안 중 한 사람이 그 종잇장을 들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한참 보더니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이게 도대체 뭔 글자야? 중국 글로 다시 써라!' 

새 종이가 나오자 바울선생부터 시작해서 아까 썼던 말씀들을 다시 써넣었다. 

'내일 다시 조사할 테니, 오늘은 모두 집으로 가라!' 
공안들은 아무리 봐도 이 사람들이 범죄자 같지는 않았는지 
새벽 3시쯤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며, 공안 한 명을 감시자로 동행시켰다. 
(그는 감시자로 사역장에서 같이 밤을 지낼 사람이었다)

형제들은 사역장으로 돌아가면서 '살려달라'고 속으로 계속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사역장에 도착한 이들은, 조선족 형제에게 
공안과 계속 대화를 나누게 했다. 

그런 후 화장실 쪽 문으로 한 명씩 도망가기 위해, 창문을 뜯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공안의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자기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으니 
'니들 도망 안 칠 거지? 니들 달아나면 내 모가지 떨어지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우리가 뭐 죄를 지었소? 자기 집을 두고 왜 도망가오?' 
조선족 형제가 재빨리 대답했다. 

공안은 30분 후에 돌아오겠다고 하며, 급히 사역장을 나갔다. 

바울선생 사역장 사건도 있었고, 전체 사역장이 
성도에 머문 기간도 벌써 4개월이 지났기에 
아무래도 이곳에 더 이상 머무는 것은 무리였다. 

권능선생 사역장은 3일 후에 파송시키기로 하고 
익두선생과 바울선생의 사역장은 
우리 가족이 있는 서안으로 옮기기로 했다.   *샨시 성 시안, 성도에서 726Km

권능선생 사역장 선생들이 학생 모집을 끝내고 연변에서 돌아오면 
곧 이어 익두선생 사역장, 바울선생 사역장 순으로 
2기 졸업생 선생들을 파송시키기로, 나는 계획 했다. 

권능선생 사역장 파송예배 때, C시에서 김무종 목사님이 파송예배를 인도해
주기 위해 오셨다. 예배가 끝나자 선생들 모두가 열광했다.  *지금 청두(성도)

'오, 드디어 파송이다! 만세 만만세! 가자 가자 연변으로!' 
모세선생은 방 안에서 껑충껑충 뛰어다니더니 
이어 북한사람 특유의 곱사춤을 추며 집안을 돌아다녔다. 

순교선생은 베란다에 나가 두 팔을 벌리고, 거리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오 북한아! 우리가 간다. 기다려라, 동방의 예루살렘아!' 
그는 갑자기 시인이 되었는지, 끝없이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한국에 와서 나중에 최원 목사 됨,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삽니다 P1 (tistory.com)

나는 그를 황급히 끄집어 내렸다. 
'혹시 특무가 지나가다 듣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하지만 순교선생을 말릴 겨를도 없이 
장만식 아바이가 나를 와락 끌어안고 울면서 말했다.  *당시58세

'선교사님, 이젠 우리도 북한선교사들이란 말이요?' 
모두들 이날 만을 기다려왔다. 

북한선교사! 
그동안 이것을 바라보며 그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다. 

어떤 때는 돈이 떨어져 며칠씩 금식해야 했고 
때로는 공안의 호구조사가 무서워, 
추운 날 밖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익두선생 사역장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살았던 희망이었다. 

예배를 인도해주신 목사님을 배웅한 후 
권능선생과 나는 들떠 있는 선생들을 제지하느라 한동안 애를 먹었다.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내가 말했다. 
'그동안 수고를 하셨어요. 힘든 훈련들을 감당해 내느라고 말이에요.' 

'아닙니다. 우리 권능선생이 더 수고했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팀장 권능선생을 칭찬했다. 

그러자 권능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서 살 때, 스승이 싼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을 듣고 
이해를 못했었는데, 여러분들을 가르치면서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게 되었어요.' 

