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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1장, 예언을 무시하면 여호와의 날이 이른다

LNCK 2022. 11. 15. 19:40

◈습1장, 예언을 무시하면 여호와의 날이 이른다     여러 설교 정리   스바냐설교모음

아래 글은 본문 스바냐서 1장의
◑적용
◑해석
◑주석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


◑적용

▲1. 스바냐의 예언활동은, <요시야의 개혁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스바냐의 예언활동이 (스바냐서에 나와 있죠) 과연 효과, 열매가 있었을까요?
네, 있었습니다.
스바냐의 예언활동이, 요시야의 개혁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스바냐는 요시야 왕 때 예언했다고 나와 있는데   1:1
요시야는 8세에 왕이 되어, 31년을 통치했습니다. (BC 639~609)       주1)

요시야 앞에 므낫세와 아몬 왕은, 둘 다 매우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예언한 스바냐는
즉 악한 시대의 말기, 또는 요시야 왕의 초기 어린 시절로 봅니다. 
   
스바냐가 히스기야 왕의 4대 손이고,     1:1
요시야 왕은 히스기야 왕의 3대 손입니다.   *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

그러니 두 사람은 항렬이 비슷하고, 먼 친척 사이였죠.

스바냐 선지자가 증거한 메시지로 인해 요시야 왕은 자극을 받고 
종교개혁과 우상타파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열왕기서에 보면, 요시야 왕때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신명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하22장

요시야 왕은 신명기를 읽다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언약을 어겨서 
어려움이 초래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베옷을 입고 
온 백성들과 함께 회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열왕기서나 역대기에 ‘선지자 스바냐’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추정하는 것은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은, 그 원인이 2가지 였다는 거죠.
-스바냐의 예언과 *스바냐서
-율법책을 발견함  *왕하22장


정리하면, 스바냐의 예언활동이 <요시야의 개혁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언제나 부흥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대개는 그렇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부흥이 안 일어난 때도 있었지만, *노아 때
대개의 경우, 국지적이라도 부흥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 말씀에 떨며 반응하는 사람이, 반드시 생겨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목사님이 설교가 약하다, 은혜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반면,
목사님은 ‘성도들이 강퍅하다, 내가 설교를 잘 해도 도무지 꼼짝도 안 한다’

같은 현상을 두고서, 평가가 엇갈리는 것입니다. 
누구 말이 맞을까요? 
둘 다 맞을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 둘 다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좌우의 날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반드시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전 교회적으로, 교인들 모두에게 부흥이 임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 설교를 들은 소수의 몇몇 사람에게라도
심령의 부흥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목회자가 한 곳에서 오래도록 목회할 수 있는 근거도
전부는 아니더라도, 소수의 몇 명이라도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 목회자를 지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 아무도 은혜 받는 사람들이 없다면... 그런 일이 오래 지속된다면
그 목회자는 거기서 오래 버티기 힘들 것입니다. 
목회자가 물러나지 않으면, 교인들이 다 물러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에, 아무런 부흥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일이 오래도록 계속 지속된다면... 
스바냐 같은 선지자들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스바냐 자신도.. 언제 어떻게 소천했는지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그는 편안하게 남은 생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가 전한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요시야 왕을 통한 신앙 부흥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스바냐 선지자 같은
부흥의 촉매제 역할을 감당하고 있나요?
그런 비전을 품고 있나요?

참고로, 그 후 요시야 왕은 
유다 역사상 가장 크고 성대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은 네 가지 요소가 있었습니다.  주2)


▲2. 그러나 요시야 왕의 부흥운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 때 반짝 부흥은 일으켰지만, 
어떤 시대적 흐름을 되돌릴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결국 스바냐의 예언대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임하여, 

요시야 왕이 죽고 난 다음부터, (그는 바로 느고와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했죠)
사실 이때부터 남유다는 국운이 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뒤로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이런 왕들이 있었지만
거의 ‘식물 왕’들이었습니다. 3달-11년-3달-11년 도합 22년 동안
남유다는 서서히 망해가다가, 주전 586년에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1:7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1:14

이 스바냐의 예언은, 미래 인류 종말과 대심판의 때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스바냐 시대로 해석하자면,
바벨론 1차포로로 볼 수 있습니다. *주전605년
요시야 왕의 전사 직후에 모든 스바냐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스바냐의 예언(스바냐서)은, 당시 요시아 때 남유다 백성들만 받은 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받는 거죠.
당시에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받았고요!

그래서 적용2의 요지는 “심판의 예언을 무시하면, 심판을 받는다”입니다. 
“부흥해야 될 때, 부흥하지 못하면... 여호와의 날이 이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눅12:39절에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우리가 깨어 경계하고 있으면, 도적이 침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도둑 맞고 나서 깨닫는 것은 ‘도둑이 올 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꼭 도둑이 아니더라도, 사고, 질병, 부도, 재난 등
모든 재앙에 ‘미리 깨어 경계하고 있으면’ 도적이 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시대에, 요시야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스바냐가 예언할 동안에는
그래도 도적이 남유다 나라를 뚫지 못했습니다. 

△스바냐와 비슷한 시기에 예언한 선지자가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때부터~남유다가 망할 때까지 오래 예언했죠.

예레미야도, 그의 예언 초기(요시야 왕 때) 에는 
‘회개하고 돌이키라, 그리하면 그가 용서하시리라’고 가능성을 예언했죠.

그러다가 그의 예언 후기(여호야김 이후)에는
‘그냥 바벨론에 포로로 순순히 잡혀가라.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예언했죠.

그가 처음부터 ‘순순히 잡혀가라’고 예언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회개하고 돌이키라. 그러면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언했죠.

△우리 각자도 ‘경고, 예언, 사전 notice’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내적 감동으로 들을 때도 있고, 
-꿈과 환상을 통해서 경고를 받기도 할 것이며, 

-성경을 읽다가
-설교를 듣다가
-어머님, 순장님, 배우자의 조언을 통해서 ‘경고, 예언’을 들을 때가 있죠.

그런데 ‘사고가 터지고 나면’
꼭 ‘그때 그 말을 들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적용2 대지는 “예언을 무시하면, 부흥할 때 부흥하지 못하면
그때는 뒷감당을 해야 하는 무서운 시기가 온다”는 것이고, 

남유다는 결국 그 뒷감당을 다 당하고 말았습니다. 
스바냐의 무서운 예언대로 다 된 것이지요.
요시야 왕이 죽고나서부터... 나라는 급전직하로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죠.

오늘도 하나님은 나에게/우리 가정에/우리 공동체에
성경말씀으로/설교로/조언으로 여러 메시지들을 주십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부흥(‘죽어가던 게 되살아남’의 뜻)하지 못하면
결국은 파국이 오고야 만다는 것, 
하나님이 보내시는 바벨론이 오고야 만다는 것을
우리는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왜 불의한 바벨론을 들어서 남유다를 치십니까?’ 했죠.
남유다 스스로 자정 능력이 상실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는 친구/배우자/부모님/순장님/목사님을 통해서 말씀하시죠.
그걸로 자정 활동이 안 되면,
하나님은 바벨론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거나, 포로로 붙잡혀갈 수도 있습니다.


▲적용3. 여호와의 날은 ‘희생 sacrifice 의 날’입니다. 
쉽게 말하면, ‘(대량으로) 죽이는 날’입니다.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여호와의 날'에 치러질 제사의 '희생'은 '유다 백성'들입니다. 

반면에 '청할 자'는 제사에 초청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유다 거민들을 멸망시킬 이방 국가입니다.
여기서는 바벨론이죠.