숙연해져 앉아 있는 2기 졸업생들 중에 모세선생이 말했다. 
'권능선생님, 너무 속에 두지 마오. 우리가 그동안 너무 몰라서 그랬지만 
이제야 또 그러겠습니까? 우리 이제부터 잘할 거예요.' 

권능선생의 속을 제일 많이 썩였던 모세선생이 
정색을 하고 이렇게 나오자, 모두들 즐거운지 '와~ 와~' 하고 웃었다. 

'저놈이 언제 철이 드나 했는데, 철들 날이 오긴 오네!'
이렇게 장아바이가 즐겁게 맞받아치자, 모두들 또다시 '와~' 하고 웃었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다. *권능선생 사역장 파송식
그 어떤 말을 해도 싫지 않고 즐겁기만 했다. 

'자 이제부터 나를 따라 합창하세요!' 
나는 다시 이들을 진정시키느라 박수를 딱딱딱 치며, 큰소리로 구호를 선창했다. 
통독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학생을 깨우느라 치던 박수가 이젠 습관이 돼버렸다. 
"행복끝 고생시작!" 

모두가 무슨 말인지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구호를 따라 했다. 
"행복끝 고생시작!" 

나는 다시 구호를 외쳤다. 
조금 더 큰 소리로 외치세요. "행복끝 고생시작!" 
모두 큰 소리로 나를 따라 외쳤다. "행복끝 고생시작!" 

한 번 더, 더 크게 "행복끝 고생시작!" 
여전히 이해되진 않지만, 모두 다시 악쓰듯 큰 소리로 외쳤다. "행복끝 고생시작!" 

'앞으로 사역을 하면서, 여러분은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지난번에는 파송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진칼빈 선생과 박요한 선생을 잃었어요.  *연변에서 학생 모집 중 북송되어 순교
이번에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거예요. 

북한 사람을 만나면 같은 동족이라고 불쌍하게 보고 너무 믿지 마세요. 
대화할 때 주의하고, 또 선생들이 기거하는 숙소위치는 절대로 알려주지 마세요.' 

이번에는 한 사람도 체포당하지 않고 
신입생들을 모집해서 안전하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1기생 선생들이 파송당시 겪었던 위험과 주의사항을, 나는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선생님, 학생들 다 모집하면, 학생들을 데리고 어느 도시로 가야 합니까?' 

'그건 나와 권능선생님만 아는 비밀입니다. 
학생 모집이 끝나면 권능선생에게서 지시를 받고, 가라는 곳으로 가면 됩니다. 
각 선생들은 오직 자기 사역장 외에, 다른 사역장의 위치와 상황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고, 또 알아서도 안 됩니다.' 

내 말이 끝나자, 분위기가 갑자기 침울해졌다. 
학생 때는 같은 사역장에서 같이 살며 공부했지만 
각자 파송 도시로 가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다른 사람의 사역 활동에 대해 철저하게 서로 몰라야 했다. 

그래야만 만일의 경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서로의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권능선생 한 사람뿐이었다. 

'자 이제는 기도 하고 출발합시다!'
내 말이 떨어지자, 앞으로 자기들이 가야 할 길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모두들 근엄한 표정으로 기도 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기도가 진행되다가,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다같이 파송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너의 가는 길에 주의 평강이 있으리, 평강의 왕 함께 하시니」 

나도 함께 노래 부르며, 한없이 북받쳐오르는 감동 속에 울었다. 
이들이 처음 사역장에 들어올 때 생각이 났다. 

그때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연길에서 유명한 깡패였고, 
누구는 아편장사꾼이었고, 누구는 도둑질로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나머지 선생들도 모두 끼니를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에 불과했다. 

(불과 1년 전) 그들의 모습 속에서, 
지금의 이 모습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2기생 북한 출신 선교사들을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들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 붙잡고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연변으로 학생들을 모집하러 떠납니다. 

이들을 통해 130~150백의 3기생들을 모집할 때 
생명싸개로 저들을 감싸주시고, 저들의 안전을 지켜주시며 
귀한 학생들을 여호와이레로 예비하사, 순적히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저들의 걸음걸음 주님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기도를 마치며 울자, 이어서 권능선생이 울더니 
모두가 울면서 다시 '파송의 노래'를 불렀다. 