그래서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라고 합니다. Be silent!  :7a
하나님이 분노로 대량으로 죽이실 것이기 때문에, ‘조용하라’는 것입니다.
군대, 직장, 학교에서 상관이 벌을 줄 때는, 하급자는 조용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원래 ‘희생(제사)’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물을 잡아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이제 당신이 직접 ‘희생(제사)’을 준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스바냐서 전체 문맥상 그 ‘희생(제물)’은 남유다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리아 산에서, 희생제물로 수양을 미리 예배하신 적이 있죠.  *창22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스바냐서 시대에, 하나님은 성전의 짐승으로 드리는 희생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내가 직접 희생을 준비했다’고 하셨습니다. :7 

※이것은 논란이 많은 주제이지만, 이런 일은 실제로 우리 주위에 일어납니다.
(그냥 예) 심청이가 물에 빠지는 희생으로 심봉사 눈을 뜨게 한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은, 가족 중에 자녀를 데려가는 ‘희생을 준비하실’ 때가 있죠.
그래서 그 부모를 회개시켜 구원하신다거나... 그런 종류의 일이 가끔 생깁니다.

하나님이 순교의 제물을 요구하시는 것도, 이런 원리와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도, 무고한 어린아이들 생명의 희생을 통해서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겼다는.. 그런 해석도 일각에서 제기되었죠. (논란 있음)

어쨌든 이 단락의 요지는 “하나님이 직접 희생을 준비하신다”입니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간혹 그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가족중에, 민족중에 누가 죽기를 기다리라.. 가 아니고
그런 일이 아예 생기지 않도록, 
‘여호와의 날’이 닥치지 않도록, 
평소에 잘 믿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주님을 믿지만 평소에 자행자지 하다가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는데,
그 날의 특징 한 가지는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신다”입니다.
아래 단락에서 보겠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 예방을 해야된다는 거죠.


▲적용4. 스바냐가 예언한 ‘여호와의 (심판의) 날’은
이 세상 종말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대종말

그 세상 종말이, 내 생애에 혹시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임종하는 날, 그 스바냐의 예언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소종말 

이래 저래, 스바냐서 1~3장의 예언은
내 미래에, 나에게 그대로 적용될 말씀이라는 거죠.
우리가 ‘남의 일’로 여겨서, 우습게 간과할 말씀이 아니라는 거죠.
 
△스바냐 선지자가 증거한 메시지의 핵심단어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실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14-15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날입니다. 
그날은 사람들에게 환란과 고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요엘서에도 나오는데, 
구약과 신약에 항상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 비슷하게 ‘말일에’라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즉 ‘여호와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이뤄질 온 인류에 대한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데, 그 특징은 “공의로 심판하는 날”입니다. 

행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행17:31 

공의로 심판할 날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시고 
심판주가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심판할 때 예수님께서 “공의를 기준으로 심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의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님의 모순되는 두 속성입니다.

오늘날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사람들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거기서 크게 난리칠 일이 발생할 것 같아서... 입니다.

왜냐면 수많은 신자들이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데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성경지식이 부족해서

‘여호와의 날’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날’인데,  행17:31등
거기서 ‘사랑의 하나님’ 타령만 하다가... 큰 낭패 볼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스바냐서가 강조하고 있는 주제인 ‘여호와의 날’은  *1:8, 1:14, 2:2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 적용되는 날입니다. 

물론 둘 다 적용되겠지만, 
회개하고 회심하고 신실한 믿음의 성도는 ‘사랑의 하나님’이 적용될 것이고
자행자지 하며, 머리로 믿은 자에게는 ‘공의의 하나님’이 적용될 것입니다.

아래 구절을 보십시오. 스바냐서에는 ‘사랑의 하나님’도 나옵니다.

1: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공의의 하나님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사랑의 하나님

평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믿은 자에겐 – 사랑의 하나님,
평소에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믿은 자에겐 – 공의의 하나님이 적용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에요!

△그러므로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스바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2:1-3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위 2:1~3절은 스바냐서의 중요한 핵심 메시지입니다. 
2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전’입니다. 
시행되기 전, 지나가기 전, 임하기 전, 이르기 전.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1장 해석                            -출처-

▲우상숭배의 죄(1-6절)

1-6절은 우상숭배의 죄를 지적합니다.

1절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다른 선지서와 마찬가지로 스바냐도 히브리어 성경으로는 

‘여호와의 말씀이라’라고 시작합니다. 

즉 이 말씀은 스바냐 개인의 의견이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바냐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볍게 듣지 말고 심각하게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절, 그렇다면 스바냐는 요시야왕과는 친척 관계에 있는 왕족 출신의 선지자였고, 

그의 신앙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2-3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요시야왕보다 앞선 두 임금, 므낫세왕과 아몬왕이 극도로 패역했기 때문에 

스바냐 선지자 시대에도 우상숭배와 사회 불의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멸절하시겠다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짐승을 비롯한 모든 생물을 진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시행되었던 때는 노아 시대입니다. 

그때도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하였습니다. 

그 죄악이 얼마나 크고 깊었던지, 사람을 지은 것을 한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때도 그때와 방불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왜 죄 없는 짐승까지 함께 멸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멸망의 길로 갈 경우, 

나머지 창조세계는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해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롬8장

마치 사람이 반려견을 사랑하여 좋은 집을 지어주고, 좋은 사료를 매일 먹였다 해도, 

만약 그 개가 없어진다면, 그 개집과 사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하나님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4가지를 지적합니다.
첫 번째는 ‘바알 숭배’입니다.

 

4절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하나님께서 ‘손을 펴신다’는 

본래 도와주시고 지켜주신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곤 하는데, 

여기에서는 심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가 아직도 바알 숭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혹 겉으로는 바알을 숭배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마음에서까지 지운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마림’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남아 있었던 것은 그들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품이나 작품의 짝퉁 공급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수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우상숭배를 하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욕망을 극대화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마림’과 같은 사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일월 성신 숭배’입니다.
5a절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는 것은 가나안과 바벨론 비롯한

다신교를 숭배하는 나라에서는 보편적이었습니다.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운명론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영원한 지표로 삼습니다.

세 번째는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5b절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유다 백성 중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을까 봐 다른 보험을 들어 놓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제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이 계명을 다시 표현하면,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이것을 잘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재산증식을 위해서 ‘분산 투자’를 하듯이, ‘분산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는 ‘분산 신앙’은 없습니다. 오직 ‘올인(All-in)’이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배교’입니다.
6절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하나님을 한 번 두 번 떠나다 보니, 나중에는 이방인, 불신앙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날의 심판(7-13절)
7-13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7절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지도자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것을 듣는 사람은 쥐죽은 듯 조용해야죠.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백성들이 침묵을 지켜야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엄청난 하나님의 날이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과, 제물을 잡을 사람을 준비하셨는데, 제물은 유다 백성들을, 

제물을 잡는 사람은 이방인들(바벨론)을 염두고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순서로 심판하시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심판의 1순위는 지도자들입니다. 방백들(대신들)과 왕자와 같은 왕족들, 

그리고 ‘이방인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의 옷을 입으려면, 외국으로 나가 직접 사든지, 수입해 온 것을 사서 입어야죠.

당시에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귀족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죠.

9절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문턱을 뛰어넘는 사람’은 이방 신전을 넘나드는 우상 숭배자들과 

남의 집을 넘나들어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탈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에게는 ‘탐욕’이 ‘하나님’이었습니다.

10-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일반 백성들, 특히 많이 가진 사람들을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 ‘어문’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제2구역’과 ‘작은 산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언급되는 곳이 모두 높은 곳입니다. 

그리고 ‘막데스’는 제2구역의 중심지로 보입니다.