「평강의 왕 함께 하시니.. 너의 걸음 걸음 주 인도하시리
주의 강한 손 널 이끄시리
너의 가는 길에 주의 축복 있으리.. 영광의 주 함께 가시니 
네가 밟는 모든 땅 주님 다스리리.. 너는 주의 길 예비케 되리 

주님 나라 위하여 길 떠나는 나의 형제여 
주께서 가라 시니 너는 가라 주의 이름으로 

거칠은 광야 위에 꽃은 피어나고, 세상은 내 안에서 주님의 영광보리라 
강하고 담대하라 세상 이기신 주 늘 함께 
너와 동행하시며 네게 새 힘 늘 주시리」 

권능선생은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나는 하염없이 울고 있는 그를 꽉 끌어안았다. 

2기 학생들에 비해 한참 어린 그가, 오늘을 위해 참고 견뎌야 했던 
말로 다 하지 못할 수고를,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오늘까지 잘 견뎌준 그가 장해 보였고 
그를 통해 이렇듯 훌륭한 2기 선생들을 만들어 주신 주님께 감사했다. 

나는 복음을 들고 사지로 나가는 선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아주며 
그들의 앞길을 축복해주었다. 

이 사역장에서 6 개월간 함께 해온 박명진 전도사도   *1999. 10월말~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한 채 2기 선생들을 안아주고 있었다. 

파송의 노래가 끝나고, 모든 선생들이 서로 서로 굳게 포옹한 후 
기차역으로 떠났다. 이 때가 2000년 4월 14일이었다. 

권능선생 팀에서 파송된 선생들은 
장만식 아바이, 정모세, 정용철, 최순교(한국에 와서 최원 목사됨), 
조선족 최빌립, 조선족 최원초, 김성근(한국에 와서 목사됨), 강석환 선생까지 
모두 8명 이었다. 

이중에서 강석환 선생은, 처음엔 바울선생 팀에 모집된 학생이었는데 
중간에 권능선생 사역장으로 옮겨 계속 공부하다가 이때 같이 파송받게 된 것이다. 

권능선생 사역장에서 파송되지 못한 사람들은 
김권희, 김누가, 강규홍 선생이었다. 

파송 전날 이들 세 선생이 나에게 찾아왔다. 
'선교사님, 우린 파송되어 나가지 않겠습니다.' 
'아니 왜요?' 

학생 모집 때 겪게 될 위험 때문에, 벌써부터 겁을 먹고 물러서는 줄 알고 
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저~ 솔직히 저는 아직 담배를 끊지 못했습니다. 
선생이 담배 피우면서 학생들을 공부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희는 좀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지식도 아직 준비 많이 못 되었습니다.' 

이들의 요구대로 이들을 권희 선생 책임 하에 서안으로 가서 
새로 사역장을 잡고, 계속 공부하며 더 준비하게 하였다. 


♣체포된 모세선생 

권능선생 사역장 선생들을 파송한 후, 먼저 익두선생 사역장을 서안으로 옮겼다. 
그러자 익두선생이 불만이 가득 차서 내게 항의했다. 

'선교사님, 우리 사역장은 왜 파송하지 않습니까?' 
그도 권능선생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사역해 왔고 
또 누구 못지않게 훈련도 잘 시켰고, 성경도 똑같이 100 독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 권능선생 사역장만 파송하고 
자기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서, 또 사역장을 꾸려야 하니 
마음에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학생들도, 하루라도 빨리 사역을 시작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파송 날짜가 늦춰지는 것을 매우 힘들어했다. 

'익두선생, 권능선생 사역장 졸업생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세요. 
작은 도시(연길)에 갑자기 2기 선생들이 한꺼번에 몰려가 학생들을 모집하면 
소문이 크게 날 거고.. 그렇지 않아도 공안과 보위부에서 우리를 잘 알고 있는데 
더 집중 추적을 받게 될 거예요. 