(스바냐는 왕족이므로, 어문, 제2구역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 봐서, 성안 지리에 밝죠)

 

유럽에 있는 도시를 보면, 대부분 그 도시에서 높은 곳, 언덕에 교회(예배당)가 있고, 

그 옆에 왕궁(시청)이 있습니다. 그곳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다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찌꺼기같이 가라앉은 사람도 찾아내신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자기 집을 짓고도 거기서 살지 못하고, 포도 농사를 지어도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날의 가까움(14-18절)
14-18절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을 선언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인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14-16절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여호와의 큰 날’은 어느 지역에만 임하게 되는 날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임하게 되어, 유다에게 치명적인 날이 될 것임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한 도시에 큰 교통사고가 나거나, 화재가 나서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낼 수 있습니다. 힘들어도 복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초대형 지진이나 쓰나미가 몰려오면 그 마을 전체가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그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날이 ‘가깝고도 빠르게’,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라고 하십니다.

그날의 특성이 ‘분노’, ‘환난과 고통’, ‘황폐와 패망’, ‘캄캄하고 어두움’, 

‘구름과 흑암’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하늘이 캄캄해지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엔 바벨론의 침입을 뜻하죠 BC609~)

 

여호와의 날이 오면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18절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 백성들을 앞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신다고 하십니다.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보다, 

중도에 실명하신 분의 눌림이 훨씬 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런 상태와 같이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꼭 실명하지 않아도, 앞으로의 삶에 조그만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고, 

절망과 좌절의 어두움만 가득할 때, 일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고대 전쟁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재산증식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국부(國富)를 강하게 하는 첩경은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은 봄부터 가을까지 연례행사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적군이 쳐들어와도 곡식이나 은이나 금과 같은 귀금속을 주면 그냥 돌아갔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고, 목숨을 달라할 것이라 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는 엄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의 날’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요시야왕 때는 유다 백성이 신앙을 새롭게 하던 시대였죠.

즉 그의 시대는 유다 백성들의 ‘종교개혁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우상숭배 하는 삶, 선은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삶을 살았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멸망과 포로됨, 그리고 회복이라는 프로그램을

시행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다 민족 전체가 ‘곤고한 사람들’,

‘곤고한 민족’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통치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날’이 임하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바냐는 ‘하나님의 종교개혁 선언문’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여호와의 날_하나님의 셈하시는 날’이 있습니다. 

그 날이 하나님의 상급의 날이 되도록, 

오늘도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시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장 주석

▲1절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 
선지자 스바냐가 사역을 하던 때는 요시아 왕시대였다. 
당시 국제적으로는 강대국 앗수르가 본국 사정으로 인해서 
서쪽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때였으며, (앗수르~바벨론 과도기)
국내적으로는 요시아 왕이 철저한 개혁을 시행하고 
국토를 넓혀가려던 때였다(왕하 22:1-23:20).

▲2절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문자적으로 '완전히 쓸어버리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철저하며, 그 정도가 매우 심한 것임을 시사한다.

▲3절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거치게 하는 것'은 우상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사람과 짐승,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그리고 우상을 
악인들과 더불어 파멸시키실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저자는 '진멸하고'를 두 번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엄격하며 
정도가 심한 것으로 철저한 파멸을 초래할 것임을 암시한다.

▲4~6절
본문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다.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손을 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것을 시사한다(사5:25, 9:12).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크게 다섯부류로 나뉘어진다.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여기서 '바알의 남아있는 것'은 개혁을 추구했던 요시아가 
많은 바알 숭배 사상이 남아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그마림'은 히브리어 '케마림'을 음역한 것이다(왕하 23:5,  호 10:5). 
이것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던 명예로운 칭호였다. 

하나님은 바알의 남은 것들만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방 제사장들조차 모조리 파멸시키실 것이다.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 성신에게 경배하는 자' 
이들은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별과 달을 숭배하는 의식은 가나안과 바벨론에서 흔히 행해졌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가나안과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 왕정 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별과 달을 숭배하였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신 4:19,  왕하 21:3,5,  렘 8:2,  19:13,  44:8-10). 