그러면 파송 나간 선생들의 신변이 위험해지잖아요. 
몇 명씩 파송 되어, 조용조용 학생들을 데려오는 게 안전할 것 같아요. 
그리고 사역비 때문에도, 동시 파송은 불가능하니, 익두선생이 양보하세요.' 

'그럼 그때까지 여기서 (성도에서) 그냥 사역을 하다가 파송받아 가면 되지,  
왜 또 서안으로 이사를 가야 합니까?' 

그는 권능선생이 쓰던 사역장을 그대로 쓰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나는 가까스로 그를 설득해서 서안으로 보냈다. 
혹시 권능선생 사역장에서 파송된 선생들 중 한 사람이라도 체포될 경우 
이곳까지 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익두선생 사역장을 서안으로 보내고 나니, 다음 문제는 바울선생 사역장이었다. 

바울선생 사역장은 그냥 계속해서 성도에 남아 사역하게 하면서 
공안에 체포될 때 사용하던 사역장은 버리고 
도시의 반대편으로 가서 새로운 사역장을 구하게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바울선생 사역장은, 성도에 처음 올 때부터 시작해서 
계속 공안에 쫓기더니, 이번에도 새로 집을 잡은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 동네에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다른 동네로 가서 다시 집을 구하게 했지만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이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누가 프락치가 있은 듯/주)

이렇게 되자 바울선생은, 사역에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술을 마시자, 학생들이 발끈하고 일어났다. 
빌립형제와 다른 3 명의 형제가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선교사님, 우린 더 이상 바울선생과 함께 공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끼리 공부하게 해주십시오!' 

'아니 왜 그래요?'

'바울선생이 학생들을 사랑해서 식당근무를 혼자서 다 감당하는 것은 고맙지만 
학생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선생이, 앞장서서 술을 마시는데 
어떻게 그런 선생하고 사역할 수 있습니까? 
우린 더 이상 저 사람을, 우리 선생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지난 번 뱀술 사건 때,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기에 
바울선생이 또 술을 마신다고 하니, 나는 배신감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제 파송까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가 끝까지 인내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바울선생, 사역장을 떠나세요. 나는 바울선생과 함께 사역하고 싶지 않아요. 
세상으로 나가서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시세요!'

'선교사님 미안합니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지난번에 했던 약속도 약속이지만, 계속되는 공안들의 추적에 지쳐 
그는 마음으로는 이미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선생이 포기하자, 김명윤, 이빌립, 이용섭, 박다윗 선생을 제외하고 
나머지 선생들도 떠났다. 

바울선생 사역장 형제들도, 벌써 선생으로 세워진 상태니 
어디를 가든 주의 일을 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나는 아픈 마음으로 그들을 떠나보냈다. 

떠나면서 바울선생은 울었다. '선교사님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선교사님 때문에 제가 예수님을 알게 됐고 
오늘 이만큼이라도 사람 되지 않았습니까! 꼭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2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기풍선생을 잃었고 
그리고 선주선생을 잃었다. *베트남 탈출 실패로 두 선생이 북송됨

오늘은 또 이렇게 바울선생을 보내야 하니, 나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제라도 떠나가는 바울 선생을 붙잡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주님의 것이니,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했다. 
주님의 뜻대로 이들을 북한 선교에 사명자로 키워내야만 했기에 
나는 울면서 바울선생과 형제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부디 저들의 앞길에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바울선생과 형제들을 내보내고 난 후 
다윗선생, 빌립선생, 영윤선생, 용섭선생을 서안으로 보내
사역장을 잡고 파송될 때까지 계속 훈련하게 했다. 

며칠 후 권능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교사님 큰일 났습니다. (연변에 간) 모세선생이 갑자기 연계가 안 됨다.' 

첫 소식부터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이었다. 
'그와 연락이 안 된 지 며칠 째예요?' 

 

'한주일이 넘었슴다. 모세선생이 묵던 주인집 아주마이 한테까지 알아봤는데 
며칠 전에 금방 온다고 하고 나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함다.' 

권능선생의 말을 듣는 나는, 목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뭐 하러.. 어디로 나갔다는 말은 없어요?'