하나님은 선지자 스바냐를 통해서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도 
예외없이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셨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 
'말감'(말캄)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왕'을 의미한다. 
70인역과 수리아 역본, 벌게이트 역본에서는 이것이 암몬 족속의 신이었던 
밀곰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말감'은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서 산당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어(왕상11:5-8)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악에 빠지게 했던 우상 중의 하나이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에도 
말감을 섬기는 종교적 혼합주의를 행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혼합주의는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때에 예루살렘에서 흔히 자행되던 죄악이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로 결정하신 대상은 배교자들과 불신앙자이다. 

▲7절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스바냐는 심판의 날을 선언하기 전에 먼저 '침묵을 지키라'고 요구한다. 

예루살렘과 유다 거민들이 침묵을 지켜야 하는 것은 
거민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분노와 파괴가 시행될 '여호와의 날'이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침묵은 감히 도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의 침묵을 의미한다.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날'에 치러질 제사의 '희생'은 '유다 백성'들이다. 
반면에 '청할 자'는 제사에 초청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유다 거민들을 멸망시킬 이방 국가이다(사 13:1).

▲8, 9절
본문에는 유다 거민들 중에서 
'여호와의 날'에 심판을 받게 될 대상이 묘사되어 있다.

'여호와의 희생의 날' 이것은 '여호와의 날'과 동의어로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셨으며 친히 심판을 시행하실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방백들'은 유다 거민들 중의 지도자들로서 히스기야 왕이 개혁을 행할 때에 
대적하였던 자들이다(미 3장). 

이들은 아마도 요시아 왕이 개혁할 때도 자신들의 기득권과 평안을 잃지 않기 위해서 
대적하였던 듯하다. 

또한 '왕자들'은 유다 거민들의 지도자들이었음은 분명하나 
문자적인 의미인 '요시아 왕의 아들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당시 요시아의 아들들은 매우 어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본문의 '왕자들'은 요시아의 친족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죄악은 '이방 의복'을 입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의복에 대해서 규정을 지으셨다(민 15:38,  신 22, 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백들과 왕자들이 이방인들이 입는 의복을 즐겨 입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어겼을 뿐만 아니라 
이방 관습에 젖어 여호와를 배척하고 우상을 섬겼음을 암시한다.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문턱을 뛰어 넘어서'는 이교 신전에서 행해지는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된다. 
특별히 삼상 5:5의 다곤 신전에서 제사장들이 문지방을 밟지 않은 것과 연결되는 듯하다. 

'문턱을 뛰어 넘어서'는 앞서 언급된 왕자들과 방백들의 하수인들이 
타인의 집을 마음대로 침입하여 
주인인 왕자들과 방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약탈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하수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왕자들과 방백들의 눈에 들기 위해서 
도둑질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10절
'어문' 
북쪽 문, 이곳은 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방향이었다.

'2 구역' 

이는 어문 가까이에 있는 성읍 안쪽에 있는 문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곳은 여선지자 훌다가 살았던 곳으로(왕하 22:14) 다른 곳에서도 
'제 이 구역'으로 지칭되고 있다(대하 34:22).

스바냐는 왕족이었으므로, 
8~9절의 왕자, 그들의 복식 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10절에서 보듯이 예루살렘 성의 지리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선지자와 다름)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작은 산들'은 주변의 언덕들을 가리키기 보다는 
예루살렘 성읍 내에 있던 언덕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것들은 '여호와의 날'에 이방 국가의 침략으로 파멸될 것이며 
그곳에 거하던 거민들은 곡하게 될 것이다.