 

'그냥 사람 만나러 나간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공안들 쪽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며칠 후 다시 소식이 왔다. 모세선생이 공안에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없었다. 

많은 형제들이 북한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오면서 
먼저 잡힌 선배들의 소식을 조금씩 알아오기도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모세선생은 북한에서 살 때 소문난 불량배였다. 
그는 북한에서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처벌이 두려워서 중국으로 도망쳐 온 사람이었다. 

중국에 온 이후에도, 계속해서 연길 깡패들 속에서 살면서 
강도, 마약 밀매 등 나쁜 짓만 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깡패들 속에서 마약장사를 하면서, 실수로 큰 돈을 손해보게 되었다. 
조직의 보복이 두려워 도망을 다니다가, 갈 곳이 없자 
우리 사역장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키가 150센티도 안되는 사람이었다. 싸울 때는 총알같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한번은 형제들과 함께 축구를 하러 갔을 때 
그가 권희 형제와 말다툼하다가 갑자기 욕설을 퍼부으며 서로 싸우기시작했다. 

그때 그는 주위에 나뒹구는 맥주병 두 개를 집어 들더니 마주쳐 깨뜨렸다. 
그러자 맥주병은 금방 유리날이 삐죽삐죽 돋은 살인무기로 변했다. 

그의 눈빛을 보면서, 그가 사람을 찌르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권능선생 사역초기에 다윗형제가 귀신 들려 갖은 횡포를 부릴 때였다. 
3일금식 마지막 날, 천불산에 올라가 함께 철야기도를 하기 위해 
바울선생 사역장 형제들이 모두, 권능선생 사역장으로 와 있었다. 

바울선생 사역장 형제들 중에는, 갓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에 대해 알고 
매우 흥분해 있던 형제가 있었다. 

그 형제는 그 권세를, 다윗형제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시험해 보기로 작정하고 
한쪽에 비스듬히 앉아 건들거리는 다윗형제에게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악한 귀신아, 썩 물러가라!' 
순간 다윗형제의 눈이 벌게지더니, 후다닥 튀어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이 개같은 자식이.. 너 오늘 나한테 죽어봐라!' 
다윗형제는 그 형제에게 달려들어, 사납게 때리기 시작했다. 

3일을 금식해 기진맥진한 상태라, 누구도 말릴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내가 급히 다윗형제에게 달려가, 그 형제를 뜯어냈다. 

그러자 숨을 돌린 그 형제가, 나의 지지에 힘입어, 다윗형제에게 달려들었다. 
얼핏 보면 다윗형제가, 나와 그 형제까지, 두 명을 상대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자 모세형제가 나에게 와락 달려들면서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야 이 개새끼야, 나랑 해보자!' 
그는 아마 내가 다윗형제를 때릴 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도 생각지 않고, 무조건 자기 친구만 두둔하는 
깡패식의 의협심이었다. (다윗과 모세는 둘이 연길에서 깡패였다)

모세 형제는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북한 사람보다도 더 거칠고 사나운 사람이었다. 
이런 그도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변화되기 시작했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을 알아 갔다. 

그리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느끼기 시작하더니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곧잘 이런 농담을 했다. 
'선교사님 혹시 북한에 사람을 파송시킬 일은 없습니까? 
그러면 모세, 바로 제가 나갈 겁니다!'

우리 사역장에는 모세선생 외에도, 사역장에 들어오기 전에 
강도, 살인, 마약밀매 등을 하던 일급 죄인들이 몇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성경말씀을 읽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께서 이 죄많은 사람들을, 당신의 말씀으로 쪼개어 놓으셨고 변화시켜 놓으셨다. 

북한으로 체포되어 갔다면, 모세선생은 십중팔구는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처형당했다 해도, 이미 구원받은 영혼 임을 알기에 
나는 울면서 주님 앞에 감사드렸다. 

진칼빈선생, 박요한선생에 이어 우리 사역장에 또 하나의 별이 떴으니 
정모세! 그 별의 이름을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은 그 별을 품으시며, 영원토록 그 빛이 비치게 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