▲11절
'막데스 거민들아' 
이곳은 앞서 언급된 ‘어문’과 반대되는 지역인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저지대, 
상업으로 이름이 난 지역을 가리키는 듯하다. 
왜냐면 본절 하반절에서 '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절은 침략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 침략로인 북쪽과 
침략로가 아닌 남쪽에서도 예외없이 이루어질 것을 시사한다.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수운하는 자가 끊어졌음이니라' 
'가나안 백성'은 성경에서 흔히 상인들이나 무역을 하는 자들을 가리켰다
(사 23:8,  겔 17:4,  호 12:7,  슥 14:21). 
여호와의 날에는 상인들도 모두 멸망당하여 
막데스는 더 이상 거래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12~13절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등불'은 점토로 만든 기름 등잔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등불을 들고 사람을 찾는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이 예외없이 행해질 것이며 
아주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하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는 
예레미야도 사용한 적이 있는 속담투의 표현이다(렘48:11). 

이것은 이어서 나오는 구절들과 연결되어 심판의 대상이 
하나님께서 역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자들임을 가리킨다. 

그들은 포도주에 가라앉은 찌끼와 같아서 그냥 내버려둘 경우 질 좋은 
포도주를 나쁘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방관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배하시고 간섭하신다는 섭리 자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활과 전혀 무관한 존재라고 무시하기까지 한다.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본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강퍅한 자들에 대한 심판 내용이다. 

자신들이 받았던 축복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재물과 집, 
그리고 포도원까지도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직접적인 심판을 통해서 그들이 부인했던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드러내실 것이다.

▲14절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큰 날'이라는 표현은 요엘의 묘사와 비슷하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피 두렵도다'라고 묘사한다(욜 2:11). 
그것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정도가 매우 강할 것을 뜻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여호와의 날'에는 용사의 애곡 소리가 들린다. 
용사들이 애곡하게 됨은 자신들이 여호와의 날에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 도구인 이방 국가에 의해서 패배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5~16절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본절은 '여호와의 날'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구름과 흑암의 날'은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출 19:16, 20:21, 신 4:11)
여호와는 정하신 날에 나타나셔서 분노하시며 진노하실 것이다.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본절은 전쟁터를 연상시킨다. 스바냐는 흔히 전쟁터를 상기시키는 경고용 나팔, 
견고한 성읍, 높은 망대를 여호와의 날과 연관시켜서 
하나님의 심판이 마치 전쟁과 같이 그 강도가 매우 심할 것을 암시한다.

▲17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날'에 유다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은 바로 유다 거민들에게 있다. 
그들의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부하고 우상 섬기기를 즐겨한 유다 거민에게 등을 돌리시며 
반대편에 서셔서 심판하신다.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지라' 
본 구절은 '여호와의 날'에 유다 거민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의 정도를 나타낸다. 
유다 거민들의 피는 티끌로, 살은 분토로 변할 정도로 하나님의 심판은 엄할 것이다.

▲18절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은과 금'은 유다 거민들이 하나님을 버리게 된 동기이다. 
그들은 은과 금을 하나님처럼 섬겼다. 유다의 지도자들과 그 하수인들은 
오직 자신들의 물질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강포를 행하기를 서슴지 않았었다(8,9절). 
그들이 그렇게 추구했던 은과 금도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스바냐는 유다 거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다가 
다시 심판의 대상을 모든 세계의 백성들로 확대한다. 

여기서 '이 온 땅'과 '이 땅 모든 거민'은 유다 거민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한다. 

선지자 스바냐는 본장 처음에서 심판 대상을 설명할 때 
'지면에서'라고 말함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과 생물들이 심판의 대상이 됨을 강조하였다(3절). 

이제 본장을 마감하는 본문에서 스바냐는 다시금 심판의 대상을 온 세상으로 확대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여호와께 범죄한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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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왕족이 맞습니다.

스바냐 1:10절에 보면 그는 어문, 제이구역, 작은 산 등 
정확한 지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스바냐 1:8절을 보니까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가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고 
귀족들과 양반들과 관리들의 의복 규정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2) 요시야의 종교개혁으 4방면

첫째, 우상타파 
둘째, 성전 수리 
셋째, 언약갱신 
넷째, 유월절 준수입니다. 
이 네 가지가 요시야 왕 31년 통치의 특징입니다.